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담: 못생김
권태현, 조형빈, 하상현, 한수민
좌담 일시_ 2025년 12월 16일 화요일
참가자_ 권태현, 조형빈, 하상현, 한수민
미, 추, 멋
조형빈 널 2호의 주제는 못생김이다. 못생김의 문제는 말하자면 미학의 문제라서, 오늘 이 자리에서 나누는 이야기들은 못생김이 무엇인지를 정의하는 것이라기보다 그것을 둘러싸고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가 될 것 같다.
하상현 나는 다양성이 없이 일괄적인 것이 못생긴 것이라고 생각한다. 모두 비슷해야 한다는 감각, 예를 들어 비슷한 디자인의 눈썹 문신을 한다거나 비슷한 모양의 검은 패딩을 입는 것과 같은 것 말이다. 이런 현상은 한국이 특히나 심하지 않은가 싶다. 이런 남들과 비슷해야 한다는 감각에서 나 또한 (유독) 자유롭지 못하다.
권태현 외국 도시를 여행하다 보면 서울과 조금 다른 결의 멋을 느낄 때가 있다. 훨씬 다양한 멋쟁이들이 있달까. 서울에도 멋있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 멋의 폭은 비교적 좁다고 생각한다. 다만 멋의 하한선이라는 것이 있다면 서울은 어떤 도시에도 뒤처지지 않는 높은 멋의 하한선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서울의 문화는 각자 고유의 방향을 찾아 멋있어지려고 하는 게 아니라, 어떤 안전한 선 안에 들어가 있고 싶은 것 같다. 멋을 추구하는 것보다 멋없는 사람이 되는 것, 촌스러운 사람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더 큰 것이 아닐까.
조형빈 외국에서의 경험들을 떠올려보면, 옷을 정말 이상하게 입는데도 그것이 문제가 된다거나 낙오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 태도들이 있었던 것 같다. 물론 옷을 정말 멋지게 입는 사람들도 당연히 있지만, 그것이 ‘못생겼다’고 해서 문제가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런 부분이 한국과 다르다고 느꼈다.
권태현 멋의 최전선에 있는 사람들이 변화한 것도 중요한 문제다. 과거에는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이 최전선에 있었다. 그것이 아름다움의 끝부분인지 추함의 끝부분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나 최근에는 예술가들의 역할과 위상이 바뀌었다고 느낀다. 멋이나 아름다움의 문제에서는 오히려 대중문화가 더 최전선에 있다고 느낄 때도 있다.
조형빈 대중적인 것과 아름다운 것(못생기지 않은 것)을 놓고 이야기해 보자. 대중적인 것이 ‘못생긴’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혹은 그렇지 않다면, 대중성을 지닌 작품 자체가 아름다운 것, 혹은 미학적인 것을 표상한다고 볼 수 있을까? 우리에게 잘 알려진 정전들을 만들어낸 셰익스피어도 사실 당대엔 대중적으로 인기 있는 작품을 매우 많이 생산해 내는 다작 작가였다. 또 대중적 인기를 누리는 연예인들이 ‘멋’있는 사람으로 간주되곤 하지 않나. 이런 측면에서 아름다움은 시대적이고 문화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때로는 대중적 동의 역시도 필요로 하는.
한수민 일관성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 우리나라의 작품들도 어떤 수준이 일정하다고 느낀다. 좋게 말하면 모두가 평균 이상을 해낸다고 해야 하나? 눈에 띄게 좋지 않은 작업은 별로 없는 것 같다. 마감이나 완성도가 모두 좋다. 어떤 평균 구간에 몰려 있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조금은 재미없다고 느껴질 때도 있다.
