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템포러리 특급 살인: 춤을 쫓는 탐정들
조형빈
애거서 크리스티의 소설 <오리엔트 특급 살인>은 폭설에 고립되어 멈춰버린 기차 안에서 벌어지는 밀실 살인을 다룬다. 살해된 미국인 라쳇은 폐쇄된 공간 안에서 수 차례 칼에 찔린 채 발견되었고, 우연히 오리엔트 특급 열차에 타고 있던 탐정 에르퀼 푸아로는 다양한 국적과 직업을 가진 열두 명의 승객 가운데에서 범인을 밝혀내는 임무를 맡게 된다. 푸아로는 눈 속에 멈춰버린 열차 안에서 탐문을 진행하면서 살인을 저지를 만한 관계성을 가진 용의자들을 발견하지만, 동시에 곳곳에서 발견되는 새로운 증거들과 다른 승객들의 증언은 범인의 정체를 계속해서 알 수 없게 만들어버린다. 어떤 것도 논리적으로 연결되지 않는 상황에서 푸아로는 과거에 있었던 어떤 비극적인 사건이 이번 살인 사건과 연결되어 있음을 추리해내고, 과거의 사건으로부터 이어진 인연들이 하나 둘 드러나면서 범인의 정체는 독자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형태로 승객들 앞에 드러난다.
<오리엔트 특급 살인>의 서사 구조가 독특한 것으로 평가받았던 것은, 소설이 설정하고 있는 사건 현장과 탐문 현장이 전적으로 폐쇄되어 있는 가운데 이야기 속에서 발견되는 증언과 증거들을 토대로 독자들이 푸아로의 추리 구조를 쫓아가는 형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고립된 기차에 언제 구조대가 도착할지 기약이 없는 상황이므로 이 사건은 탑승객 각자의 신분과 증언을 증명해줄 수 있는 경찰이나 외부의 힘이 개입할 수 없는 완벽한 밀실 살인이면서, 동시에 범인을 추적하는 푸아로 역시도 오로지 승객의 증언만을 토대로 범인을 밝혀내야 하는 흥미로운 구조 안에 놓여있다. 범인은 대담하게도 푸아로의 객실 문을 두드린 후 복도 끝에 사라지는 주홍색 잠옷의 실루엣을 슬쩍 보인다든지, 범행 현장에 서로 어울리지 않는 파이프와 사치스러운 손수건을 함께 남기는 방식으로 푸아로의 추리를 줄곧 흔들어 놓는다. 결국 범인을 잡기 위해 탐문을 진행할 수록 사건은 오리무중에 빠지고, 벌어진 일(살인)은 분명히 존재하면서도 벌인 사람(범인)은 존재하지 않는 기묘한 상황에 놓이고 만다. 너무나 비논리적이기 때문에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그러나 범인이 푸아로가 그렇게 생각하게끔 의도했던 가설처럼, 범인은 열차의 창문으로 빠져나가 폭설이 내린 설산 속으로 사라져버린 것일까?
여기 세 개의 무용 작품이 있다. 2025년 여름부터 가을에 걸쳐 올려진 이 공연들은 저마다 다른 주제를 선보이는 별개의 공연들로, 각각 북한춤, 우주로 보내는 춤, 지르박을 소재로 삼아 춤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품들이었다. 정다슬은 최근의 작업들을 통해 연이어 들여다보던 ‘쓰인 것’으로서의 춤과 그것을 되살리는 춤의 존재론의 문제를 제기하고, 정지혜는 관객들이 직접 참여하여 춤의 형상을 만들어가는 방법을 통해 춤을 우주로 보내고자 한다. 또한 권령은은 한국에서 현대무용의 계보를 비틀어 춤에 대한 태도를 이야기하면서 ‘외부적 춤’을 동시대적 춤의 관점으로 승화시킨다. 세 작품은 모두 다른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풀어가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들 작품 모두를 관통하는 하나의 커다란 질문을 발견할 수 있다. ‘춤이란 무엇인가?’
