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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상에서 방식으로, (극장)감각의 문제들

 

접근성, 다양성, 포용성. 예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타진하는 최근의 흐름에서 두드러지는 몇 가지 키워드들이 있다. 이들을 단일한 혹은 동류의 개념으로 묶어내는 것은 지나치게 성긴 범주화가 되겠지만, 그 가운데에서 이것들을 아우르는 가장 핵심적인 주제는 장애를 둘러싼 공연예술의 이슈들이다. 매체의 특성상 시각이 지배적인 감각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는 무용과 같은 공연예술에서 공연을 구성하는 몸들을 다양한 감각과 접근성의 관점으로 되짚어보는 것은, 곧 공연이라는 예술 형식을 매체적으로 다시 해석하는 일과도 같다. 몇몇 공연들에서 (이제는 정례화된 것처럼 보이기까지 하는) 무용음성해설을 도입한다든지, 극장 혹은 개별 공연의 차원에서 접근성 매니저를 상주시킨다든지, 작품을 진동으로 느낄 수 있는 우퍼조끼를 준비하는 것 등은 모두 우리가 ‘공연을 어떤 방식으로 감각할 것인가’하는 매체적 고민이 수반되는 실천들이다. 결국 이와 같은 시도들은 관객이 누구이고 어떤 감각을 통해 관극의 경험이 완성되는지를 묻게 되면서, 포스트드라마 연극 이후로 극장의 역학 안에서 끊임없이 ‘일어서기’를 요구받았던 관객성 자체를 되돌아보는 계기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서울국제공연예술제(Seoul Performing Arts Festival, 이하 SPAF) 역시 국내에서 가장 큰 공연예술 축제로서, 몇 년 전부터 접근성과 관련된 주제를 축제 내외부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기획하고 실천해 오고 있다. 2023년 SPAF의 경우 축제 차원에서 직접적으로 다섯 편의 배리어프리 공연을 제작하는 접근성 기획을 실행하였고, 2024년의 SPAF 역시도 축제의 음성 포스터나 관객의 이동을 지원하는 접근성 매니저의 상주, 한영 자막 및 수어 통역의 지원 등의 다양한 장치들을 통해 접근성의 대안들을 마련해 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접근성 안내와 확보에 대한 노력들은 공연예술의 외연을 확장하고 더 다양한 관객을 상상하게 하는 일임에 틀림없지만, 또한 동시대의 공연예술이 떠안은 시대적 고민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여기서 더 나아간 또 다른 방식의 접근이 필요하다. 이에 2024년의 SPAF는 축제의 주제를 ‘새로운 서사: 마주하는 시선’으로 정함으로써 관객이 작품과 소통하는 극장의 물리적 환경에 대한 고민과 더불어 작품의 주제들을 아랍이나 중동, 이슬람, 여성, 탈식민지적 서사 등으로 확장하는 주제적 시도를 꾀한다. 단순히 다양한 몸을 가진 관객들이 공연 관람 자체에 접근할 수 있는 매체 감각과 접근성의 문제에서 나아가, 다양성 그 자체가 무대 위에서 어떻게 해석되고 무엇을 전달할 수 있을지 그것을 주제적으로 고민하는 데까지 폭넓게 아우르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인간의 몸을 주제로 삼는 무용에 있어 여러 가지 형태의 장애를 다양성의 개념으로 포괄하는 것은 이전까지 있었던 무용 공연의 전형성을 탈피하는 차원에서 의미를 지닐 뿐만 아니라, 동시대의 무용이 무용 자체와 몸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그 당대적 관점과 비전을 암시하는 차원에서도 또한 유의미한 함의를 가진다. 물론 무용 안에서 특정 형태의 장애를 통해 몸의 가능성과 다양성을 타진하고자 하는 시도들은 이미 상당한 역사를 가지고 있고, 국내 공연예술계에서의 제도적 환경(기관이나 극장 등)들이 비로소 조성되면서 비/장애를 가로지르는 몸의 국면들을 들여다보는 작업들이 보다 활발해진 것이 사실이다. 이런 흐름 안에서 이번 2024 SPAF에서는 몸의 가능성을 새로운 방식으로 들여다보는 무용 작업들, 미나미무라 치사토의 〈침묵 속에 기록된〉과 프로젝트 이인과 캐나다 내셔널액세스아트센터가 협업한 〈카메라 루시다〉는 비/장애의 몸이 공연예술에 제시하는 매체적 가능성을 논의하는 모멘텀을 만들어내었다.