하상현 2025년 시댄스(SIDance)에서 한 해외 초청 공연을 봤는데, 정말 충격적으로 별로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신선했다. 관객의 눈치를 안 본다는 느낌이 들었고, 이런 작업이 한국에는 있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양가적인 감정이 들었다. 한국의 작업들은 어느 정도의 규격과 퀄리티를 잘 맞춰낸다. 그런데 때로는 그 안전한 선을 넘는 시도를 하지 않는 것 같다. 거친 것을 그대로 보여주거나, 부끄러울지라도 작업의 씨앗이 되는 생각을 내보이는 일이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조형빈 이전에 어떤 해외 큐레이터에게서 한국의 무용 공연들을 추천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적이 있었다. 내가 쉽사리 안무가 이름을 꺼내지 못하자, 그는 “한국에서 창고 같은 곳에서 공연하는 안무가들은 누구인가”라는 추가 질문을 던졌다. 놀랍게도, 한국에 그런 안무가들은 거의 없다. 대부분의 안무가가 매년 지원서를 쓰고 지원금을 받게 되면 예산을 책정해 극장에서 공연을 하지, 특별히 사비를 들여 극장이 아닌 공간에서 공연을 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내가 지금 이 사례를 떠올린 건, 당시 큐레이터의 질문이 단순히 공간에 관한 질문이 아니라 천편일률적인 공연의 형식을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에 관한 질문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물론 극장 외의 공간에서 공연을 하는 사례가 아예 없지는 않지만, 모두가 대체로 지원금을 받고 비슷한 공간, 잘 아는 공간에서 공연을 하기 때문에 비슷한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못생김
조형빈 ‘못생김’이라는 호명은 시각 중심적인 판단이 전제되어 있다는 느낌을 준다. 만약 그렇다면, 무언가를 ‘못생겼다’라고 판단하는 것에는 일종의 형태적인, 혹은 디자인적인 관점이 깊게 들어있을 것이다. 내가 이러한 차이를 크게 느끼는 것은 한국과 해외의 웹 환경을 번갈아 돌아다닐 때다. 확률적으로 유럽권의 웹사이트들이 더 깔끔하고 아름답게 되어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물론 우리나라에도 예쁘고 훌륭한 웹사이트들이 많지만, 특히나 우리가 자주 들어가야 하는 공공기관 웹사이트들의 경우 높은 확률로 구시대적이거나 사용자를 불편하게 하는 미학을 고집한다는 느낌이 들곤 한다. 물론 공공기관은 민간기관만큼 예산 사용이 자유롭지 않고, 빠르게 변화하는 웹 환경에 발맞추어 그때그때 인터페이스를 업데이트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들 사이에는 ‘이게 어때서?’라고 생각하는 사회적 합의가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예쁘고 못생긴 것은 미학적 쾌/불쾌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담고 있는 콘텐츠 자체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태도의 문제이기도 하다. 예술이 반드시 ‘아름다울’ 필요는 없지만, 아름다움을 탐구하는 것은 예술일 수밖에 없다. 예술을 어떤 그릇에 담을 것인가? 그릇에 담긴 것이 흘러넘치지 않게 하는 실용적 차원과 함께 그것이 어떤 모양으로, 누구에게 전달될지 함께 고민하는 것이 예술의 속성이다. 결국 웹사이트 미학의 문제는 예산의 문제라기보다, 오히려 철학의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상현 함께 일하는 디자이너와 외국어 폰트에 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어떤 알파벳 폰트는 해외에서 표지판에 사용되는 흔하고 클래식한 폰트인데, 이를 한국인이 봤을 때 세련되어 보이는 현상에 관한 이야기 였다. 한국어 폰트를 외국인이 보았을 때 다르게 지각되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는 시각적인 것의 익숙함/낯섦과 관련이 있다. 해외에서 흔한 글씨체가 한국에서는 세련된 것으로 생각되고, 반대로 한국에서 촌스러워 보이는 글자가 외국인들에게 아름답게 받아들여진다.
조형빈 물론 해외 사이트들이 그들의 이국적인 문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도 있을 것이다. 다른 곳에서 들었던 내용 중에, 디자인적으로 아름답게 꾸미기는 것에 있어 알파벳이 한글보다 상대적으로 더 수월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다. 디자인적으로는 재미있는 부분인 것 같다. 그런데 한국 웹사이트들이 보이는 난감함들에는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미학 아래에 깔린 철학의 문제가 있다고 느껴진다. 비슷한 역할을 하는 한국과 해외의 공연 축제 홈페이지들만 봐도 차이가 느껴진다.
