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템포러리 특급 살인: 춤을 쫓는 탐정들
조형빈
권령은, 〈swallow swallow quick quick〉 ⓒ 곽민석
애거사 크리스티(Agatha Christie)의 소설 〈오리엔트 특급 살인〉은 폭설에 고립되어 멈춰버린 기차 안에서 벌어지는 밀실 살인을 다룬다. 살해된 미국인 라쳇은 폐쇄된 공간 안에서 수차례 칼에 찔린 채 발견되었고, 우연히 오리엔트 특급 열차에 타고 있던 탐정 에르퀼 푸아로는 다양한 국적과 직업을 가진 열두 명의 승객 가운데 범인을 밝혀내는 임무를 맡게 된다. 푸아로는 눈 속에 멈춰버린 열차 안에서 탐문을 진행하면서 살인을 저지를 만한 관계성을 가진 용의자들을 발견하지만, 동시에 곳곳에서 발견되는 새로운 증거들과 다른 승객들의 증언은 범인의 정체를 계속해서 알 수 없게 만들어버린다. 어떤 것도 논리적으로 연결되지 않는 상황에서 푸아로는 과거에 있었던 어떤 비극적인 사건이 이번 살인 사건과 연결되어 있음을 추리해 내고, 과거의 사건으로부터 이어진 인연들이 하나둘 드러나면서 범인의 정체는 독자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형태로 승객들 앞에 드러난다.
흥미로운 것은, 범행이 밀실에서 이루어진 것뿐만 아니라 수사 역시도 갇힌 공간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고립된 기차에 언제 구조대가 도착할지 기약이 없는 상황이므로 이 사건은 탑승객 각자의 신분과 증언을 증명해 줄 수 있는 경찰이나 외부의 힘이 개입할 수 없는 완벽한 밀실 살인이면서, 동시에 범인을 추적하는 푸아로 역시도 오로지 승객의 증언만을 토대로 범인을 밝혀내야 하는 구조 안에 놓여있다. 범인은 대담하게도 푸아로의 객실 문을 두드린 후 복도 끝으로 사라지는 주홍색 잠옷의 실루엣을 슬쩍 보인다든지, 범행 현장에 서로 어울리지 않는 파이프와 사치스러운 손수건을 함께 남기는 방식으로 푸아로의 추리를 줄곧 흔들어 놓는다. 결국 범인을 잡기 위해 탐문을 진행할수록 사건은 오리무중에 빠지고, 벌어진 일(살인)은 분명히 존재하면서도 벌인 사람(범인)은 존재하지 않는 기묘한 상황에 놓이고 만다. 너무나 비논리적이기 때문에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그러나 범인이 푸아로가 그렇게 생각하게끔 의도했던 가설처럼, 범인은 열차의 창문으로 빠져나가 폭설이 내린 설산 속으로 사라져 버린 것일까?
여기 세 개의 무용 작품이 있다. 2025년 여름부터 가을에 걸쳐 올려진 이 공연들은 저마다 다른 주제를 선보이는 별개의 공연들로, 각각 북한춤, 우주로 보내는 춤, 지르박을 소재로 삼아 춤에 관해 이야기하는 작품들이었다. 정다슬은 최근의 작업들을 통해 연이어 들여다보던 ‘쓰인 것’으로서의 춤과 그것을 되살리는 춤의 존재론의 문제를 제기하고, 정지혜는 관객들이 직접 참여하여 춤의 형상을 만들어가는 방법을 통해 춤을 우주로 보내고자 한다. 또한 권령은은 한국에서 현대무용의 계보를 비틀어 춤에 대한 태도를 이야기하면서 ‘외부적 춤’을 동시대적 춤의 관점으로 승화시킨다. 이들 세 작품은 모두 다른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풀어가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들 작품 모두를 관통하는 하나의 커다란 질문을 발견할 수 있다. ‘춤이란 무엇인가?’
