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치 댄스:춤에게 무엇을 요구해야 하는가?
조형빈
“2004년 7월 7일 더블린의 한 법정에서는 아일랜드 국제 무용 페스티벌을 상대로 민사소송이 진행되었다. 이 페스티벌이 초청한 프랑스 현대 안무가 제롬 벨의 〈제롬 벨(Jérôme Bel)〉(2005)이라는 작품이 알몸을 노출하고 있으며 외설적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이 작업은 사실 2002년의 같은 페스티벌에서 이미 선보인 적이 있다. 여러 절차상의 문제로 이 고소 건은 결국 기각되었지만 고소인 레이먼드 화이트헤드는 이 작업에 대한 불평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외설적 행위에 대한 혐의와 거짓광고 혐의를 엉터리로 버무려 페스티벌 주최 측에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그가 제롬 벨의 작업이 댄스 퍼포먼스에 속하지 않는다고 주장한 것이었다. 2004년 7월 8일자 기사에서 화이트헤드는 춤의 존재론에 대해 역설했는데 이는 키셀고프의 주장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이리시 타임』의 한 기사에 따르면 화이트헤드는 “춤이란 무용수들이 리듬감 있게 주로 음악에 맞춰 위아래로 뜀박질을 하며 관객에게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것인데, 제롬 벨의 공연에는 춤이라고 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는데도 페스티벌 측은 입장권의 환불을 거부했다”고 말했다.”
— 안드레 레페키, 『코레오그래피란 무엇인가』1
운동성 비판
안드레 레페키(André Lepecki)는 저서 『코레오그래피란 무엇인가』에서 아일랜드 국제 무용 페스티벌에서 있었던 일화를 소개한다. 내용에서 언급된 안무가 제롬 벨의 〈제롬 벨〉은 네 명의 무용수들이 등장하는 작품으로, 나체로 등장한 이 무용수들은 분필로 무대에 개인의 정체성을 암시하는 여러 가지 정보나 숫자들을 적다가 작품의 후반에 이르러서는 무용수가 무대에 소변을 보는 장면이 연출된다. 지금은 너무나 잘 알려진 작품이 되어 연출적 맥락이 머릿속에 쉽게 그려지기도 하지만, 벨이 이 작품에서 동원하고 있는 여러 장치들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쉽사리 환영받지 못하는 금기의 코드들을 포함하고 있다. 아일랜드 국제 무용 페스티벌을 상대로 소송을 건 고소인은 이와 같은 형태의 연출이 전혀 ‘무용적’이지 않음을 주장하며, 거기에 “춤이라고 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고 이야기했다.
레페키는 〈제롬 벨〉 소송 사건의 일화를 무용이 보여주는 새로운 징후, 근대성을 뛰어넘는 일련의 무용적 전환의 사례로 소개한다. 〈제롬 벨〉 뿐만 아니라, 벨 작품들의 대다수는 근대 이후로 우리에게 강요되어왔던 단일한 주체의 신화를 해체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그것은 하나의 몸 위에 파악하기 힘든 여러 가지 정체성을 덧씌우거나(〈셔츠올로지〉(shirtology, 1997)), 객체로 배제되었던 행위자들의 출현(〈베로니끄 두아노〉(Véronique Doisneau, 2004))같은 것들을 통해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벨이 짚었던 동시대적 ‘농당스(non-danse)’의 국면들이 가지는 의미들이 2000년대 이후의 무용 작업들에서 보여주는 미학적 가능성들을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과연 무엇이 무용적인 것인가?’라는 질문을 선결해야 할 필요가 있다. 아일랜드 국제 무용 페스티벌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고소인 화이트헤드는 〈제롬 벨〉이 전혀 무용적이지 않고, 또 나아가 무용이 보여주어야 하는 어떤 당위적인 미학에 반하고 있다고 간주했다. 그렇다면 ‘무용적인 것’은 무엇이며, 동시대의 무용은 그것을 요구받아야 하는가? 우리는 춤에게 무엇을 요구할 것인가?
