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담: 쉬움의 어려움에 대하여

 

좌담 일시_2025년 7월 25일 금요일
좌담 장소_서울 연남동
참가자_권태현, 라시내, 이민주, 한수민
정리 한수민

 

 

예술에서 쉬움의 문제 

권태현 오늘은 ‘쉬움’이라는 주제를 이야기해 보려고 한다. 우리 편집위원들은 최근 접근성이나 배리어프리 등 용어에 대한 엄밀성과 섬세함에 관하여 다양한 논의를 꾸준히 이어 왔다. 그러던 중 이 좌담의 주제는, 국립현대미술관의 《기울인 몸들: 서로의 취약함이 만날 때》(이하 《기울인 몸들》)에서 사용된 이른바 ‘쉬운 말 해설’ 방식에 대한 고민과 그것에서 촉발된 이야기가 출발점이 되었다. 전시의 벽면에 붙은 설명에는 ‘취약함’, ‘디자인’, ‘편견’과 같은 낱말들에 대한 해설이 일종의 각주 형식으로 달려 있었고, 당시 민주 님에게 그 사진을 찍어 보내면서 일종의 논쟁이 시작되었다. 우선은 넓은 관점에서 ‘쉬움’이라는 추상적인 기준으로 더 설명해야 하는 개념과 그렇지 않아도 되는 개념을 나누는 것이 가지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고, 더 나아가 ‘쉬움’이라는 개념의 기저에 깔려 있는 관객들을 지적으로 평등한 존재로 보지 않는 태도는 옳지 않다고 보았다.

이민주 나는 그게 왜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그 ‘쉬움’의 기준이 누구에게 있는 것인지 궁금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쉬움’이 무엇인지, 예술에서 ‘쉽다’와 ‘어렵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함께 질문하게 되었다. 엘리트주의 차원에서 ‘쉽다’라는 표현은 종종 상업적이거나 진부하고 새롭지 않은 것으로 여겨졌다. 그런 의미에서 ‘쉬움’이라는 말은 비판적인 뉘앙스를 담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지금 접근성의 맥락에서 말하는 쉬움은, 그와는 다른 층위에서 생각해야 할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예전에 태현 님이 어린이 해설용 글쓰기에 대해 “쉽게 써달라”는 요청을 받았고, 그 말을 비판적으로 바라봤던 기억이 겹치면서 이번 쉬움에 대한 논의에 영향을 준 것 같다. 다만 이번 경우에는 접근성을 중심으로 한 쉬움의 문제이기에, 그 의미를 조금 더 다른 각도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권태현 많은 부분 동의한다. 민주 님 말처럼 접근성과 관련한 쉬움과 미술계에서 행정적으로 요구되는 쉬움 일반을 구분할 필요는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전히 쉬움이라는 개념을 둘러싼 복잡한 문제가 있다. 우선 방금 민주 님도 이야기해 주신 것처럼, 예술계에는 분명 엘리트주의적인 층위가 존재한다. 잘 모르는 대중들을 위해서 쉽게 풀어주어야 한다는 관점에서 시작되는 쉬움의 문제는 자연스럽게 이런 엘리트주의를 기반으로 한다. 또 다른 한편에는, 문화산업적 측면에서 더 많은 관객을 개발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전시나 작품을 더 쉬운 언어로 설명하는 것이 요구되기도 한다. 물론 나도 ‘더 많은 관객’이라는 목적 자체가 잘못됐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더 쉽게 설명해야 대중들을 만날 수 있다.’라는 관념 속에 숨어 있는 문제를 비판적으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민주 나 역시도 정리된 생각은 아니지만, 예술은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어렵다’라는 감각은 예술이 늘 추구해 온 방향, 이를테면 ‘새로움’과 연결되어 있다고 본다. 지금까지와는 없었던 언어를 발굴해 나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그것을 창조적인 것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에 없었던 언어를 우리가 목도했을 때 느끼게 되는 감정은 ‘어렵다’, ‘난해하다’ 같은 말로 표현된다고 생각한다.

그런 맥락에서 예술은 본래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 자체가 쉬워져야 한다는 방향보다는, 그 어려움을 어렵게라도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연결고리가 항상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지금 각자의 사전에 어떤 단어가 있고, 없는지를 확인하게 하는 일도 매우 필요한 작업이라고 본다. 내가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것이 무엇인지 확인하는 작업 말이다. 물론 ‘쉬운 말 해설’에서 사용되는 쉬움이라는 단어에 대해 나 역시 약간의 비판적인 태도를 갖고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예술에 접근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연결고리는 여전히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쉬운 말 해설’이나 풀이와 같은 방식 역시 분명 의미가 있다고 본다.

라시내 어느 정도의 쉬움이 ‘일반 대중’을 위해서 필요하다는 의미인가? 개인적으로 나는 예술이 새롭기 때문에 난해하다는 의견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예술이 새롭거나 새로워야 한다는 명제에도, 예술이 어렵다는 명제에도 꼭 동의하지는 않는다. 물론 민주 님 말씀의 요지는 예술이 쉬운지 어려운지의 여부가 아닐 것이다. 예술이 본질적으로 어려운 것이니까 그것을 억지로 쉽게 만들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어려운 예술을 있는 그대로 두되 더 많은 관객과 매개할 수 있는 언어가 필요하다는 뜻으로 알아들었다. 그렇다면 내가 궁금한 점은 그러한 매개를 필요로 하는 관객이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예술 제도나 관행은 관객을 구체적으로 어떤 관객으로 상정하고 있는가? 우리가 만약 그 관객을 구체적인 누군가로 상상하지 않는다면, 결국 관객은 ‘일반 대중’ 관객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든다. 

이민주 나는 ‘대중’이라는 단어를 쓰고 싶지는 않다. 대중은 엘리트주의적인 시각에서 무지하거나 추상화된 집합으로 규정되곤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전시와 같이 불특정한 다수를 초대하는 형식에서 정말로 어떤 특정한 누군가를 상상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도 든다. 그리고 개인적인 차원이라고 말씀해 주셨지만, 왜 예술이 새롭다거나 난해하다는 것에 동의하지 못하는지, 그 이유도 궁금하다.

라시내 예술이 항상 새로움으로 규정되는 것은 모더니즘의 방식 같다. 개인적으로 모더니즘 이후의 예술, 특히 현재의/동시대 예술에서 새로운 것 자체는 더 이상 그렇게 가치가 있는 것 같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다. 나는 예술가가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 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우리가 지금 말하는 새로움의 의미가 서로 다를 수는 있겠지만. 