정다슬이 무보에 적힌 북한춤을 되살려냄으로써, 정지혜가 우주로 보내기 위한 춤의 표상을 수집함으로써, 권령은이 컨템포러리 댄스의 정의와 형상을 재해석함으로써 찾고자 했던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마치 밀실 살인의 범인을 밝혀내기 위해 수사를 진행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단서를 잃어버리는, 고립된 공간 안에서 이루어지는 어떤 형사의 탐문을 연상시킨다. 이들의 질문은 마치 춤이 ‘실종된’ 것처럼 사라져 버린 춤의 존재를 찾아내고자 하지만, 계속해서 발굴되는 증거들과 연이어 그것을 흐트러트리는 춤의 맥락은 동시대 춤의 형상을 불투명한 어떤 것으로 끊임없이 치환한다. 망실된 춤의 존재론, 지금 여기의 ‘탐정’들이 추적해 밝혀내고자 하는 춤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잃어버린 춤의 정체를 추적하는 이 세 작업은 ‘범인’의 간섭 속에서도 춤의 존재론을 밝혀내고자 하는 집요한 동시대적 시도이자 탐구다.
정다슬, 〈PINK: Published In North Korea〉 ⓒ 전소영
다잉 메시지
정다슬의 〈PINK: Published In North Korea〉(이하 〈PINK〉)는 북한의 춤 〈사관장과 전사들을〉 되살려 기록과 춤의 현존성(liveness) 사이에서 나타나는 균열을 드러내고, 이를 통해 춤에 대한 존재론적 질문을 던지는 작업이다. 이번 작업은 정다슬이 2023년 〈무용보읽기: 사관장과 전사들〉로부터 시작한, 기록된 춤을 현현하게 함으로써 춤이 쓰여질 수 있는지를 계속해서 되묻는 작업의 연장선상에 놓여있다. 작품들을 관통하고 있는 북한의 무용은 북한의 다른 예술들이 그러하듯, 체제를 선전하고 그로부터 인민의 삶을 ‘혁명적으로 교양’하고자 하는 목표를 가진다. 예술은 ‘당과 혁명에 복무하는 사상적 무기’로 표현되며, 이에 따라 정립된 몇 개의 북한 예술 기본서들은 대부분 완벽한 프로파간다로서 기능하는 예술의 구조와 역할에 대해 설파한다. 이런 흐름 안에서 북한은 1987년 2월 일반 문자 체계를 활용한 움직임 기록법인 ‘자모식 무용표기법’을 완성하기에 이른다. ‘자모식 무용표기법’은 춤의 동작을 기본적인 요소들로 나누고 그것을 부호화한 다음 자음과 모음의 결합 방식을 통해 움직임을 묘사하는 기록법으로, 〈PINK〉는 이 ‘자모식 무용표기법’으로 춤을 기록한 책, 인민배우 홍정화가 안무한 〈사관장과 전사들〉의 무보집을 춤으로 되살리는 작업이다.
정다슬은 줄곧 춤의 저장과 복원(다시-쓰기로서의 춤), 즉 안무(choreography)라는 개념의 의미가 기본적으로 ‘쓰기(-graphy)’라는 어원에 근거하고 있기에 발생할 수밖에 없는 춤의 특이성에 주목해 왔다. 춤을 소장하고 전수하는 것의 의미를 전시의 형태를 통해 전복적으로 들여다보고자 했던 2021년의 〈정다슬파운데이션 소장품전〉, 허구적 서사를 경유한 재현이 건드리는 춤의 본질은 무엇인지 질문한 2022년의 〈정다슬파운데이션 회고전: 기연 1951-1988〉, 그리고 ‘완벽한 형태로’ 저장된 무보집을 통해 일종의 ‘가상’(한국에게 북한이 미지의 공간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실재보다 가상에 가까울 것이다)을 재현한 〈무용보읽기: 사관장과 전사들〉에 이르기까지, 정다슬은 원본과 전혀 다른 결과물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춤의 재현이 가진 아이러니를 춤의 존재론으로써 날카롭게 지적해 온 바 있다. 이번 〈PINK〉 역시도 물질(무보집)로서 분명히 존재하지만 영상이나 다른 자료들이 모두 소실되어 누구도 원본의 정체를 알 수 없는 북한의 춤, 〈사관장과 전사들〉을 무보집에 표기된 움직임의 문자들을 하나하나 해석하고 연결함으로써 되살리고자 하는 시도다.
