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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로서의 스크린과의 계약:《Masochistic Screens》
김지훈
영화미디어학자, 중앙대학교 교수
곽소진 〈Para〉, 《Masochistic Screen》(2024), Ⓒ 이현석
하상현이 기획한 《Masochistic Screens》은 많은 작가들이 개별 매체와 장르의 울타리를 넘어 미술의 전통적 개념 및 가정을 심문하고 갱신하기 위한 무대와 상황을 마련하고자 퍼포먼스를 채택했던 1970년대의 맥락을 동시대의 갤러리에 재연한다. 캐시 오델은 크리스 버든, 비토 아콘치,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울라이의 피학증적 퍼포먼스에서 “예술과 일상생활에서 소외의 역학… 인간 주체와 객체 모두가 되는 감각, 예술에서 은유의 기능, 그리고 특히 예술가와 관객 대중 간의 관계1와 같은 공통의 관심사를 식별하고, 질 들뢰즈의 통찰(“피학증자가 특정한 순간과 시기에 계약으로써 수립하는 상황은 마조히즘의 상징적 언어 속에 무시간적이고 제의적으로 이미 포함된다”)2을 확장하면서 이 작가들의 행위가 마조히즘을 지탱하는 일종의 계약(contract)을 전제하고 실행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피학증적 퍼포먼스에서 계약은 퍼포머들 간에, 퍼포머와 그가 접촉하는 사물 또는 환경 간에, 그리고 퍼포머와 관객 대중 간에 수립된다. 그 계약에 따라 퍼포머의 정체성은 행위의 주체이자 대상 모두가 되고, 관객은 사진 또는 비디오를 통해 매개되는 고통의 장면을 통해 물리적 신체와 그 신체의 재현 모두를, 이 둘 사이의 긴장과 갈등을 보게 된다. 오델에 따르면 이와 같은 피학증적 계약은 “기표의 지시체 간의 분리”에서 촉발했고, 그 계약에 따른 상황들의 연출은 “고통의 효과를 복제”하는 동시에, “기표와 지시체 간의 차이를 분명히 하고 우리의 삶을 형성하는 재현을 감각할 수 있도록 분리의 역설적 필연성을 보여주었다.”3
이와 같은 전통을 고려한다면 《Masochistic Screens》에서 ‘피학증적’이라는 단어는 전시가 포함하는 퍼포먼스들이 공유하는 어떤 계약을 뜻한다는 것을, 따라서 ‘계약적(contractual)’이라는 단어로 대체가 가능함을 알 수 있다. 그 계약의 대상은 스크린이다. 전시를 이루는 세 개의 퍼포먼스에서 표준적 영화관의 스크린이나 전자 정보의 디스플레이를 위한 인터페이스로서의 스크린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모든 퍼포먼스에서 스크린은 일종의 은유로 캐스팅된다. 그 은유는 ‘스크린’이라는 기표와 이에 대응하는 지시체 간의 대응을 접합하는 동시에 문제시하는 방식으로 활성화된다. 하상현은 전시 서문에서 스크린을 “타인의 몸 앞을 가로막는 방어막이자 방어 기제(defense mechanism)” 그리고 “세계를 향해 열린 창(window)”으로 규정한다. 이와 같은 규정은 “영사되는 이미지의 수신을 위한 수직적 평면”이라는 18세기 이후부터 현재까지의 가장 범용한 의미로 환원되지 않는 스크린의 어원을 소환한다. 14세기 중반 프랑스어와 네덜란드어에서 스크린은 “화재의 열기로부터 가구를 보호하는 직립형 가구” 또는 “덮개, 방패”를 뜻했다. 즉 스크린은 주체와 외부 세계를 구분하는 보호와 장벽의 기능을 포함했다. 이와 같은 이중적인 어원과 이와 결부된 인공물의 역사를 고려하면서 최근 프란체스코 카세티(Francesco Casetti)는 스크린을 ‘영사/보호 복합체(projection/protection complex)’로 개념화한 바 있다. “여기서 ‘복합체’는 정신분석학적 의미와 경제적 의미를 모두 반영하는 것으로, 세계와의 ‘보호’된 대면을 이루는 동시에 개인을 안전한 공간 밖으로 ‘투사’하기 위한 일련의 상호 관련된 과정과 구성 요소를 나타낸다. 영사/보호 콤플렉스는 현실과 숨바꼭질하는 역할을 한다.”4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영화, 텔레비전, 비디오, 모바일 미디어의 스크린은 물론 사각의 프레임을 넘어서는 VR마저도 그 나름의 방식으로 심리적이고 지각적인 계약을 관람성(spectatorship)으로 구성한다. 그 계약은 가시성과 비가시성의 경계를 수립하고 변조하며, 관람 주체에게 물리적 현실과의 분리는 물론 특별한 보기(seeing)의 방식을 허용한다. 《Masochistic Screens》에 참여한 작가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이와 같은 계약을 환기하거나 파기함으로써 스크린이 물리적, 기술적 지지체를 넘어 이미지와 주체, 주체와 주체, 이미지와 세계 사이의 관계와 경계에 대한 은유로서 기능해 왔음을 일깨운다.