나는 오늘날 예술이 우리가 보고 있지만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하고, 항상 느끼고 있지만 느끼지 못했던 것을 느끼게 해준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을 새로운 것이라 말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말하면 이미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것이기에 전혀 새롭지 않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민주 무슨 말인지 이해했다. 내가 말한 예술에서의 새로움은 예술가나 창작자가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차원이 아니다. 오히려 개인적인 차원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게 되는 순간들에 가까운 것이다. 그것은 아주 감각적인 것일 수도 있다. 다시 말해서, 어떤 결과물로서의 새로움이라기보다는 감각적인 새로움에 더 가깝다.

우리가 감각할 수 없던 것은, 우리에게 이미 주어져 있던 것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볼 수 없던 것을 보게 하고, 느낄 수 없던 것을 느끼게 하는 것이 예술이 추구하는 새로움이라는 생각이 든다. 시내 님이 말한 것처럼, 우리가 다른 무언가를 보기 위해 예술을 찾는다는 점과 연결된다. 그리고 이 다름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면, 거기에는 언제나 쉬움이라는 문제가 따라오는 것 같다. 같은 말을 다른 단어로 표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라시내 쉬움의 반대말은 어려움일 텐데, 쉽거나 어렵다는 것은 말하자면 차갑거나 뜨겁다는 것 같은 것이다. 차가운 것과 뜨거운 것은 서로 반대지만 차가운 것도 뜨거운 것도 둘 다 온도다. 결국 차가운가 뜨거운가가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차가운가 혹은 뜨거운가가 문제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쉬움과 어려움은 무엇의 양극단을 표시하는가? 그것들은 결국 이해를 전제해야 성립할 수 있는 개념일 것이다. 즉 예술을 혹은 예술 작품을 이해해야 한다는 전제가 있어야 비로소 예술이 혹은 예술 작품이 어렵다거나 쉽다는 이야기가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예술 작품 앞에서 우리가 이해와 지식을 바탕으로 그것을 감상하는가? 그래야만 하는가? 그것이 옳은가? 예술이라는 것은 근원적으로 이해 불가능성에 맞닿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해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면 굳이 예술이라는 형식을 하고 있을 필요가 없지 않을까? 말이나 글 같은 다른 미디어를 통해 충분히 표현할 수 있는 방식이 많고, 그런 방식이 더 이해 가능하고 명확하지 않은가? 나는 예술은 반드시 이해될 수 있어야 한다는 전제를 거부하는 위치에 있어야 한다고 본다.

이민주 동의한다. 내 생각에도 쉬움의 전제에는 이해할 수 있고 없고의 문제가 깔려 있다. 물론 나는 앎의 문제도 예술에서 중요한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앎은 지식과 이해의 차원에서 다뤄진다. 하지만 나는 감각 역시 지식과 이분법적으로 분리할 수 없는 영역이라고 본다.

흔히 감각에 관해서 ‘언어화할 수 없는 신체성’이라는 표현을 쓰곤 하는데, 그 감각이라는 것이 정말 언어의 바깥에 있는 것인지, 지식의 바깥에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질문이 생긴다. 그런 의미에서 쉬움이라는 단어 자체를 다른 방식으로 다시 이야기해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과연 쉬움의 의미는 무엇일까?

 

대중과 구체적인 얼굴들

권태현 앞서 민주 님이 ‘대중’이라는 표현에 대한 입장을 이야기해 주셨고, 시내 님이 대중과 구체적인 대상의 문제를 언급해 주셨으니, 대중이라는 개념을 한번 짚어야 할 것 같다. 일단, 쉬움이라는 문제가 예술 담론장 바깥에 있는 대중이라는 존재를 상정하고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아닐까. 나는 이 전제부터 다시 생각해야 한다고 본다. 예술을 이해할 수 없는 누군가가 있다는 입장은 아주 관념적이고 실체가 없는 대중이라는 개념을 딛고 있다. 여기에서 대중이라는 관념은 말을 해도 알아듣지 못할 사람들이 있다는 식으로 누군가를 규정해 버린다.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의 관점을 빌리자면, 그는 몫 없는 자들이 말을 하거나 들을 줄 모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말이 감각적인 것의 분배 속에서 언어로 자리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점을 짚어낸다. 나는 쉬움을 둘러싼 지금의 논의에서도 그런 방식의 역학이 작동한다고 생각한다. ‘대중은 잘 모른다’, ‘이렇게 말하면 못 알아듣는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야 한다’라는 식의 관념은 사실상 누군가를 언어적·감각적으로 배제하는 구조다. 이것은 단순한 엘리트주의를 넘어선다. 이런 관점에서 나는 ‘대중을 위해서’라는 입장 자체가 근본적으로 문제라고 본다. 

라시내 앞서 내가 ‘관객은 누구인가’ 혹은 ‘관객은 누구라고 상상되고 상정되는가’를 문제 삼은 것은, 가령 서두에 태현 님이 접근성이라는 말을 많이 쓰셨는데, 그 접근성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문제 삼고 있는 접근성이 흔히 ‘일반 대중’ 관객이라 여겨지는 추상적인 관객을 위한 접근성인가, 아니면 어린아이나 노인, 지체장애나 발달장애처럼 특별한 필요를 가지고 있는 이들을 위한 접근성인가를 좀 구분해서 이야기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구체적으로 관객이 ‘누구’인가를 떠올려보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대중’은 흔히 예술에 별로 관심도 없고, 공연을 보러 와서는 “난 모르겠어, 이해 안 돼, 어려워.”라고 말하며 자리를 뜨는 사람처럼 상상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특정할 수는 없어도 어떤 누군가로 상상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관객을 구체적으로 상상하는 일이 중요한 것은, 그렇게 할 수 있어야 이를테면, ‘어떤 종류의 쉬움이 필요한가?’ 아니면 ‘그 쉬움을 어떻게 해서 이루어 낼 것인가?’ 같은 다음의 질문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작업을 하면 작품에 대해 글을 쓰게 되는데, 나 같은 경우 글에 대해서 가장 많이 듣는 피드백이 “너무 어렵다.”라는 것이다. 글을 “쉽게 써달라”고 요청하는 사람들은 대개 내 글을 작품 홍보에 필요로 하는 사람들인데, 그러니까 결국 글은 티켓 구매력이 있는 사람에게 닿기 위해서 쉬워져야만 했을 것이다. 예술이 티켓 구매력을 가진 사람에게 접근할 수 있는 무엇이 되기를 요구받는다면, 그건 일종의 신자유주의적인 검열이 알게 모르게 작동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작년에 〈카메라 루시다〉를 만들 때는 이런 일이 있었다. 공연을 소개하는 글을 써서 축제 주최측에 보냈는데, 글이 너무 어려우니 고쳐 달라고 자꾸 되돌아온 것이다. 중간에서 PD님이 중재하느라 고생을 많이 하셨는데, 결국은 거의 고치지 않았다. 작품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온 관객이 공연과 함께 본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문장들로 이루어진 글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작업과 관련하여 매번 글을 어렵게 쓰는 것은 아니다. ‹카메라 루시다›는 쉬운 말 해설을 따로 만들었다. 축제측이 제공하는 접근성과 관련된 편의제공과는 별개로, 우리 프로덕션 내부에서 발달장애인 관객을 대상으로 큰 글씨의 쉬운 자료, 그러니까 공식적인 공연 소개 페이지에서 접할 수 있는 글보다 훨씬 쉽고 자세한 내용을 담은 자료를 따로 만들었고 현장에서 필요하신 분들께 배포했다.

