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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온 《열린 추락 Open Fall》
리뷰: 오픈 리허설, 깨진 노트(101’0’0101’01’’01’’’00)

 

사진 제공: ⓒ 2023. 김온 courtesy the Artist

 

1.
“오랜 시간 의식 불명에 빠져 있던 이가 깨어난 직후엔 자신이 얼마나 오래 누워 있었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낯선 몸, 노화, 여러 장치의 삽관과 고정을 감각할 뿐이다. 마치 방금 태어났거나 잘못 조립된 듯 어색하다. 그리고 침대에서 일어나 바닥을 딛는 순간 현실감이 밀려온다. 기립성 저혈압은 눈앞을 정지시키고 발바닥은 손바닥보다 연약하다. 마치 물구나무를 선 듯 비틀거리며 자신의 몸무게만큼의 중력을 아무런 근육도 굳은살도 없이 붙잡아야 한다.

한편 여전히 수면에서 일어나지 못한 채, 이곳이 현실이 아님을 어렴풋이 눈치챈 이는 현실의 중력과 바닥 면을 만질 수조차 없다. 꿈속의 몸은 둔감한 촉감으로 종종 바닥과 물리적 작용을 무시하고 떠 있으며 한 면을 거쳐 반대 면으로 통과하는 상황을 겪곤 한다. 날갯짓이나 헤엄 없이 가만히 서 있는 채 허공에 떠 있는데 배경이 움직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는 결국 꿈에서 일어나기 위해 추락사를 감행 또는 연출한다. 특별한 사유가 없다면 바닥에 몸이 더 강하게 닿는 순간 감각을 되찾아, 이곳에서 일어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중심과 중력을 붙잡기 위해 자기 살해와 자기 인식을 번복한다.”1

0.
김온의 《열린 추락 Open Fall》은 2023년 8월 4일부터 6일까지 3일간, 하루 6시간 진행한 퍼포먼스다. 작업은 오픈 리허설로 이뤄졌지만, 본 공연은 확정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는 작가의 연습 과정을 몰래 지켜보는 것이기도 했다. 수평과 수직으로 설치한 폴에 매달리거나 반대로 폴을 들며 자동인형처럼 반복되는 움직임은 통상적인 공연 시간을 초과하여 계속된다. 마치 전시장의 끝없이 루프되는 영상처럼, 돌고, 걸쳐지고, 버티고, 매달리는 몇 가지 패턴을 반복한다. 퍼포먼스 전체를 보진 못했지만, 그의 체력은 말미로 갈수록 점점 떨어졌을 것이다. 아름답게 연출되고 통제된 움직임은 점차 엉망이 되었을 것이다. 팔과 다리에 난 빨간 상처와 멍 자국은 고통을 증언하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1’.
1의 글은 현장에서 작가가 제공한 글 중 일부를 가져온 것이다. 이는 작업과 평행하는 작가 노트에 가까워 보인다. 이 글은 어떤 상황에 놓인 몸을 설명하고 있다. 오랫동안 잠에 빠진, 그래서 현실의 수직적인 중력에 적응할 수 없는 몸. 스스로의 몸이 낯설고, 일어나 보니 온갖 기계 장치가 삽입된 몸. 이때 물구나무서기와 직립이 동일한 증상을 유발하는 것은 다름 아닌 너무 오래 누워, 너무 오래 꿈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꿈에선 중력이 작용하지 않는다. 혹은 적어도 시뮬레이션 된 것이다. 사물과 몸들 사이의 경계도 마찬가지다.

그가 추락을 연출하는 이유는 바닥이라는 타자를 지각하기 위해, 그래서 나도 없고 너도 없는 영원한 셀피의 나르시시즘적 세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다.

0’
‘열린 추락 Open Fall’이라는 제목을 둘러싼 단어들을 떠올려 본다. 오픈 콜(Open Call), 오픈 리허설(Open Rehearsal), 오디션(Audition), 열린 결말(Open Ending). 이것들은 조금씩 다르게 사용되는 말이지만 어떤 유예된 시간을 딛고 있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최종적인 목적이 되는 순간 주변을 배회하는 길고 반복적인 시간.

이 같은 시간성은 김온이 특정한 이미지나 상황에 맞춰 자신의 이미지를 연출하고 판매해야 하는 배경과 맞물려 있다. (김온은 오랫동안 무용수, 퍼포머, 모델로 일을 해왔다.) 오픈 콜, 오픈 리허설, 오디션, 오픈 엔딩. 결말은 절망과 환희 한쪽으로 치우치기보단, 영원한 유예를 제공한다.

01.
글쓰기에도 리허설이라는 개념을 적용할 수 있을까? 회화의 리허설이라는 말이 낯선 것처럼, 보존이 가능한 매체와 리허설이란 개념이 접붙는 것은 어딘가 어색하다. 리허설의 목적이 공연의 시간을 현재에 펼치고 이로써 시간의 모든 요소를 붙잡고자 하는 것이라면, 애초에 글쓰기는 즉시 기록이 가능하기 때문에 행위를 반복할 필요가 없다. 글쓰기가 ‘리허설’이 되려면 새로운 무언가를 쓰는 것 보단, ‘받아쓰기(dictée )’와 비슷한 무언가를 해야 할 것이다.