어떤 것이 ‘무용적’이냐는 물음은, 무용을 ‘구성’하는 것이 무엇인지 묻는 말과도 같다. 무용이라는 예술의 체계가 추구하는 미학적 가치는 무엇이고, 관객은 무엇을 통해 그것을 파악하고 그것을 ‘아름답게’ 느끼는지, 그리고 이 ‘아름다움’을 통해 우리가 받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이 모든 예술의 요소들이 어떻게 길항하고 있는지에 대한 문제 제기가 바로 그 질문 안에 담겨있다. 이것은 특별히 어떤 시대에 국한되어 있는 질문이 아니며, 당연하게도 그리고 여전히 지금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질문이기도 하다. ‘무엇이 탁월한가?’ ‘우리는 왜 춤을 추는가?’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한 이 질문들은, 한국에서 2010년대를 전후하여 등장한 새로운 모습의 작업들을 통해 다시금 소환되었다. 1980년대와 90년대를 거치며 견고하고도 화려한, 정형화된 무용의 ‘아름다움’을 이룩했던 한국의 무용이 갑작스레 예상치 못한 국면을 맞게 되었기 때문이다. ‘춤을 추지 않는’ 춤들, 이 생경한 미학 앞에서 누군가는 침묵을, 누군가는 외면을 택했고, 몸과 운동성에 대한 전면적인 해체와 재해석을 무용의 미학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사람들은 그것을 ‘무용’으로부터 쫓아내기 시작했다. 그 결과는 우리가 익히 아는 것처럼 ‘다원예술’이라는, 대단히 혼종적이면서도 ‘탈’시대적인, 기이한 예술의 임시적 형태로 귀결되었다. 결국 어떤 것은 무용적으로 결코 아름다울 수 없다는, 확고한 신념이 그것을 만들어낸 것이다.
레페키는 춤에 있어 ‘안무’라는 개념이 무용의 근대적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강화될 수밖에 없었던 개념이라고 역설한다. 근대의 시기에 무용이 다른 장르들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순수예술로 분류되기 위해 어떤 특징적인 정체성을 필요로 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끊임없이 강화되는 운동성과 더불어 그 ‘운동적’ 특성을 ‘쓰고, 읽을’ 수 있는 개념으로서의 안무가 필요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스펙터클한 움직임을 보여주려는 춤의 욕망이 춤의 근대성을 구성한다”는 이야기다.2 이는 모더니즘 이후 현대 예술이 그려왔던 예술의 모델을 무용에 적확하게 적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단일한 주체성(‘천재적 예술가’)을 바탕으로 개인의 세계관을 오롯이 반영하는 이상적 형태로서의 예술, 세계의 모든 것을 낱낱이 파악하고 그 비밀을 캐내고 밝히는 주인공 주체가 그려내는 예술이 바로 모더니즘이 이룩해내고자 했던 형태의 예술이었다. 종교와 신이 사라진 자리에 들어선 것은 인간이었고, 인간의 ‘전지적 눈’ 아래 모든 것이 분석되어 원리로서 귀결되는 이 환원주의적 세계관은 인간에게 ‘미처 신도 알지 못했던’ 세계의 비밀을 손에 거머쥘 수 있을 것이라는 전능감을 안겨 주었다.
이런 맥락에서 레페키는 운동성 그 자체를 전면적으로 비판한다. 『코레오그래피란 무엇인가』에서 여러 작품들에 대한 분석과 비평을 통해 드러나듯, 그는 ‘운동성’의 시대가 저물고 ‘춤을 소진시키는’ 지금의 국면이 오히려 무용의 탈근대적인 정체성을 수립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음을 천명한다. 끊임없이 ‘숨을 헐떡이며’ 움직이는 근대적 주체가 구성하는 안무를 소진시키는 것만이 안무와 춤의 개념을 재설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인간도 하늘을 날 수 없고, 공기처럼 가벼워질 수 없으며, 단단하고 균질적인, 불변하는 몸을 유지할 수 없다. 근대적 무용의 무대가 구성하는 것은 자기충족적 운동성의 환상일 뿐이다. 모더니즘이 구현하고자 하는 이상적 신체(인종, 성별, 장애,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차원에서)는 필연적으로 실패한다. 그것은 어디에도 없는 몸이기에 어떤 이야기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레페키에게 있어 운동성(과 춤)을 소진시키는 것은 식민화된 영토를 다시 회복하는 이데올로기이자 일종의 정치적 운동이다. 근대성을 한 몸에 담고 있는 안무로부터 떠나 “몸을 통해 주체를 다시 생각하는 것. 이것이 바로 안무의 과업”3인 것이다.