쉽게 말로 할 수 없는 이야기가 있다면 그 이야기를 쉽게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때의 쉬움과 관객 중에 발달장애를 가진 관객이 있다면 프러덕션이 마땅히 제공해야 하는 쉬움은 완전히 다른 층위라는 생각이 든다. 발달장애를 가진 관객들이 다른 관객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에게 보다 적합한 방식으로 작품을 즐길 수 있게 하기 위해 필요한 쉬움은 소위 쉽게 떠먹여 주는 차원의 쉬움이 아니다. 그래서 쉬움을 생각할 때, 누가 이 작품을 찾아 오는지, 그 ’누구’의 얼굴을 구체적으로 떠올릴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어린이가 오는지, 여성이 오는지, 노인이 오는지, 장애가 있는 사람이 오는지, 그런 것들을 떠올려봤으면 좋겠다. 사실 대중이라는 말로 얼버무려지는 존재는 나이도 성별도 없고 신체와 정신에 어떤 결함도 없는 매우 비상식적인 존재로 상상되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실제로 예술작품을 찾는 사람들의 몸과 마음은 그렇게 획일적이지 않다.

내가 공연예술의 맥락에서 말을 많이 한 것 같은데, 미술관이나 갤러리의 경우에는 보통 텍스트가 굉장히 많고, 이때 텍스트는 단순히 홍보 글과는 다른 무엇이리라는 생각이든다. 전시장 안에 들어온 사람에게 어떤 텍스트가 제공되어야 하는지, 그것이 얼마 만큼의 어떤 쉬움을 지향해야 할지 혹은 어려움을 지향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전시에 따라 다른 맥락들이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이민주 《기울인 몸들》 전시는 접근성을 주제로 한 전시였고, 초대하는 대상도 취약한 몸을 가진 존재들이었다. 그런 맥락에서 전시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하려고 했다는 느낌이 든다. 어쩌면 장애인, 노인, 여성, 어린이 등 그 대상을 아주 구체적으로 상상한 전시일지도 모르겠다. 다만 너무 많은 몸을 품고 있어서, 그 안에서 개개인이 특정 유형으로 환원될 수 있다는 우려도 잠시 들었다. 

그리고 한편으로 그 전시에서 느꼈던 약간의 불편함이라고 하면, 쉬움의 문제가 늘 친밀함과 환대의 의미에서 ‘포용적인 미술관’을 표방하는 흐름과 연결된다는  점이다. 국제박물관협의회(ICOM)에서 2022년에 미술관의 정의를 개정하면서  모든 기조가 열린 미술관을 향해 가고 있는 것 같다. 물론 나는 미술관은 무조건 환대의 장소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환대의 의미가 예술을 설명해내거나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만들어야 하는 건 아닌 것 같다. 시내님이 앞서 말한 것처럼 예술은 언제나 이해 불가능성과 맞닿아 있으니까. 이 전시에서 제공된 음성해설은 약간 극적인 톤으로, “이건 어떤 것이에요. 이거 뭔지 아세요?” 식의 대화형이었다. 처음 들었을 때는 이해도 잘 되고 친구가 옆에서 설명해주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데, 이게 과연 맞는 방향인가 하는 의문이 생겼다. 그러니까 예술이 너무 설명적으로 되는 것은 아닌가, 자꾸 포용과 환대, 친밀함이라는 단어로 다 설명해내려고 하는 건 아닌가 싶었다. 어떻게 보면 관람의 방식을 규정해 버리는 것이 될 수도 있다. 

