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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영 작가 인터뷰:도구로서 서사성과 서사장치
2024. 12. 6.
인터뷰어: 하상현
사진 ©정세영
상현 정세영 작가님 안녕하세요. 이번에 공연예술비평활성화 프로그램 일환으로 〈서사의 죽음 이후 ‘신체적 서사’의 가능성 연구〉을 진행하고 있는데요. 이번 기회를 빌려 연극성을 새로운 관점에서 다루고 있는 정세영 작가님 작업의 서사성에 관해 인터뷰하는 자리를 준비했습니다. 연극에서, 특히 전통 연극에서 서사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특히 극작가의 텍스트는 공연을 발생시키는 시작점이자, 원본이라고 여겨질 만큼 중요하게 다뤄지는데요. 반면 포스트드라마 연극과 같은 현대 연극의 흐름에서는 이와 같은 텍스트 중심성을 힘을 여러 차원에서 해체하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이 시기에는 텍스트를 제외한 공연의 요소인, 배우/무용수/퍼포머의 몸, 무대와 소품, 조명, 음향, 관객의 몸과 관객석, 목소리와 말하기 등을 새롭게 갱신하는 실험들이 있었죠. 이러한 시대적 흐름과 함께, 정세영 작가님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 연작은 배우의 소품이나 배경에 불과한 사물을 무대 중앙에 두는 역전을 보여준 작품으로 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동시에, 이 작업은 연극성의 뼈대라고 할 수 있는 ‘기승전결의 구조’를 물리적인 상승과 하강의 움직임으로 치환하여, 메타적인 차원에서 서사를 바라보고 그 구조를 활용할 수 있는 대상으로 관객에게 개방하는 작업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탈-서사적인 실험을 해오신 작가님이 돌연 서사와 드라마를 끌고 들어오신 2019년 〈다 타버리고 난 후에야〉는 저에겐 일종의 충격과 새로움으로 다가왔습니다. 이 작업을 통해 언어와 서사를 해체하는 작가가 다시 이를 신중히 다룰 때 기존의 서사와 어떤 차이가 있는지 살펴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어떤 변화가 작가에게 이런 실험을 하게 만들었는지 궁금하기도 했어요. 그래서 이번 인터뷰에서는 개인적인 질문들과 함께 해체적 서사성을 다룬 작업인 〈데우스 엑스 마키나〉 시리즈(2013-2017)와 〈44〉(2017, 기획전 《아무것도 바꾸지 마라》, 처인성), 〈세 마리 곰〉(2018, 문래예술극장) 드라마적인 서사성을 다시 끌고 들어온 〈내진〉(2017, 문래예술공장), 〈다 타버리고 난 후에야〉(2019, 신촌극장), 〈그중에 한 마리〉(2024, Apparatus, 공간 서로), 〈내일의 이웃〉(2024, The WilloW), VR 공간의 시각성과 서사성을 실험한 〈개인주의자의 극장〉(2020, 국립현대미술관 멀티홀), 〈내일의 이웃〉(2022, 광주아시아문화전당) 등을 함께 이야기해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세영 안녕하세요.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데우스 엑스 마키나〉 시리즈는 서사의 구조를 멀리서 보여주는 작업입니다. 몽펠리에 국립안무센터(CNN De Montpellier)를 졸업하고 본격적으로 작업을 시작하던 시기에는 직접적으로 언어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왜 언어를 연극의 재료로 사용하지 않았을까를 생각해 보면, 당시에는 언어가 너무 확정적이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누군가가 하나의 의견을 제시할 때, 그 의견이 맞기도 하지만 틀릴 때도 많다고 생각합니다. 언어를 사용함에 있어서 그 지점에 부담이 있었습니다. 반면 비언어적인 감각은 확정적이지 않다는 점이 좋습니다. 관객에게 특정한 감각을 전달하면서, 생각할 거리를 열어주는 역할로서 작업이 놓이는 것이죠. 제가 서사적인 연극을 만드는 것이 특히 어려웠던 점은 주어와 조사, 동사로 이뤄지는 문장의 흐름에 틈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초기 작업을 만들던 시기에는 일단 그러한 언어를 거둬내고 연극의 형식적인 구조와 작용 자체에서 즐거움을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작업은 관객에게 일종의 감각적인 해소의 경험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와 관련된 하나의 헤프닝이 있었는데요. 〈데우스 엑스 마키나〉 를 댄스 엘라지 경연에서 발표하던 중이었습니다. 경연날 공연 장면에서 조명 바텐이 내려와야 하는데, 장치에 문제가 생겨 실제로 한참 동안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체감상 되게 긴 시간을 끌었고, 관객 모두가 바텐이 내려오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바텐이 마침내 내려오니, 관객들이 모두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박수를 쳤습니다. 늦게 내려온 것이 사고였지만, 상황적 서스펜스를 만들었고, 일종의 해소의 감각을 만든 것입니다.