무용의 순간
그렇다면 운동성은 이제 마땅히 폐기되어야 하는 개념인가? 레페키가 이야기한 것처럼 멈춰 서고 소진시키는 것만이 지금의 무용을 구성하는 것인가? 운동성은 그것 자체가 안무의 ‘주체’로서 올라서면서 몸이 가진 본질들을 가리게 되었기에 비판받지만, 운동성이 가진 속성과 특질들은 인간 너머의 것을 상상하는 동시대적 관점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아니, 엄밀히 말한다면 운동성이 배태되었던 현대무용의 초창기부터 그것은 (지금에도 여전히 작동하는) 확장된 개념들을 내포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무용의 장을 연 초기 무용가들 중 하나인 로이 풀러(Loie Fuller)는 운동성을 몸 이외의 것들로 확장하고자 했던 안무가로, 풀러의 작품들은 이전까지 무용이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않았던 무대 장치와 의상들을 ‘확장된 몸’으로서 기능하도록 무대를 구성했다. 현대무용의 출현 자체가 발레와 토슈즈로 대변되는 어떤 극적인 모사나 완벽한 환영연극으로서의 무대를 넘어서기 위해 발생하였으므로, (모더니즘적인) 움직임의 본질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추상화는 필수적인 방법론이 될 수밖에 없었다. 움직임을 통해 무용의 절대적인 아름다움을 찾고자 했던 이런 흐름 안에서 여러 안무가들이 움직임을 소위 ‘개념’과 연결 지으려는 다양한 시도를 한 가운데, 풀러가 선택한 것은 오히려 그 운동성을 몸 바깥으로 확장하는 것이었다.
풀러의 〈Serpentine Dance〉(1892)는 무용수의 몸보다 훨씬 커다란 천이 몸을 감싸고 있는 상태에서 그것을 극도로 과장되게 ‘움직임’으로써 무대를 구성하는 공연이다. 무용수의 위치 자체는 무대 중앙에 고정되지만, 무용수가 휘두르는 팔의 움직임을 따라 커다란 의상의 천이 끊임없이 펄럭인다. 〈Serpentine Dance〉가 무대를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지극한 ‘몸’의 운동성이다. 다만 그것은 현대무용이 토슈즈를 벗어 던짐으로써 드러내고자 했던 ‘몸’이 아니라, 오히려 몸 위에 덧씌워진 의상을 통해 신체를 확장하는, 연결된 신체로서의 ‘몸’이 보여주는 운동성이다. 이 운동성은 인간의 형상을 뒤틀고 확장해 다른 것이 되도록 만드는 인간 너머의 움직임을 쫓는 시도인 것이다.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는 이 풀러의 확장된 운동성을 “환경을 창조”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4 추상적인 정식을 통해 운동성 그 자체가 확장되는 이 퍼포먼스 안에서 풀러 본인의 몸이 하나의 매개의 장소가 됨으로써 환경 그 자체를 구성한다는 것이다. 만약 풀러의 공연에서 무용수의 몸이 그 자체로 운동성을 ‘휘두르는’ 주체가 아니라 환경을 ‘확장하는’ 하나의 매개이자 장치로 기능한다면, 여기서 춤추는 것은 오히려 운동성 그 자체, 의상과 의상 사이사이를 드나드는 공기의 역동, 즉 다시 말해 ‘창조된 환경’으로서의 비인간 형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결국 풀러의 춤은 발레가 추구했던 자기 긍정을 넘어서 비-개인의 역량으로 넘어가는, 말하자면 어떤 존재의 대리로서의 몸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해체하고 넘어서 인간 바깥의 형상을 추구하는 춤이 된다.
Loïe Fuller, 1902.