 

프로젝트 이인 x 캐나다 내셔널액세스아트센터 〈카메라 루시다〉 ©2024 SPAF/JD WOO
 

다른 감각을 통한 ‘열림’, 〈침묵 속에 기록된〉

〈침묵 속에 기록된〉은 일본에 있었던 두 번의 원자폭탄 투하의 과정과 그로 인해 생겨난 원폭 피해자들, ‘히바쿠샤(被爆者, 피폭자)’라 불리는 생존자들의 서사를 그리는 작품이다. 이 작품의 연출자이자 유일한 퍼포머인 미나미무라 치사토는 영상이 투사되는 스크린 너머에서 수어를 동반한 퍼포먼스를 펼치고, 당시의 사건을 직접 겪고 생존한 ‘히바쿠샤’들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재구성된 서사는 일본 사회에서 원폭 피해자들이 받았던 차별과 고통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무엇보다 이 작품이 깊이 있게 느껴지는 것은, 원폭 피해자로서 낙인찍힌 삶을 살았던 사람들 중에서도 청각장애를 가지고 있는 소수의 이야기를 작품의 소재로 삼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작품 안에서 묘사되고 있는 원폭 피해자들에 따르면, 청각장애인들은 원자폭탄 투하와 폭발이라는 막대한 인명 손실을 불러온 참상이 벌어지는 그 순간에도 차단된 감각 때문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온전히 알지 못했다. 게다가 피폭 이후의 삶에 있어 일본 정부에 의해 이루어졌던 지원 프로그램에 대한 정보조차도 정확히 알 수 없었으므로, 피폭의 후유증과 여파를 다른 피해자들보다도 훨씬 더 가혹하게 겪어야만 했다는 것이다.

하나의 특정한 감각이 망실된 몸의 조건들을 무대 위에 풀어놓기 위하여 〈침묵 속에 기록된〉은 여러 가지 장치들을 동원한다. 작품의 유일한 퍼포머는 투명한 스크린 뒤에서 수어를 동반한 퍼포먼스를 선보이고 퍼포머의 앞에 놓인 스크린에는 퍼포머의 몸을 다양한 맥락으로 이끄는 그림과 정보들이 펼쳐진다. 또한 공연이 이루어지는 극장의 몇몇 객석에는 우저 스트랩이 놓여져 있어 그것을 몸에 자유로운 방식으로 둘러 작품의 내용을 촉각적으로 감지할 수 있는 별도의 감각을 제공하고 있기도 했다. 퍼포먼스를 펼치는 미나미무라 치사토는 본인 스스로가 청각장애인이기도 하므로, 작품에는 청각장애인 관객들이 이 공연을 마주했을 때 이것을 어떻게 느끼고 받아들일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곳곳에 녹아들어 있다. 이를테면 원자폭탄이 투하되어 폭발하는 순간 전투기와 시골의 자연스러운 소음들이 모두 사라지고 오직 침묵만이 남았다가 그 결과가 하늘에서 쏟아지는 낙진으로 시각화되는 것과 같은 미장센들이 바로 그러한 것들이다. 이 공연에서 소리는 인류에게 있어 전대미문의 참상을 안겨준 사건의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역할을 맡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극적 효과들이 청각 이외의 다른 감각들(급격하게 빨라지는 퍼포머의 수화, 우저 스트랩의 점층되는 진동)을 통해 어떻게 구현되는지 비교해 볼 수 있는 비교-감각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결국 〈침묵 속에 기록된〉은 제목에서 묘사된 바와 같이 참혹한 역사적 사실을 ‘침묵’으로서 체험한 몸들이 그것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지 재현함과 동시에, 소수자로서의 정체성이 역사 안에서 얼마나 취약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생생하게 전달한다. 말하자면 이 공연은 청각장애를 가진 몸이 겪어야 했던 낙인을 통해 다른 감각을 가진 몸을 소환하고, 그것을 다양한 장치들을 동원하여 관객에게 전달함으로써 관객의 감각을 매체적 사건으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의 층위에서 작동하는 작품의 메시지는 장애와 감각을 연결해 경험으로서의 공연을 가능하게 만든다. 〈침묵 속에 기록된〉에서 청각장애는 소수자로서 장애를 가진 ‘히바쿠샤’들이 어떻게 역사 아래 가라앉게 되었는지를 조명하는 단서이면서, 또한 그것이 어떤 매체적 감각들을 통해 관객에게 전달될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주요한 방법론으로 기능하는 것이다.