어느 시기 이후 이처럼 서사를 감각적으로 경험하는 방식이 있다면, 서사의 효용성도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작업은 감각과 감각적 서사를 통해서 무언가 해소되는 경험을 주는 일을 할 수 있지만, 사회적인 측면에서 대상이 명확한 이야기를 하며 직접적인 영향을 끼칠 수도 있고, 어떤 시점에는 그런 힘이 중요해지는 시기가 분명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된 계기 중에 고주영 PD님과 나눴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지 보이스 합창단이 참여한 정은영 작가님의 〈변칙 판타지〉(2016)에 관해 이야기하던 중, 연극이 아닌 다른 매체에서 소수자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공연에서도 소수자의 목소리를 이야기할 필요성에 대해 PD님께 물었습니다. PD님은 “그만큼 해야 할 이야기가 많고, 또 그에 비해 이야기할 자리가 적다는 거겠죠?”라고 반문하셨습니다. 이때 분명하고 확정적인 언어가 필요한 사람과 상황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회적인 차원에서 소수자가 이야기할 수 있는 자리가 늘어나면 예전보다는 보편적으로 이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고, 우리가 당연시하고 있던 남성중심적인 구조들이 사실 당연하지 않다는 사실을 되돌아보게 해줍니다. 우리 사회의 저변을 확장하기 위해 먼저 양적인 차원에서 이러한 이야기들과 목소리가 늘어나야, 이후에 더 다양한 차원의 주제를 나눌 수 있다는 생각도 하게 됐습니다.
이런 사회적인 차원에 대한 생각을 거쳐 다시 저의 작업을 다시 돌아 볼 때에, 너무 비언어적이고 확정적이지 않은 재료를 사용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회인으로서 무언가를 발언할 때 의견을 낼 수 있는 방법을 모르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죠. 사람들은 종종 SNS에서 시의성을 가진 사회적 이슈에 관해 이야기하곤 하는데, 저는 SNS를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SNS 계정을 만들어도 익숙하지 않고,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추상 언어를 다룰 때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말하는 일도 다 훈련이고 물리적인 시간이 필요하단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드라마가 등장하는 극을 만들게 된 계기를 물어보셨는데, 이건 아마 사회에서 제 위치가 변한 것도 큰 영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가정이 생기고, 기성세대가 되었는데요. 자연스럽게 저의 위치에서 지금 일어나는 사회 현상에 대한 책임과 이에 대해 무언가를 발언해야 하는 책무가 있다고 느낀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계속 확정적이지 않은 비언어적인 작업만을 해왔기 때문에, 말하는 훈련이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나의 의견을 피력할 수 있는 방법, 그리고 이야기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상현 그런 말하기를 위한 시도로 2019년도에 〈다 타버리고 난 후에야〉를 만드신 것 같은데, 이때 어려움은 없었나요?
세영 〈다 타버리고 난 후에야〉는 학생 때나 해봤던 극작을 시도한 첫 작업입니다. 극작을 하면 글을 만들어 놓고 부끄러울 때가 많은데요. 생각이 전부 탄로 나니까 그런 것 같아요. 작가가 언어로 생각을 규정지어 버리면, 시기가 지나거나 시대가 바뀌면서 그게 증거로 남아 버리니까 금세 별 볼 일 없어지고, 구려지고, 작업의 의미가 제한적이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일련의 계기를 통해 작업에서 언어를 사용하는 일이, 구려질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할 때도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동시에 서사와 이야기,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이야기를 하는 구조나 방식에 대해 의심하는 태도를 놓지 않았습니다. 이런 생각들을 하며 부끄러워도 한번 글을 써보자고 결심했습니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비롯해서 저는 원래 현상을 거시적으로 바라보는 태도가 있는데요. 예술가가 신이 아닌데, 매번 거시적으로 바라보는 태도가 스스로 재수 없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다 타버리고 난 후에야〉에서는 작가가 말한 이야기의 증거가 남는 일, 대상을 규정해 놓고 이야기하는 작업을 시작해 보고 싶었습니다.
