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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의 감각으로 구성된 공동의 정치성, 유령들의 몸*

*이 글은 2023 국립현대무용단 아카이브북 『카베에: 언/아카이브』에 수록된 글입니다.
null에서는 하나의 공연을 주제로 만들어진 여러 개의 글을 비교하는 기회를 만들어보고자,
null의 멤버들(조형빈, 하상현, 하은빈)이 비평으로 참여했던 『카베에: 언/아카이브』의 세 개의 글을 싣습니다. 

황수현 〈카베에〉 © 박수환, 국립현대무용단 제공
 
근육

하나의 근육이 솟아오른다. 미세하게 떨리며 곧게 나아가는 근육은 점차 가늘어지다가, 이내 다른 근육과 마주친다. 근육은 휘어지고, 휘돌아 감긴다. 서로 당기거나 얹히고, 뭉쳐서 나아간다. 여기에 다른 근육들이 합류한다. 어떤 근육은 처지거나 빗나가기도 하지만, 이내 다른 근육들이 함께 잡아 이끈다. 근육은 그 살갗으로 서로 비비거나 마주치고, 부피를 늘려 확장하며 엉킨다. 팽팽하게 당겨진 긴장된 근육의 떨림이 느슨한 살갗과 만나 이완된 근육들을 깨운다. 서로 엉켜 비비는 근육들은 함께 떨리며 나아간다. 근육은 결코 멈춰 서는 법이 없다. 살아있는 호흡이 박동하는 섬유질들은 다른 근육이 흘러간 발자취를 밟으며 함께 길을 만든다.

이 근육들은 시간과 공간 그 어느 곳에도 적(籍)을 두고 있지 않다. 이것은 공간을 떨게 만들어 그 진동으로 존재하는 근육, 오직 떨림 위에 존재하며 그것으로 몸을 구성하는 근육, 물리적 제약에 구애받지 않고 시공간을 가득 메우는 ‘소리-근육’이다. 2023년 4월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의 텅 빈 공간을 구석구석 차지한 이 소리의 근육들은, 무용수와 관객의 몸을 연결하며 그 사이에 울림의 정동을 띄워 올렸다. 마치 ‘동굴’처럼 객석을 감싸 안은 높은 무대 천장 아래 촉발된 이 무수히 많은 진동의 사건들은 우리가 공연을 감각하는 방식, 무용 안에서 몸이 교통(交通)하는 방식을 동시대적으로 제안하면서, 공동체를 구성하는 다수의 감각을 몸을 통해 어떻게 구성할 수 있는지 깊이 있게 보여주었다.

 

감각

우리는 공연을 즐기러 갈 때, 공연을 ‘보러 간다’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몸을 객석에 구겨 넣고 앉아서, 무대를 ‘본다’. 시간에 대한 감각을 제외한다면, 우리가 공연을 감상할 때 가장 많이 동원하는 것은 시각이다. 우리는 무용수가 얼마나 높이 뛰는지, 혹은 연기를 얼마나 잘하는지 ‘보고’ 판단한다. 이것은 무용수가 줄에 매달린 꼭두각시처럼 심장이 터질 때까지 무의미하게 움직이는 작품을 더 이상 만들지 않기로 선언한 동시대적 작품들에서 역시 그러하다. 우리는 보는 감각을 스스럼없이 받아들이고, 다른 감각을 판단하기 이전에 ‘먼저 본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응시(gaze)에 대한 담론들이 이미 오래전 지적했던 것처럼, ‘본다’는 행위가 만들어 내는 위계질서의 구조 안에 갇힌다. 우리는 먼저 봄으로써 권력화되며, 우리가 ‘보는 한’ 우리는 영원히 보고 있는 대상의 존재에 다가갈 수 없다.

〈카베에〉는 이 감각을 뒤튼다. 단순히 ‘보지 않기’의 구조를 만드는 것에서 나아가, 다른 감각을 일깨우고자 하는 시도들이 〈카베에〉의 전체에 걸쳐 넓게 퍼져있다. 공연이 처음 시작하는 장면에서 관객은 휘파람 소리를 내는 무용수들을 살펴보다 갑작스레 터져 나오는 무용수들의 함성소리를 맞닥뜨리는데, 여기에서 이미 관객의 감각은 보는 것에서 듣는 것으로 전환된다. 함성소리가 잦아들고 나면 거기에서 솟구치는 것은 하나의 소리다. 무용수 한 명의 몸을 통해 뿜어져 나오던 소리는 이내 다른 무용수 한 명의 소리로 이어진다. 이들의 소리는 마치 근육처럼 힘을 주고받기 시작한다. 하나의 소리-근육에 다른 소리-근육이 붙고, 줄어든 근육에 다른 근육이 이어서 접붙는다. 이 근육들의 길항하는 관계는 관객에게 청각으로 다가오지만, 실상 관객은 또한 소리를 ‘본다’. 무용수의 몸으로부터 울려 나오는 이 감각의 진동들을 접하고 있는 관객들은 마치 공간을 가득 메우는 거대한 덩어리(flesh)를 보듯, 눈과 피부, 호흡과 온도로 그것을 감지한다.

