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얼굴:
임시극장 〈메모리를 위한 라이트 로딩 프로세스〉

 

ⓒ Studio UM

 

며칠째 한 남자의 얼굴을 생각하고 있다. 그는 깊은 동굴 속에 있다. 어딘가에서 드리우는 빛이 그 동굴 세계의 윤곽을 밝히고 벽면에는 그림자의 향연이 펼쳐지며 어둠에 잠긴 사람들은 별세계에 넋을 빼앗긴다. 남자는 그 빛의 관리자다. 보여야 할 것에 빛을 쏘고 보이지 않아야 할 것에 그늘을 드리운다. 장면에는 리듬을 부여하고 인물에는 호흡을 불어넣는다. 비록 미약한 한숨에도 스러질 모조 세계에 불과하더라도 그는 임시적인 권능을 누린다. 사람들이 무엇을 보고 보지 않을지를 가름하고 어떤 이야기를 믿게 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권능을. 새삼스러운 구석이 하나도 없지만 이 동굴 세계의 다른 이름은 극장이며 빛의 관리자에게는 조명감독이라는 직함이 붙어 있다.

그러나 이 ‘작은 것들의 신’에게도 예외 없이 시간은 지나가고, 극장만큼이나 늙수그레해진 남자의 앞으로 자의 반 타의 반의 은퇴가 들이닥친다. 마지막 출근일을 맞이한 남자는 언제나처럼 조명을 꼼꼼하게 점검한다. 콘솔 시스템의 ‘급진적인 업데이트’로 인해 다음 조명감독은 채용되지 않을 예정임을, 아무리 모든 것을 예비해도 극장에서는 항상 예측을 뛰어넘는 사고가 발생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 그렇게 한다. 극장의 곳곳이 차례로 빠르게 밝아졌다 어두워진다. 바텐, 분장실, 오퍼실, 캣워크, 갤러리, 블루라이트, 객석, 무대… 떠올랐다 가라앉은 자리마다 따듯한 온기가 잠시 머물다 식어가는 것은 그가 이제는 사라져가는 텅스텐 할로겐램프를 여태 간직한 조명감독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남자에게는 한 가지 믿음이 있다. 빛은 아날로그적인 존재라는 것. 빛은 열기를 내뿜어야 한다는 것. 열을 내는 만큼 조명기는 정직하게 피로해져야 하고 발열에 의해 표면의 할로겐이 증발하는 만큼 필라멘트가 삭아야만 한다는 것. 요컨대 남자는 무언가를 밝히기 위해서 다른 무언가가 타버려야만 한다는 것을 아는 조명감독이다. 하나의 믿음을 구축하기 위해서 반드시 또 다른 물리적 실체가 삭아 끊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고 믿는 조명감독이다.

남자에게 낯선 이가 다가온다. 너무도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으면서 자신을 새 콘솔이라고 소개하는 그는 자신이 이미 기존 콘솔에 들어있는 ‘메모리’ 연동을 모두 마쳤다고 밝힌다. 그뿐만 아니라 콘솔은 더 세밀하고 빈틈없는 조명 시뮬레이션을 위해서 조명감독이 가지고 있는 모든 ‘메모리’를 요구한다. 여기서 ‘메모리’는 두 가지 맥락으로 사용된다. 하나는 조명콘솔에 기록된 정보이자 그 기록의 절차 — 즉 조명이 켜지고 꺼지는 타이밍과 속도, 정도를 동일하게 반복할 수 있게끔 등록하는 일 — 이고 다른 하나는 남자가 이 극장에서 지나온 과거의 기억이다. 0과 1 외에도 ‘알 수 없음’이라는 새로운 옵션을 탑재했다는 이 신형 콘솔은, 전자의 ‘메모리’만으로는 미처 다 알 수 없는 오류 가능성까지 완전히 소거하기 위해 후자의 ‘메모리’, 즉 남자의 몸 안에 남은 기억을 학습하려 한다.

 

ⓒ Studio UM

 

시뮬레이션이 가동되자, 오로지 남자 한 사람을 위한 공연이 시작된다. 남자의 내면에만 간직된 기억을 펼친다는 점에서도 남자만을 공연의 유일한 배우이자 관객으로 삼는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남자는 자기도 모르게 이 연극의 배우가 되어 파편적인 장면들 속으로 들어간다. 〈고도를 기다리며〉의 블라디미르가 되고, 〈오이디푸스 왕〉의 오이디푸스가 되며, 〈리어 왕〉의 리어 왕이, 〈안티고네〉의 이스메네가, 〈바냐 아저씨〉의 바냐 아저씨가 된다. 동시에 같은 무대에는 그가 극장에서 살아냈던 인생의 장면들이 들쑥날쑥 누벼진다. 처음으로 극장에 들어서고 아내를 마주친 날이 지나가고, 뜬눈으로 새벽을 지새우며 불가능해 보이던 셋업을 해내던 밤이 지나간다. 연극으로부터 큰 상처를 입고 더 이상 무대에 서지 않기로 한 아내와의 갈등도, 그들의 세대와는 다른 연극을 하겠다며 대거리하는 딸과의 다툼도 지나간다.