상현 해보고 나시니까 어떠셨나요?
세영 막상 해보니 생각보다는 덜 창피했던 것 같아요. 작업을 하면서 거시적인 구조의 측면을 완전히 놓치지 않으면서도, 이야기가 가진 원래의 목적과 힘을 사용하는 중간적인 형태를 고민했습니다. 〈다 타버리고 난 후에야〉에서는 특히 이야기를 해보자는 것이 목적이었고, 대상이 확고해야 이야기를 할 수 있기 때문에 일부러 인물을 특정하고, 확정적인 언어를 사용하여 서사를 만들었습니다.
이 작업은 고독사 한 청년에 관한 이야기예요. 구체적으론 혼자 죽어가서, 자신의 몸이 썩을 때까지 자신을 삼인칭으로 관찰하는 이야기이죠. 죽은 사람을 재현할 수 없으니, 재현의 방법을 포기하고 서사와 관찰자 중심의 이야기를 해 나아가는 것에 집중했습니다. 낭독 형식으로 이야기를 전달했고, 집에서 한 인물이 홀로 방에 있는 이미지를 상상하고 만든 것이어서 컴컴한 방에 핸드폰 불빛만 비추는 조명이 중요했습니다. 신촌극장의 좁은 공간을 활용하기 위해 기본적으로 암전을 만들고 공간감을 상실시켰습니다. 음향 또한 모노와 스테레오를 전환하면서 관객이 공간감을 잃어버리도록 했습니다. 드라마와 서사가 있지만, 연극적인 재현을 하지 않고 시각적인 것을 소거하면서 관객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장면을 상상하도록 했고, 시각적인 환경을 없애 버리면 조금 더 상상하는데 도움이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최근 작업인 〈그중에 한 마리〉도 시각적인 묘사보다는 낭독의 형식을 통해 이야기를 전달합니다. 제 작업에서 서사성을 이야기 하자면, 좀 추상적인 말일 수 있지만, ‘서사가 현장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중에 한 마리〉에서는 낭독 행사를 통해 성우의 말하기로 이야기를 전달하면서, 극의 시공간과 극장의 시공간을 일치시켜 보았습니다. 이야기를 읊는 것 자체가 현장이 되면서 서사가 서사만으로 끝나지 않고, 극장 안에서 현장이 되어서 맞물리게 하고 싶었어요. 아무래도 전 공연을 만드니까 무대 위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주로 합니다.
상현〈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인간과 인간의 도구인 사물의 위계에 관한 것이었다면, 〈그중에 한 마리〉는 종의 위계를 다룬 작업이었는데요. 안드로이드 아기와 가상 세계로 전송된 몸에 관한 이야기. 다소 SF 장르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데요. 사회현실에 대해 발언하기 위해서, SF의 서사 장치를 사용하신 이유가 있을까요?
세영 앞서 제가 작업을 할 때 거시적으로 바라보는 특성이 있다고 했는데, 드라마가 있는 연극을 시작하면서도 그걸 완전히 버리진 못 하겠더라고요. SF 장르의 서사성은 구체적인 이야기를 하면서도, 거리를 둘 수 있는 특성이 있어요. 미래의 흑인 뱀파이어 이야기를 담은 옥타비아 버틀러의 『쇼리』를 굉장히 좋아하는데요.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SF가 인종과 젠더, 퀴어와 같은 현시점의 문제를 다루면서도 거리감을 바라볼 수 있는 특별한 장르라고 느낄 수 있었어요. 지금 당면한 현실의 문제를 바로 이야기하면, 당사자와 그렇지 않은 사람과 사건의 간격이 너무 좁아져 문제를 적절하게 판단하기 쉽지가 않은 것 같아요. 그런데 이야기 안에서는 시간상으로 아주 먼 과거와 미래를 시대적으로, 또 시간적으로, 뛰어넘으며 다룰 수 있어요. 이런 방식은 너와 내가 거시적으로 사건을 함께 볼 수 있는 시야를 만들어 준다고 생각해요. 역사를 보는 일, 과거를 보는 일도 비슷하죠. 현시점을 과거로 만들거나, 미래를 현시점으로 가져다 두면, 우리가 당면한 현재의 문제를 좀 더 명징하게 바라볼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겨난다고 생각했어요. 만드는 사람입장에서는 좀 더 은유적이 되기때문에 자유롭게 이야기를 풀어갈 수도 있고요. 〈그중에 한 마리〉의 경우도 몸을 다룬다고 했을 때, 종의 형태가 달라지는 것인데, 이것을 현시점으로 이야기하면 원래 제가 쓴 내용보다 훨씬 정치적인 것이 되어요. 관객에게 의견을 강요하는 형태가 되기 쉽고, 그런 것을 피하고 싶었어요. 시간을 뛰어넘으면, 자신이 당사자가 되지 않은 범위에서 의견을 공유할 수 있는 여지가 남는다고 생각했어요. 이런 것이 SF적인 상상이겠죠.