권태현 나는 그것이 한국, 외국을 가르는 문화적인 문제라기보다는 일반적으로 작용하는 멋의 복잡한 역학이 아닐까 생각한다. 예를 들어 디자인을 배우는 단계에선 굴림체를 쓰지 않는 것이 멋있는 것이지만, 어느 정도 고민이 제대로 쌓이면 오히려 굴림체를 가지고서 무언가 해낼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멋의 복잡한 역학 속에서 가장 멋없다고 여겨지는 것이 되레 그렇기에 가장 멋있는 것이 되기도 한다. 한국과 외국을 그렇게 대치해서 비교하기는 어렵다고 본다. 한국의 공연 축제 웹사이트 중에서도 분명 훌륭한 것들이 있다. 한국의 웹사이트 중에서 못생긴 것들은 단지 촌스러운 디자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관료제와 연결된 한층 더 깊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조형빈 그렇다. 최근 새로 만들어진 웹사이트 하나를 보면, 이곳은 기존에 공공기관에 존재하던 비평과 언론의 역할을 하던 매체들을 폐쇄하고 대신 기관에서 지원하는 사업들을 모아서 홍보하겠다는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진 곳이다. 그런데 취지나 기능이 어떻든 간에, 사이트의 외양은 전혀 예술적이거나 미학적으로 훌륭해 보이지 않는다. 공공기관이라고 해서 편협함을 고집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여기에 담긴 예술에 대한 철학은 무엇일까? 심지어 이 웹사이트는 국내 예술 관련 기관의 사이트들 중 가장 최신에 가까운 웹사이트다.
하상현 로고와 키 컬러에서 ‘부’를 상징하는 금색을 사용한 것도 눈에 띈다. 이건 디자이너의 문제라기보다는, 공공기관이 제도적으로 이러한 디자인을 요청하고 승인하는 구조를 살펴보아야 한다. 기관의 위계, 예술을 바라보는 계급적인 태도가 ‘별’과 ‘황금색’, ‘왕관’과 같은 부를 상징하는 요소들에 잘 드러나고 있는 것 같다.
한수민 이 웹사이트의 가장 큰 문제는 분명한 역할이라던가 정체성이 없다는 것이다. 무엇을 하는 웹사이트인지 잘 모르겠다. 아마도 이걸 제작하는 단계에서도 그랬을 것이다. 웹사이트의 목적이나 당위를 아무도 몰랐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디자인을 의뢰하는 담당자도 방향이 불분명한 상황에서 디자이너에게 구체적인 주문을 하지 못했던 것 아닐까? 결국 아무 템플릿이나 고르고 공공기관에서 자주 사용하는 요소들을 모아서 그냥 만든 느낌이다. 나는 이 웹사이트가 못생겨서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실용성이 없다는 점이 문제라고 생각한다.
하상현 이 웹사이트는 예술을 담는 플랫폼이 어떤 방식으로 시각화 되어야 하는지에 관한 방향성 없이, 예산이 주어지고 성과를 도출해야 하는 상황과 함께 만들어진 시각적인 결과물로 보인다. 이러한 제도의 방향성 또한 기능과 실용성의 일종이고, 이러한 실용성의 부재가 못생김을 만든다.
조형빈 결국 실용적인 것과 미적인 것 사이에서 둘 중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 문제라기보다, 같이 가야만 하는 문제일 수 있겠다.
권태현 정말이지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이야기하면서 드는 생각은 로고의 생김새 같은 표면의 요소가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태도와 관련된 문제가 있다. 특정 브랜드가 촌스럽게 여겨질 때, 그 브랜드의 미적 수준 자체가 떨어지는 경우는 드물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모두 입기 때문에 따라 입어야 한다는 생각이 못생긴 것이다. 양산형 로고도, 굴림체도 그 자체로는 문제가 아니다. 디폴트 값으로 설정되어 있는 무언가를 신경 써 바꾸지 않는 태도가 못생긴 것이고, 책임감 없는 관료주의가 못생긴 것이다.
화이트큐브? 멸균실?
한수민 우리가 못생김이라는 주제를 선정하게 되었던 것은 지난 호의 쉬움의 주제와도 맞닿아 있다. 지난 호 은빈 님의 국립아시아문화전당 큐레이터 두 분과의 인터뷰 「아름다움에 휘말리기: 전시에 돌봄을 꿰는 사람들」에서도 잠깐 언급되었던 문제를 되짚어 보자. 접근성의 문제가 투박함과 못생김을 다루는 일이 될 때도 있는데, 미술관에서는 못생긴 것들을 용납하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나 역시도 미술관이나 갤러리가 견뎌내지 못하는 못생김이라는 게 있다고 느낀다. 무용인으로서 미술관과 함께 일할 때 그런 부분에서 차이를 느낄 때가 많은데, 쉽게 말하면 하얀 벽을 지켜야 한다는 어떤 마음이 있는 것 같달까. 예컨대 문 옆에 커다랗게 ‘미세요’라고 써놓지 못하는 것이다. 분명 그런 표시가 필요할 때가 있는데, 화이트큐브에서는 그런 접근을 굉장히 꺼리는 느낌을 받는다.