전시공간 윈드밀에서 입장한 관객이 맨 처음 맞닥뜨리는 것은 정다슬과 일곱 명의 무용수들이 함께 〈사관장과 전사들〉을 읽으며 그것을 해석해 낸 일종의 리서치 과정을 담은 영상이다. 무보 기호들이 가진 원리만 알고 있을 뿐 실제로 그것이 어떤 모습의 무엇을 전달하고자 하는 공연이었는지 알 길이 없는 상황에서, 여덟 명의 연구자들은 〈사관장과 전사들〉의 모습을 집요하게 추적한다. 무보에 적힌 움직임들을 박자로 변환하고, 몸의 각도, 시선의 방향, 팔과 다리의 변화를 하나하나 찾아나가는 영상 속의 이 ‘복원’의 과정은 마치 범인이 남긴 단서들을 분석하고 밝혀내는 수사의 과정을 연상시킨다. 자취를 감추고 사라진 범인처럼, 지금은 아무도 알 수 없는 공연의 실체를 밝혀내기 위한 집요한 탐구의 과정이 〈PINK〉의 전반을 차지한다. 아이러니한 것은, 놀라울 정도로 집요한 이 탐구의 과정에도 불구하고 〈사관장과 전사들〉의 많은 부분이 여전히 불확실한 안개 속에 감춰져 있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무보에 맞추어 동작의 세세한 부분까지 되살려 재현되고 있음에도 어떤 것들은 음악이나 극의 분위기를 통해 전달되어야만 하고, 모호하게 표현된 개별 동작의 연결 부분이나 추측으로만 알 수 있는 무용수들 사이의 관계성은 무보집에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영상이 끝난 후 관객이 이동하여 관람하게 되는, 7명의 무용수의 몸을 통해 ‘실연’되는 〈사관장과 전사들〉 공연은 이 ‘빈’ 부분을 상상력으로 채운다. 재창조된 음악과 새롭게 만들어진 의상에 맞추어 일곱 명의 무용수가 추는 〈사관장과 전사들〉은 그래서 인민배우 홍정화의 〈사관장과 전사들〉과는 전혀 다른 어떤 것이 된다. 관객의 눈앞에서 펼쳐지는 〈PINK〉의 공연은 기록으로서의 춤이 미래에 벌어질 퍼포먼스를 잠재하는 미래적 시제의 ‘쓰기’임을 암시함과 동시에, ‘재현’으로서의 춤이 끝끝내 불가능하다는, 다시 말해 그 어떤 퍼포먼스도 동일한 것이 될 수 없다는 춤의 존재론적 본질을 건드린다. 〈사관장의 전사들〉이 얼마만큼 프로파간다적인지, 정말로 사관장과 전사들은 ‘인민을 혁명적으로 교양’할 수 있었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PINK〉의 공연이 되살리는 것은 ‘쓰인’ 춤의 수수께끼를 끝없이 풀어내는 어떤 이미지들이다. 그리고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원본은 무보에 의해 완벽하게 복원된다 해도 여전히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남는다) 춤이 남긴 기록, 낱낱이 해체되어 무보의 기호들로 환원되어 새겨진 책 〈사관장과 전사들〉은 사라져 버린 춤이 실종되기 전에 남긴 마지막 흔적, 범행 현장에 남은 춤의 다잉 메시지와도 같다.
정지혜, 〈코스믹 댄스〉 ⓒ 정재필
증언
춤은 얼마나 ‘인간적일 수’ 있을 것인가. 정지혜의 〈코스믹 댄스〉는 보다 직접적으로 관객에게 춤의 모습에 관해 묻는다.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의 블랙박스 안에서 진행된 〈코스믹 댄스〉는, 가장 인간적인 것을 춤으로 정의하면서 만약 우리가 우주로 춤을 보낸다면 그 춤의 모습을 어떻게 정의 내려야 하는지 묻는 작품이다. 객석이 비워진 소극장 안에 들어서면 관객은 커다란 스크린이 한쪽 벽면에 설치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 스크린에는 중간중간 관객들이 직접 선택을 입력할 수 있는 QR 코드가 띄워지고, 그때마다 관객은 어떤 춤을 보고 싶은지(그리고 우주로 보내고 싶은지) 두 개의 선택지 중 하나를 골라 자신의 스마트폰으로 입력하게 된다. 관객의 다수가 선택한 선택지는 모두에게 고지되고, 극장을 끊임없이 돌아다니며 춤을 추는 두 무용수의 춤은 관객의 선택지에 따라 점점 변화해간다.