출처: Library of Congress / Wikimedia Commons (퍼블릭 도메인)
여기서 랑시에르가 추출하는 무용의 매체적 본질은 ‘번역’이다. 랑시에르에 따르면 무용은 인간의 신체를 이용해 무언가를 ‘이야기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그저 운동으로 남는다. 표현이나 묘사가 아닌 그저 운동으로서의 존재가 무용을 규정짓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이야기 없는’ 무용은 무용이 만들어내는 움직임들이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인간 존재의 움직임을 행위하는 즐거움을 위한 ‘능동적 인간’과 노동과 구조로 운명지어진 ‘수동적 인간’의 모습으로 나눌 수 있다면, 랑시에르는 무용이 이 두 가지 인간 존재의 가운데에서 ‘자유로운 움직임’으로서 기능하기 때문에 예술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5 재현의 스펙터클과 미메시스를 폐기함으로써 무용은 목적과 수단을 일치시키는 예술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무용은 번역을 요구하는 예술이다. 칸트가 이야기한 ‘목적 없는 합목적성’의 예술로서, 무용은 완성될 필요 없는 감각적 상태들의 종합일 수밖에 없다. 결국 무용은 보는 관객에 의해 ‘번역’되는, 의식적 목적과 (목적 없는) 미적 경험 사이에 교량을 놓는 상상력의 예술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운동이라는 환유다. 랑시에르에게 있어 공연(예술)은 공동체를 구성하는 운명에 놓여있는 매체다. 그는 관객성에 있어서, 연극과 무용을 가리지 않고 모든 종류의 공연이 공동체의 잠재적 형태를 띠고 있음을 이야기한다. 이 ‘감각적 구성’은 장소와 시간을 점유하는 방식으로서의 공동체로, 법적 기구에 맞서는 현동적인 신체로서의 공동체로 드러난다.6 결국 관객은 무용을 번역함으로써 무용을 완성시키기 때문에, 안무는 더 이상 몸짓을 공연하지 않게 된다. 그것은 그저 어떻게 이 ‘공동체’를 완성시킬 수 있는지 골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운명의 고리, 안무와 관객, 운동과 번역의 사이에서 벌어지는 역학이 언제나 항상 완결되는 것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관계를 구축하고 관객을 해방시킴으로써 안무를 완성하는 이 구조가 때때로 실패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다시 한번 무용이 ‘번역’의 환경(milieu)을 창조하는 예술이라는 것을 떠올려본다면, 여기에서 안무와 안무가의 의무는 그 번역을 수행가능하도록 하는 장치를 벼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번역이라는 구조와 그 매체에 있어, 오직 번역 너머에 예비된 장치들만이 그것을 번역 가능케 한다. 안무는 이 ‘장치’들을 구조화하는 일종의 싸움이다. 움직임은 번역의 잠재태이고, 안무는 공연이 상연될 그 시간, 관객의 번역이 거기 존재할 것을 상정하는 미래적 테제다. 안무에 시간이 깃들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또한 무용의 ‘운동’이 번역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이 곧 감각의 구성을 오로지 관객에게 맡겨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랑시에르는 지금의 무용이 1960년대 뉴욕 저드슨 처치에서 이루어졌던 삶의 움직임들을 더 이상 작품의 방법론으로 취하지 않는 것이 운동성 그 자체의 폐기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대신 그것은 정치적이고 미학적인, 감성을 분할하는 측면에서 작동하는 운동성이 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운동’이라는 매체적 방법론이 가지는 중간자적 숙명이 움직임을 무용으로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 정말로 그렇다면, 감성의 분할을 이루는 정치적 차원을 고려하지 않는 무용은 번역 불가능한, 무용이 ‘아닌’ 움직임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키치 댄스
결국 근대 이후의 안무에 있어서 번역을 예비하는 무용을 작품으로 만들어내는 것은 감각을 정치적으로 분할하고 배치하는 역량이다. 관객은 번역자로서 작품 ‘안에’ 들어오며, 이 공동체적 관계성은 ‘포스트모던 무용’7의 핵심으로 자리 잡았다. 주목할 만한 것은 이야기꾼과 번역자가 연결되는 이 작품의 구조가 실패하는 경우다. 관계성이 파열되는 무용의 실패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나, 이 모든 종류의 결과들, 움직임이 번역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침몰하게 되는 표류의 순간들을 묶어 우리는 그것을 ‘키치(kitsch)’로 통칭할 수 있다.