이윽고 남자는 문제의 ‘선생님’ 앞에 도착한다. 먼 과거의 장면 속에서 선생님은 앳된 청년인 그에게 ‘알 수 없음’에 대해 가르치고 있다.

 

선생님   하지만 사람이 사람을 알 수 있니? 타인을 알 수 있니? 자신을 알 수 있니? 더군다나 무대 위라면 말이야. 우린 대본을 가지고 있지만 인물들은 한 치 앞을 모르잖아. 우리는 모른다고 생각하고 무대에 서야 해. (…) 이미 자신이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배우는 죽은 배우다. 배우는 계속 찾아 헤매야 해. 계속. 계속.

조명감독   그렇지만 그건 너무 힘든 일이잖아요.

 

선생님은 0과 1, 명전과 암전, 빛과 어둠만 알았던 그에게 ‘알 수 없음’의 회색지대를 알려준 사람이었다. 동시에 선생님은 누군가에게 돌이킬 수 없이 큰 잘못을 저지르고는 행적이 세상에 드러나자 목숨을 스스로 저버린 사람이기도 했다. 선생님은 ‘알 수 없음’을 알려주었을 뿐 아니라 스스로 ‘알 수 없음’ 그 자체가 되어 광활한 회색지대 너머로 사라져 버렸다. 그 이후로 남자는 그에게 남은 세월을 어두운 객석에서 무대의 밝기를 조정하고 관리하며 늙어왔다. 무대의 빛을 알맞게 결정하면서, 어떤 가상의 세계를 면밀하게 구축하면서, 그러기 위해 정교하게 짜인 ‘메모리’를 끝없이 축적하면서.

그러나 조명을 ‘메모리’한다는 데엔 어떤 역설이 있다. 그 말은 이상하게도 망각을 전제한다. ‘메모리’한다는 것은 하나의 장면이 해결되었다는, 장면에 꼭 맞는 빛의 호흡을 찾아냈다는, 따라서 다음 장면으로 지나갈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메모리 된 큐는 반복 가능하고, 반복 가능한 것은 더 이상 우리를 멈춰 세우지 않는다. 조명은 정확한 타이밍에 꺼졌다가 켜지고, 배우는 퇴장한 뒤 일정한 속도로 다시 등장하며, 공연은 그러한 일련의 약속들로 말미암아 오류를 최소화하고 갈등을 매듭짓고 미래로 나아간다. 그것은 극장의 작동 방식이면서 남자가 삶을 살아온 방식이다. ‘메모리’했다는 것은 할 만큼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기 위해 이제 지나가기로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 알았다는 말, 다 안 것으로 하자는 말, 그러므로 잊어버리자는 말, 떨쳐 잊어야 한다는 말을 의미한다.

 

ⓒ Studio UM

 

하지만 어떤 기억들은 그렇게 깨끗하고 손쉽게 넘어가지지 않는다. 신형 콘솔이 조명감독에 요구한 ‘메모리’, 즉 기억이란 쇼파일로 간편하게 저장하고 넘어갈 수 있는 정보가 아니라 끝내 등록될 수 없는 파편들, 지나가지지 않고 남아 있는 단면들, 그리하여 거듭 다시 살게 되는 장면들이다. 선생님의 자살, 아내와의 갈등, 끝내 이해할 수 없는 채로 나란히 ‘고여버린’ 동료들의 매너리즘, ‘제대로 된 연극’을 둘러싸고 나누는 딸과의 논쟁처럼, 그의 내면에서 어떻게 해도 이해할 수 있는 모습으로 해소되지 않고 부유하는 이 장면들은 끝내 조명감독의 내면에서 삭제되지도 업데이트되지도 않으면서 거듭하여 다시 상연된다. 오류를 줄이기 위해 솎아지는 결정들이 아니라 언제까지고 해결되지 않음으로써 계속 이 삶에 머무르는 미결정으로 남아 무대에 계속해서 되돌아온다.

