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으로서 장애?:
크립 계보학, 환대, 그리고 까칠함에 관한 단상

 

최근 국립현대미술관, 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 모두미술공간 등 주요 공공 미술기관들이 앞다투어 장애와 접근성을 주제로 한 전시를 선보이고 있다.1 전국에서 장애와 취약한 몸이 활발하게 담론화되는 이례적인 여름이었다. 이는 사회 전반의 인식 전환뿐만 아니라, 제도의 정책적 필요, 담론적 유행, 그리고 문화 기관의 전략적 기획에 의한 호출이었을 것이다. 전시들은 환대와 포용, 다정한 정서로 관객을 맞이한다. 함께 머물 수 있는 공간을 약속하고, 취약한 몸을 초대하는 언어들은 온기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과연 장애가 이토록 친밀하고 따뜻한 언어로 이야기될 수 있는 걸까? 

장애는 퀴어와 마찬가지로 언제나 정치적인 투쟁의 장이었다. 그것은 제도와 사회적 배제, 돌봄의 위계와 노동의 착취, 제도적 폭력과 생존의 투쟁이 교차하는 전쟁터와 같다. 어떤 몸들은 법과 제도가 부여한 분류 속에서 끊임없이 협상해야만 하며, 결코 온화하게 웃으며 대화할 수 없는 상황들의 연속이다. 장애는 단순한 환대나 다정함으로 서로 간의 ‘차이’를 확인하는 것을 넘어서 제도와 학문을 뒤흔들고 각자의 세계관을 불안정하게 만드는 비판적 사유의 공간이 되어야 한다. 

나는 이 지점에서 장애학의 역사에 눈길을 돌려본다. 개별 전시가 내세우는 각 서사들은 모든 몸을 환영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로 인해 전시와 작품은 각자의 고유한 신체적 감각에 집중하길 제안하며, 공간의 물리적, 정서적 접근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나는 분명히 매우 섬세하고 엄밀하게 구성된 전시에 감탄했지만, 이 과정에서 그 고유한 신체들이 겪어온 운동의 역사와 제도와의 투쟁, 정치적 긴장을 발견하기 어려웠다. 이렇게 동시다발로 전시가 개최된 전례 없는 시기에 이 전시들은 어떤 역사적 위치를 점유하고 있는 것인가? 하필 왜 지금 이렇게 전시와 장애에 관한 논의가 많아진 걸까? 이 전시들이 단순히 정책적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도착 서사’가 되지 않고 논의의 출발점에 서기 위해선 그간 장애학이 축적해 온 비판적 계보학적 사유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장애학의 역사와 크립 계보학

이 글은 분명하게 2023년에 발간된 『Crip Genealogies』(이하 크립 계보학)을 딛고 있다.2 이 책은 멜 Y. 첸(Mel Y. Chen), 김은정(Eunjung Kim), 그리고 앨리슨 케이퍼(Alison Kafer), 줄리 애브릴 미니치(Julie Avril Minich)가 공동 편집했으며, 기존 장애학이 백인, 서구(북반구) 중심, 제국주의적 시각이 지배적인 장애학의 계보를 비판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장애학은 언제부터 학문으로 성립되었나? 학문이라는 이름은 언제나 역사를 전제한다. 특정한 기원, 선배 세대, 이론적 유산을 호출해야만 학문으로 인정받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지금까지의 장애학은 흔히 “제1세대–제2세대–제3세대”라는 파도(wave) 은유로 설명되어 왔다.3 즉, 1980~90년대 영국과 미국에서 장애인권운동과 함께 학문적 토대가 형성되었고, 이후 교차성(intersectionality)을 수용하며 확장되었으며, 최근 들어 ‘글로벌’한 장애학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식이다. 이러한 발전 서사는 장애학을 정전(canon)으로 만들고, 특정한 기원을 “필연적”으로 보이게 하지만, 동시에 백인·영미 중심의 역사만을 남기고 다른 시간성과 계보를 지워버린다.

