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생긴 게 문제가 아니야


못생김은 참 어려운 주제다. ‘못생겨도 괜찮아’ 정도로 수렴되는 위선적인 이야기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 지면에 미학 담론장의 미추에 대한 오랜 논쟁들을 옮겨 적는 것도 재미있을 리 없다. 추한 것에 관한 흥미로운 통찰은 이미 차고 넘친다. 그래도 어딘가를 딛고 이야기를 시작하자면, 카를 로젠크란츠의 『추의 미학』(Ästhetik des Häßlichen)이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1853년 발표된 이 책은 추함을 주요한 미학적 사유의 대상으로 끌어 올렸다. 헤겔 연구자였던 로젠크란츠는 절대적인 미에 대하여 이야기 하는 것보다 미와 추의 변증법 속에서 미학을 사유할 수 있다는 점을 알았다. 부정적인 것, 불완전한 것, 비대칭, 부조화, 부정확성 등등. 그는 기존 미학에서 배제되었던 추를 철학의 대상으로 삼기 위해 미의 변증법적 반대항을 논한다. 흥미롭게도 한국어에서 추를 뜻하는 ‘못생김’은 애초에 부정형이다. ‘못생기다’는 ‘생기다’에 부정형 부사를 붙인 말이고, ‘생기다’는 ‘생기게 하다’, ‘만들다’라는 의미를 가지는 옛말 ‘삼기다’에서 온 말로, 생성의 사건을 가리킨다. 못생겼다는 말은 어떤 존재가 온전하게 생기지 못했다는, 즉 생성의 중단을 뜻한다. 이런 관점에서 못생김은 독립적인 상태가 아니라, 마땅히 도달해야 했을 어떤 ‘생김’과의 관계 속에서 성립하는 개념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못생김은 분명 그 자체만으로 무언가 해낸다는 것을 우린 이제 알고 있다. 현대 사회의 모순을 드러내는 것이 예술의 힘이라고 생각했던 아도르노는 예술이 전통적 아름다움을 거부하고 기꺼이 못생겨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추함은 매끄러운 자본주의 사회가 은폐하는 균열을 폭로하는 미적 형식이었다. 전혀 다른 방식이지만 퀴어 미학에서도 못생김은 아름다움의 실패가 아니다. 그것은 정상성의 견고한 벽을 허무는 독자적인 미적 형식이 된다. 대표적으로 비체(abject) 같은 개념을 경유하여 예술장에 들어온 똥, 오줌, 침, 피 같은 것들이 고상하고 정상적인 세계를 멋지게 전복하는 전략으로 작동하는 사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런 논의를 보면 못생긴 것들은 단순히 생기지 못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도 충분한 가능성과 힘을 지닌다.

이런 미적 전략으로서의 못생김이 아니라, 정말 구린 것들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나는 오늘날의 못생김이 모두가 너무 못생기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생각한다. 진짜 못난 것들이 점점 사라져간다. 사람들이 입는 옷만 봐도 그렇다. 유니클로나 자라 같은 SPA 브랜드, 한국 맥락에서는 무신사의 랭킹을 보고 쇼핑하는 것이 패션의 표준을 만들면서 옷을 이상하게 입는 사람들을 보기 힘들어졌다. 모두가 적당히 세련되고 적당히 멋있다. 못생김의 하한선은 높아졌을지 몰라도 문화적 생태계의 다양성이 망가지고 있다. 멋지기보단 못생기지 않기가 더 중요한 세계에서 진정 아름다운 것이 생성되기는 점점 어려워질 것이다. 모두가 적당히 세련된 세계의 미적인 나태함을 생각한다. 시각 이미지나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생성형 인공지능이나 거대언어모델로 누구나 그럴듯한 이미지와 텍스트를 뚝딱 만들 수 있다. 무엇이 아름다운 것인지 잘 모르는 상태에서 이상한 시도를 반복하며 자연스럽게 수행되는 미적인 탐구는 점점 자취를 감춘다.