하상현 어쩌면 이 부분은 각 장르에서 생각하는 중요도에 따라 달라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예를 들어 시각예술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작가나 미술관은 퍼포머에게 사례비를 얼마나 줘야 하는지 감을 잘 잡지 못한다. 연습에 해당하는 사례비와 연습실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아예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반대로, 시각적 부분에서는 공연예술계가 덜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느끼는 요소들도 있다. 예를 들면 작품 앞에 ‘밀지 마시오’ 같은 안내 문구를 적어야 할 때, 사소해 보이는 폰트의 종류와 크기 같은 것들이 관객이 작품에 접근하는 방식을 변화시킬 때가 있다. 이런 부분에 대한 민감도는 확실히 시각예술계가 높다. 안내문을 벽에 붙일지 바닥에 붙일지 결정하는 일은 단순해 보이지만, 어떤 방향이 정면인지 결정하는 일이 되기도 하고, 관객의 시선의 방향을 정하는 일이 되기도 하는 중대한 문제이다. 이것이 미술에서는 미적인 문제와도 연결되는 것이다. 그런데 공연예술 장르에서는 이런 부분에 중요도를 두지 않는 경우를 종종 보았다.
권태현 나도 벽에 붙이는 안내문이나 인제책 같은 부분에서 다른 분야의 사람들, 혹은 기관과 협업할 때 이견이 발생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내 입장에서는 캡션이나 경고문, 인제책 같은 것들도 전시라는 미적 구성의 일부로 판단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인데, 기관 입장에서는 안전 관리 같은 가치가 미적인 판단을 압도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상현 안전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경우도 있지만, 인제책을 사용하는지 여부는 작품의 감각과 개념을 아예 바꾸기도 한다.
한수민 얘기를 들으니까 이 문제가 미술관의 환대하는 태도와 더 연결된다고 생각된다. 미술관에서 허용하는 것이 어디까지인지. 작품의 맥락에 따라 즉각적으로 감상의 태도를 갖출 수 있는 사람은 어느 정도 미술사를 알고 예술에 익숙한 사람들이다. 나도 미술관에 가면 아직도 몸이 굳는 느낌이 들 때가 많다. 요즘은 특히 만져보거나 앉아보거나 하는 작업들이 많아져서 구분하기가 더 어렵고 조심스럽다. 어떤 것이 허락되는지 좀 크게 써 붙여줬으면 하는 마음이 들 때도 있다.
하상현 실용과 미학이 사실은 연결되어 있기에 실용과 미학 사이에서 둘 중 하나는 포기해야 하는 문제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현실에선 둘 중 하나가 누락되는 경우가 많다. 한정된 예산과 시간 내에서 모든 요소에 관해 매번 신경쓴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한수민 「아름다움에 휘말리기: 전시에 돌봄을 꿰는 사람들」 인터뷰에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인터뷰이였던 큐레이터분이 필요와 아름다움이 충돌하는 부분에 대해서 인지하고 많은 고민과 연구를 한다는 점이었다. 배리어프리를 위한 조금 더 아름다운 장치를 찾는다거나, 못생기고 거친 부분을 미학적으로 전유할 방법들을 많이 생각하시는 듯했다. 확실히 시각적인 아름다움에 많이 신경을 쓴다고 느꼈다. 예산이 많다면 이런 식의 시도를 많이 해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꼭 돈의 문제가 아닌 것이, 나에게도 똑같은 예산이 주어진다고 해도 나는 다른 곳에 돈을 사용할 것 같다. 퍼포머에게 사례비를 더 준다든지. 일단 나는 못생김이 크게 거슬리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에.
조형빈 무용계에서 포스터나 홍보물 디자인에 예산을 많이 쓰지 않는 건 맞는 것 같다. 물론 무용 공연의 포스터가 시각 전시회 포스터만큼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돈을 많이 들이지 않는 것일 수도 있지만, 돈의 문제가 아닌 것 같기도 하다. 많은 무용 잡지나 오래된 무용 공연 행사의 포스터들이 여전히 철 지난 디자인들을 고수하고 있는 걸 보면, 돈의 문제라기 보다는 업계의 문화, 흐름, 미학의 문제라는 생각이 더 많이 든다. 미술 잡지들의 경우 역사가 있고 오래된 잡지라 하더라도, 디자인이 지나치게 올드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기 때문이다.