키치는 부족한 예술이 어떤 것을 흉내 내려고 했을 때 발생하는 파열음이다. 예술의 본령을 정신적 긴장을 바탕으로 세계를 넘어서는 힘을 만들어내는 균열로 정의할 수 있다면, 키치는 예술이 아닌 것이 예술의 껍질을 뒤집어쓰고 마치 예술인 양 행세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예술인 ‘척’하기 때문에 비천해진다. 예술이 가지고 있는 진중함과 세계에 대한 통찰을 오직 방법론으로 흉내 냄으로써 소화할 수 있다고 믿는다. 키치는 예술이 되려다 실패한 허위의식의 결정체다. 굳이 예술을 고급예술과 통속예술로 분류해 본다면, 고급예술들 사이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자 하는 통속예술, 양의 탈을 뒤집어쓴 늑대의 모습이 곧 키치다. 통속예술이 통속예술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키치가 아니다. 긴장 대신 휴식을, 생산 대신 소비를 목적으로 하는 통속예술은 세계를 저격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감각적 유희의 차원에 머물 뿐이다. 본분에 충실한 통속예술은 키치가 될 수 없다. 키치는 오직 통속예술을 벗어나고자 기만하기 때문에 생겨난다. 단지 ‘예술’이라는 이름을 어쩌다 뒤집어쓰게 된 덕분에 예술인 양 하는 것, 그것이 키치의 특성이다.
무엇보다도 키치의 기만이 이루어지는 장소는 관객의 몸이다. 키치의 허위의식이 작동하는 방식은, 불행에 빠진 어린아이를 연민하다 어느덧 아이를 연민하는 자기 자신에 대해 연민을 느끼는 경우와도 유사하다. 여기에서의 핵심은 대상(예술 작품)이 조성하는 감정 그 자체가 중요해지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조성하고 있는 다른 표상으로 감정의 전이가 일어난다는 점이다.8 음악의 미적 가치에 집중하는 대신 음악이 불러일으키는 관객의 기억, 그리고 그 기억으로부터 발생하는 감각 수용의 구조가 키치를 만들어 낸다. 여기에서의 감각은 작품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이차적 눈물”인 것이다. 따라서 키치는 예술을 소외시킨다. 그리고 예술로부터 관객의 허위의식을 발생시킨다는 점에서 관객 역시도 소외시킨다. 키치의 기만은 작품과 관객 모두의 측면에서 실패를 불러일으킨다.
William Pope.L, 〈Tompkins Square Crawl〉, 1991.
© Pope.L. 이미지 출처: Wikipedia (공정 이용)
랑시에르가 말한 것처럼 무용이 ‘번역’의 예술이라면, 키치 댄스는 오직 ‘오역’만을 만들어 낸다. 그것은 운동성을 통해 오히려 자기-없음을 숨기고, 치밀하게 고민해야 했을 번역 가능성의 자리를 공란으로 비워둔다. 임무를 방기한 무용이 관객에게 불러일으키는 것은 오직 ‘이차적 눈물’뿐이다. 가고자 하는 곳이 없는 무용이 관객에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은 관객 자신의 모습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이 관계성의 차원에서 관객은 (번역의) 언어를 잃어버리고, 따라서 자기 자신에게 남은 것, 관객 스스로에 대한 연민만이 작품의 효과가 된다. 키치 댄스에서 무용과 관객은 공동체를 형성할 수 없다. 키치 댄스는 그저 기만이자 폭력이며, 예술에 대한 비루한 거짓말로 남는다. 결국 키치는 감상이라는 정동의 상태가 작품과 감상자의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관객의 몸 안으로 들어가 관객의 욕망에 의해 작품이 해석되기 때문에 나타난다. 이것은 ‘공동체’나 ‘번역’의 과정이 아닌 것이다.
문제는 키치 댄스를 만들어내는 안무가의 관점이다. 키치 댄스가 키치가 되는 것은, 안무가가 춤 안에 번역할 수 있는 어떤 것도 남겨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용의 움직임이 ‘능동적 인간’과 ‘수동적 인간’ 사이의 자유로운 움직임이 된다는 것은, 움직임 자체가 인간이 처한 삶의 수동성과 인간(관객)의 욕망 모두를 파악하고 그 사이에서 감각적 조율을 만들어내야 함을 뜻한다. 이것을 비워둔 채 만들어진 움직임은 그것이 안무가의 의지와 욕망으로 가득 차 있더라도, 오로지 허위의식을 향한 ‘신념’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9 따라서 무용이 키치 댄스로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번역’할 수 있게 만들 수 있을지 춤을 다시 들여다보는 과정이 필요하다. 안무가가 무용을 관객의 관점으로 바라보았을 때, 다시 말해 ‘번역’을 예비하는 또 하나의 주체로서 자기 자신의 작품을 바라보았을 때, 무용은 통속예술과 키치의 범위를 벗어나 감각의 정렬을 이룰 수 있다. 작가는 자신의 ‘신념’을 포기함으로써 삶을 지체시키는 키치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안무가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오히려 레페키적으로, 번역이 잠재된 운동성을 이데올로기적으로 혁파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레페키가 『코레오그래피란 무엇인가』에서 사례로 들고 있는 윌리엄 포프엘(William Pope.L)의 ‘기어가기’ 퍼포먼스는 운동성을 소멸시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운동성을 아주 느리게 만듦으로써, 운동성 자체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움직임이 근대적 수직성과 어떤 관계를 맺는지를 드러낸다. 운동성을 부정하거나 없애는 대신 운동성(그리고 근대성)의 이데올로기를 오히려 끌어올림으로써, 미학을 정치학으로 바꾸는 번역을 만들어내는 과정인 것이다.