바로 이런 점에서 『크립 계보학』이 도발적으로 이 역사성에 개입한다. 이 책은 ‘장애가 하나의 학문적 제도로 인정받는’ 환영의 서사를 흔들며, 장애학의 역사적 기원 자체가 이미 불균등하고 배제적이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멜 Y. 첸, 김은정, 앨리슨 케이퍼, 줄리 미니치는 장애학이 페미니즘, 퀴어 이론, 탈식민 연구, 흑인 페미니즘, 크립 운동과 얽혀온 다층적 계보들을 호출하면서, 단선적인 학문적 발전 모델을 거부한다. 이들은 나무나 파도 같은 직선적 은유 대신 격자, 주파수, 파도 아래 생명 같은 은유들을 제시하며, 학문이 항상 ‘성장’과 ‘도착’의 언어로만 말해지는 습관을 문제 삼는다. 그렇다면 장애는 어떻게 학문이 될 수 있는가? 『크립 계보학』은 단순히 ‘장애학’이라는 제도화된 학문 분과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불안정하고 비선형적인 관계들, 우연한 접속들, 그리고 감정과 몸의 흔적을 계보로서 사유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장애학은 제도화의 안정성 속에서만 학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제도적 제약을 교란하고, 백인·서구 중심의 “발전 서사”를 흔들며, 다른 학문·운동들과의 교차와 긴장 속에서 학제적으로 논의가 되어온 것이다.

 

환대와 까칠함

『크립 계보학』이 제시하는 불안정한 계보학은 곧 환대와 안정과 같은 정서의 언어와도 맞닿아 있다. 장애학은 제도의 안정성에 안착하기보다는, 불안과 정동적 조건 속에서 끊임없이 재구성되어 왔다. 흔히 장애는 불행의 징후처럼 여겨지고, 그렇기에 환대가 마치 필수적인 도덕적 반응처럼 요청된다. 하지만 환대는 단순한 ‘따뜻한 수용’에 머무르지 않아야 한다. 오히려 불편함, 미완의 상태를 드러내면서 제도와 능력주의적 질서를 흔드는 정동적 기반으로 작동해야 한다. 

물론 환대는 접근성과 연대의 실천에서 반드시 필요한 정서적 기반이다. 특히 국립현대미술관, ACC, 부산현대미술관 등 최근 기관들이 준비해 놓았던 접근성 전시들은 관객에게 안전하고 열린 경험을 보장한다는 점에서 분명히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나 역시 환대 없이는 어떤 예술적·사회적 연대도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이 환대와 연대의 중요성을 인정하면서도, 『크립 계보학』에서 제시하는 것처럼, ‘까칠함’(crankiness)이라는 정서에 주목해 본다. ‘까칠함’은 단순한 부정적 감정이 아니라, 완성하려는 충동(the drive to complete)에 대한 비판적 신호로 작동한다. 이는 장애를 총체화된 내러티브로 만들거나, 언제나 즉각적인 답변을 준비하거나, 오직 행동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전제하는 충동이다. 저자들은 ‘장애’를 하나의 총체적 설명 원리로 만들거나, 항상 즉각적인 해답을 내놓으려는 충동, 그리고 모든 것을 행동으로 환원하려는 강박이 사실은 능력주의적 질서와 닮아 있음을 지적한다.4 

까칠함은 “학문 분야에 대한 것이고, 우리가 경험한 일들, 그 분야의 사람들, 그 분야로부터 향하거나 멀어지는 지향들에 대한 것”이며, 이는 단순한 부정적 감정이 아니라 일종의 파수꾼(sentry)으로 작동한다. 이 까칠함은 크립에 관한 하나의 방법론으로 제시된다. 말하자면 까칠함은 장애학에 대한 것이다.5 특히 책의 저자들은 오드리 로드(Audre Lorde)의 『분노의 쓰임』(The Uses of Anger)을 언급하며 분노와 까칠함의 연결성과 차별성을 짚는다. 분노와 까칠함은 동일한 감정이 아니지만, 그 글 속의 많은 부분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6 