물론 이 점에서 약간 스스로 모순적인 감정도 든다. 한편으로는 그런 방식의 해설이 필요하다고 느끼면서도, 동시에 과연 그게 맞는가 하는 생각도 드는 것이다. 결국에는 작품 감상이 앎이나 지식의 차원으로만 수렴되는 것은 아닌가. 예술은 감각과 지식 사이에서 계속 오가면서 그 경계를 확장해가는 무언가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지금의 전시 해설이나 쉬움이라는 명목으로 풀이되는 여러 실천들은 한 가지 방향, 즉 지식 제공, 정보 전달의 양상으로 흘러가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한다. 이미지로 다뤄야 할 무언가를 언어로 선점해버리는 방식처럼 느껴졌다. 쉬움과는 정확히 맞닿은 문제는 아닐 수 있지만,  분명히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이 쉬움을 여러 각도에서 바라봐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한수민 우리 모두 예술의 언어가 익숙하다 보니, 무엇이 쉽고 어려운지를 판단하는 것이 어려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쉬움의 문제를 다른 영역에서 실감한 적이 있다. 예를 들어 내가 법률에 관한 문서를 들여다봐야 한다고 생각해보라. 생소한 용어와 문장 앞에서 작아지는 기분,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다는 느낌에 나는 무력감과 일종의 분노가 생긴다. (웃음) 이렇게 어려운 용어들로 사람들을 접근하지 못하게 막아두고,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면서 자신들의 업계를 공고히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민주 그런데 사실 법률은 해석의 여지를 많이 열어두는 영역이다. 어떤 조항이 있을 때, 어떤 변호사는 그 조항을 다른 조항과 연결해서 해석하기도 하고, 또 다른 변호사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그 조항에 접근하기도 한다. 그래서 결국 누가 더 논리적으로 조항을 해석하느냐의 싸움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나는 오히려 하나의 문장이 다양한 의미를 담기 위해 어렵게 쓰였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은 어떤 면에서는 필요한 부분이자 불가피한 지점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이전 어떤 판례에서는 특정 방식으로 해석됐던 조항이 다른 케이스에서 동일한 방식으로 해석될 때, 그 안에는 개별 사건 하나하나를 하나의 판례로 결정짓게 되는 폭력성이 작동할 수도 있다. 정확한 것과 쉬운 것은 다른 것이다. 쉬운 글쓰기, 쉬운 말들은  방식으로 대상의 의미를 고정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된다면, 오히려 작품에 대한 해석의 여지를 닫아버리는 문제가 생길 수 있다. 그러니까 분노의 감정은 이해되지만(웃음), 그런 맥락도 함께 고려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한수민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법률 용어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언어와 너무 큰 차이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나는 법을 잘 모른다. 이 분야에 대해 공부를 해본 것도, 관심을 가지고 찾아본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건 공연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이 조금만 더 관심을 가지고 공연에 대해 읽고 찾아본다면 그렇게까지 작품이 어렵게 다가가지 않을 텐데, 작품에 다가서려는 노력 없이 문장 몇 줄 읽고 바로 어렵다고 판단해 버리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다시 법률로 다시 돌아가서 생각해볼 때, 관심을 가지고 다가가려고 해도 용어 자체에서 막히는 지점이 있다. 너무 생소한 단어들, 딱딱한 한자어와 문장들이 포진되어 있는 것을 보면 튕겨져 나가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혹시 우리가 하는 작업도 그런 식으로 작동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작업 역시 법률 해석처럼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고 무작정 어렵다고만 말할 순 없겠지만, 그 가능성에 다가가기 전에 언어가 먼저 벽처럼 가로막고 있는 건 아닐까. 그래서 사람들이 그 앞에서 튕겨 나가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민주 나는 글을 쓸 때마다 자주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예전에도 어떤 글에서 이런 고민을 녹여 쓴 적이 있는데, ‘누가 내 글을 읽을까?’, ‘누가 보러 올까?’라는 생각을 자주하게 된다. 작업하는 사람들이라면 한 번쯤 해봤을 것이다. 이럴 때 나 스스로에게 위로하며 했던 말이 ‘필요한 사람이 보겠지’, ‘당장에 누군가에게 읽히지 않더라도 언젠가 비슷한 주제로 글을 쓰거나 궁금한 키워드가 연결되면 누군가는 이 글을 읽겠지’였다. 글이나 전시, 그리고 많은 창작물은 모두를 위한 것이기보다는 그냥 그 문장이, 그 주제가 필요하고 궁금한 사람들이 오는거다. 만약 어려운 법률 용어가 포함된 문장이 있다고 할 때,  절실하면 어떻게든 그 문장을 뜯어 읽고 이해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니까 튕겨져 나간다는 건, 어쩌면 그렇게 궁금하지 않은 사람일 수도 있는 거다.  

이런 맥락에서 공공기관이나 공익기관은 일반 ‘대중’을 위한 것을 만드는 역할이 있다고 본다. 구체적인 누군가가 아니라. 그러나 다른 영역에서 쉬움을 이야기해야 한다면, 절실하게 무언가를 필요로 하는 누군가를 상상하며 무언가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게 진짜 만남이라고 믿는다. 창작자가 자신의 필요에 의해 무언가를 만들고, 누군가가 그들 자신의 필요로 다가올 때, 그 만남이 진짜라고 생각한다. 

한수민 그러니까 그 필요라는 개념이 너무 좁게 상정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필요의 가능성을 계속 열어 두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법률 같은 경우에도, 내가 법조계에서 일하거나 소송을 하는 등 직접적인 필요가 생길 때는 어려운 내용을 어떻게 해서든 이해하고 찾아보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필요가 아니더라도, 삶 속에서 어떤 문제를 파악하거나 바라볼 때 그러한 앎들이 필요해지는 순간이 있다. 혹은 거꾸로, 이러한 앎이 세계를 더 복잡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그 가능성 자체에 마음이 열린 상태로 있기를 바란다.

그렇게 본다면, 예술 역시 마찬가지다. 예술가이거나 주변에 예술가가 많은 사람, 예술로 돈을 버는 사람, 작품을 구매할 수 있는 사람과 같이, 특정한 누군가가 예술을 필요로 한다고 한정되는 것은 아닐까? 사실 이렇게 생각하면 제일 필요가 없는 분야가 예술일 것이다. 예술이야 말로 없는 필요를 만들어 내는 분야라고 생각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기웃거릴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민주 맞다. 필요의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한다는 말에 동의한다. 우리가 마주하는 만남의 형태를 생각해 보라. 여행을 갔을 때처럼, 우연히 어떤 것을 마주치고 어떤 사건을 맞닥뜨렸을 때 그게 인생을 바꾸는 경험이 되기도 하지 않나. 그런 맥락에서, 수민님이 말한 것처럼, 포용적이고 열려 있는 환경이 바로 그런 예상치 못한 만남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도 중요한 것 같다. 그런 차원에서 국공립미술관처럼 ‘모두’를 위한 열린 태도도 필요하고, 그 안팎에서 특정한 누군가를 위한 구체적인 상상과 실천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둘 중 택일하는 문제는 아니다. 

권태현 나는 그런 의미에서 기본적으로 환대의 옹호자다. 하지만 그 환대가 쉬움과 어려움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사실 난 도슨트로 미술계에 입문한 사람이기도 하다. 미술을 전공하지 않았던 학부 시절, 다양한 미술관에서 도슨트를 하며 미술계에 점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도슨트를 하다 보면 정말 다양한 관객을 만나게 된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깨닫게 된 건, 통상적으로 말하는 대중이 생각보다 훨씬 높은 수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쉽게 설명해야지 사람들이 잘 알아들을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대중을 잘 모른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우리 이야기의 중요한 발견 지점은 쉬움의 다양한 층위를 잘 구분해야 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대중에게 너무 어려워서,’ ‘더 많은 티켓을 팔려면,’ ‘더 많은 관객을 유치하려면,’ ‘홍보에 유리하려면’  등의 이유로 쉬워야 한다고 말하는 방향성과, ‘어린이를 위해서,’ ‘발달장애인을 위해서,’ ‘장애인의 접근성을 확보하는 차원’에서, 무언가 쉬워야 한다는 것에 대한 관점을 구분할 필요가 있겠다.

