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두 문장으로 말해봐

 

『첫 번째 팝아트 시대』가 어려운 것은 핼 포스터의 탓인가, 팝아트의 탓인가?1

이 질문을 읽었을 무렵, 마침 나도 핼 포스터를 읽고 있었다. 내가 읽던 책은 『소극 다음은 무엇? 결괴의 시대, 미술과 비평』이다. 실은 ‘결과’의 시대로 착각하고 구매했다. ‘결괴’가 무슨 뜻인지 국어사전을 들춰 보고 처음 배웠다. 더디게 읽히는 책이었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어려웠다. 그러니 이 어려움이 핼 포스터의 탓인지, 아니면 책의 주제 탓인지 나 또한 마찬가지로 묻고 싶었다. 아니다. 나는 질문이 필요 없었다. 저 물음을 마주하기 전까지 내게는 답이 있었다. 이것은 작가의 탓도, 예술의 탓도 아니다. 그건 내 탓이다. 

내 탓인 이유는 여럿이다. 책에서 언급되는 데리다나 벤야민, 프랑스나 미국의 역사에 대해 나는 정확히 모른다. 그게 아니라도, 소극이라는 단어가 사용되는 맥락을 이해하는 데 한참이 걸렸다. 다양한 용어와 배경지식을 통과해 전개되는 글이 쉬이 이해될 리 없다. 이 책이 어려운 건 수준에 맞지 않는 책을 택한 나의 문제다. 선행되어야 하는 계단들을 먼저 밟아야 했다. 내 공부가 부족한 탓이다. 포스터의 책에 앞서 접한 많은 이론 서적들에서도 같은 결론이었다. 무언가를 탓하기엔 내가 너무 부족해. 누가 나의 멍청함을 눈치채기 전에, 그 부족함을 채우려 애를 써본다. 진학한 대학원에서, 읽는 책에서, 스터디 모임에서 느린 걸음으로 겨우 계단 몇 개에 발을 내디뎌 본다. 동시에 허우적대다 넘어진다. 느린 속도도, 넘어지는 허술함도 모두 내 탓이오. ‘그런 책’을 읽을 때마다 나 자신을 탓하지 않을 날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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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과 비평의 테두리에서 벗어나면 다를까? 창작자로서 글을 읽고 쓰는 동안에는 정반대의 상황에 놓였다. 내가 쓰는 글은 간략하고 쉬워져야 했다. 주로 혼자 시작한 작업을 동료들과 공유할 때, 특히 지원서를 위해 작업을 설명할 때면 글이 다소 길다거나 너무 은유적이라는, 불친절한 글이라는 피드백을 받았다. 참여하는 역할이나 글의 목적에 따라 나는 종종 더 간결하고 또 친절해져야 했다. 

한번은 〈극장 종말론〉이라는 프로젝트의 기획서를 바탕으로 기금을 위한 인터뷰 심사에 참여했다. 이 프로젝트는 ‘이대로라면 극장이 망할 것 같아 걱정인, 극장의 종말만은 막고 싶은 종말론자들의 모임’이다. 반어적인 제목부터 극장이라는 장소를 보는 여러 층위의 관점이 더해진 프로젝트는 누군가에게는 꽤 어수선하고 핵심을 표현하지 못한 기획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높은 경쟁률을 뚫고 서류전형에 통과했다는 기쁨도 잠시뿐이었다. 심사에 참여한 어느 기관장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다.”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옆에 앉은 다른 남자가 동의했다. 그는 내게 질문은 하지 않았다. 대신 간략하게 설명해 보라고 했다. 어서.

“네, 간략히 말씀드리면, 이 프로젝트는 극장이 가진 한계를 발견하기 위해 관객의 시선을 사용하는 작업입니다. 극장이라는 장소가 여러 사람이 모일 수 있는 공공장소라는 이유로 마치 거기서 행해지는 작품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것이라고 느끼지만, 실제로 극장은 많은 경우 노키즈존이고 여러 스펙트럼을 가진 장애인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곳이자 교양이라는 문턱을 가진 곳이기도 합니다. 그 밖에도 언급조차 되지 못한 다양한 벽이 있습니다. 그런 점을 드러내고 또 다루는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을 텐데요. 저는 극장이라는 장소의 한계와 가능성을 다양하게 해석하기 위한 방법으로 관객들이 경험한 극장을…” 그렇다. 나는 간략하게 설명하는 법을 모른다.

기획서를 마무리할 때면 나의 동료는 늘 내게 확인한다. “그러니까 두 문장으로 한번 말해봐.” 사방으로 가지를 뻗어가는, 내 정신 상태와 똑 닮은 기획서가 핵심을 잘 담고 있는지 점검하기 위한 절차다. 처음에 몇 번은 시도해 보았다. 두 문장으로 말하기. 물론 할 수 있다. 하지만 매번 실패했다. 이게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아. 있잖아, 그렇게 간단히 말할 수 있었으면 굳이 이런 프로젝트를 하지도 않았을 거야. 한 문장으로 말할 수 있었다면 표어를 만들어 붙이는 프로젝트를 했겠지. 

그런 기억을 되짚으며 끝 모르고 길어지는 필패의 ‘간략한 설명’을 누군가 친절하게 끊어냈다. 맨 끝에 앉아 있던 어느 재단 팀장이었다. 그가 내 기획서의 일부를 요약하며 질문을 했다. 그는 나의 종말론이 ‘그냥 종말 타령’이 아니라는 걸 이해하고 있었다. 그에게 고마워할 틈 없이 심사는 끝났다. 해당 사업에는 선정되지 못했다.