우주인, 즉 인류를 단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존재가 인류를 마주쳤을 때 보여주어야 하는 춤은 무엇일까? 〈코스믹 댄스〉가 스크린을 통해 관객에게 던지는 질문은 관객으로 하여금 춤의 개념과 형상에 대해 돌아보도록 한다. “어떤 춤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여러 차례 던져지는 이 질문에서 관객이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이야기/사건, 내부/외부, 작고 큰 것/크고 작은 것 등 개념적으로, 혹은 이미지적으로 묘사된다. 첫 질문이 제시되기 전 무대에 등장하여 마주 보고 있는 상태로 느리고 조용한 움직임을 이어가던 무용수들은 관객의 선택에 따라 춤을 변화시켜 나간다. 선택지에 따라 조명이나 사운드 역시도 변화하며, 무용수들의 춤은 극이 진행될수록 더 크고 다양한 움직임으로 확장된다. 그러면서 관객은 끊임없이 자신에게 되묻게 된다. ‘이것이 (내가 정의하는) 춤의 모습인가?’
두 가지의 선택지 중 하나를 택한 관객은 무용수들의 춤이 변화하는 것을 느끼지만, 또한 포기해 버린(혹은 다수결에서 밀린) 다른 선택지의 춤을 확인할 수 없다. 단 하나의 선택지들로 이어지는 춤의 변화를 바라보면서 관객은 춤이 상대적인 것이기보다 절대적인 형상으로 자리 잡고 있음을 느낀다. 그래서 〈코스믹 댄스〉의 춤은 역설적이다. 우주로 보내기 위한 춤을 만들기 위해 관객은 계속해서 어떤 선택을 만들어 나가지만, 여기서 춤의 정의는 확장되고 유연해지기보다 좁아지고 단단해진다. 우주인과 만나는 인간이 인류를 대표하는 ‘어떤’ 인간이 되는 것처럼, 우주로 보내야 하는 춤은 ‘어떤’ 춤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결국 〈코스믹 댄스〉의 모든 과정을 구성하는 것은 관객으로부터 촉발된 춤의 증언이며, 이 증언들은 관객이 지금 바라보고 있는 동시대 춤의 형상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이것이 정말 춤일까?’ 〈코스믹 댄스〉가 관객에게 부여하는 선택지들은 관객의 춤에 대한 인식을 깨우고 흔들어 놓는다. ‘우리는 춤을 통해 무엇을 가능하게 할 수 있나?’ 관객 모두가 일종의 고뇌하는 공동체로서 고민하는 이 춤의 정의는, 종국에 우리에게 있어 춤이 ‘어떤’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우치게 하는 트리거로서 작동한다. 춤은 그것 자체로 정의되는 만큼이나, 어떤 특정한 형상으로부터 끊임없이 탈주하려 하기 때문이다. 〈코스믹 댄스〉의 선택지들 가운데서 춤은 그것이 좁아지는 만큼, 매 순간 그 가능성들을 확장한다. 어떤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동시에 그것이 ‘왜’ 불가능한지 되돌아보게 만들기 때문이다. “어떤 춤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두 가지 선택지에서 탈락해버린 춤은 우리가 무엇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는지 우리에게 역으로 되묻는다. 이를 통해 확장되는 것은 춤에 대한 우리의 의식이다. 따라서 춤은 결코 머무르거나 고정되지 않는다는 것, 형상이나 개념으로 틀지울 수 없다는 사실이 마침내 우리가 우리 안에서 찾아낸 춤의 증언이다.