감각의 서사, ‘움직임’을 구축하기
랑시에르가 『감성의 분할』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예술은 예술 안에서 미학적인 분할을 만들어내는 감각의 정치성을 끊임없이 조율한다. 예술에 있어 그것을 구성하는 감성의 형태는 사회 구조 혹은 사회 운동을 반영하는 방식을 규정하므로, 글쓰기에서의 작법과 인쇄물이 그러하듯, 또 회화에서 평면성과 추상성이 그러하듯 미학적 분할은 정치적인 순간들을 만들어낸다. 작품과 관객이 만드는 공동체 안에서 사회적 질서는 단순한 은유를 넘어서 예술의 매체적 힘을 통해 끊임없이 감각을 전복시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용의 감각을 분할하는 ‘운동성’을 새롭게 구축하는 문제에 있어서,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것은 미학을 가능하게 하는 정치 그 자체다. 키치 댄스가 ‘운동’으로 가득함에도 키치가 되어버리는 것은 거기에 움직임을 분할하는 정치적 힘이 소실되었기 때문이다. ‘운동’은 폐기되는 대신, 복원되고 구축되어야 한다. 그것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관객(번역자)의 이념이다. 랑시에르의 말마따나 무용은 “감각적 상태들의 종합이요 이질발생적 종합의 한 형태”다.10 그리고 그 종합은 완성될 필요가 있다.
어떻게 ‘움직임’을 구축해 나갈 것인가? 주목할 점은, ‘운동성’은 더 이상 몸의 움직임 위에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지금의 무용에서 ‘운동성’은 물리적 신체만을 흔들지 않는다. 그것이 흔드는 것은 몸 위에 얹힌 정치적 거미줄 혹은 몸으로부터 발산되는 정동의 감각 그 자체다. 미학과 정치학이 교차하는 작품들은 바로 그 (대안적) ‘움직임’을 생성해 냄으로써 번역 가능한, 혹은 번역을 잠재시키는 운동성을 안무에 포함시킨다. 오스트리아의 안무가 도리스 울리히(Doris Uhlich)의 2013년 작 〈more than naked〉는 22명의 무용수가 나체로 무대에 오르는 작품이다. 여기서 무용수들의 벗은 몸은 옷을 ‘벗은’ 대신 살가죽을 ‘입은’ 것처럼 표현된다. 이를 통해 관객은 몸이라는 것이 단순히 단일한 개체가 아님을, 그리고 인간의 몸의 경계를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 공연이 흔드는 것은 어떤 것을 짐짓 몸으로 규정해 버리고 마는 몸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므로, 여기서 운동성을 가지고 ‘움직이는 것’은 관객의 인식이다. 메테 잉바르첸(Mette Ingvartsen)의 〈to come(extended)〉(2017)와 같은 작품 역시도 몸 너머의 것을 춤춘다. 이 작품은 몸이 가지고 있는 모든 기호들을 비닐 수트 너머로 삭제해 버린 몸을 통해 육체와 성적 욕망, 쾌락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 관객의 고정관념과 인식은 얼굴 없이 몰려다니는 무용수들에게 이리저리 쫓기고, 마침내 무용수들이 수트를 벗고 몸으로 ‘귀환’했을 때 쾌락은 해방된다. 무용수들은 빠른 음악에 맞추어 신나게 춤을 추지만 여기서 발생하는 ‘운동성’은 쾌락과 몸, 성과 감각에 대한 관념을 흔든다. 웃고 소리 지르고 구르며 춤추는 것은 우리의 인식이다. 황수현의 〈검정감각〉(2019)은 몸으로부터 파생된 감각이 춤추는 작업이다. 어떤 종류의 감각을 차단하고 어떤 종류의 감각을 확장했을 때 무용수의 몸이 반응하고 대응하는 과정은, 짜여진 안무대로 춤추는 몸의 움직임 대신 실시간으로 조율되는 감각을 춤추게 한다. 여기서 이동하고 움직이는 것은 암기할 수 없는 감각의 속도들이다. ‘운동성’은 몸의 감각기관들로부터 출발하지만, 무대를 뒤흔드는 것은 물리적 몸이 아닌 감각을 분할하고 조율하는 무용수들의 긴장이다.