정다슬이 무보에 적힌 북한춤을 되살려냄으로써, 정지혜가 우주로 보내기 위한 춤의 표상을 수집함으로써, 권령은이 컨템포러리 댄스의 정의와 형상을 재해석함으로써 찾고자 했던 이 질문에
정다슬의 〈PINK: Published In North Korea〉(이하 <PINK>)는 북한의 춤 <사관장과 전사들을> 되살려 기록과 춤의 현존성(liveness) 사이에서 나타나는 균열을 드러내고, 이를 통해 춤에 대한 존재론적 질문을 던지는 작업이다. 이번 작업은 정다슬이 2023년 〈무용보읽기: 사관장과 전사들〉로부터 시작한, 기록된 춤을 현현하게 함으로써 춤이 쓰여질 수 있는지를 계속해서 되묻는 작업의 연장선상에 놓여있다. 작품들을 관통하고 있는 북한의 무용은 북한의 다른 예술들이 그러하듯, 체제를 선전하고 그로부터 인민의 삶을 ‘혁명적으로 교양’하고자 하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예술은 ‘당과 혁명에 복무하는 사상적 무기’로 표현되며, 이에 따라 정립된 몇 개의 북한 예술 기본서들은 대부분 완벽한 프로파간다로서 기능하는 예술의 구조와 역할에 대해 설파한다. 이런 흐름 안에서 북한은 1987년 2월 일반 문자 체계를 활용한 움직임 기록법인 ‘자모식 무용표기법’을 완성하기에 이른다. ‘자모식 무용표기법’은 춤의 동작을 기본적인 요소들로 나누고 그것을 부호화한 다음 자음과 모음의 결합방식을 통해 움직임을 묘사하는 기록법으로, <PINK>는 이 ‘자모식 무용표기법’으로 춤을 기록한 책, 인민배우 홍정화가 안무한 <사관장과 전사들>의 무보집을 춤으로 되살리는 작업이다.
정다슬은 줄곧 춤의 저장과 복원(다시-쓰기로서의 춤), 즉 안무(choreography)라는 개념의 의미가 기본적으로 ‘쓰기(-graphy)’라는 어원에 근거하고 있기에 발생할 수밖에 없는 춤의 특이성에 주목해왔다. 춤을 소장하고 전수하는 것의 의미를 전시의 형태를 통해 전복적으로 들여다보고자 했던 2021년의 <정다슬파운데이션 소장품전>, 허구적 서사를 경유한 재현이 건드리는 춤의 본질은 무엇인지 질문한 2022년의 <정다슬파운데이션 회고전: 기연 1951-1988>, 그리고 ‘완벽한 형태로’ 저장된 무보집을 통해 일종의 ‘가상’(북한이 미지의 공간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실재보다 가상에 가까울 것이다)을 재현한 〈무용보읽기: 사관장과 전사들〉에 이르기까지, 정다슬은 원본과 전혀 다른 결과물로 귀결될 수 밖에 없는 춤의 재현이 가진 아이러니를 춤의 존재론으로서 날카롭게 지적해온 바 있다. 이번 <PINK> 역시도 물질(무보집)로서 분명히 존재하지만 영상이나 다른 자료들이 모두 소실되어 누구도 원본의 정체를 알 수 없는 북한의 춤, <사관장과 전사들>을 무보집에 표기된 움직임의 문자들을 하나하나 해석하고 연결함으로써 되살리고자 하는 시도다.
전시공간 윈드밀에서 입장한 관객이 맨 처음 맞닥뜨리는 것은 정다슬과 일곱 명의 무용수들이 함께 <사관장과 전사들>을 읽으며 그것을 해석해낸 일종의 리서치 과정을 담은 영상이다. 무보 기호들이 가진 원리만 알고 있을뿐 실제로 그것이 어떤 모습의 무엇을 전달하고자 하는 공연이었는지 알길이 없는 상황에서, 여덟 명의 연구자들은 <사관장과 전사들>의 모습을 집요하게 추적한다. 무보에 적힌 움직임들을 카운트로 변환하고, 몸의 각도, 시선의 방향, 팔과 다리의 변화를 하나하나 찾아나가는 영상 속의 이 ‘복원’의 과정은 마치 범인이 남긴 단서들을 분석하고 밝혀내는 수사의 과정을 연상시킨다. 자취를 감추고 사라진 범인처럼, 지금은 아무도 알 수 없는 공연의 실체를 밝혀내기 위한 집요한 탐구의 과정이 <PINK>의 전반을 차지한다. 그러나 이 집요한 탐구의 과정에도 불구하고 <사관장과 전사들>의 많은 부분들이 여전히 불확실한 안개 속에 감춰져 있기도 하다. 동작이 묘사되고 있음에도 어떤 것들은 음악이나 극의 분위기를 통해 전달되어야 하고, 모호하게 표현된 연결 부분이나 추측으로만 알 수 있는 무용수들 사이의 관계성은 무보집에 ‘기록’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영상이 끝난 후 관객이 이동하여 관람하게 되는, 7명의 무용수의 몸을 통해 ‘실연’되는 <사관장과 전사들> 공연은 이 ‘빈’ 부분을 상상력으로 채운다. 재창조된 음악과 새롭게 만들어진 의상에 맞추어 일곱 명의 무용수가 추는 <사관장과 전사들>은 그래서 인민배우 홍정화의 <사관장과 전사들>과는 전혀 다른 어떤 것이 된다. 관객의 눈 앞에서 펼쳐지는 <PINK>의 공연은 기록으로서의 춤이 미래에 벌어질 퍼포먼스를 잠재하는 미래적 시제의 ‘쓰기’임을 암시함과 동시에, ‘재현’으로서의 춤이 끝끝내 불가능하다는, 다시 말해 그 어떤 퍼포먼스도 동일한 것이 될 수 없다는 춤의 존재론적 본질을 건드린다. <사관장의 전사들>이 얼마만큼 프로파간다적인지, 정말로 사관장과 전사들은 ‘인민을 혁명적으로 교양’할 수 있었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PINK>의 공연이 되살리는 것은 ‘쓰인’ 춤의 수수께끼를 끝없이 풀어내는 어떤 이미지들이다. 그리고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원본은 무보에 의해 완벽하게 복원된다 해도 여전히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남는다) 춤이 남긴 기록, 낱낱이 해체되어 무보의 기호들로 환원되어 새겨진 책 <사관장과 전사들>은 사라져버린 춤이 실종되기 전에 남긴 마지막 흔적, 범행 현장에 남은 춤의 다잉 메시지와도 같다.