 

환대와 복잡한 문제들

이민주 환대의 문제를 다시 한번 이야기하고 싶은데, 나 역시 환대 옹호자다. 앞서 말한 것처럼, 미술관 뿐만 아니라, 그 어느 곳에서도 서로가 서로를 배제의 감각 없이 환대하는 일은 무조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어느 장소이든지, 거부당하는 경험은 누구에게나 불쾌한 일이고, 특히 미술관이라는 공간은 공공기관으로서 더욱 열려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최근에 만난 한 시각장애인 분이 들려준 일화가 있다. 그분이 이야기해 준 건, 장애인은 혼자서 관람하는 일이 어렵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시각장애인이니까 혹은 농인이니까 옆에 붙어서 설명해 주고 그룹 안에서 단체로 관람해야만 하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어쩌면 한 개인으로서 그 공간 혹은 작품을 혼자 조용히, 자기 속도대로 경험하고 싶은데, 시각장애인이기 때문에 혼자서 작품을 보기 어려울 것이라는 그 배려의 태도가 어쩌면 또 다른 차별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관람의 방식을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이 오히려 배제의 구조를 만드는 일이 되는 것이다. 

물론 이런 식의 동반 관람이나 함께하는 경험을 제공하려는 것은 환대의 의미이기도 하다. ‘편하게 와라, 당신이 이 공간을 경험하는 데 어려움이 없도록 내가 옆에 있있겠다. 너만을 위해 있겠다’ 이런 의미일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이 마냥 긍정적인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걸 인지하는 게 중요하다. 환대의 형식에 대해선 미술관이 끊임없이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쉬운 방식으로 설명하고 친밀한 감각으로 다가가면 환대하는 거라고 생각하는 것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라시내 결국 예술의 향유나 감상의 조건이 누군가에게는 매우 어려운 조건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점점 더 인식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요즘 연극 공연을 보러 가면 공연장에 인형이나 스트레스 볼 같은 물건들을 비치한 것을 종종 보게 되는데, 평소에 가까이 알고 지내는 한 배우가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극장이라는 게 그렇게 안전하고 편안한 장소여야만 하는 것은 아니지않나?” 예술이 위험해야 한다는 그의 의견에 깊이 공감하면서도 나는 이렇게 답했다. “맞다. 다만, 당신이 말하는 ‘안전함’이 과연 누구에게 안전한 것인지 생각해보라. 이미 이 극장은 당신에게는 안전한 공간이니까, 당신은 예술이 안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걸지도 모른다. 그런데 누군가에게는 이 극장에 오는 것 자체가 이미 너무 어렵고 힘든 일일 수 있다. 당신이 상상할 수 있는 그 이상으로 훨씬 더 극장을 어렵게 느끼는 다른 몸들을 생각해 보시라.“ 물론 나도 그 인형이나 도구들이 누군가에게 실제로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는 잘 모른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그 자리에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이 공간이 자신을 초대하고 있다, 나 같은 사람이 올 수도 있을 것이라고 예상하고 준비했다는 감각을 줄 수 있지 않을까. 배제라는 감각은 실제로 배제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진짜 잘 모르는 것 같다. 그것은 ‘너는 나가’라는 식의 거절이 아니라, ‘너라는 사람의 존재를 애초에 상상하지 않았다’는 방식의 배제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제스처, ‘당신 같은 사람이 이 공간에 올 것을 상상해 보았다’가 매우 중요한 환대의 제스처라고 생각한다. 

이민주 예전에 내가 어떤 선생님과 대화를 나눴던 일이 있다. 퀴어와 장애 같은 주제를 다루는 포럼이었는데, 많은 연사 중 한분이 저시력 시각장애인이 안내견을 데리고 오게 되었다. 그런데 또 다른 연사 중 한 분은 개 알러지가 있었다. 둘이 같은 공간에 있어야 하는 상황이었고, 이건 충돌이 생기는 지점이었다. 접근성 차원에서 안내견도 들어올 수 있도록 허용했지만, 이 상황을 어떻게 조율할 것인가가 내부적으로 논의되었다고 한다. 이 행사를 그대로 진행할 것인지, 구조를 바꿔야 할지, 아니면 취소해야 할지까지 이야기되었는데, 이때 그 선생님이 말한 핵심은 ‘접근성의 요소 하나하나를 모두 충족시키는 것보다, 우리가 왜 이 자리에, 무엇 때문에 함께하려고 하는지’가 중요한 지점이었다. 모두가 온전히 편안한 상태로 경험을 나눌 수는 없고, 누군가 어떤 불편을 감수해야만  만날 수 있는 경우가 있다. 모두가 공평한 만남을 누릴 수 없을 때, 우리가 왜 이 만남을 가져야 하는지, 이 만남의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해 먼저 생각해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만약 그 만남이 꼭 필요한 것이라면, 누군가는 약을 먹고, 누군가는 마스크를 쓰는 방식으로라도 조율이 필요할 것이다.  내가 그 선생님과의 대화를 빌어 강조하고 싶은 것은 ‘모두가 불편하지 않은 만남’을 상상하는 것이 오히려 더 많은 어려움을 만든다는 점이다.

라시내 민주님이 말씀해주신 내용에 동의한다. 그 모든 일은 누구도 불편하지 않은 상황을 만들기 위함이 아니다. 물론 그 누구도 배제되지 않고 불편하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사실 그런 상황이 불가능할 때가 많다는 것을 인정하자는 거다. 그럴 때 우리는 여전히 어떤 노력을 시도할 수 있다. 나는 이 쉬움이라는 문제의 기저에 미학적인 문제가 자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마치 완전한 재현이라는 것이 가능하다는 듯이, 작품이 무언가를 재현하고 있으니, 당연히 비장애인으로 상정되는 ‘관객’은 그것을 감상하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고, 따라서 장애인 관객도 동일하게 이해해야 한다는 식의 어떤 관념. 재현은 본래 불완전하며, 우리 모두는 불완전한 감상과 해석의 과정 가운데 있는데도, 이를 완전함의 이데올로기로 은폐하는 어떤 작동이 있는 것이다. 아직은 이런 논의가 시기상조일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직은 접근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시도 자체가 여전히 턱없이 부족하고, 그렇다면 이런저런 시도들이 이루어져야 하고, 그래야만 시행착오를 거치며 상황이 더 나아질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접근성에 신경을 많이 쓰는 작업들이 이런 미학적인 문제도 같이 고민해 보면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리고 사실 오늘 우리가 여기서 쉬움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접근성 이야기도 함께 하려 하지만, 정작 당사자가 이 자리에 없다. 접근의 문제는 “당사자에게 직접 물어봐라, 뭐가 필요한지 물어봐라”가 정답이라고들 한다. 예술이 어렵냐 쉽냐, 혹은 예술 담론이 어렵냐 쉽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들이 어떤 상태에 있든 그 자체가 누군가에게 ‘어려움’을 유발할 수 있다는 점을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이 바로 ‘쉬움의 능력’이라는 생각이 든다. 