이처럼 미적 다양성의 폭이 줄어들수록 못생김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움의 가능성이나 역량 자체가 줄어든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또 하나의 흥미로운 국면은 미적인 취향과 계급, 계층의 문제를 입체적으로 사유할 수 있도록 고안된 개념인 아비투스가 이상하게 전유되는 지점에서 발견된다. 부르디외의 비판적인 맥락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멋진 사람이 되려면 자고로 상류층의 아비투스를 갖추어야 한다는 식의 자기 계발 용어처럼 그 개념이 쓰이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띈다. 단지 학술적 엄밀함이 부족해서 그렇다기엔 너무도 징후적이다. 각기 다른 못생김을 가꾸어가며 각자의 멋을 생겨나게 하지 못하고, 쉽게 못생김에서 벗어나려고만 하는 세계에서 못생김이란 또 다른 문제가 되어가고 있다. 이렇게 못생기기 어려운 세계에서 못생김은 오히려 미적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닐까.

오히려 진짜 못난 것은 그 안일한 평균값 안에 들어있다. 미적인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말 그대로 무언가 생겨날 여지가 없는 상태로서의 못생김. 적당히 무난하면 된다는 안일한 생각에서 만들어지는 것들이 세계를 못생기게 만든다. 못나고 쓰기도 불편한 관제 웹사이트들이 떠오른다. 대체 왜 그렇게 만들어졌을까. 단지 예산이 부족해서? 관료 문화가 촌스러워서? 기이한 관료주의 문화의 핵심은 촌스러움이 아니라, 무언가 해내는 것보다 욕을 먹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한 문화에 있다. 여기서 우리가 보통 기본값이라고 번역하는 디폴트(Default)라는 말을 되짚어보자. 디폴트의 어원은 ‘실패’나 ‘의무 불이행’에 있다.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즉 값을 입력하지 않으면 출력되는 값이 디폴트 값이기에 이것을 의역하여 기본값이 된 것이다. 기본값에 머무는, 무언가 생성하기 위해 애를 쓰지 않는, 단지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려는, 예산조차 눈에 띄지 않게 가성비를 따져 계약한 외주 업체에 책임을 전가하는 그 태도가 못생김을 낳는다.

이와 반대로 멋진 것들은 꼭 세련되고 트렌드에 앞서기 때문에 멋진 것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주어진 것들을 애써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불편하게 무언가 드러내기 때문에 멋지게 느껴지는 것들이 있다. 앞서 언급한 웹사이트 중에서 생각해 보면, 시력에 따라서 글자 크기 등을 조절할 수 있도록 만들어둔 인터페이스나 스크린 리더 사용을 염두에 둔 디자인이 그렇다. 아직 표준이 아닌 것들을 도입하고 실험하는 태도 자체에서 멋이 생성되는 것이다. 이 외에도 간단한 소셜미디어 포스팅임에도 불구하고 이미지 대체 텍스트를 세심히 작성해 두는 태도가 생겨나게 만드는 것들을 떠올린다. 그것은 단지 윤리적이기 때문에 선한 것이 아니라, 미적으로 아름답고, 멋이 있다. 무언가 제대로 생겨나게 하기 위해서 애쓰는 실천을 통해 진정으로 못생기지 않게 되는 것이다. 결국 못생김은 세련되지 못하거나 최신의 멋을 따라잡지 못하는 상태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복수의 다른 감각들을 세심히 고려하지 않는 무신경함이나 무책임에서 온다.

멋은 일반적인 세계에서 만들어지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애를 써 조금이라도 다르게 존재를 생성해 내려고 분투하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사실, 세상은 그리 아름답지 않다. 지배 계층의 추악한 모습이 만천하에 드러나도 뻔뻔하게 자리를 유지하고, 세계는 전쟁과 학살의 구렁텅이로 빠지고 있다. 회의감이 들 수밖에 없는 요즘이다. 그러나 이토록 못생긴 세계에서도 무언가 잘 생겨나게 하기 위해서 분투하는 존재들이 분명 있다. 이렇게 작은 애씀들이 모여서 추악한 세계는 또 어딘가에 아름다움을 품는다. 그 일은 이미 생겨있는 세계를 다시 못생겨 있는 상태로 끌어내리는 실천이기도 할 것이다. 추악한 세계의 생김을 불편하게 계속 돌아보는 일. 생김과 못생김 사이에서. 윤리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그리고 감각적인 것이 뒤섞인 미적 다툼이 우리에겐 항상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