상현 〈그중에 한 마리〉와 〈내일의 이웃〉은 ‘가상 세계 안에서의 몸’과 비슷한 서사를 다루고 있는데 공연 자체로 보면 완전히 달랐던 것 같아요.
세영 〈그중에 한 마리〉는 공연이라는 형식을 생각하고, 그 안에서 레이어를 만들어야겠다고 접근했어요. 반면 〈내일의 이웃〉은 텍스트, 이야기 안에서만 이 내용을 해결해 보고 싶었어요. 글 안에서 화자와 이야기의 시점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고민했죠. 전 작업에는 게임, 낭독회, SF 이야기와 같은 여러 공연 구조를 액자식으로 사용했다면, 〈내일의 이웃〉에서는 소설 안에서 그 자체로 해결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접근했어요. 해보니까 생각보다는 잘 작동을 못한 것 같아요.(웃음) 소설이 정말 소설이 되었더라고요. 테스트해 보고 어쩌다 되면 좋은 거고, 아니면 안 된 거라고 생각해요. 저는 이런 방식으로 모든 작업이 실험의 연속이었어요.
상현 그런 서사적인 실험의 첫 시도였던 〈다 타버리고 난 후에야〉는 관객들의 반응이 긍정적이었던 것 같은데, 그때 심정은 어떠셨나요?
세영 그 작업도 일종의 테스트였는데, 관객들이 좋게 봐주셨어요. 끝나고 난 후에는 스킬적으로 글을 쓰는 방식에 대해서 많이 고민했어요. 저는 공연을 시작할 때 제약 같은 것을 걸어두고 시작하는 편이에요. 〈다 타버리고 난 후에야〉의 경우는, 1) ‘연극이라는 장르 안에서 해결한다.’, 2) ‘그렇지만 재현을 하지 않는다.’, 3) ‘하지만 재현과 유사한 공연적 형태가 있어야 한다.’ 였어요. 낭독하기 위해서, 아이패드를 보면대 위에 올려 두었고, 그 사물이 보면대 역할도 하지만 컴컴한 방안의 침대에 앉아 핸드폰을 보는 이미지가 될 수 있도록 상상하며 만들었어요. 여기서 재현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기존의 전통적인 공연에 흔히 등장하는 무대의 형상을 구현하지 않겠다는 것이 있었어요. 또 이야기를 관객에게 직접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도 있었죠. 이게 어떤 뜻이냐면, 지금 대부분의 많은 연극이 관객에게 직접 이야기하는 방식을 선택해요. “나는 ~을 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관객의 눈을 마주치면서 대사하는 방식들이 많아요. 과거의 연극은 환영을 만드는 것이 중심이었다면, 지금은 현장을 만드는 것이 중심이 되었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죠. 배우가 관객과 직접 눈을 마주치는 것이 현장감을 만드는 가장 대표적인 방법 중에 하네요.
저는 전통적인 연극의 형식에 관심이 많은데요. 전통적인 연극에서는 아주 중요한 장면이 아니면 배우가 ‘프로파일’(45도 각도)을 유지해요. 또 등을 보이거나 뒤를 돌면 안 된다는 규칙이 있었어요. 지금은 그런 규율들이 다 없어진 상태이긴 하지만, 이런 과거의 형태들을 생각해 보면 지금 정면으로 무대를 바라본다는 것은 현장감을 무지하게 많이 발생시키는 형식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을 수 있어요. 반면 인물이 45도 각도로 저 멀리 바라보면, 환영과 은유를 발생시키고, 시적인 감수성이 생성되죠. 저는 오늘날 부족한 것이 이러한 시적인 감수성이라고 생각해요. 환영을 깨고 관객에게 지금의 현장성을 만드는 것, 그리고 환영과 시적 감수성, 은유의 세계, 그 중간 어딘가를 찾은 것이 낭독의 형식이에요. 제 작업에서 인물은 정면을 바라보며 현장을 만들어 주지만, 시선은 관객 뒤에 가 있거나 관객과 눈을 마주치지 않는 중간 형태를 취했어요. 〈그중에 한 마리〉에서도 낭독이라는 현장이 있지만, 서사적인 픽션 안에 낭독 행사라는 또 다른 구조를 중첩시켜서 실제로는 낭독극이 아닌 은유를 만들어 놓는 어떤 장소를 제시했어요. 현장 장소와 픽션의 장소의 중첩, 낭독극이지만, 현장과 텍스트, 텍스트를 쓴 작가를 모두 픽션으로 설계했어요.