권태현 ‘모두’라는 표현을 듣고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진행했던 ‘모두를 위한 미술관’ 프로젝트가 떠올랐다. 장애인 접근성뿐만 아니라, 개를 위한 미술관, 아저씨를 위한 미술관 등으로 뻗어나가면서 유의미한 논의의 가능성을 열어낸 프로젝트였다. ‘모두’라는 것이 사실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감히 ‘모두’를 말하는 태도에 어떤 급진성이 있다고 느낀다. ‘모두를 위한’이라는 표현이 상투적으로 사용되거나 행정적으로 전유되는 경우도 있지만, 모두라는 관념을 상상하면서 생겨나는 힘이 분명히 있다. 시내님이 이야기했던 것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시도해 보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것들이 분명 존재한다. 물론 모두라는 관념은 전체주의적으로 나아갈 수도 있는 복잡한 문제를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더욱 모두를 구성하는 존재들을 세심히 돌아보고, 무엇보다 ‘모두’라고 말할 때에도 자꾸만 배제되는 존재들을 아주 구체적으로 상상해 나갈 필요가 있다.

이민주 태현님의 말에 동의한다. ‘대중’과 비슷한 맥락에서, 결국 그 ‘모두’가 누구인지 질문하게 되는 시점이다. 구체적인 대상이 설정되지 않았을 때 생기는 문제들이 있고, 앞서 언급했듯이 모두를 위하려고 할 때  충돌하는 것들이 발생하게 된다. 그런데도 이 ‘모두’라는 단어 안에 그런 충돌들이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혹은 균일한 것처럼 작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모두’는 계속 쪼개고 쪼개서, 훨씬 더 구체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는데, 현재 ‘모두’라는 하나의 대상을 상정해 두고 접근성을 가져다 붙이니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앞서 말한 안내견과 개 알러지의 충돌 같은 모순되는 상황들에 대해 어떤 목표 없이, 환대의 제스처만을 취하고 있는 듯한 상황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이런 흐름은 신자유주의적인 맥락이 분명 있다고 생각한다. 기관이 ‘모두’를 사용하는 방식은 실질적인 포용의 의미라기보다는, 기록과 숫자의 논리에 가까워 보인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왔는가, 우리는 모두에게 열려 있다는 전제 아래 얼마나 많은 모객이 가능한가, 이 프로그램에 몇 명이 신청했는가, 이 전시의 관객 수는 몇 명인가 같은 수치가 중요한 것이다.

권태현 ‘모두’라는 관념을 통해서 관객수가 늘어나는 등의 행정적으로 환영받을 일이 아니라, 정말로 문제가 되는 일이 발생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국립현대미술관의 ‘모두를 위한 미술관’ 프로젝트를 다시 생각해 보자. ‘개를 위한 미술관’이 일회성 이벤트가 아니라, 정말로 동물들을 미술관에 받아들이는 정책으로 나아간다면, 작품에 똥 싸고 오줌 싸고 감당하지 못할 수많은 문제가 있을 것이다. ‘모두’라는 말이 급진적인 까닭은 바로 이런 점에 있다. 모두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만큼의 문제를 받아들이는 것이고, 안정적인 시스템이 흔들리는 상황까지도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모두’가 그저 마케팅 용어로만 소비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민주 그러니까 ‘모두’라는 단어를 비판하는 맥락 중 하나는, 그것이 마케팅적으로 전유되는 방식으로만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단어는 태현님이 말한 것처럼, 매우 위험하고 문제적인 단어일 때 그 의미가 제대로 기능하는데, 지금은 너무 평온하고 아름다운 방식으로만 소비되고 있다. 그래서 ‘모두’라는 말에 좀 더 문제적으로 접근해보자는 비판 의식들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인데, 이제는 오히려 ‘모두’라는 단어 자체를 잘 쓰지 않게 된 것 같기도 하다.

 

쉬움의 층위, 지적 평등, 어려운 글과 쉬운 글

권태현 ‘모두’를 경유해 다시 ‘쉬움’으로 돌아가 보자. 오늘의 이야기에서 내가 여전히 가장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 모르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쉽게 풀어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런 관점 자체가 이미 어떤 대상들을 배제하고 있다. 무언가 쉽게 풀어내야 한다는 관념이 오히려 불평등을 전제한다. 이러한 차원에서 지적 평등을 상정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언급했던 랑시에르도 그의 저서 『무지한 스승』에서 지적인 능력은 결코 평등할 수 없지만, 지적인 능력의 평등을 상정하는 것의 가능성에 대하여 논한다. 이는 근본적으로 누군가를 배제하는가 배제하지 않는가의 문제이다.

이민주 태현 님이 랑시에르의 논의를 이어가고 있다는 건 알겠다. 하지만 이때 쉬운 말 해설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 조금 더 설명해달라. 어떤 방식으로 지적 평등을 전제할 수 있나? 우리가 얘기해 온 건, 쉬움이 개방성과 연결된다는 방향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어떤 종류의 쉬움은 분명히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우리가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쉬움의 종류를 나눌 필요도 있다고 본다. 이 맥락에서 보면, 나는 쉬운 말 해설도 다른 종류의 쉬움으로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하지만 태현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지적인 평등을 전제하지 않는 방식이라고 보고 있는 것인지 궁금하다.

라시내 지적인 평등을 상정하자는 태현님의 말은 어떤 기준선을 긋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오히려 그 선을 없애자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현실적으로 각자 이해하는 어휘나 지적인 수준, 언어 능력, 문해력은 모두 다른데, 어떤 선이든 그어버리는 순간, 그 선으로 들어오지 않는 바깥의 사람들이 생긴다. 