권령은, 〈swallow swallow quick quick〉 ⓒ 곽민석
알리바이
권령은의 〈swallow swallow quick quick〉(이하 〈스왈로우〉)는 보다 실질적이고 구체적으로 춤에 접근한다. 〈스왈로우〉에 등장하는 네 명의 무용수는 이 공연에서 한국 현대무용의 역사가 드러나는 여러 가지 장면들을 번갈아 보여준다. 이를 통해 현대무용, 혹은 ‘컨템포러리 댄스’라 불리는 어떤 특정한 형상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무용인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겪어봤을 춤에 대한 고민들이 곳곳에서 생생하게 드러난다. 현대무용이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스왈로우〉가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제도권 교육 안에서 어떤 특정한 형태를 지향하도록 훈련받은 무용가들에 의해 구성되는 개념이다. 네 명의 무용수는 2020년대 초 국내 대학 무용학과에서 이루어진 ‘컨템포러리 댄스’의 훈련 방식을 재구성하여 보여주거나, 1960년대와 2000년대, 그리고 2014년의 ‘컨템포러리 댄스 훈련법’을 서로 비교해서 보여주는 방식으로 지금의 ‘(한국)컨템포러리’가 가진 역사성을 추적해 나간다.
이 여러 시공간의 ‘현대무용’이 보여주는 것처럼, 춤은 언제나 문화적으로 구성된다. 〈스왈로우〉는 몸을 훈련하는 특정한 방식에서 출발하여 움직임을 구성하는 방법론을 거쳐 춤 그 자체를 사유하는 데에 이르기까지, 춤이 고정된 하나의 형식이나 법칙이 아니라 끊임없이 문화적으로 변화해 나가는 존재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지금. 〈스왈로우〉는 ‘춤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맞닥뜨린 지금의 시공간에서 더 이상 어떤 ‘말’을 할 수 없게 된 상황을 지적한다. 지금의 춤은 동작과 리듬, 신체를 분절시켜 몸을 환원주의적으로 감각하는 방식을 통해서 구성되지도 않고, 움직임의 (개인적) 근원을 찾아내어 그것을 무용수 개인의 욕망의 발화로 연결시키는 피나 바우슈(Pina Bausch) 류의 방식으로 구성되지도 않는다. 〈스왈로우〉에 의하면 그것은 안드레 레페키(André Lepecki)와 같은 이론가의 ‘말’을 통해 개념화된다. 그리고 그 ‘말’들은 몸의 대화를 막는 벽으로 작동한다. 두 쌍으로 나뉜 무용수들은 〈코레오그래피란 무엇인가〉에 담긴 문장을 하나씩 말한 뒤, 책을 사이에 두고 진한 키스를 나눈다. 두 몸이 서로를 끌어안고 서로를 바라보고 있지만, 무용수의 입과 입 사이에는 물리적 장애물인 책이 몸의 소통을 가로막는다. 몸이 서로를, 혹은 무용을 더 갈구하면 갈구할수록, 책으로 상징되는 ‘말’은 그 갈구를 더욱 실현 불가능한 것으로 만든다. 무용수들의 포옹이 더 농밀하고 격렬할수록, ‘말’에 의해 몸은 점점 더 멀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우리는 몸을 가로막는 ‘말’ 앞에 몸을 포기하고 주저앉고야 말 것인가? 안드레 레페키, 그리고 〈코레오그래피란 무엇인가〉로 대변되는 ‘말’의 개념적 난감함, 몸의 교통을 가로막는 이 단단한 장벽은 〈스왈로우〉의 끝부분에서 지르박 춤을 통해 해소된다. 어떤 제도에도 속하지 않았기에 ‘자유롭게’ 발전해올 수 있었던 춤, 택시기사로부터 우연히 전해 들었다고 하는 이 춤의 탈출구는 공연의 후반부에 마치 정언 명령처럼 떨어지는 강령들, 모든 춤은 “오리지널”이고 “공동의 산물”이며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춤의 과제들을 기꺼이 만족시킨다. 그동안 한국의 현대무용이 ‘삼켜온(swallow)’ 개념들, 제도권 교육이 강제했던 몸의 훈련법에서 출발하여 개념적 난해함 앞에서 맞닥뜨린 비언어 매체로서의 번역 불가능성들은, 지르박을 추는 몸 위에서 (그것이 춤의 개념들을 모두 만족시킨다는 점에서) 하나로 뭉쳐지고 (지르박의 감각 아래 모든 ‘말’들이 무의미해진다는 점에서) 이내 흩어진다. 트로트풍의 음악에 맞춰 지르박을 춤추는 네 명의 무용수는, 결국 그렇게 우리에게 ‘춤이 무엇인지’ 다시금 상기시킨다. ‘현대무용’이라는 제도적 개념이 춤에 덧씌운 여러 제약들이 우리를 춤으로부터 멀어지게 했으나, 그 개념들을 삼켜냄으로써 우리가 직시한 것은 지르박의 리듬 위에서 흐르는 몸 그 자체다. 여기서 지르박이 재현하는 춤의 진정성(authenticity), 움직이는 몸의 감각들은 개념 아래 사라져 버린 춤의 형상 너머로 춤이 지켜온 그것의 알리바이다.