따라서 관객은 이 생경한 감각의 경관 앞에 몸이 열리고 만다. 청각을 통해 두드려진 감각의 문은 우리가 공연이라는 매체를 얼마나 (단지) 시각적으로 감각하고 있었는지 깨닫게 해주며, 무용수가 소리-근육을 통해 몸을 만들어 내는 광경 앞에 관객의 몸은 오감을 확장한다. 무용수들은 고도로 훈련된 소리의 감각들(자신이 내는 소리의 강도, 높낮이, 지속력, 다른 소리와의 조화, 연결, 다른 소리를 감지하고 이어가기 위해 공연 내내 극도로 날카롭게 서 있는 온몸의 신경들)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그것으로 자신의 존재를 빚는다. 무용수의 물리적 몸은 일종의 추(錘)처럼 소리-몸을 붙잡아 주고, 자신의 몸을 공간 전체로 확장하면서 그것을 ‘육체화’한다. 이 낯선 풍경, 불편한 감각이 보여주는 새로운 인지와 감각의 세계를 자신의 몸 안으로 받아들여 자신의 몸을 일깨우는 것,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일지 결정하는 선택 자체는 오로지 관객의 역량에 달려있다. 관객이 이 소리-근육의 길항들을 단지 시각을 통해서만 받아들이고자 했을 때 퍼포먼스는 반드시 실패하며, 관객은 공연이 시도하고 있는 감각의 새로운 국면들, 이 공연이 제안하고 있는 몸-정동의 정체를 결코 발견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결국 〈카베에〉는 소리와 몸을 관계시키며 우리의 몸을 열고, 다른 차원의 감각들을 끊임없이 소환한다. 우리가 습관적으로 ‘먼저 보던’ 것을 ‘여기’의 감각이라고 한다면, 〈카베에〉가 떨림 위에서만 존재하는 덩어리의 매질을 통해 소환하는 것은 ‘저기’의 감각이다. 바로 여기서 무용수들이 온몸을 진동시켜 빚어내는 소리는, 소리라기보다 오히려 근육을 구성하는 섬유질과 같은 것이 된다. 소리는 공간을 울리고 공간을 메움으로써 촉각으로 전환되고, 관객은 심지어 눈을 뜨고 있지 않아도 ‘저기’의 감각들이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음을, 그리고 무대를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소리-근육들은 잦아들거나 커짐으로써 그 ‘몸’의 크기를 조절할 뿐, 결코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흐르는 매질로서의 소리는 그 자체로 변주되고 스펙터클이 되므로 무용수의 물리적 몸은 공간을 가득 메운 ‘실질적 몸’에 그저 따라갈 뿐이다. 몸은 소리에 따라 주저앉고, 기어가고, 굴러다니면서, 무용이 아니고서는 절대로 표현할 수 없는 몸의 정수, ‘저기’의 감각들을 극장에 새겨 넣는다.

 

공동체

무용수들이 어느새 사라진 텅 빈 무대, 스산하고 기이한 울림들이 무대 밖에서 ‘저기’의 감각을 무대 안으로 던져 넣던 어느 순간, 곧게 선 무용수들이 무대 안에 다시금 불쑥 출현한다. 뒷걸음질로 아주 천천히, 미끄러지듯 무대로 들어오는 무용수들의 입이 걸어 들어오는 속도보다 더 느린 속도로 열린다. 몸에 번지는 구멍처럼 천천히 늘어나는 턱은 어느새 한계점에 다다르고, 거기에서 멈추고, 배가 진동한다. 목을 타고 떨림이 올라와 입에서 터져 나온다. 아, 하고 짧게 울리는 소리, 이것은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출현하는 몸의 출현하는 소리, 바로 무용수의 ‘목’소리다. 공연이 후반부로 넘어가는 이 장면에서, 무용수들은 개별적인 존재의 목소리를 부여받는다. 이전까지 소리-근육을 통해 몸을 만들고, 확장하고, 감싸 안던 무용수들은 여기서 목소리를 통해 개인성을 획득한다. 부드럽게 뭉쳤다 흩어지던 소리-근육들은 물리적 몸 안에 고정되어, 다양성을 가진 존재로 모여든다. 움직이는 무용수의 몸들은 점차 빨라지다가, 마침내 내달리고 서로 충돌하거나 서로를 가로막는다. 이 쉼 없이 내달리는 다양한 몸들이 표상하고 있는 것은 바로 공동체의 역동이다.