 

미나미무라 치사토 〈침묵 속에 기록된〉 ©2024 SPAF/JD WOO

 

다양성의 층위들을 상상하는 극장, 〈카메라 루시다〉

2024 SPAF에서 몸의 다양성을 들여다보는 또 다른 작품으로 프로젝트 이인과 캐나다 내셔널액세스아트센터(National accessArts Centre, 이하 NaAC)가 협업하여 제작한 〈카메라 루시다〉를 꼽을 수 있다. 이 작품은 몸과 안무에 대해서 질문하는 작업들을 이어온 프로젝트 이인과 발달장애가 있는 네 명의 NaAC의 무용수들이 만나 협업하는 과정을 통해 만들어졌다. ‘카메라 루시다’는 한국어로 〈밝은 방〉으로 번역된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의 마지막 저작의 영문판 제목으로, 바르트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결코 언어화될 수 없는 어떤 ‘찌름’의 순간들, 그 정동을 몸의 다양성을 통해 풀어내고자 하는 의미가 담겨있다. 이 작품에서 개념적으로 가장 중요하게 두드러지는 것은 발달장애를 가진 네 명 무용수들의 존재 자체다. 장애를 소재로 하는 기존의 많은 무용 작업들이 신체의 물리적 장애를 그 탐구의 대상으로 삼아왔던 것은 무용이 가지는 형상으로서의 미학을 넘어서고자 하는 안무가들의 의지도 있었지만, 더불어 어떤 특정한 ‘안무’를 수행하는 것으로 귀결되어야 하는 극장의 구조 안에 지적장애인들이 들어오기 어렵다는 현실적인 이유가 존재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카메라 루시다〉는 발달장애를 가지고 있지만 그 안에서도 서로 다른 정도의 장애를 가진 무용수들을 “돌봄의 시학”1 안에 함께 있게 함으로써, 장애를 장애와 비장애의 이분법 안에 놓는 대신 커다란 스펙트럼으로 바라보고 어떻게 ‘우리’가 될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작품이다.

장애는 무엇에 의해 정의되는가? 만약 장애가 어떤 특정한 임계로서 설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스펙트럼 안에 놓인 정도로 파악될 수 있다면, 장애 혹은 비장애의 개념에 근거하여 배타적으로 서로를 제외하는 범주가 아니라 모두가 (많든 적든) 어느 정도의 장애를 가진 동등한 몸으로서 공동체를 구성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프로젝트 이인은 발달장애와 같은 정신장애 역시도 신경다양성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다고 보고, 무용수들이 가지고 있는 개별성이 어떻게 극장을 하나의 공동체로 엮어낼 수 있을지 이와 같은 맥락에서 고민한다. 〈카메라 루시다〉의 무대는 공연의 구조를 알려주는 1부와 1부에서 공유된 규칙들 위에서 본격적으로 펼쳐지는 2부로 나뉘는데, 이러한 공연의 구조와 규칙들은 극장 안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이 공연이라는 하나의 공동체를 구성하도록 이끄는 장치다. 1부에서 극장 벽에 쏘아지는 자막은 자막이 나올 때마다 관객 중 하나가 자발적으로 일어나서 그것을 읽도록 유도하고, 그러한 자발적 행동들이 다른 관객들, 그리고 나아가 공연을 구성하는 무용수들을 자연스럽게 이끌고 안내할 수 있도록 만든다. 관객은 수동적인 위치에 머물면서 공연으로부터 타자화되는 대신, 저마다 다른 지표에 의해서 자신의 순서를 알 수 있는 무용수들을 안내하고 공연에 참여시키는 적극적인 행위자가 된다. 