춤은 얼마나 ‘인간적일 수’ 있을 것인가. 정지혜의 <코스믹 댄스>는 보다 직접적으로 관객에게 춤의 모습에 대해 묻는다.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의 블랙박스 안에서 진행된 <코스믹 댄스>는, 가장 인간적인 것을 춤으로 정의하면서 만약 우리가 우주로 춤을 보낸다면 그 춤의 모습을 어떻게 정의내려야 하는지 묻는 작품이다. 객석이 비워진 소극장 안에 들어서면 관객은 커다란 스크린이 한쪽 벽면에 설치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 스크린에는 중간중간 관객들이 직접 선택을 입력할 수 있는 QR 코드가 띄워지고, 그때마다 관객은 어떤 춤을 보고 싶은지(그리고 우주로 보내고 싶은지) 두 개의 선택지 중 하나를 골라 자신의 스마트폰으로 입력하게 된다. 관객의 다수가 선택한 선택지는 모두에게 고지되고, 극장을 끊임없이 돌아다니며 춤을 추는 두 무용수의 춤은 관객의 선택지에 따라 점점 변화해간다.
우주인, 즉 인류를 단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존재가 인류를 마주쳤을 때 보여주어야 하는 춤은 무엇일까? <코스믹 댄스>가 스크린을 통해 관객에게 던지는 질문은 관객으로 하여금 춤의 개념과 형상에 대해 돌아보도록 한다. “어떤 춤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여러 차례 던져지는 이 질문에서 관객이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이야기/사건, 내부/외부, 작고 큰 것/크고 작은 것 등 개념적으로, 혹은 이미지적으로 묘사된다. 첫 질문이 제시되기 전 무대에 등장하여 마주 보고 있는 상태로 느리고 조용한 움직임을 이어가던 무용수들은 관객의 선택에 따라 춤을 변화시켜 나간다. 선택지에 따라 조명이나 사운드 역시도 변화하며, 무용수들의 춤은 극이 진행될수록 더 크고 다양한 움직임으로 확장된다. 그러면서 관객은 끊임없이 자신에게 되묻게 된다. ‘이것이 (내가 정의하는) 춤의 모습인가?’
두 가지의 선택지 중 하나를 택한 관객은 무용수들의 춤이 변화하는 것을 느끼지만, 또한 포기해버린(혹은 다수결에서 밀린) 다른 선택지의 춤을 확인할 수 없다. 단 하나의 선택지들로 이어지는 춤의 변화를 바라보면서 관객은 춤이 상대적인 것이기보다 절대적인 형상으로 자리잡고 있음을 느낀다. 그래서 <코스믹 댄스>의 춤은 역설적이다. 우주로 보내기 위한 춤을 만들기 위해 계속해서 어떤 선택을 만들어나가지만, 여기서 춤의 정의는 확장되고 유연해지기보다 좁아지고 단단해진다. 우주인과 만나는 인간이 인류를 대표하는 ‘어떤’ 인간이 되는 것처럼, 우주로 보내야 하는 춤은 ‘어떤’ 춤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결국 <코스믹 댄스>의 모든 과정은 관객으로부터 촉발된 춤의 증언으로 구성된다. 이 증언들은 관객이 지금 바라보고 있는 동시대 춤의 형상을 비추는 거울이다. 관객 모두가 일종의 고뇌하는 공동체로서 고민하는 이 춤의 정의는, 결국 우리에게 있어 춤이 ‘어떤’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우치게 하는 트리거로서 작동한다. 춤은 결코 머무르거나 고정되지 않는다는 것, 형상이나 개념으로 틀지울 수 없다는 사실이 우리가 우리 안에서 찾아낸 춤의 증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