〈내일의 이웃〉은 이러한 복잡한 공연 구조가 아니라 텍스트 자체로 밀어붙이고 싶었어요. 한번 해보자는 것이었는데, 조금 어려운 부분이 있었네요.
상현 다른 이야기지만, 아까 현시대의 많은 연극이 관객과 직접 눈을 마주치는 방식을 선택한다고 말씀하신 부분이 흥미로웠어요. 개인적으로는 브레히트 연극의 극작법의 영향이라고 보이기도 하는데요. 환영을 거부하고 현실의 문제에 눈을 돌리게 하는 방식이요. 그런데 이런 브레이트적인 연출을 생각할 때 2015년도 아시아예술극장 웹고래에서 김성환 작가와 데이빗 마이클 디그레고리오의 인터뷰가 공감되기도 했어요.1 리얼리티쇼와 그것의 카메라 워크가 예능 TV쇼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지금, 거리감을 파괴하는 연극의 형식이 현재 잘 작동할 수 있는 형식인지 의문이 들기도 하고요.
세영 직접적으로 대화를 형식의 극이 미학적인 차원에서 효용성이 미약해진 상태에는 동감해요. 하지만 그런 직접적인 이야기로 서로 소통할 수 있는 관객, 그런 가능성이 필요한 관객이 남아 있다면 여러 미학적인 형식이 나름대로 공존의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해요. 직접적인 소통이 필요한 관객은 실제로도 생각보다 많이 남아 있는 것이 사실이고요. 대학로의 연극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들어요. 대학로 연극은 일반 대중이 오는 게 아니라, 극장마다, 공연마다 매니아틱한 고정 관객층이 있는 것 같아요. 그 이야기들이 필요한 관객이 제 발로 찾아오는 것이죠. 직접 소통하면서, 위안을 느끼고, 사건들을 생각하는, 그러한 필요가 있는 관객이 아직도 많이 존재하고 있어요. 저는 지금의 시대는 이런 여러 형태의 공연이 다 필요한 시기라는 생각을 해요. 물론 미학적인 견제의 대상이 항상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필요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대상을 없앨 수 없고, 그조차 필요한 것이죠.
어찌 되었든, 연극은 미디어에요. 서사도 미디어고, 도구에요. 도구 자체의 좋고 나쁨은 없고, 언제 쓸 것인지 말 것인지 선택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렇기 때문에 공구 가방처럼 모든 장비들을 다 집어넣어야지 필요할 때 쓸 수 있어요. 지금 당장 필요 없다고 집에 갔다 두면 찾느라고 시간이 걸리죠. 그래서 일단 전 도구들을 안 쓰더라도 가방에 집어 넣는편이에요. 다양성 측면에서 연극의 형식이 공존하는 것이 중요해요. 안 쓰더라도 있긴 있어야 해요. 문제는 하나가 무분별한 권력을 가질 때죠. 망치는 못을 박는 일을 해야 하는데, 못을 다 빼버리려고 하고, 무언가를 지어야 할 상황에 벽을 다 부수고 그러면 안 되는 거죠. 못을 박아야 하는데 멀쩡한 담벼락을 허무니까 문제인 것이라고 생각해요.
모든 공연의 형식이 필요하다는 게 어찌 보면 줏대가 없는 것인 것 같기도 하네요. ‘이것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라는 믿음이 필요할 수도 있겠어요. 그 믿음이 맞고 틀리건 밀고 나가는 방식도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이 또한 도구를 사용하는 어떤 방식이자, 태도이죠. 저도 말만 이렇게 하지, 시각화하는 것이 싫어서 낭독극을 하잖아요. 한쪽에 빠져있으면 다른 거 보면 꼴보기 싫고요.(웃음) 싫긴 하지만 필요는 해 그런 마음이에요. 싫어하는 마음이 있어야, 새로운 것에 대한, 다른 것에 대한 생각도 나오는 것 같아요.