그런데 어떤 가상의 선이나 표준이 분명히 필요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든 글을 써야 하고, 전시장에서 텍스트는 필요하니까. 태현님의 말은, 과거에는 대중을 선 아래에 있다고 상정해왔고, 이제는 그 선 자체를 없애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선을 없애야 쉬운 해설과 어려운 해설의 공존도 가능한 것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든다. 

이민주 여전히 물음이 남는다. 그렇다면 어떤 형식의 글쓰기가 가능할까. 사실 쉬운 해설과 어려운 해설은 명확히 나뉘어 있는 것이고, 그건 결국 선이 그어져 있다는 뜻이다. 지적인 평등을 전제하자는 것이 어려운 말로 쓰인 글과 쉬운 말로 쓰인 글 사이에 그어진 선을 없애자는 취지라면, 우리는 이 두 가지 구분 가운데 어떤 글쓰기를 선택해야 할까. 

권태현 내 생각엔 글쓰기에 대한 가치 판단에 쉬움과 어려움이 어떤 기준으로 작동하는 것 자체가 문제다.

이민주 그건 나도 동의한다. 그러니까, 잘 쓴 글과 잘 못 쓴 글이 있다고 했을 때 누군가에게 ‘쉬운 글’이 잘 쓴 글로 여겨질 수 있지 않나? 뭔가 앞선 대화의 반복인 것 같지만, 나는 다양한 글쓰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권태현 나도 그런 관점에는 당연히 동의한다. 우리의 이야기의 출발점인 《기울인 몸들》은 특히, 아주 높은 수준의 접근성 자체가 전시의 주제이자 형식이기 때문에 전략적으로 눈에 띄는 쉬운 말 해설 등이 도입되었을 것이다. 이렇게까지 할 수 있다는 것을 하나의 모델로 보여주고, 그것을 통해 토론을 촉발시키는 것이 《기울인 몸들》 전시의 큐레토리얼 실천에서 중요한 국면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해당 사례는 관련 문제를 잘 풀어낸 사례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쉽다’, ‘어렵다’라는 관념이 예술 일반에 전혀 필요하지 않다는 문제의식이 지금 이 논점에서 더 중요하게 다뤄져야 할 것 같다.

라시내 쉬운 말 해설 작업이 특정한 기획 안에서 특히 눈에 띄어야 한다는 해석과 주장에는 동의한다. 그런데 다른 전시들에도 발달장애인이 오거나, 글을 잘 읽지 못하는 사람들, 혹은 어린이들이 올 수 있지 않나. 그랬을 때 전시에서 그런 각주나 해설이 제공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나? 

너무 어렵게 쓰는 것이 누군가를 배제하니 좀 더 쉽게 써야 한다고 말하는 경우, 사실 그때 상정되는 누군가는 우리가 말한 유령 같은 대중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진짜 시장의 검열 같다. 누구도 직접적으로 검열하지 않지만 자본의 논리에 따라 검열이 작동하게 되는 그런 글쓰기인 것이다. 나는 그 점에 대해 태현님이 비판 의식을 많이 드러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태현 님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다. 만약 어렵게 써야 할 글을 어렵게 잘 썼다고 해보자. 나도 어렵게 써야 할 글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사실 글쓰기라는 게 똑같은 내용을 써도 단어 하나를 바꾸는 것이 도저히 불가능한 경우들이 있지 않나. 이 단어는 절대 바꿀 수 없다는 감각이 있는 글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래서 그런 글을 썼다 치자. 거기에는 외국어나 한자어가 많을 수 있다. 그런데 외국어나 한자어에 대해 일일이 밑줄을 달아 설명하는 방식이 일반화되었다고 가정해보자. 이를테면 모든 전시에서 그런 식의 각주가 붙는 상황이 된다면 어떨 것 같나?

권태현 그 작업을 누가 하게 되는지가 중요할 것이다. 글쓴이가 글 전반의 내용과 맥락을 고려하여 그러한 형식을 채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경우 아주 좋은 글쓰기 형식이 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행정적으로 강제된다면, 다시 생각해봐야 할 문제이다.

라시내 아마도 당연히 전문가와 발달장애 당사자들이 검수를 하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넷플릭스에서는 청각장애인을 위한 소리 자막이 의무화되어 항상 제공된다. 이런 방식이 일반화될 수도 있지 않을까. 내가 이 질문을 한 이유는 공연을 생각해 보면 문제가 복잡해지기 때문이다. 현재 다수의 연극 공연들이 자막을 제공하고 있다. 무대 뒤나 옆에 자막이 공존하는 방식이다. 최근에 미술계에서 활동하는 한 작가님과 연극을 본 적이 있었는데, 그분이 자막이 너무 거슬렸다는 이야기를 했다. 계속 자막을 보게 되니 자막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말이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꽤 놀랐다. 나는 연극을 자주 보러 다니고, 자막 사용이 일반화된 지가 꽤 되어서, 이미 그것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내 감각 체계는 이미 적응을 했는지, 나는 그 자막이 안 보인다. 그냥 연극만 본다. 오히려 대사를 놓쳤거나 할 때 자막을 확인하는 편이고, 그럴 때면 편리하다고 느낀다. 

쉬움의 의미를 보다 넓게 생각하면 그것은 휠체어를 탄 사람이 특정 공간에 들어갈 때 겪는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쉬움을 더 좁고 정확한 의미로 사용하면, 이는 정신장애나 발달장애의 문제로 한정될 수도 있다고 본다. 그리고 이 부분에서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심적 장벽이 상당히 높다고 느낀다. 내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언어가 사실 조정이 필요하다는 점이 장벽이 높은 것 같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모로 생각해 볼 지점이 있고,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쉬운 글을 쓰라는 뜻은 아니지만 말이다.

권태현 자막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나 역시 개인적으로는 자막이 거슬리는 사람 중 한 명이다. 다만, 자막이 공연 관람 자체를 방해하기 때문이 아니라, 작업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가능성들을 축소해 버리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한다. 크리스틴 선 킴의 작업이 정확하게 이런 부분을 다루고 있지 않나. 영상 작업에서 음악이 나올 때, 자막에 음표 한두 개만 나오는 경우를 짚어내며, 자막이 당사자 입장에서도 문제가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감각적으로 펼쳐져 있는 것을 자막으로 수렴시켰을 때 발생하는 문제가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언어로 규정하기 어려운 음악이 자막에 ‘긴장되는 음악’ 혹은 ‘아름다운 음악’처럼 쓰이고 말면,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관람자가 경험하는 풍부함이 사라져 버린다. 이러한 논의는 자막을 없애자는 취지가 아니라, 끊임없이 다른 대안을 고민하며 어떻게 하면 감각들 사이의 번역을 가능하게 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가 되어야 할 것이다. 