한수민 포스터를 다들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하긴 하다. 나는 포스터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프로젝트 전체를 놓고 봤을 때는 큰 부분을 차지하진 않는 것 같다.
하상현 그래픽 포스터와 회화를 같은 평면 작업물로 놓고 보자면, 어쩌면 포스터는 전시에서 가장 대표성을 띤 작품의 일종이다. 이런 관점에서 포스터는 단순히 시선을 끄는 홍보물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전시의 물리적・개념적인 방향성을 이해하면서 제작되는 작업으로 볼 수 있다.
조형빈 물론 이렇게 안무가 프로필 사진을 주르륵 포스터에 넣는 식의 디자인이 옛날에는 그렇게까지 못생기지 않았을 수도 있다. 못생김이라는 게 시간성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포스터뿐만 아니라 무용 예술 미학 패러다임도 마찬가지이다. 가령 현대무용이 처음 발생하던 시기에는, 발레에 익숙해져 있던 사람들이 왜 토슈즈도 안 신고 맨발로 나와서 못생긴 공연을 하냐고 얘기했을 것이다. 그 이후로 현대무용, 포스트모던 댄스, 컨템포러리까지 오면서 여러 패러다임이 바뀌는 장면들에서 어떤 못생김의 기준들이 흔들리곤 했다. 지금 내가 생각하는 무용이 추구해야 하는 미학은 몸이 가지고 있는 어떤 정치적인 국면을 잘 활용해야 한다는 것인데, 그렇지 못한 작업은 못생겨 보이는 거다. 물론 이건 내 개인의 관점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시간성과 관련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시대를 초월하는 아름다움?
조형빈 또 한편으로는, 어떤 관점에서는 시대를 초월하는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여겨지기도 하는 것 같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들 어떻게 생각하나?
하상현 불변의 아름다움을 굳이 찾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동시에 우리가 보아야 할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있다고 믿는다. 아름다움을 쉽게 정의할 순 없지만, 영원하지 못한 순간적인 무엇일지라도 우리가 경험하는 아름다움에는 굉장히 강력한 힘이 있다고 믿는다.
권태현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개념뿐만 아니라, 모든 것에서 절대적인 것이나 영원한 것은 없지 않을까. 불멸의 아름다움도 불멸의 못생김도 없다고 생각한다.
한수민 그러니까 불멸의 아름다움이나 못생김이 무엇인지를 얘기하는 것보다 아까 이야기 나왔던 것처럼 아름다움이나 못생김이 승인되는 과정, 그 역학이 무엇인지 얘기하는 게 중요할 것 같다.
조형빈 그게 내가 말한 시간성의 문제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예쁘다거나 잘생겼다고 인정하는 얼굴들이 있지 않나? 보편적인 어떤 잘생김이나 못생김이 있다고도 말할 수 있을까.
권태현 어떤 미추에 관한 판단이든 특정한 구조의 맥락에서 작동하기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간성의 문제, 시대의 문제는 당연히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시간성은 발전론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대착오적인 것 같다.
한수민 우리가 아까 처음에 얘기했던 것처럼 옛날에는 예술가들이 멋의 최전선에 있다거나 아름다움의 기준이 엘리트나 계급적인 것이었다면, 지금은 예술이 자본의 흐름에 따라 만들어지고 있다고 느낀다. 어색하고 익숙하지 않음에서 오는 멋과 아름다움 역시 익숙해지는 타이밍을 재면서 자본이 우리가 잘생기고 못생긴 것을 판단하는 기준을 주무른다고 해야 할까. 그 사이클 속에서 우리가 계속 돌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근데 또 그 주기가 점점 빨라지는 것 같아서 지치고 피곤하기도 하다.