받아쓰기는 ‘글의 내용’보단 그 자체로서 ‘쓰는 행위’가 중심에 놓인다. 어쩌면 이는 모든 글쓰기에 숨겨진 위계를 전면에 드러낸다. 어린 시절 받아쓰기의 한 종류인 반성문(깜지)을 쓴 적이 있다. 이때 글쓰기는 새로운 문장을 짓기보단 주어진 반성의 문장을 반복한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잘못 했습니다. 잘못 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잘 못해냈습니다. 잘 못해 냈습니다. 잘 해내지 못했습니다. 잘못해 버렸습니다.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검은 펜으로 꾹꾹 눌러쓴 문장은 종이의 면이 새까매질 때까지 계속 이어진다. 글자 형태는 점점 무너지고, 정해진 사각 면을 채워 빨리 집에 가고 싶은 마음뿐이다. 감시자가 허용하는 한계까지 최대한 손놀림을 흘리고 뭉개며 시간과 면을 채워나간다. 이때 과도하게 많이 쓰인 사과의 문장은 역설적으로 의미를 잃는다. 날 붙잡아 두는 저 힘은 여전히 고통스럽지만, 이상하게 우습기도 하다. 감시자는 “그래, 잘 못했지?”라고 말하며 미소 짓는다.

받아 쓰기의 연출, 선생이나 감시자 없이 스스로 구속하고 반복하는 행위는 김온의 리허설 내내 지속된다. 거꾸로 매달려 고통을 받으며 미소 짓는 김온. “그래, 잘못했지?”

(폴에서 돌기를 멈춘다. 누가 보고 있는 듯, 정면을 잔뜩 의식하며 향수를 뿌리는 김온. 인공적인 복숭아 향내가 관객에게 퍼진다. 보이지 않는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다. 아마 아무도 모르게 광고를 촬영 중이었던 것 같다.)

01’.
코레오그라피(안무)는 춤을 뜻하는 코레오(Choré)와 글쓰기를 뜻하는 그라피(Graphie)를 결합한 단어다. 안무는 이미 이뤄진 공연을 기록하거나, 혹은 앞으로 있을 공연을 창작하기 위한 글쓰기다. 두 경우 모두 안무라는 과정을 통해 ‘춤’을 온전히 재생산 가능한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욕망과 관련이 있다. 현대에 와서 춤과 접붙은 이 같은 영구화의 욕망은 글보단 영상 매체와 결합한다. 언어와 같은 추상적인 기호에서 이미지적 닮음의 구체적인 기호로의 이행. 이때 안무는 춤-글쓰기(Choré-graphie)보단, 춤-사진-쓰기(Choré-photo-graphie)에 가까워진다.

01’’.
인간의 눈은 2차원의 면밖에 보지 못한다. 그렇기에 입체성은 두 개 이상의 면을 조합하는 방식으로, 사후적으로 구성된다. 이는 시신경에 의한 일종의 환영이다. 입체를 감각하는 일은 시간과 관계없이 즉시 이뤄지는 것 같지만, 실상은 흐르는 시간 속에서 주체가 대상을 (재)구성하는 행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01’’’.
《열린 추락 Open Fall》은 장시간 라이브로 진행되는 고통과 지친 몸을 전시한다는 점에서 고통받는 몸을 직접 제시하는 퍼포먼스의 계보를 떠올리게 한다.

자신의 몸과 고통을 현시하는 작업으로 유명한 아브라모비치는 〈Artist is Present〉(2012)에서 의자에 앉아 사건을 겪은 자신의 몸 자체를 제시했다. 우리는 여기서 제시된 그 자체의 현존(presence)을 경험할 수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줌아웃을 해 사건을 바라보면 그의 몸을 둘러싼 수많은 매개들을 볼 수 있다. 작가의 퍼포먼스를 직접 보지 못한 경우라도 〈Artist is Present〉를 영상으로 찾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페이스북을 떠도는 아브라모비치와 (옛 연인)울라이의 ‘드라마’ 같은 조우. 아브라모비치의 몸과 관객이 ‘아무런 매개 없이 만나는’ 퍼포먼스의 현장은 사실상 촬영용 카메라와 조명 장비, 미술관의 제도적 시스템을 통과한 미디엄의 ‘한 가운데 in medias res’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00.
김온의 작업은 보지 못한 것을 떠올리게 한다. 본 것을 기억해 쓸 때의 왜곡과 사라진 이미지들, 보는 이가 공간을 나가고 계속 진행되었을 장면들, 6시간의 행위를 전부 관람했다 하더라도 어떤 의미에서는 그 몸을 한 순간도 볼 수 없었음을

 


  1. 김온 《열린 추락 Open Fall》(2023, 윈드밀) 서문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