상현 아까 공연마다 제약을 걸어두고 시작한다고 하셨는데, 〈데우스 엑스 마키나〉 작업을 시작할 때는 어떤 제약을 걸어 두셨었나요?
세영 그때는 ‘서사를 만든다.’라는 것이 기본 토대와 컨셉이었어요. 무용학교에 다닐 당시에 초기 형태를 만든 것인데, 무용이니까 뭔가 ‘움직여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죠. 어떻게 움직일 것인가 질문하게 되었고, 작동에 관한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내가 직접 못 움직이니까, 다른 것들이 움직이게 만들자.’라고 생각했어요.
이번에 작업을 하면서 뭘 발견해서 웃겼던 게 있어요. 모든 작업을 돌이켜보니 작업이 모두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는 대상에 관한 거였더라고요. 오브제도 내가 작동해야 움직이는 것이고, 〈다 타버리고 난 후에야〉에서 소설-낭독에서도 혼자 살고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에서 홀로 죽어가는 것에 관한 내용이고, 〈그중에 한 마리〉도 나중에 안드로이드 아기나 여자도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 가상현실로 가버리고, 이번에 신작의 주인공으로 나온 사람도 불치병에 걸려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를 다뤄요. 아무것도 못 하고, 누가 해줘야 하는 그런 상태, 수동적인 상태를 다루고 있네요.
저 스스로가 그런 상태라서 이런 작업을 하나? 그런 생각도 해봤어요. 맨날 뭐가 작동이 안 돼요. 오브제도 잘 작동 안 되고, 하늘 위로 올라가는 것도 다른 것에 매달려서, 의지해서 올라가는 것이고…
상현 제 생각에는 이것이 ‘서사-구조’를 통해 이동하는 주체에 대한 뭔가라는 생각도 드네요. 스스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요.
세영 김정현 기획자의 전시 《연말 연시》에서 선보인 〈데우스 엑스 마키나〉에서도 봉에 연결된 줄에 의해 냉장고 문이 열리고 닫히는 작업을 했어요. 자동기계, 오토마타(자동인형)죠. 로봇이 처음 나오고 이를 부를 때 ‘자동인형’이라는 표현을 썼어요. 하인이라는, 그런 뜻으로 오토마타… 생각해 보면 제가 상정하는 관객도 그냥 앉아서 보는, 수동적인 관객인 것 같아요. 기본 컨셉은 굉장히 보수적인 형태를 지향하고 있어요. 극장 밖을 나가거나, 극장을 전복시키거나 그런 생각은 잘 안 하고, 원래 있던 극장에서 어떻게든 해결해 보자는 생각. 원래 있던 문법안에서 어떻게든 해내 보자는 그런 태도 같아요.
상현 극장을 전복시킨다고 하시니까, 《연말 연시》에 함께 참여했던 송주호 연출님도 생각이 나네요. 난장과 파괴의 미학, 바로크적이고 원초적인 미학을 다루는 주호 연출님의 작업에 관해서도 여쭤보고 싶지만, 시간이 많이 지난 관계로 이후를 도모할게요. 오늘 정말 즐거웠습니다. 내년에는 국립극단에서 신작을 발표하신다고 들었는데, 그곳에서는 어떤 방식의 서사성을 다룰지 정말 기대가 됩니다.
세영 네. 저도 정말 즐거웠습니다. 국립극단에서는 ‘소실점의 후퇴’라는 주제로 장르적인 연극 문법에 맞춰서 작업을 만든다는 제약을 걸어뒀어요. 많은 기대 부탁드립니다.
1 “현대 연극에 있어서, 시각 예술에서도 그렇고, 기본적인 법칙은 환상의 마법을 깨고 거리감을 조성하는 것이다. 고도로 발달된 예술 교육 체제가 기여한 것이 아닐까 싶다. 어떨 때는 우리 시대에 입각해 볼 때 너무 많은 거리감이 있는 게 아닐까 생각된다. 마술이나 공감과 달리 연극에서는 거리감의 존재가 규범이 된지 오래다. 텔레비전과 같은 상업적인 매체조차도 종종 자기참조나 상호 참조에 관심이 있다. 만약 감독을 포함한 대다수의 관객이 애초부터 거리감을 예상한다면, 클로즈업과 같은 장치는 충격적일 수 있다. 또 다른 세대의 드레이어의 영화가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다.” 김성환/데이빗 마이클 디그레고리오 인터뷰 (인터뷰어: 막스-필립 아셴브렌너), 아시아예술극장 웹고래,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