인터미션이 끝난 후 이어지는 2부에서는 네 명의 무용수가 각자 한 명씩 무대로 나와 저마다의 특성이 두드러지는 솔로 무대를 선보인다. 어떤 무용수는 제자리에서 끊임없이 도는 춤을 보여주고, 또 다른 무용수는 음악에 맞춘(그러나 정확히 같은 박자만큼 엇나가는) 춤을 추기도 한다. 성별도 나이도 제각기 다른 네 무용수의 몸은 그 차이만큼이나 두드러지는 각자 다른 퍼포먼스를 선보이고, 공연의 마지막에 가서는 모든 무용수가 함께 나와 펼치는 군무로 이어진다. 마지막에 출현하는 군무 장면은 네 명의 무용수가 무대에 울려 퍼지는 목소리에 따라 같은 동작들을 연속적으로 수행하며 이동하는 방식으로 구성되는데, 어떤 특정한 동작들을 외우고 적확한 타이밍에 그것을 수행하는 것이 어려운 무용수들이 ‘함께’ 무언가를 수행하고 그것을 위해 서로를 돕는 광경은 우리가 알던 안무의 개념과 유사하면서도 조금 다른 어떤 것을 보고 있다는 느낌을 만들어낸다. 하나의 이상적 형상, 만들어진 기록으로서 존재하는 것을 안무라고 정의할 때, 안무의 숙명은 실패 위에 놓여있다. 그것이 언제 어디서 누구에 의해 수행되든지 간에 안무는 그것이 만들어진 시공간으로부터 지독히도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안무는 태어나는 동시에 죽는 어떤 것이다. 〈카메라 루시다〉의 무용수들이 함께 모여 군무를 이룰 때 그것은 리허설 공간에서 미리 설정했던 규칙과는 다른 것이 되어버리지만, 동시에 무용수들이 가진 특질 덕분에 도달해야 하는 완벽한 이상향으로서의 형상이 여기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안무가 성취해 내야 할 원본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군무는 여기서 실패하는 것으로서 완성된다. 안무는 목표를 달성하기보다 일종의 특이성, 푼크툼(punctum)2으로서 존재하며, 작품 안에서 무용수들이 이루는 것은 대형이나 구성이 아닌 공동체가 된다. 신경다양성의 스펙트럼 위에 놓인 몸들이 끊임없이 흩뜨려놓는 것은 신경전형적인 안무 그 자체다.

 

프로젝트 이인 x 캐나다 내셔널액세스아트센터 〈카메라 루시다〉 © 2024 SPAF/JD WOO

 