나도 여러분께 질문하고 싶은 것이 하나 있다. 지적장애인에게 지적 보조 수단을 제공하는 것과 청각장애인이나 시각장애인에게 감각적인 보조 수단을 제공하는 것을 같은 위상으로 보아야 하는지, 아니면 조금은 다른 문제로 보아야 하는지 궁금하다.

라시내 나는 쉬운 말 해설과 그 외에 필요한 보조적인 편의를 제공하는 것은 시각장애인에게 음성 해설을 제공하거나 휠체어 이용자에게 경사로를 제공하는 것과 다를 바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이유는 그 필요성이 지나치게 간과되고 있기 때문이다. 자막이 아쉬운 경우가 많을 수 있다. 제작 여건 등을 생각하면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없었겠다는 짐작도 간다. 자막 작업 정말 어렵다.

그런데 우리가 외국어로 된 연극을 볼 때도 자막을 보며 관람하지 않나? 외국어 공연을 보면서 자막이 엉망이면 당연히 짜증이 날 것이다. 하지만 오류가 있거나 조금 엉성하더라도 아예 없어서 못 보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나는 이 문제도 똑같다고 생각한다. 자막이 제대로 된 감상을 방해하거나 작업을 납작하게 만들 수 있다. 개인적으로 나는 미술관에 붙어 있는 모든 텍스트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데, 그런 설명들이 대부분의 경우 나의 감상을 제한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인적 선호나 취향과는 별개로, 외국어 공연에 자막이 필요한 것과 같은 위상으로 모든 종류의 편의 제공을 생각해야 한다고 본다. 

나는 쉬운 말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미술관에 온다면 어떤 종류의 쉬운 설명이나 자료를 원할지 궁금하고, 그것이 어떻게 제공될 수 있을지가 궁금하다. 우리가 그런 고민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편의 제공을 개방형으로 할지 폐쇄형으로 할지 선택할 수도 있다. 둘 중 어느 쪽이 더 낫다고 단정할 수 없다. 비장애인의 입장에서는 개방형이 더 윤리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모두에게 제공한다는 것을 공시하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꼭 그런 방식이 아니더라도 미술관에서 별도의 프린트물을 제공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발달장애가 있는 경우 미리 자료를 제공하는 것이 좋다. 미리 보여주면 안 될 것 같지만, 사실 미리 보고 와야 비로소 여기서 진짜로 볼 수 있는 상태가 될 수도 있다. 첫 만남 자체를 소화하느라 만남을 할 수 없는 경우도 있으니까 말이다. 미리 미술관 홈페이지에서 현재 전시에 대해 발달장애인이 이해할 수 있는 자료를 미리 다운로드할 수 있는지에 대한 접근 같은 것이 보편화 될 때 실제로 그들이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이민주 음악에서 [긴장되는 음악] 같은 자막이 비장애인/장애인 입장에서 관람에 제한을 두거나 방해가 된다는 의견이 나왔는데, 그런 의미에서 자막을 어떻게 더 잘 쓸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에는 동의한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정말로 그런 자막이 비장애인에게 감상의 제한이 되는가라는 질문이 생긴다. 나도 그런 경험이 많다. 전혀 긴장되는 음악이 아닌데 자막에 ‘긴장되는 음악’이라고 나온다. 그러면 이 음악을 긴장하라고 썼나 보다라는 생각이 들고, 이 사람이 말한 긴장은 무엇인지 의문이 생긴다. 이 과정에서 나는 지금까지 그 흐름 속에서 느끼지 않았던 감각들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그것은 제한이나 한계로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새로운 인식 경로를 열어주는 듯한 느낌이 든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어려운 단어에 주석을 다는 방식에 대해 어떨 것 같냐라는 시내님의 질문에 나는,  전문가만이 아니라 글쓴이가 함께 주석을 만드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글쓴이가 이 글에서 특정 단어를 왜 썼는지에 대해 조금 더 문장을 덧붙인다면 어떨까. 단순히 이해하지 못할 수 있으니 단어의 정의를 적는 차원이 아니라, 내가 어떤 맥락에서 이 단어를 썼는지를 설명하면 오히려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라시내 나도 처음에는 작품 안에서 음성 해설이나 자막 같은 방식을 시도해 보고 싶었다. 왜냐하면 그것을 통해 열리는 새로운 가능성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러 과정을 거치면서 분명해진 것은, 그것이 본질적으로 그리고 원칙적으로 그것을 필요로 하는 관객을 위한 장치이지, 창작자의 지평을 넓히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물론 새로운 가능성이 주어진다면 시도해 볼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실제로 필요로 하는 관객에게 도움이 되는가 하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오히려 욕심을 줄이는 방향을 택했다. 예를 들어, 민주 님이 “글을 쓰는 사람이 직접 설명을 덧붙이면 좋을 것 같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나는 그것은 조금 다른 문제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단어에 사전적 주석이 필요할 수도 있다. 당사자의 필요를 당사자에게 직접 물어 보아야 한다. 새로운 미학적 가능성도 중요하지만, 우선은 편의가 제대로 제공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민주 결국 모든 글쓰기는 타깃(target)을 가진다. 누군가에게 읽히기를 바라는 글이 있다. 학술적 글쓰기가 동료 연구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처럼 모든 글과 작업은 누군가와 만나기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언어가 다르더라도 어떻게든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

그런 맥락에서 주석이나 쉬운 말 주석 같은 요소들은 모든 글에 무조건 적용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이 글은 누구에게 읽힐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대상을 치열하게 고민한다면, 그에 따라 필요한 방식이 자연스럽게 적용될 것이고, 그런 과정을 통해서만 보편화될 수 있다

나는 이 점이 예술에서 ‘쉬움’과 ‘어려움’의 문제와도 맞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예술이 쉽거나 어렵다는 이분법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얼마나 쉽게 닿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어떤 방식으로 여전히 어렵게 다가오는가를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이 더 중요하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예술과 글쓰기가 ‘모두에게 똑같이 쉬운 것’이 되기를 요구하기보다는, 각기 다른 독자와 관객이 처한 조건을 상상하면서 그에 맞게 열려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쉬움의 능력’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