조형빈 선형적인 발전론과도 연결이 되어 있는 것 같다. 이전에는 어딘가에 최고의 아름다움이 있을 거라고 가정하고 그것을 추구해 나갈 수밖에 없는 구조를 따라갔다고 한다면, 지금은 그 믿음이 끝나버린 거다. 모더니즘은 인간이 진리를 통해 세계의 비밀을 밝힐 수 있다고 믿었던 것에서 출발했다. 예술 역시도 같은 선상에서,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존재한다고 믿고 그것을 찾아내는 것을 지상 목표로 삼았던 것이 모더니즘 예술이었다. 몬드리안이 선과 면, 흰색과 빨강, 노랑, 파랑으로 구성한 추상이 ‘진정한’ 아름다움이라고 믿었던 것처럼, 모더니즘 안에서 아름다움과 못생김은 아주 명확한 구분이 있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바로 이러한 신화의 허상을 벗기고자 출현했다. 지금은 누구도 진리가 있다고 믿지도 않을뿐더러, 지식이라는 것이 각자가 처한 상황 안에서 개별적인 발견을 통해 구성되어 가는 것이라는 것을 모두가 안다. 이런 개념과 지형의 차이도 있을 것이다.
권태현 내가 미술 담론장에 진입할 시기에는 조각이나 회화 등 고전적인 장르로 전공을 명확히 구분하는 것이 구시대적으로 여겨졌었다. 그런 맥락에서 미술대학의 학과 이름도 조형예술학과나 융합예술학과처럼 변화하는, 어떤 추세가 관찰되었다. 예술가들도 스스로를 조각가, 화가 등으로 부르는 것을 어색하게 느끼던 시기였다. 지금은 다시 한 바퀴 돌아서 조각이나 회화 같은 고전적인 매체론의 재귀환이 흥미로운 국면을 만들어내고 있다. 젊은 작가들 중에서 스스로를 조각가 등으로 부르는 사람들도 다시 눈에 띈다. 이런 것도 발전론적인 관점에서 벗어나는 어떤 역학과 관련된 문제라고 생각한다.
조형빈 아름다움을 구분하는 것이 제도적인 역학과 깊게 관련되어 있다면, 비평 역시도 그 역학과 상호작용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2000년대 이후 한국의 무용은 그 전과 양상이 다른데, 이것은 비단 2000년대 이후 새로운 흐름들이 나타난 것뿐만 아니라 그 흐름에 맞추어 비평이 유연하게(혹은 민첩하게) 발맞추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든다. 예술이 추구하는 양상이 변화한다면 그것을 누구보다 빠르게, 혹은 앞서 달려가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고민해 보는 것이 비평의 역할일 것이다. ‘무엇을 아름답다고 말할 것인가?’ 이 질문은 비평의 존재 자체를 규정하는 질문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무엇이 정말로 아름다운지를 구분해 내는 것보다, 무엇이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게, 혹은 못생긴 것을 못생기게 만들고 있는지 묻는 일이다.
아름다움을 구축하기
조형빈 무용은 시각예술에서의 그것보다 더, 어떤 정형화된 아름다움에 오랫동안 사로잡혀 있었던 예술이다. 여전히 ‘발레’라는 특정한 스타일로 남아 있기도 하지만, 예술 작품에 있어서 ‘무용수’라는 고정된 질료에게 끊임없이 요구되는 아름다움의 ‘속성’들이 무용 그 자체를 정의하기도 한다. 심지어 이 ‘예술적 재료’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하기까지 하지 않나. 따라서 동시대 무용 예술에서 아름다움을 재정의하고자 하는 시도는 불가피한 것처럼 보인다. 1900년대 초반 현대무용이 출현한 것 자체가 발레의 전형적인 아름다움으로부터 탈피하기 위한 것이었고, 익히 잘 알려진 1960년대 저드슨 처치의 활동들에서 이미 비-무대적인 몸을 가지고 어떻게 무용(예술)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에 대한 실험들이 이루어졌다. 자비에 르 루아(Xavier Le Roy)의 〈Self Unfinished〉(1999)는 무용수 본인이 옷을 거꾸로 뒤집어 입고 네발로 기면서, 더 이상 인간의 형상이 아닌 모습으로 무용의 형상 그 자체에 질문을 제기하는 작품이다. 여기서의 몸은 결코 아름다운 어떤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아하거나, 높이 뛰거나, 경이로운 운동성을 수행하지 않는다. 이 ‘못생긴’ 움직임은 못생겼기 때문에, 아름다움을 비판하는 ‘다른’ 아름다움이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하상현 미술에서도 신인상파와 같은 예시들을 보면, 당대의 기준으로는 굉장히 파격적이고 못생겼었지만 지금은 관광 상품이 될 정도로 아름다운 것들로 여겨지는 작품들이 많이 있다. 말씀하신 르 루아의 작업 역시도 당시에 어떻게 여겨졌을지 모르겠지만, 현시점에 내가 보기에는 이미 정제되어 있는, 제도로부터 승인받은 어떤 종류의 아름다움을 드러낸 작품으로 느껴진다. ‘못생김의 미학’이라는 것 자체가 제도가 아름답다고 인정한 것들이 정형화되고 한정된 것들만 승인되는 구조에 반응하며 나왔던 미학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직면하는 못생김, 시선을 사로잡지 못하는 풀어진 미학을 선택하는 결정은 때때론 어떤 급진적인 선택이기보다는, 현재의 상황을 충분히 감각하지 않은, 어떤 종류의 방종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만약 지금 말한 것처럼 지금의 ‘못생김’이 그런 상황에 놓여 있다면, 사람들에게 더 효과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것은 오히려 어떤 종류의 다양한 아름다움을 구축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아름다움을 만들어내기 위한 다양한 경로와 시간들을 마주할 때 비로소 예술이 작동할 수 있는 일말의 여지가 생긴다.