황수현 〈검정감각〉, 2019 ⓒ 옥상훈, 2019 SPAF 제공
이와 같은 공연들은 인식적이고 감각적인 차원에서의 운동성을 발생시킨다. 이들이 물리적 운동성을 조직하는 데 그치고 마는 공연들보다 훨씬 더 강력한 힘을 갖는 것은, 어떤 움직임이 미학적 가치를 갖게 되는 과정에 무엇이 몸이고 무엇이 몸이 아닌지, 그것을 가르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움직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정치는 움직임의 미학을 발생시키는 수단이자, 관객의 번역을 통해 실현되는 결과물의 자리를 동시에 차지한다. 정치적인 것은 단지 작품의 외연에 그칠 수 없다. 2025년 서울세계무용축제가 이스라엘 무용단의 축제 참가와 이스라엘 대사관의 후원으로 인해 겪었던 논란은, 움직임의 근원으로서의 정치적 미학과 실천으로서의 미학적 정치, 두 가지 차원이 번역을 통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보여준다. 이스라엘이 자행하고 있는 팔레스타인에 대한 전쟁 행위가 현재진행형인 상황에서 축제에 참가하는 몇몇 단체는 이스라엘 무용단과 대사관의 참가와 관련해 축제를 보이콧했고, 결국 축제 측이 이스라엘 대사관으로부터의 후원을 포기하는 것으로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물론 이스라엘이 일으키고 있던 전쟁에 있어 ‘행위자’로서 당위적으로 비판받아야 하는 부분도 있었지만, 나아가 더 문제적이었던 것은 축제에 참가한 이스라엘의 오를리 포르탈(Orly Portal) 무용단의 작품 〈폐허〉(Al-Atlal, 2025)가 작품 안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주제가 전쟁의 폐허로부터 피어난 연대와 치유를 말하고자 한다는 점에 있었다. 이 작품에서 이집트 가수 움 쿨숨(Umm Kulthum)이 부른 노래에 맞춰 춤추는 무용수들은 폐허 속에서 피어나는 한숨과 신음을 움직임으로 묘사한다. 움직임의 미학적 분할은 평화와 치유를 말하며 그것을 문화적 맥락에 놓고자 하지만, 또한 (2025년 현재의 상황 아래) 실천적 측면에서 그것은 움직임의 의미로 작동할 수 있을 것인가? 이 감각의 운동성은 실천과 정치의 맥락에서 기반을 상실하고, 결국 번역 가능한 원본의 자리를 잃어버리고 만다. 우리가 여기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무용, 그리고 움직임은 반드시 그것이 배태되어있는 정치적 맥락과 상호작용한다는 사실이다. 결국 미학적 힘을 완성하는 것은 움직임을 나누는 정치적 질서, 랑시에르가 말한 ‘미학적 예술 체제’에 의해 가능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례는 다음과 같은 것을 말해준다. 모든 움직임이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질 필요는 없지만, 또한 작품에 있어 모든 움직임은 반드시 어떤 ‘감각적 서사’ 속에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는 무용의 매체적 정의를. 그리고 이 서사를 완성하는 것은 안무의 잠재태와 관객이 만나 생성하는 번역, 바로 ‘무용의 순간’이다.