로드가 쓴 것처럼, “우리가 분노로부터 돌아설 때, 우리는 통찰로부터 돌아서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알려진, 치명적이면서도 안전하게 익숙한 디자인만을 받아들이겠다고 말하는 것이다.”7 완성에 대한 충동을 따라가다 보면, 행위와 의도의 결합 자체는 질문되지 않고, 오직 결과론적인 능력주의로 작동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러므로 책의 저자들은 까칠함이라고 부른 정서가 장애에 대한 접근에 있어서 기존의 능력주의적 방법론을 해체할 수 있는 틈을 마련한다고 주장한다. 까칠함이 하나의 방법론이 될 때, 이는 분노가 지향하는 바깥을 가리키는 동시에, 장애 당사자들로 하여금 지금보다 더 많은 것들을 열망할 수 있는 당위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전시의 맥락에서 환대는 여전히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렇다면 환대와 까칠함은 어떤 방식으로 공존할 수 있는 감정인가? 환대가 제도화되는 것은 안정된 형식의 반복으로 귀결될 수 있다. 기관이 내세우는 환대는 종종 매뉴얼화된 서비스나 표준화된 프로그램으로 제시된다. 이때 환대는 개인과 개인이 유기적으로 맺는 관계가 아니라, 기관과 개인이 맺는 불균형한 관계다. 다시 말해, 환대가 특정한 형식으로 ‘서비스’화 되거나 제도화되면 다른 방식의 접근이나 관계 맺음에 대한 가능성이 닫히는 것이다. 이는 더 이상 질문을 열어두는 것이 아니라, 차이를 규격화하고 관리하는 장치로 전락할 수 있다. 

본래 환대는 돌봄, 신뢰, 연대와 같은 복합적인 정동을 수반한다. 하지만 제도 안에서 이뤄지는 환대의 수사학은 ‘안전’과 ‘친절’이라는 한정된 정동만을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그 힘을 납작하게 만들고, 실제 만남의 긴장과 불확실성을 소거한다. 이렇게 된다면, 환대는 오히려 자기비판을 중단하게 되는 장치가 될 것이다. 여기서 다시 까칠함으로 돌아가 보자. 까칠함은 환대의 정서가 너무 쉽게 ‘완성 서사’로 굳어지는 것을 경계하게 만든다. 환대가 언제나 안전하고 익숙한 방식으로 반복될 때, 까칠함은 그것을 ‘더 많은 것’을 향해 밀어붙이는 정동적 열망으로 작동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이는 제도적으로 형식화된 환대에 균열을 내고 새로운 감각과 실천을 요청하는 방법론적 자원으로 기능할 수 있다. 

환대가 학문을 가능하게 하는 공동의 장을 열어준다면, 까칠함은 그 장이 완성된 답안으로 고정되는 것을 막는다. 장애학은 바로 이 두 정동이 교차하는 자리, 즉 환대가 열어놓은 관계성 위에서 까칠함이 균열을 내는 자리에서 일종의 학문으로서 성립한다. 그렇기에 장애를 학문으로 논한다는 것은, 제도 속의 안정된 분과로 ‘도착’하는 것이 아니라, 제도를 교란하고 질문을 계속 열어두는 비판적 계보학으로서 지속되는 일일 것이다.

 


1 《기울인 몸들: 서로의 취약함이 만날 때》(국립현대미술관, 2025년 5월 16일 ~ 7월 20일), 《우리의 몸에는 타인이 깃든다》 (ACC 2025년 4월 17일 ~ 6월 29일/서울 모두미술공간 순회전: 2025년 7월 23일 ~ 8월 22일), 《열 개의 눈》(부산현대미술관, 2025년 5월 3일 ~ 9월 7일)
2 Mel Y. Chen, Alison Kafer, Eunjung Kim, and Julie Avril Minich, eds., Crip Genealogies (Durham, NC: Duke University Press, 2023)
3 Ibid., 13.
Ibid., 21.
Ibid., 21-22.
Ibid., 21-22.
7 Audre Lorde, Sister Outsider: Essays and Speeches (Berkeley, CA: Crossing Press, 1984), 130–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