경유지로서의 장애, 그 너머

장애를 불완전함이 아니라 몸이 가진 하나의 가능성으로 바라보고 그것으로부터 새로운 상상력을 이끌어내고자 했던 시도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있었다. 1991년 창단되어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섞여 다양한 작품들을 만들어온 것으로 유명한 영국의 칸두코 댄스 컴퍼니(Candoco Dance Company)는, 장애인들이 비장애인과 구분 없이 고도의 신체적 훈련을 거쳐 무대 위에서 탁월한 기량을 선보여 온 단체로 널리 알려졌다. 칸두코 댄스 컴퍼니의 장애인 무용수들은 무대 위에서 경이로운 움직임들을 선보임으로써 신체적 장애가 무용의 미학적 목표를 달성하는 데에 결코 제한으로 작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해 낸 사례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칸두코 댄스 컴퍼니가 추구해 왔던 이와 같은 접근 방식은 장애를 다양성이나 스펙트럼의 개념으로서 보는 것이 아니라, 완결된 정상성으로서의 육체를 선험적으로 가정해 놓고 그것을 향해 가거나 혹은 그것을 뛰어넘기 위한 방법론으로서 육체를 경주한다는 비판에 직면하기도 하였다. 앤 쿠퍼 올브라이트(Ann Cooper Albright)는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칸두코 댄스 컴퍼니의 지향점이 만들어내는 결과물이 관음증적 경계에서 위험하게 흔들릴 수밖에 없음을 지적한 바 있다.3 장애인 무용수의 탁월한 기량이 역설적으로 장애인 무용수의 몸이 가지고 있는 수동성을 부각시키고 차별을 가시화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비판은 안무가 제롬 벨(Jérôme Bel)이 극단 호라(Theater Hora)와 함께 작업한 〈장애 극장〉에서도 유사하게 작동한다. 극단 호라의 배우들은 연극 작업을 통해 이미 훈련받은 몸을 가지고 있음에도, 지적장애를 가진 무용수로서 무대 위에 올라 스스로를 고백하거나 자신이 좋아하는 춤을 추는 장면을 통해 간단하게 대상화되어 버릴 수 있는 위험을 가진다. 〈장애 극장〉에 등장하는 무용수들은 탁월한 신체적 기량을 선보이는 대신 본인의 개별성을 드러내는 연출적 맥락 안에 들어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 공연에는 비교 대상이 될 수 있는 비장애인 무용수가 존재하지도 않고, 안무에 의해 상정된 신체적 완결성을 떠올리게 하는 격렬하고도 어려운 ‘무용적’ 동작들이 있는 것이 아님에도 그러하다. 따라서 많은 사례에서 보이듯, 작품 안에서 장애를 ‘장애로서’ 다루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비장애의 반대급부’로서의 장애를 가시화하는 결과를 초래할 위험성을 언제나 가진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초점을 조금 옮겨 볼 필요가 있다. 과연 장애가 무용에 주는 가능성은 무용수들 몸 위에 흐르는 낯섦들, 그 생경함을 무대화함으로써만 창발되는 것인가? 2024 SPAF에서 (멀게든 가깝게든) 장애와 연결된 두 무용 작품, 〈침묵 속에 기록된〉과 〈카메라 루시다〉는 장애 자체를 무대 위에 올려놓는 대신 그것을 경유하는 방식으로 작업의 지향점들을 선보인다. 〈침묵 속에 기록된〉은 비가시화되었던 청각장애 원폭 피해자들의 이야기들을 꺼내면서 청각을 벗어나서도 공연을 감각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을 고민한다. 이 작품에서 청각장애는 서사를 이끌어나가기 위한 중요한 주제로 작동하기도 하지만, 또한 극장에서 공연을 관극하는 감각의 방식을 고민하는 일종의 방법론이기도 하다. 관객들은 무용수의 몸과 겹쳐있는 스크린과 그 너머의 몸, 진동이 울리는 우저 스트랩 등을 통해 다양한 몸의 감각들을 상상해 볼 수 있다. 이 작품에서 작품의 주제는 이야기이자 동시에 그것을 전달하는 감각의 방법이다.

〈카메라 루시다〉는 발달장애를 가진 무용수들과 무대를 만들기 위해 여러 가지 장치를 동원하면서 극장이 가지고 있는 신경전형성과 폐쇄성을 해체하고자 한다. 이 공연에서 관객은 무대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앉아 눈만 남기는 환영 연극의 관람자가 아니라, 무용수들을 안내하고 이끌면서 공연 공동체를 구성하는 일원이 된다. 이 과정에서 〈카메라 루시다〉가 공연의 이면에서 은근히 지적하고 있는 것은 반드시 실패할 수밖에 없는 안무의 역설이다. 무용수가 특정 시점에 특정 동작을 수행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인다면 무대는, 혹은 관객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 신경전형적인 안무가 무대를 상정하지 못한다면 무대가 성취/실패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프로젝트 이인의〈카메라 루시다〉는 이와 같은 질문을 통해 장애를 작품의 평면적 주제로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극장의 구조 자체를 고민할 수 있는 경유 지점으로 위치시킨다. 단순히 낯선 몸의 형상이기 때문에 거기서 어떠한 미학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실패할 수밖에 없는 국면들을 활용해서 극장의 환영을 부수는, 형상의 재고가 아닌 방식의 재편으로써 공연의 감각을 재정의하는 것이다.

2024년 SPAF는 〈침묵 속에 기록된〉이나 〈카메라 루시다〉 이외에도, 다양한 작품들을 통해 ‘새로운 서사’들을 촉발하고자 하였다. 낯선 중동 여성의 이야기들을 통해 가부장적 체계를 드러내고 해방의 목소리를 가시화하거나(〈우먼, 포인트 제로〉), 빛이 없는 세계에서 능동적으로 감각을 나누는 경험(〈커뮤니티 대소동〉), 식민주의적 역사 안에서 가려졌던 폭력을 드러내는 이야기(〈새비지 콜로나이저〉)와 같은 것들이 축제를 구성함으로써 SPAF는 지금의 공연예술이 바라보는 동시대적 관점들을 공유하는 자리가 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침묵 속에 기록된〉과 〈카메라 루시다〉와 같은 무용 작품은 ‘마주하는 시선’으로서 장애를 이야기하지만, 장애 자체를 평면적으로 가시화하거나 그 형상을 문제화하기보다 그것을 경유하는 방식으로 그 너머를 보고자 한 작품들이다. 이를 통해 장애가 다양성과 포용성의 관점에서 극장 밖의 접근성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감각을 일깨우고 극장의 구조를 넘어서는 작품적 맥락으로 만들어질 수 있었다. 동시대 공연예술 축제의 역할은 바로 이 ‘시선’들, 비/장애의 형상의 문제가 아닌 새로운 미학의 가능성들을 제안하는 일이 되어야 할 것이다.