무용은 이제 무엇을 춤춰야 하는가?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는 『추의 역사』에서 미와 추를 가르는 판단 기준의 상대성에 관해 이야기한다. 끔찍한 것, 흉측한 것, 소름 끼치는 것들을 모아놓은 에코는 어떤 것을 추(혹은 미)로 정의하는 일이 그것을 둘러싼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음을 언급한다. 에코가 여기서 지적하는 것은 추를 어떤 절대적인 가치로 심판하고 그것을 복속시키는 것이 아니라, 추를 추하게 느끼는 그 감각의 과정과 신체성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풀러의 의상이 그 안에 포스트휴머니즘적 운동성을 내포하고 있음에도 지금의 시대에 더 이상 추어지지 않는 것, 그리고 이본 레이너(Yvonne Rainer)11의 일상적 움직임들을 활용한 방법론이 더 이상 무용의 방법론이 되지 못하는 것에는, 그것이 더 이상 미로 간주되지 않는 시대적 관점이 깊게 결부되어 있다. 미학의 분할을 이루어내는 정치적 관점이 예술에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의 시대에 무용이 바라보는 관점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그것은 관객에게 어떤 ‘번역’을 가능하게 해야 하나? 키치 댄스의 추함을 극복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이 질문들은 모두 무용이 숙명처럼 짊어지고 있는 ‘운동’ 그 자체를 다시 돌아볼 필요가 있음을 암시한다. 무용이 재현과 미메시스의 세계를 떠난 지 오래되었음에도 어떤 무용들은 여전히 키치의 불구덩이 속에 쉽게 몸을 던져넣는다. 그 위험한 ‘신념’은 무용 자체를 ‘못생긴’ 키치 댄스로 치환한다. 방임과 기만, 나태와 오만 사이에서 어떻게 ‘움직임’을 되살려 구축할 것인가? 이것이 지금의 무용이 짊어진 시대적 과제다. 키치로서가 아닌 번역이, 작품이 아닌 공동체가 되기 위해 움직일 것은 몸뚱이가 아닌 감각의 서사다. 무용은 이제 무엇을 춤춰야 하는가? ![]()
1 안드레 레페키, 『코레오그래피란 무엇인가: 퍼포먼스와 움직임의 정치학』, 문지윤 옮김 (서울: 현실문화연구, 2014), 12쪽.
2 위의 책, 14쪽.
3 위의 책, 20쪽.
4 자크 랑시에르, 『모던 타임스: 예술과 정치에서 시간성에 관한 시론』, 양창렬 옮김 (서울: 현실문화A, 2018), 142쪽.
5 위의 책, 138쪽.
6 자크 랑시에르, 『감성의 분할: 미학과 정치』, 오윤성 옮김 (서울: 도서출판b, 2008), 15쪽.
7 ‘포스트모던 무용’이라는 개념은 포스트모더니즘과 등치되지 않는다. 샐리 베인즈(Sally Banes)는 저서 『포스트모던 댄스』에서 1960년대 뉴욕 저드슨 처치를 중심으로 일어났던 일종의 무용 운동적 흐름이 ‘포스트모던 댄스’를 구성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모더니즘/포스트모더니즘을 구분하는 개념적 차원에서 보았을 때, 1960년대에 발생한 ‘포스트모던 댄스’는 무용이라는 공연과 예술을 환원적으로, 또 개념적으로 다르게 보고자 시도했던 모더니즘 예술의 한 갈래로 파악할 수 있다. 따라서 무용 안에서 무엇이 ‘포스트모더니즘’이냐는 질문은 여전히 논쟁거리로 남아있지만, 베인즈가 특정한 1960년대의 ‘포스트모던 댄스’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개념을 적용한 무용이라기보다는, 특정한 시기에 출현한 실험의 형태들을 지칭하는 일종의 고유명사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8 조중걸, 『키치, 우리들의 행복한 세계』 (서울: 현실문화연구, 1999), 13쪽.
9 위의 책, 152쪽.
10 자크 랑시에르, 『모던 타임스: 예술과 정치에서 시간성에 관한 시론』, 양창렬 옮김 (서울: 현실문화A, 2018), 148쪽.
11 이본 레이너는 1960년대 뉴욕 저드슨 처치에서 일어났던 예술 행동인 ‘저드슨 댄스 씨어터(Judson Dance Theater)’의 일원으로 ‘포스트모던 댄스’에 참여하고 그것을 이끌었던 대표적인 안무가다. 그는 〈Trio A〉(1966)와 같은 작품을 통해 이전까지 무용 공연에 요구되었던 ‘잘 다듬어진 신체’, ‘기술과 기교로 훈련된 움직임’만이 무용 공연을 구성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반기를 들고, 걷기, 가볍게 뛰기, 앉기, 팔 뻗기와 같이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수시로 행하는 움직임들로 공연을 구성하였다. 이본 레이너와 ‘포스트모던 댄스’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Sally Banes, Post-Modern Dance (New York: Routledge, 1987)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