김온 〈Selfieless〉, 《Masochistic Screen》(2024), Ⓒ 홍철기
은유로서의 스크린과의 계약, 그리고 스크린이 관객과 피사체 간에 구축하는 계약을 가장 명시적으로 상연하는 퍼포먼스는 김온의 〈Selfieless〉다. 작가는 모델, 안무가, 무용수, K-pop 음악산업의 무브먼트 디렉터이기도 한 자신의 신체가 다양한 스크린과 시각 기계, 관람자가 수렴되고 이들 간의 관계가 변주되는 무대임을 일련의 폴 댄스 리허설 퍼포먼스를 통해 표현해 왔다. 〈Selfieless〉의 경우 김온은 리허설 촬영 전 아이폰의 ‘블랙 매직 캠’을 통해 스스로의 퍼포먼스를 테스트하는 촬영 상황을 재생하는데, 이는 한쪽 벽에 설치된 스마트폰으로 반영된다. 원형의 금속 무대와 폴을 스스로 설치하고 폴 댄스를 수행하는 일련의 절차가 스마트폰의 응시로 매개된다. 무대로 설정된 갤러리 공간의 뒷면에 설치된 거울은 이 일련의 절차는 물론 이를 지켜보는 관객의 모습 또한 투영한다. 투영되는 이미지는 결코 투명하지 않다. 거울과 관객 사이에는 투명 플라스틱이 일종의 장막처럼 설치되어, 퍼포머와 관객의 이미지 모두를 왜곡하기 때문이다. 즉 이 플라스틱 장막은 무대에서의 공연과 대중음악에서의 안무, 이들을 위한 사전 리허설, 뮤직비디오, 유튜브 비디오 등을 넘나들며 중첩되고 미끄러지는 아티스트의 신체를, 그리고 그 신체를 다양한 스크린과 촬영 장치를 수반하는 다수의 플랫폼과 문화적 인공물을 통해 관람하는 관객의 응시를 반영하는 스크린으로 기능한다. 이런 점에서 〈Selfieless〉는 스벤 뤼트리켄이 식별한 리얼리티 텔레비전 등장 이후의 퍼포먼스라는 맥락에 놓인다. “포스트-포디즘은 반복적인 행위뿐만 아니라 보다 개인화된 터치, 창의적인 자기-연기(self-performance)를 위해 노동자의 잠재력을 채굴하고자 한다. 점점 더 많은 ‘자발적인’ 출연자를 요구하는 접근성이 높은 포맷을 갖춘 텔레비전은 이러한 자기-연기가 발전하고 성숙할 수 있게 해준 매체였다. 이제 우리는 이 체제 안에서 일하고 있기 때문에 프로그램에 포함되지 않은 잠재력을 어떻게 발굴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부상한다.”5 이와 같은 의문에서 출발하는 〈Selfieless〉에서 왜곡되는 퍼포머와 관객의 이미지는 이 두 행위자의 욕망이 점근선처럼 서로 접근하지만 완전히 포개질 수는 없음을 시각화한다. 투영하는 동시에 감추기도 하는 스크린의 이중적인 위상이 환기된다.