정지혜, 〈코스믹 댄스〉 ⓒ 정재필
대단원
각각의 공연은 저마다 다른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하지만, 이들에게서 찾아낼 수 있는 공통점은 모두가 ‘춤이란 무엇인가’를 질문하고 있다는 점이다. 세 작품이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이제 춤은 어떤 한 단어나 한 개념으로 정의 내릴 수 없는 것이 되었다. ‘현대무용’이라는 개념의 측면에서 춤은 예전보다 더 많은 것을 포용하고 더 많은 가능성에 열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모든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는 뜻과도 같을 것이다. 만약 춤이 세상의 진리 속으로 스며들어 세계의 유일원칙이 되어버린 것이 아니라면, 지금 우리에게 춤은 무엇일까? 그것은 언제, 어디로 사라져 버린 것일까? 우리는 왜 춤을 움켜잡을 수 없으며, 그 어떤 것도 ‘춤적’으로 평가받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 춤의 망실, 춤의 실종이 바로 지금 우리가 맞닥뜨리고 있는 사건의 현장이다.
세 작품, 〈PINK〉와 〈코스믹 댄스〉 그리고 〈스왈로우〉는 바로 이 춤의 실종을 탐문해 나간다. 에르퀼 푸아로가 승객들을 하나하나 소환하여 사건의 진상에 다가가듯 이들 작품은 춤의 실종이 어디에서, 왜 일어났는지, 그리고 그것을 잃어버리게 한 것은 누구인지 면밀히 조사한다. 춤의 실종이라는 사건 현장에 남은 알리바이, 그것이 있었다는 사실을 증거하는 시뮬라크르(simulacre)로서의 ‘무보집’은 〈PINK〉에서 〈사관장과 전사들〉의 실체를 밝히는 중요한 증거물이다. 무보집을 해석하고 ‘번역’하여 알리바이 너머에 잠든 춤을 깨우는 치밀하고 고된 노력은 춤과 기록의 관계를 탐구함으로써 동시대 춤의 정체를 추적한다. 춤은 기록되어 저장될 수 있는가? 혹은 다른 곳으로 전수되어 되살려질 수 있는가? ‘재현된’ 춤은 ‘그’ 춤과 동일한 것인가? 이 질문들은 당대적 춤의 과제가 육체적이고 물리적인 운동성을 재현하는 것을 넘어서, 역사와 수행성을 교차시키는 실험에 놓여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실종된 춤의 현장에서 발견된 이 알리바이는 춤에 대한 매체적 질문이 춤의 실종, 그리고 그것을 불러일으킨 당대적 춤의 형상과 모종의 관계가 있음을 암시한다. 푸아로가 범행 현장에서 발견한 단서들, 여성용 흰 손수건과 파이프 소제기가 범인을 특정할 수 없게 만드는 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음에도 결국 열차 승객들 사이에서의 관계성을 발견했던 것처럼, 〈PINK〉는 상관없을 것 같은 북한의 춤과 2026년 한국의 몸을 연결 짓고자 시도한다. 탈각되거나 생성되는 춤의 단서를 집요하게 쫓는 과정에서 〈PINK〉에서 벌어진 공연은 특정한 감각이나 서사를 불러일으키는 무용 공연이라기 보다 춤의 매체성을 이미지적으로 전시하는 퍼포먼스에 가까워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관장과 전사들〉은 ’재현’된 형상을 통해 사라져버린 춤을 집요하게 쫓는 탐문의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춤의 실종을 쫓는 과정에서 맞닥뜨리는 혼란은 다른 두 공연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코스믹 댄스〉에서 겹겹이 주어지는 두 개의 선택지들은 (그것이 이분법적 선택이라는 단단한 틀 안에 있다는 것을 떠나서도) 춤에 대한 우리의 사고가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지를 고민하게 함으로써 관객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관객이 순간순간 내린 선택은 공연에서처럼 춤의 형상을 확실하게 좁히는 대신, 오히려 춤이 무엇이 ‘될 수 있는지’ 생각하는 관객의 인식 속에서 그 가능성을 확장한다. 여기에서 주어지는 선택지들은 춤의 실종 아래 관객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단서에 가깝다. 춤이라는 (고정된) 형상이 이미 사라진 지금에 춤의 형상을 ‘선택’하는 것은, 이미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음에도 어떤 것을 ‘판단’하게끔 만드는 역설적 장치다. 춤의 형상과 성격을 설정하는 이 선택들은 마치 푸아로에게 진실을 감추고 처음 듣는 일인 양 시치미를 떼는 용의자들의 증언과도 같다. 따라서 이 거짓 증언들과 대치하는 관객의 춤에 대한 상상력은 오히려 새로운, ‘진실된’ 춤의 증언을 구성하게 된다.