황수현의 이전 작업들에서 가장 두드러졌던 것은 감각과 감정의 메커니즘이었다. 무용수의 몸으로부터 발화한 감정의 떨림들이 관객에게서 어떻게 점층적으로 작동하는지, 혹은 무용수의 감각을 차단하고 극대화함으로써 소통과 감각의 역동이 어떻게 전개되는지 고민하는 것이 이전까지 이루어진 황수현 작업의 흐름이었다. 이러한 일련의 작업들은 안무로 하여금 단지 쓰인 것의 재현으로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거기’에서 발생하고 있는 살아있는 개념으로서 작동하도록 만들었다. 흥미로운 것은 황수현의 작업들에서 몸을 통해 가장 크게 밀어붙여졌던 개념은 몸뚱아리(무대 아래에서의 몸, 비예술로서의 몸, 사회-관계적인 몸)로서의 몸이라기보다, 감정과 감각을 내포하고 그것을 실어 나르는, 일종의 경유 지점으로써의 몸이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과정 안에서 몸이 가지는 개별성과 정치성의 국면들은 감각이라는 커다란 테두리 안에 묶임으로써, 파편적으로 드러나거나 감각 너머로 숨어버리는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

〈카베에〉는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몸들이 몸을 통해 감각을 주고받는 물성에서 그치지 않고 각자의 방식으로 모여 또 다른 ‘하나의 몸’을 만들어 낸다. 소리-근육의 정동이 시공간을 점유하는 과정에서 다른 존재들을 인지하고 포용하면서 함께 확장해 나가는 것이었다면, 목소리의 정동은 너와 내가 ‘각자 있음’으로써 ‘우리’를 구성하는 방식의 정동이다. 공동체는 하나의 둘레, 덩어리, 영역이되, 그것을 구성하는 것은 균일한 몸이 아니다. 공동체가 개체들이 모인 것으로서의 의미를 가지기 위해서, 그리고 함께 모여 공동의 몸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저마다 다른 개별적인 몸들이 필요하다. 불연속적인 세계에서 탄생하는 공동체는 필연적으로 상보성을 기반으로 한 균열과 회복을 끊임없이 반복해야 하는 운명에 처해있기 때문이다.

서른아홉 명이라는 막대한 숫자는 여기에서 작동한다. 단지 둘이나 혹은 다섯 정도로는 결코 구현할 수 없었을 공동체의 내면, 균열적이고 파편적이며 그렇기에 ‘공동의 몸’을 함께 완성할 수 있는 갈등의 국면들이 서른아홉 개의 몸을 통해 그려진다. 이 사이에 무수히 많은 관계들이 생성되고 무너져 내린다. 단일한 몸, 고정된 것으로서의 안무, 비현실적인 이상으로서의 무용은 여기에서 폐기되고, ‘저기’의 감각이 소환한 ‘우리’의 덩어리들이 공간을 메운다. 키도, 나이도, 성별도 제각기 다른 몸뚱아리들이 오로지 감각만으로 하나가 되어 함께 천천히 발을 내딛는 순간, ‘함께 있음’의 감각이 무대 위에서 폭발한다. 잊힌 목소리들, 개별적이고 사소한 목소리들이 서로의 몸 위에 소리를 싣고 나아간다. 돌아보지도 붙잡지도 않지만, 몸들은 서로에게 서로를 의지하며 마침내 함성이 된다. 공동체의 감각, 다수의 기억이 바로 여기 무대 위에 소환되어 정치적인 것으로 나아가는 정동의 순간이다.

 

유령들

휘몰아치는 정동의 덩어리가 관객의 몸을 그 안으로 삼키고 무대 위에 잊힌 기억의 공동체를 소환하고 나면, 무용수들은 객석의 앞에 머물다 이내 천천히 뒷걸음질 친다. 서른아홉 명의 무용수들이 저마다의 목소리의 위치로 돌아가 서면, 조명은 어두워지고 무용수들은 천천히 자리에 눕는다. 몸이 눕고 호흡이 잦아드는 가운데, 희미한 목소리만 남아 극장을 떠돈다. 마치 유령처럼.

