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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하는 마음

안녕하세요. 저는 하은빈이라고 합니다. 연극에 관한, 종종 무용과 퍼포먼스에 관한 글을 씁니다. 지난 몇 년간 이곳저곳에 공연비평을 기고하거나 연재해 왔지만 어디 가서 스스로를 비평가라고 소개하지는 않습니다. 처음 비평 고정 연재를 시작할 때 제 이름 앞에는 ‘연극평론가’라는 말이 붙었는데요, 거북한 마음을 몇 개월 꾹 참았다가 슬쩍 ‘드라마투르그’로 바꿔달라고 했습니다. 딱히 더 편해진 것은 아니지만 그나마 마음이 덜 까끌거렸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뭐하자고 비평을 계속 쓰고 있으며, 지금도 「비평하는 마음」이라는 제목의 글을 쓰고 있을까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실은 앞으로 계속 비평을 할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종종 듭니다. 마음이 허전하기 때문입니다. 비평가가 되고 싶은 것은 아닌데, 제 글이 읽혔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자꾸만 갖는 게 좀 괴롭습니다. 응답을 받고 싶어요. 그것은 모든 창작자가 갈급해 하는 일이지만, 동시에 무척 드물게 주어지는 경험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오늘날 가능한 응답의 형식 자체가 제한적이라는 생각을, 허락된 응답이래봤자 기껏해야 인스타 스토리 정도라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생각해 보면 비평을 시작한 것도 성의 있는 응답을 돌려주고 싶어서였습니다. 피로에 절어있는 탁월하고 출중한 창작자들에게, 관객으로서 또 동료 창작자로서 힘을 실어주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쓰기 역시 응답을 필요로 하는 일인지라 얼마 지나지 않아 저는 읽히는 경험을 간절히 원하게 됩니다. 요새는 좌절하지 않기 위해서 처음부터 읽히지 않으리라는 체념을 단단히 끌어안고 글을 씁니다. 그러고 나면 조금 외롭습니다. 응답하고 싶다는 마음은 누군가의 손을 맞잡고 싶었다는 이야기이기도 할 텐데요, 서른 편 남짓한 비평을 쓰고 난 지금은 더욱 혼자인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비평이 무엇인지도 여전히 모르겠습니다. 비평가가 할 법한 제스처나 포즈를 따라 하는 것, 그것이 처음 몇 번의 청탁에서 제가 어설프게 했던 일입니다. 팔짱도 한번 껴보고 안경도 고쳐 쓰면서, 그 너머로 눈알을 굴리면서 제 것이 아닌 것 같은 문장들을 따라 썼습니다. ‘비평적 거리’를 두는 데엔 뭔가 우아한 몸짓과 태도가, 복잡하고 어려운 말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요새는 초장부터 무릎을 꿇고 쓰는 편입니다. 쓰기가 저를 패배시키는 까닭입니다. 글은 늘 저를 때려눕히면서 완성되고, 저는 패잔병이 되어 백기를 흔들며 제 글이 떠나가는 길을 배웅합니다. 

용맹한 길고양이처럼 세상에 나간 글이 어디서 어떤 삶을 사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어쩌면 제 글이 만난 마음은 오로지 저의 마음뿐일지도요. 이제껏 비평을 가지고 누구의 손도 잡아본 적 없었을지 모릅니다. 그냥 극장에 가서 공연을 잘 보고 창작자와 좋은 악수를 나누는 편이 차라리 더 빠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매달 마감을 하려 밤을 지새울 때면, 무언가 아름답고 불투명한 것이 배회하며 느리게 손짓하는 것을 선명히 느낍니다. 그것을 향해 손을 뻗지만 매번 제 손에 남는 것은 불완전한 결정들 같은 글뿐이에요. 다음에는 더 잘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번번이 허공을 휘젓습니다.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어떻게든 잘 건져보려고, 두 손 모아 쓰고 있습니다. 비평하는 마음에 관해. 


*


제게는 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연극비평이라는 작은 지면이 있습니다. 고려대와도, 혹은 고려대 대학원과도 아무 연이 없지만 이 작은 신문은 제게 정기적인 지면을 준 유일한 곳입니다. 매달 말 마감을 하면 다음 달 초에 실물 신문이 발행되고, 그중 한 부는 목포에 있는 저의 본가에 보내집니다. 그 신문을 저의 엄마인 수미가 읽어요. 지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공연과 거리가 먼 사람이지만, 수미는 딸이 쓴 비평을 읽고 이해가 되는지 안 되는지 재미가 있는지 없는지를 제게 알려줍니다. 그러니까 이 신문에 글을 연재하게 되면서 제 비평에는 매우 구체적이고 확실한 한 명의 독자가 입주한 셈입니다. 