한수민 방금 무용과 발레에 관한 이야기도 나왔지만, 못생김에 관해서 이야기해 볼 부분이 있는 것 같다. 발레와 같은 확고한 몸의 정형성을 아름다움으로 간주하는 영역이 있는 한편, 다양한 몸들이 존재하고 그것이 무용 안에서 미로 승인되고 아름답다고 이야기하는 영역이 있다. 작업 안에서 ‘못생긴’ 몸을 드러내는 일들이 비단 최근에 벌어진 일은 아니다. 관객들도 이제는 무용 작품을 보면서 그런 몸의 다양성을 당연하게 느낀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극장 밖으로 나오면 여전히 발레의 몸 같은, 어떤 특정한 몸을 욕망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괴리가 중요한 것 같다. 예술 작업에서는 이것이 이미 철 지난 무엇일지 몰라도, 이 차이는 여전히 계속해서 존재한다. 그래서 현재 열리고 있는 아트선재센터의 퀴어 미술 기획전 《스펙트로신테시스 서울》에서 하고 있는 일종의 물량 공세처럼, 다른 방식의 형식 추구와 같은 것들이 여전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권태현 이러한 이야기의 맥락에서 탈코르셋 운동과 그 백래시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외모를 가꾸는 문제 자체를 비평적으로 사유한 문제는 물론 큰 의미가 있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 이후의 세계는 다시 ‘코르셋’을 바짝 조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최근 소셜미디어에서는 상징적인 의미의 코르셋이 아니라, 말 그대로 진짜 코르셋을 입는 인플루언서들의 모습도 볼 수 있다. 탈코르셋 운동 이후 대중 담론에서 백래시가 어떻게 작동했고, 그것들이 어떤 방식으로 오늘날 아름다움과 못생김의 문제를 바꾸어내고 있는지 고민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한수민 발레의 몸과 같은 전형적인 미에 반기를 들고 다양하고 퀴어적인 몸을 드러내면 세상이 다양성을 승인할 것으로 생각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우리는 지금 오히려 그런 다양한 몸을 더 싫어하는, 우리가 바라고 상상했던 세계와 더 동떨어진 현실을 마주하고 있다. 이런 아름다움의 전형성을 고정하려는 힘이 더 강력해졌다고 느낀다. 못생긴 몸을 더 적극적으로 싫어하고 혐오하는 힘이 생긴 것 같다.
하상현 ‘코르셋’이라는 것이 이전까지는 인지되지 않은 상태로 작동하고 있었다면, 이제는 그것을 알지만 오히려 그것에 찬동하거나 과시하려는 흐름이 분명히 있다고 느껴진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미와 추에 접근하는 경로들이 너무 단순화 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예를 들면, 다양성의 문제에 접근할 때, 미의 반대인 추를 드러내 다양성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미 자체를 어떻게 다양하게 구축할 것인지 고민해 본다면 어떨까?
한수민 단순히 주류의 아름다움에 반기를 듦으로써 힘을 가질 수 있다는 이야기는, 생존의 문제를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유효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그저 미학적인 문제가 아니라, 퀴어나 장애의 담론이 다루고자 하는 다양성과 ‘못생김’은 그것들이 생존과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에 중요해진다.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 앞에서, 퀴어로서, 여자로서, 장애인으로서 맞닥뜨리는 생존의 문제 앞에서 미에 반대하기 때문에 힘을 가질 수 있다는 이야기는 자칫 낭만적인 얘기처럼 들리는 것 같다. ‘못생김’이 승인된다는 것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고, 오히려 생존의 문제와 깊게 관련되어 있다.