마지막에 가서야 ‘일어서는’ 유령의 이미지는 공연이 끝나도 관객의 감각에 잔상으로 남아있지만, 〈카베에〉에서 무용수의 개별적인 몸들이 가진 이미지는 기실 처음부터 어떤 ‘유령적인 것’이었다. 몸은 내내 극장을 떠돌고, 출몰하며, 엄습한다. 공연이 처음 시작되었을 때 함성이 잦아든 후 벌어지는 첫 장면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놀랍게도 일어서서 소리-근육을 직조해 내는 네 명의 무용수들이 아니라 그들 주위에 넓게 퍼져 앉아 낮은 소리를 만들고 있는 서른다섯 명의 무용수들이다. 높이 솟구치는 소리-근육들이 공간을 유영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은 바닥에서 끊임없이 출몰하고 있는 낮은 소리, 유령의 소리들이기 때문이다. 무용수들의 몸이 하나로 뭉쳐져 바닥을 구르는 중반부 장면에 돌입하기 직전, 무용수들의 흩어져있던 몸이 휘어지며 몸을 ‘포기’하는 것처럼 보이는 씬 역시 그러하다. 소리에 매달려 있던 몸들은 소리-근육으로부터 잘려 나와 땅으로 떨어지며, 유령이 떠난 몸들은 의식 없는 무기물처럼 한데 뭉쳐 굴러가다 이내 사라져 버린다. 여기에서 유령은 몸의 그림자이자 증거, 혹은 정동이 남긴 존재의 흔적들이다.

존재 너머에서 존재를 암시하는 유령들은 그래서 〈카베에〉의 전체를 지배한다. 소리-근육이 시공간을 넘나들고 목소리들이 존재를 밀어붙이고 있는 동안에도, 그 주위에는 스산한 유령이 떠돈다. 오감으로 감지될 수 없는 영역, ‘저기’의 감각들이 존재를 연결 짓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무대가 거대한 대극장, 감히 가늠하기 어려운 높이의 층고를 갖고 있는 해오름극장의 상부를 모두 무대로 편입시키고 있는 중요한 이유가 된다. 단순히 소리가 뻗어나기 위한 공간을 확보하는 것뿐만 아니라, 무대 바로 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소리와 존재의 흔적들이 그 반향으로서 울리는 여백의 공간, 유령이 진동하는 공간으로서 높고 멀리 퍼지는 공간이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는 〈카베에〉라는 공연 제목이 암시하듯 동굴, 천장, 혹은 움푹 들어간 공간이 단순히 소리를 반사하기 위한 공간이 아닌, 존재의 반향을 떠돌게 하는 유령의 공간으로서 필요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 넓은 ‘움푹한’ 공간은 잊힌 존재들을 부르는 공동(空洞)의 공간이다. 극장이라는 매체가 가진 근본적인 한계, 벌어지는 모든 것은 현실을 모사한 유사-현실일 뿐이라는 비극을, 〈카베에〉는 이 공동에 ‘저기’를 불러옴으로써 넘어선다.

〈카베에〉의 유령들은 우리가 상실한 감각과 잃어버린 욕망을 부른다.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서의 유령은 우리 눈앞에 붙잡히지 않는 것들을 감각하게 하는 여섯 번째 감각이다. ‘저기’로부터 온 유령의 도래는 우리가 숨기고자 한, 혹은 오래전에 잊어버린 감각들을 소환한다. 군중, 떼, 하나의 몸, 커다란 것들 곁에는 언제나 유령이 있다. 소리-몸이 진동하는 가운데 흔적처럼 나타났다 사라지는 유령의 모습은 작고 개별적인 존재들의 힘이 ‘저기’를 통해 언제나 우리 곁에 도래할 준비를 갖추고 있음을 은유한다. 그리고 그 유령들이 일깨우는 것은 우리의 감각과 욕망이다. 공동(共同)으로 돌아가고 싶은 욕망, 만지고자 하는 욕망, 존재에게 다가가 그것과 관계 맺고 싶어 하는 욕망들이 바로 유령이 남긴 흔적이다. 단일하지 않은 유령들의 모습은 무용수의 몸 위에 겹쳐 있다. 몸이 누워도 소리는 남는다. 몸이 어둠 속에 잠기고 소리만이 남을 때, 호흡이 꺼진 텅 빈 곳엔 유령이 남는다. ‘저기’의 몸, ‘거기 있음’의 방, 마침내 유령은 우리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