 


1 2024 서울국제공연예술제 〈카메라 루시다〉 작품 설명에서 인용. “신경다양성의 개념은 흔히 ‘온전치 못한’ 것으로 여겨지는 몸들의 신경학적 특성들, 예컨대 기분장애, ADHD, 자폐스펙트럼장애, 난독증 등을 정상과 비정상의 병리학적 이분법 너머에서 ‘다름’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가능성을 연다. 신경다양성의 관점에서 연극을 되돌아 보는 이 작업에 우리는 “돌봄의 시학”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제각각 불완전하고 유한한 존재들인 우리에게 돌봄은 도덕적인 책무나 윤리적인 당위이기 이전에 ‘우리’의 존재론적인 조건이자 가능성으로 주어진다.” 링크.
2 라틴어로 ‘찌름’이라는 뜻으로, 롤랑 바르트가 『밝은 방』에서 스투디움(stúdĭum)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제시하였다. 스투디움은 문화기호학적으로 통용되는 사회적 기호들에 의해 작품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을 의미하는 반면, 푼크툼은 개인의 취향이나 경험에 의해서 다가오는 강렬한 충격와 여운의 감정을 의미한다.
3 Ann Cooper Albright, Choreographing Difference: The Body and Identity in Contemporary Dance, Wesleyan University Press, 1997, p. 79.

 

미나미무라 치사토, 〈침묵 속에 기록된〉

2024.10.17.(목) – 10.18.(금) 19:30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예술감독/출연 미나미무라 치사토
애니메이션 데이브 패커
조명 및 프로덕션 디자인 존 암스트롱
소닉 아티스트 대니 브라이트
진동촉감전문가 데이비드 보비어, 짐 럭스턴 (VibrafusionLab)

수어 표현 예술 전문가 테츠야 이자키
수어 멘토 스티븐 웹
프로듀서 마이클 키친
사진 마크 픽설
후원 잉글랜드예술위원회, 캐나다예술위원회, 영국 사사카와 재단 및 영국문화원

협력/파트너 비브라퓨전랩, 팬쇼, 오벌하우스 극장, 디클링 미술관+공예 박물관, 커스핀크, 댄스프롬잉글랜드(패브릭)
고마운 분들 보노 마유미(국립정보학연구소), 가네코 마미, 쿠로카와 토모에, 나카가와 후미에, 오야 스스무, 아와지 후쿠로노 사토 양로원
자막제공 (재)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자막번역 이지민

프로젝트 이인 x 캐나다 내셔널액세스아트센터, 〈카메라 루시다〉

2024.10.26.(토) – 10.27.(일) 15:00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공동창작/출연 앨리샤 모리슨, 도믹스 라운드, 제임스 실콕, 멕 오사다
안무/연출 라시내, 최기섭
조연출 최희범
조명디자인 공연화
사운드 카입

음향감독 김성식
영상감독 임정은
무대감독 이영규
의상디자인 정호진
포용성, 접근성 감수 캐시 M. 오스틴

음성해설 구자혜
NaAC 크리에이티브 프로듀서 애슐리 브로더
NaAC 크리에이티브 어시스턴트 캐시 홈즈
협력 프로듀서 이호연
책임 프로듀서 장수혜

공동제작 프로젝트 이인, 캐나다 내셔널엑세스아트센터
기획 커넥티드에이
후원 문화체육관광부, 캐나다 정부/주한 캐나다 대사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캐나다문화예술위원회,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
캐나다 레지던시 지원 디사이디들리 재즈 댄스웍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