〈스왈로우〉가 펼치고 있는 이야기는 그렇다면 춤이 어떻게 실종되었는지, 한국 춤의 역사적 시간성 안에 그것이 어떻게 개념화해 왔는지를 보여주는 춤의 알리바이다. 푸아로가 용의자들을 탐문하는 과정에서 마주친 이야기들처럼, 춤의 알리바이는 서로 엇나간다. 푸아로가 사건 시간에 목격한 주홍색 잠옷을 입은 여성의 뒷모습은 옆 칸에 머문 나이 많은 부인에 의해 부정되었고, 영국인 하인은 사건이 일어난 밤 새벽까지 어떤 소음도 듣지 못했다는 알리바이를 댔다. 〈스왈로우〉가 현대무용의 정체를 추적하는 이 공연에서 움직임과 리듬을 분절함으로써, 혹은 개인적 욕망으로부터 움직임의 동인을 찾음으로써 무용을 만들어내는 방식들은 서로 다른 춤의 모습을 제시한다. 이 상충되는 알리바이들은 춤의 형상을 흐릿하게 만들고, 종국에는 현재 한국의 현대무용이 어떤 상황에 빠져 있는지 그것을 재구성한다. 말에 의해, 개념적으로 정의되는 춤은 동작적이고 구성적인 안무들과 배치(背馳)되고, 표현으로서의 춤, 감정으로서의 춤은 서로 엇나간다. 그것은 마치 푸아로의 객실에서 고이 접힌 채로 발견된 주홍색 잠옷처럼 탐문하는 ‘탐정’들과 관객을 농락하는 것처럼 보인다. 결국 이 혼란이 가 닿는 곳은 ‘춤의 실종’이라는 사건이다. 서로 완벽하리만치 엇나가고 보완하는 알리바이들을 통해 푸아로가 의심했던 것처럼, 관객은 공연의 말미에 그것이 ‘정말로 사라졌는지’를 고민하게 된다. 그리고 이 고민을 해소하는 것은 어쩌면 지극히 ‘현대무용적’인 춤, 지르박의 형상이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을 던져볼 수 있을 것이다. ‘춤은 왜 사라졌는가?’ 여러 안무가들이 이 공통적인 질문에 관심을 기울이는 지금의 현상은 징후적이다. 예술이 언제나 관습으로부터 발생한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그것을 이어 나가거나 그것에 맞서기 위해 예술은 언제나 관습을 필요로 한다. 춤이 지금에 실종되었다는 사실은 이 관습의 문제와 관련된 일종의 사건이다. 육체적이고 물리적인 차원에서의 춤, 어떤 것을 대리하는 것으로서의 춤, 구상과의 단절을 선언한 뒤 오직 추상을 무용수(안무가) 본인과 동일시하는 춤, 이러한 근대적 춤의 양상들이 한국의 춤을 관통해 온 역사가 있다. 이 가운데에서 근대적 형상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춤들은 춤으로부터 배제되었고, 춤이지만 춤이 아닌, 춤을 잃어버린 춤들이 지금의 춤을 구성하게 된 것이다. 기한이 만료되어 버린 근대적 춤의 형상들을 거부함으로써 생겨난 공백들, 쉽사리 채워지지 않는 이 공백들과 함께 분투하는 일련의 안무가들이 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안무가들은 지금에 묻는다. 춤은 도대체 무엇이냐고. 하지만 춤의 실종은 그것이 정말로 눈 속으로 발자취 없이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보다, 왜 지금에 그 질문이 발생했느냐는 점을 더욱 주목하게 만든다. 무엇이, 어떤 안무가들로 하여금, 춤을 추적하게 만들었는가. 그리고 그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남기는가.