이를 기점으로 제 비평에는 제1원칙이 생겼습니다. 바로 수미가 쉽게 읽을 수 있어야 한다는 원칙입니다. 짧은 분량 안에 수미를 비롯한 누구나 무슨 말인지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쉽고 명료하게 써야 합니다. 이 원칙 앞에서 많은 욕심이 무너집니다. 있어 보이고 싶은 마음도, 개념어를 두른 세련된 문장들도 맥없이 부스러집니다. 실로 만만할 것. 독자를 주눅 들게 하지 않을 것. 읽는 이가 자신의 경험을 글과 동등하게 견주어 보게끔 할 것. 누구나 드나들 수 있는 글일 것. 그것이 제가 저의 비평에 적용하는 기준입니다. 그러다 보니 읽기에 많은 자원이 필요한 글과는 자연히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제 글의 독자는 아주 적습니다. 저의 잘못만은 아닐 것이, 비평의 독자 자체가 많지 않은 데다가 공연비평의 독자는 더욱이 드문 까닭입니다. 여러 가지 이유를 댈 수 있겠지만 거기엔 공연 자체의 존재론적 특성도 크게 한몫하는 듯합니다. 문학이나 영화와는 달리 공연의 경우 작품을 다시 만날 수 없어요. 글을 읽을 시점엔 해당 작품은 내려간 다음이고, 대개의 공연들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며, 어쩌다 재연된다고 해도 이전과는 사뭇 다른 경험을 줄 확률이 큽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공연비평이란 애초부터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를 수밖에 없는 것에 대해 쓰는 장르인 것입니다. 

어쩌면 모든 공연 비평은 언제나 공연이라고 하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린 무엇에 대한 증언이거나 추도사인 셈입니다. 그래서 저는 공연에 대한 비평이 다른 장르의 비평보다 더 막대한 부담을 떠안는다고도 느낍니다. 남는 것은 글뿐, 의존할 대상이 세상에 더 이상 남아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글이 그 글 자체로 공연의 모든 것을 대신해야 합니다. 그러니 저는 더더욱, 공연에 대한 글들이 더욱 글 자체만으로 온전히 재미있고 매력적이어야만 한다고 느낍니다. 그렇지 않으면 독자에게는 그저 내가 모르는 이야기를 너무 많이 하는 글일 따름이니까요. 작품을 보지 않은 사람도, 공연 자체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도 읽을 만한 비평. 하나의 오롯한 글로서 흥미롭고 유의미한 비평. 그런 공연비평을 더 많이 쓰고 싶고, 또 읽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마감이 다가오면 마음과 달리 모든 것이 비슷하게 흘러갑니다. 손바닥만한 지면에는 자칫 공연 소개만 해도 분량이 꽉 차지요. 단순한 줄거리 요약 이상의 글을 납품하고 싶지만, 매번 질이 좋고 의미가 있는 글을 생산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늘 일정한 맛을 내면서도 매일 새롭게 맛있는 음식을 내어야 하는 요식업자의 마음이 이럴 것만 같습니다. 지난달에 마감했다고 해서 이번 달에도 마감할 수 있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데드라인이 다가오면 마감을 앞둔 자들이 으레 행하는 미미한 자해로 기어이 스스로와 주변을 조금 망칩니다. 매 차례의 송고가 한 번 한 번의 투신인 양 구는 것도 이제 그만둘 때가 되었습니다만, 궁지에 몰리면 번번이 비슷한 정도로 허름해집니다. 그저 나 자신이 읽을 수 있는 글을 써냈을 뿐이라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불필요하게 괴롭힙니다. 쏜살같이 시간은 흘러 어느새 다음 마감이 다가옵니다. 


*


글을 쓰는 동안 제 마음은 여러 목소리로 시끄럽습니다. 

‘이번 달엔 이쪽보다는 저쪽의 공연을 재미있게 봤는데… 하지만 글이 필요한 쪽은 아무래도 이쪽이지? 저기는 『연극in』에서 비평이 나올 거야. 이 주제는 아직 한 번도 쓴 적이 없으니까. 근데 그렇게 치면 저 공연은… 아니, 아직 반도 못 썼는데 언제 이렇게 길어졌지? 이 얘기는 꼭 써야 하니까 그럼 저 얘기는 들어내고… 그나저나 다음 달에는 너무 바빠서 공연을 많이 못 볼 것 같은데… 자기가 참여한 공연 쓰는 것도 이제 염치가 너무 없는데… 다음번엔 꼭 연극이 아닌 공연을 소개하고 싶어… 근데 이런 얘기는 수미한테 너무 어려우려나? 그럼 이 단어는 풀어 쓰고… 다음 달에 요 작품 꼭 까먹지 말고 예매하기… 공연을 본 사람들한테 이 단락은 큰 의미가 없을 것 같지 않아? 근데 이런 비판을 하는 게 과연 다음 작업을 하는 데에 생산적인가? 그냥 공적인 말로 우아하게 미워하고 싶은 건 아닌지? 그래도 이 말은 정말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해야겠는데… 진짜로? 목에 칼이 들어와도? 오바하지 마라… ’ 