조형빈 나는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못생김’이 힘을 가질 수 있고, 가져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현실적인 문제에 끊임없이 부딪히지만, 그것에 대한 백래시가 더욱 거세지는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프로젝트 이인과 김원영이 작업했던 〈무용수-되기〉 같은 작품에서는 그 아름다움의 전형성을 정확히 찌른다. 규정된 형식으로서의 발레 무용이 불가능한 몸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이 분명히 있다. 그것을 어떻게 작동시킬 수 있을지, 아름다움으로 어떻게 승인할 수 있을지를 이야기해 보고 싶었다.
권태현 두 분의 이야기가 통하면서도 각각 다른 맥락에 있는 것 같다. 형빈 님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못생김을 아름다움으로 뒤집는 힘, 미학의 자장 안에서 벌어지는 일에 관한 이야기인 것 같다. 미학적 자장 안에서는 분명히 이런 것들이 작동한다. 반면, 수민 님은 실제 세계에서 그것이 정말로 승인되는가 하는 회의에서 오는 한계를 말씀하신 것 같다. 이러한 문제는 예술이 세계에서 어떤 역량을 지닐 수 있는지에 대한 일반적인 고민과도 맞닿는다.
하상현 결국 못생김은 ‘그런 식’으로 작동하지 않는 것 같다. 나는 〈무용수-되기〉가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세상이 ‘못생겼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구조화하고 직조해서 예술의 장 안에서 펼쳐냈기 때문에 결국 아름다움의 어떤 종류로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어느 시점에서는 일부러 미를 구성하지 않는 것이 각광받던 시기가 있었던 것 같다. ‘못생김’ 그 자체를 추구하는 흐름이다. 나는 그러한 흐름이 현시점에 작동하지 않거나, 의도하지 않은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질문하게 된다. ‘못생김’은 미학의 자장 안에서도 나타나고 그것이 정치적으로도 연결되는 방식은 못생김이 일종의 아름다움으로 전환하며 발생하는 것이지, 못생김이 그 자체로 작동하는 방식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역사의 언젠가 중요했던 해체의 에너지는 현재 동시대의 패션이 되었고, 방종이 되었다고 느낀다.
권태현 다만, 지금의 미적인 헤게모니 싸움에서 위기의식을 공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다양성이 조금씩 힘을 키워가는 흐름이 분명히 있었는데, 이제는 그것이 다시 약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여기에는 다양한 극단주의와 전쟁 등 거시적인 정치적인 맥락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정세에서 이 헤게모니 싸움을 잘 지속해 나가기 위해 어떻게 전열을 가다듬는 것이 좋을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때이다.
조형빈 결국 우리는 ‘못생긴’ 것들을 통해 우리의 미학을 반추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아름다운가/못생겼는가?’라는 질문은 그것이 정말로 아름다운지를 판별하기 위한 질문이라기보다, 그것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질문하는 것에 가깝다고 느껴진다. 이 질문은 예술과 세계 모두에서 작동한다. 세계에서의 강력한 백래시와 같은 정치적이고 문화적인 상황 속에서도 지금 우리 밖으로 밀려나고 있는 것들은 무엇이고, 어떻게 하면 그것들을 다시 안으로 불러들일 수 있을지 고민할 수 있게끔 만드는 질문이기도 하다. 오늘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계속해서 어긋나는, 혹은 제안하는 개념들을 가지고 싸웠다. 그만큼 ‘못생김’이 피할 수 없는, 중요한 시대적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못생김’을 어떻게 파악하고 받아들이는지는 계속해서 무언가를 생각하게 만든다. 어쩌면 왜 밀려나고 있는지, 어떻게 헤게모니 싸움에 다시 뛰어들 수 있을지, 혹은 어떤 ‘못생김’을 타파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것도 ‘못생김’의 문제를 놓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못생김’은 무엇이고, 왜 그것은 ‘못생긴 것’으로 정체화되는가? 그리고 어떻게 ‘아름다움’을 구축할 것인가? 이 정치적/미학적/윤리적 질문은 지금 우리가 무엇을 ‘예술’로서 바라볼 것인지를 고민하는 질문이기도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