〈오리엔트 특급 살인〉의 결말은 푸아로가 열두 명의 탑승객을 모두 모아놓은 자리에서 밝혀진다. 모두가 용의자이면서 모두가 결백한 이 상황에서, 푸아로가 제시하는 것은 두 가지 가설이다. 첫 번째 가설은 살인을 저지른 범인이 폭설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는 것. 그리고 두 번째 가설은 열차에 타고 있는 열두 명의 승객이 모두 과거의 한 사건에 연루되어 있었고, 이 열차에서 살해당한 사람에게 원한을 품고 모두가 살해에 가담했다는 것. 〈오리엔트 특급 살인〉의 이야기는 벌을 받아 마땅했던 피살자의 과거가 낱낱이 밝혀지면서 사건의 진실을 세상에 알리지 않는 것으로 마무리되지만, 결국 이 이야기는 모두의 증언과 알리바이가 서로 어긋나면서 범인은 어디에도 없고 그것을 밝혀내는 것이 무의미해지는 상황으로 귀결된다. 춤을 실종시킨 것은 누구일까? 그것은 어디로 갔을까? 모호하고 불투명해 잡히지 않는 지금의 무용은, 오히려 춤이라는 것이 무엇으로 정의되는지 그것의 개념을 가지고 싸우기 시작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춤이 잃어버린 것이 무엇이고 누가 그것을 잃어버렸는지 같은 것들이 아니다. 잃어버린 춤을 되찾고자 하는 이들 ‘탐정’들이 밝혀내고자 하는 것은 그래서 어떻게 춤을 새롭게 구축할 것인지의 여부다. 근대적 춤이 만료된 시대에 우리가 ‘출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공백의 자리에서 춤과 몸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은 어떤 춤을 통해 이뤄질 수 있을지, 세 작품은 바로 이 질문을 우리 앞에 전면적으로 투사하는 동시대 무용의 징후적 사건이다. ![]()
정다슬, 〈PINK: Published In North Korea〉 ⓒ 전소영
정다슬 《PINK: Published In North Korea》
2025.8.15.(금) 오후 7시
2025.8.16.(토) 오후 3시, 7시
윈드밀
컨셉/안무 정다슬
드라마투르기 권태현
리서치 유지영, 임은정, 정다슬, 주혜영
발전/퍼포먼스 강호정, 박유라, 박주현, 송명규, 유지영, 임서희, 주혜영
영상 백종관
편곡 김현수
무대 이신실
무대 어시스턴트 김성빈
사진 기록 전소영
영상 기록 삼인칭시점
그래픽 디자인 슈퍼샐러드스터프
프로덕션 매니지먼트 강유진
프로덕션 어시스턴트 천주연
주최/주관 정다슬파운데이션
후원 서울특별시, 서울문화재단
『사관장과 전사들』
안무 인민배우 홍정화
작곡 김동철
표기 주암금, 김혜숙
정지혜 〈코스믹 댄스〉
2025.9.26.(금) 19:30
2025.9.27.(토) 15:00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안무, 컨셉 정지혜
리서치, 퍼포먼스 김기범, 정지혜
영상 AWF1/2
사운드 준도
조명 유성희
미디어 비쥬얼 장주희
기술 지원 신승백
무대감독 유창대
프로듀서 김옥경
프로젝트 매니저 김서하
그래픽디자인 유나킴씨
권령은 〈swallow swallow quick quick〉
2025.10.3.(금) 19:30
2025.10.4.(토) 16:00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안무, 글 권령은
리서치, 출연 김혜윤, 이민진, 이소여, 이재윤
드라마투르그 손옥주
음향 지미세르
조명 디자인 유성희
의상 자문 정호진
프로듀서 이호연
그래픽 디자인 차민경
영상기록 성승정
무대감독 유창대
주최 주관 권령은
후원 서울특별시 서울문화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