돌이켜보건대, 그 경험은 나의 글쓰기에, 특히 기획서 쓰기에 큰 영향을 끼쳤다. 기획서의 핵심은, 다른 모든 글이 그렇듯, 읽혀야 하는 글이다. 누구에게 읽히느냐면, 그 기획서의 독자, 즉 지원금을 결정하는 사람이다. 내가 쉽고 간결하게 쓰려고 할 때, 거기에는 읽는 사람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는 마음이 있었다. 내가 뭘 하고 싶은지보다 이 기획이 그럴듯한지 명쾌한지 평가하려고 했다. 처음 아이디어를 펼칠 때 도사리고 있던 흥미로운 불꽃을 살리기보다는 운영 가능성을 기준으로 작품을 평면화했다. 

누구나 쉽게 읽고, 또 바로 이해되는 글이어야 한다는 강박이 생겼다. 기획서를 쓸 때 가장 신경 쓰는 것은 문단마다 소제목을 쓰고, 그 한 문장에 모든 내용을 담는 것이 된다. 한눈에 읽히기 위해서다. ‘그 심사 위원’도 이 정도면 내 기획을 이해할 수 있겠지. 아예 서술형을 포기하고 개조식으로 쓰기도 했다. 주로 중요한 정보나 내용을 강조했다. 가독성을 높여 정보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게 했다. 이게 효과적이라고 판단되자, 계속 그렇게 썼다. 

그런데 왜 내 글의 독자를 ‘하나도 모르겠다’라고 섣불리 말하는 남자로 삼았을까? 

그가 인터뷰 심사 전에 기획안을 제대로 읽지 않았을 것에 한 표를 준다. 언급된 프로필상 그는 미술계 인사이고 극장의 공공성 논의에 호기심조차 없었을지도 모른다. 내 글을 읽지도 않을 사람만을 독자로 상정하고 그만을 설득하려 좁고 납작해지기를 선택하는 게 맞을까? 그 기획의 가진 흥미로운 면을 발견하고 기꺼이 질문을 던진 사람이 있었다는 점은 왜 기억하지 않았을까?

무관심한 독자의 흥미를 끌어오는 일은 무척 중요하다. 그러나 독자의 층위는 다양하다. 무엇보다 모든 글의 독자는 작가 자신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바로 이해되는 명쾌한 기획안에는 그만큼 명확한 한계가 있었다. 그건 재미가 없다. 다른 어떤 독자들에게, 또 나 자신에게.

잘 읽히는 쉬운 글이 언제나 좋은 글은 아니었다. 비트겐슈타인의 유명한 명언처럼, “언어의 한계는 세계의 한계이다”. 사용하는 언어가 제한적이면, 그 언어로 표현하고 이해할 수 있는 세계도 제한적이라는 뜻이다. 달리 말해 가독성만이 목적이 되어버린 글은 그 밖의 것을 잃기 쉽다. 예를 들어, 쉽고 짧은 글로 내가 상상한 세계를 빚어내는 일은 내게 더없이 어려웠다. 왜냐하면 내가 만들고자 하는 작업이 늘 탈락된 상태들을, 잘 구분되지 않는 경계를, 애매한 말과 제스처를 다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연하고 간결한 세계 바깥의 것들. 그것들을 억지로 익숙한 틀에 끼워 넣고 나면 나는 조금 우울했다. 복잡한 것을 잘 설명하기 위해서는 고도의 기술이 필요할 텐데, 그런 기술이 없는 나는 마감일을 핑계 삼아 쉬운 선택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단순한 구조와 단어로 쓰인 기획은 내가 원래 하려던 것과 사뭇 달라 보인다. 둘은 실제로도 다르다. 기획하는 글에서는 익숙한 단어와 뻔한 구조만을 사용하면서 그것을 실행으로 옮긴 작업이 새롭고 낯설기를 바랄 수는 없었다. 그래도 그 기획안이 통과해 작업을 시작할 수 있다면 괜찮은 걸까?

*

내가 핼 포스터의 글을 읽으면서 나를 탓했던 것은, 내가 그의 독자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를 원망하며 요약본을 찾는 대신, 내 언어와 세계가 넓어지기를, 또는 쪼개지길 바랐기 때문이다. 기획서라고 다르지 않다. 사실 기획서의 독자야말로 해석하고 발굴하는 사람이다. 그들이야말로 아직 구현되지 않은 세계를 상상하고 창조하는 독자다. 기존의 언어로 한계 지어진 땅을 넓히거나 깊게 만들 글을 기다리고 있는. 

그러니 이제는 오해를 풀어야 할 때다. 간결하고 단순한 글은 보다 정확해지기 위해서이지, 무심한 독자에게 “떠먹여” 주기 위해서 존재하는 게 아니다. 그래서 말인데, 이제는 두 문장으로 말해보고 싶은 거다. 읽자마자 바로 이해되고 끝나는 쉬운 접근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궁금해서 독자를 멈춰 세울 수 있는 방법으로서. 더 길고 까다롭지만 흥미로운 다음 장으로 나아가는 통로로서.

 


1 이동휘, 이여로, 『시급하지만 인기는 없는 문제: 예술, 언어, 이론』(서울: 미디어버스, 2022), 1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