이제 남자는 비로소 자신의 삶이라는 무대 위에 올라 “한 치 앞도 모르”는 배우가 되어 이해해 보고 싶어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을. 삶이 다 가도록 알 수 없었던 것을. 주어진 대본을 잃어버린 채 이 연극의 결말을 찾아 계속해서 헤매면서. 계속… 계속… 그렇지만… 이제는 지난날의 선생님만큼이나 나이를 먹었을 늙고 남루한 남자가, 평생을 바친 극장에서 내쫓기기 직전인 지치고 슬픈 남자가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건 너무 힘든 일”이 아닌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는 일, 그것은 죽을 만큼 힘든 일, 죽기보다 힘든 일, 그래서 누군가는 자기 삶을 죽음 속으로 처박기까지 하는 일이 아닌가? 왜 그토록 혹독하리만치 끝없이 알 수 없어야 하는가? 그것이 대관절 우리에게 어떤 진실을 비추어주기에?

이 쓸쓸하고 애달픈 조명 시뮬레이션이 남자에게 비추어주는 진실은 다음과 같다. 그가 알 수 없는 것을 이해해 보기 위해 끝까지 찾아 헤매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들은 알지 않기로 한 채 다음으로 넘어오는 방식으로 살아왔다는 것. 어떤 것을 밝히기 위해 다른 무엇을 힘써 외면하기로 하며 그것들을 어둠 속에 떨쳐두고 왔다는 것. 가상 세계의 어떤 장면을 계속해서 밝히기 위해 삶의 다른 중요한 것들이 삭고 닳아 끊어질 때까지 내버려두었다는 것. 그러나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미처 다 알 수 없었을 것들 앞에서 이제 와 바꿀 수 있는 것 또한 많지 않으리라는 것.

남자는 희미해져 가는 빛을 느끼며, 서서히 다가오는 어둠을 감지하며 탄식한다.

 

조명감독   이해할 수 없었던 사람들을 이해해 보고 싶어. 이해할 수 없었던 순간들을…
너무 늦은 사과도 너무 이른 결심도
조바심에 알 수 없음을 선택하지 못했던 그 시간으로 되돌아가고 싶어.

 

긴 암전으로 마무리되는 이 공연의 마지막 장면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면 좋을까? 어쩌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남자의 몸이 서서히 어둠에 잠겼다고. 거대하고 문제적인 오류로, 뒤떨어지고 한물간 구태로 새로운 콘솔의 데이터에 입력되었다고. 극장에서 다시는 반복되어서는 안 될 실수로서 미래의 극장에 ‘메모리’되었다고. 혹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자신의 선생님이 그랬듯이 그 또한 그늘진 곳으로 도망쳐 들어가 버린 것이라고. 애써 피하고 싶었던, 그렇게 해서 쌓게 된 장면들과 기억들로부터 끝내 등 돌린 채 고독하고 무력하게 사라진 것이라고.

그러나 빛이 지나가는 자리에 서서히 가라앉는 남자의 마지막 얼굴을 본 나는 어쩐지 이렇게 말하고 싶어진다. 이제 그는 자신이 알던 것과는 사뭇 다른 것을 무대에 드러내기 위해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고. 끝내 비추지 못했던 장면에 뒤늦은 빛을 보내기 위해 스스로 삭아 끊어지기로 했다고. 평생을 바쳐온 아름답고 연약한 모조 세계와 그런 방식으로 작별하기로 했다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애써 이해해 보려는 얼굴, 그러느라고 너무 늦게 도착한 사람의 표정, 부신 빛에 하염없이 구겨진 미간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기지 않고 부릅뜨이는 두 눈, 그런 눈가에만 잠시 어리는 일말의 진실됨만을 데스마스크처럼 남겨두고서.

 

ⓒ Studio UM

 

〈메모리를 위한 라이트 로딩 프로세스〉

2026.3.28.(토) – 4.5.(일)
평일 20:00, 주말 16:00
서울연극창작센터 서울씨어터 101

배우 윤상화 이유라
김수려
연출 최현비
조연출 변승지
무대감독 서수현
무대크루 문홍식 손용석
조명 김수려
조명 프로그래머 최예원
조명 오퍼레이터 고민주
조명크루 고민주 장하랑 전의준 최예원
음악 홍석영
사운드 목소
음향 오퍼레이터 정한별
자막제작 이정근 최현비
자막 오퍼레이터 최현비
영상 장비 엠투비주얼
PD. 그래픽 이정근
접근성 매니저 박소희
홍보사진 스튜디오 음
기록영상 김지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