이렇게 우왕좌왕하는 것은 작품을 바라보는 제가 자꾸만 이동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창작자의 자리에서 지켜보다가, 관객의 입장이 되어 첫 줄 객석에 앉았다가, 비평가의 마음으로 가장 멀리 물러나 보았다가… 이런 식으로 저의 위치는 계속해서 흔들리고 또 옮겨갑니다. 이런 맥락에서 저는 스스로가 저급한 비평가, 신뢰하기 어려운 비평가, 나쁜 비평가인 것만 같습니다. 불안정하고 편협한데다 일정하지도 객관적이지도 않다는 점에서요. 작품에 대한 생각만큼이나 작품을 둘러싼 사람들 생각을 너무 많이 한다는 점에서요. 조그만 지면 위로 이 말을 옮겼다 저 말을 들어냈다 하는 동안 실로 여러 얼굴들이 저를 지나쳐 갑니다. 제 마음의 안팎으로 아주 많은 이들의 입장과 사정이 드나듭니다. 비평가라면 무릇 타협하지 않아야만 할 것 같은데, 글을 완성하기까지 저는 아주 많이 타협합니다. 

요새는 아예 생각을 고쳐먹었습니다. 기왕 타협할 거라면 좀 잘 해보자고.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멈출 수가 없다면 여러 위치들을 오가며 다리를 놓는 사람이 되자고. 요새는 작품으로 들어가는 여러 길을 내는 상상을 하며 비평을 씁니다. 어쩌다 이 길에 접어든 누구나 잠시간의 좋은 산책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거기에는 공연을 본 사람도, 공연을 보지 않은 사람도, 공연예술 자체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저의 엄마 수미도, 글을 쓰는 저 자신도 있습니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공연을 손수 지은 이들이 있습니다. 

글을 쓰면서 공연을 만든 이들을 많이 떠올립니다. 저는 지금 작년 백상예술대상에서 젊은연극상을 수상한 ‘지금 아카이브’의 수상소감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김진아 연출은 무대에 올라가 어느 날의 작업일지를 읽었습니다. “벌판 위에 집을 짓고 있다. 아무도 오지 않을 것이다.” 이 짧은 두 문장이 제 마음을 건드린 것은, 저 역시 그 마음을 모르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닿을 것을 일찌감치 포기하자고 마음을 다잡는 쓸쓸하고 황량한 마음. 그 마음을 생각하면, 한 사람의 관객이자 동료 창작자로서 누군가의 작업에 응하고 싶어 비평을 시작했다는 사실을 다시금 맴돌게 됩니다. 아무것도 돌아오지 않아 적적하고 헛헛한 속을 안다면, 그렇기에 더더욱 비평을 내려놓을 수 없겠다고 마음을 다잡습니다. 

제게 비평이란 누군가에게 좋은 대답을 주는 일인 것 같습니다. 그 일은 작품이 받아야 할 마땅한 비판뿐만 아니라 풍요롭고 충분한 감탄 또한 포함합니다. 그들이 무엇을 해냈는지 좋은 눈썰미로 알아보고, 모자람 없이 칭찬하고, 창작자들이 다음 작업을 할 수 있도록 필요한 말을 보태는 일. 저는 그 일을 잊지 않고 싶습니다. 창작자들이 자신들의 작업물에 대한 비평에서 소외되지 않았으면 좋겠고, 온당한 존중을 받으면서 충분한 피드백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저의 글이 그들에게 다음 작업의 방향성과 동력을 줄 유의미한 지표이자 응원이 된다면 좋겠습니다. 최전선에서 잘 싸우는 사람이 있다면, 한편으로 누군가는 백업이 되어주어야 할 테니까요. 제가 더 잘 쓸 수 있는 종류의 글을 앞으로도 계속해서 쓰겠다는 뜻입니다.

여전히 쓰기는 제게 요령부득의 일이며 비평은 더욱 그러합니다. 하물며 비평에 대한 쓰기는 더더욱 어려워서, 기우뚱기우뚱 어설프게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렇게 어설프게라도 낸 길이 우리를 벌판 위의 그 집으로 데려가기를 바랍니다. 그 집의 안팎에서 무엇인가를 같이 보고, 그것에 대한 이야기를 모자람 없이 나누기를 바랍니다. 내킨다면 충분히 싸울 수 있기를, 필요하다면 가벼운 포옹이나 악수를 나눈 후 헤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비평이라는 게 그저 하나의 실없는 말대꾸여도 괜찮지 않나 하는 생각이 자꾸 듭니다. 벌판에서의 고단한 시간을 지나는 동안 한담을 나누며 함께 견딜 수 있다면. 그 모든 것이 별 의미 없는 농담이나 신소리라 하더라도 그렇게 해서 누군가 너무 오래 혼자 있지 않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저것 바라는 마음으로 두 손 모아, 비평을 쓰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