스크린은 곽소진의 퍼포먼스 〈Para〉에서도 그것이 구축하고 활성화하는 관계들의 은유로서 수행된다. 이 퍼포먼스에서 관객은 처음에는 뭉쳐진 커다란 천을 펼치고 다시 접는 두 명의 남성 퍼포머를 보게 된다. 작가에 따르면 이 퍼포먼스는 낙하산을 사용할 미래의 주체를 위해 천을 접는 포장병과 현재는 부재하지만 곧 공중에서 떨어질 낙하병의 관계를 다룬다. 그렇다면 여기에서의 스크린은 관객이 현재 시제로 관람하게 되는 과거 현실의 기록뿐 아니라 그 기록이 함축하는 이전의 과거와 잠재적 미래 모두에 대한 은유다. 투사(projection)와 내사(introjection)의 동시성을 함축한 스크린의 은유적인 위상은 낙하산을 펼치고 접는 퍼포머들의 행위를 통해 신체적, 환상적, 물질적으로 연장된다. 이때 천은 신체와 물리적 공간과의 접촉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그 접촉에 따른 충격을 완화하는 표면, 포장병과 낙하병 간의 관계를 매개하고 투영하는 표면이 된다. 천이 갤러리 공간 내에 가장 넓게 펼쳐지는 순간은 이와 같은 표면이 일시적으로나마 물질적으로 현실화되는 순간이다. 결국 〈Para〉에서 천은 낙하산의 등가물을 넘어 일종의 파라-스크린(para-screen)이 된다. ‘Para’라는 접두사가 표준적인 대상을 넘어서지만 그 대상과 일정 부분 유사하고 그러기에 그 대상의 본성과 기능을 환기시키는 불완전하거나 파생적인 대상을 가리킨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즉 〈Para〉에서 천은 표준적인 스크린을 벗어나 있지만 일정 부분 표준적인 스크린과 닮아 있고 그러기에 표준적인 스크린의 본성과 기능을 그 스크린의 바깥에서 탐구하는 파생적인(para) 스크린이다.
권희수 〈스크린만이 스크린을 본다〉, 《Masochistic Screen》(2024), Ⓒ 이현석
스크린의 이와 같은 가변성은 권희수의 프로젝션 퍼포먼스 〈스크린만이 스크린을 본다〉에서 가장 물질적, 공간적, 미적으로 상연된다. 권희수는 실험영화의 전통적인 주제 중 하나로서 영화가 실행하는 특별한 방식의 보기, 그 보기를 지탱하는 신체와 영화장치에 대한 자기반영적 탐구를 영화관과 갤러리, 공연장을 넘나들며 변주하고 탐구해 왔다. 본다는 경험을 볼 수 있는 공간이자 무대라고 말할 수 있는 권희수의 설치작품과 퍼포먼스에서 빛을 영사하는 장치는 표준적인 영사기와 달리 움직인다. 예를 들어 〈그 이전의 방〉(2019)에서 관객은 360도로 천천히 회전하는 조명 장치(이 조명 장치는 셀룰로이드 필름스트립이 포함된 표준적 필름 영사기가 아니다)가 영사하는 사각형을, 그 사각형을 전달하는 광선을, 그리고 그 광선과 사각형 사이의 입자들을 보게 된다. 〈코어〉(2020)와 〈빔〉(2021)에서도 이동성을 구비한 조명 장치는 화이트큐브의 곳곳을 직선과 사각형의 형태로 비춘다. 백남준아트센터에서 전시된 〈나선 필름〉(2024)에서는 두 개의 셔터 스피드 조절 장치를 장착한 프로젝터가 360도 회전 장치와 만나 삼색의 진동하는 추상적 이미지들을 갤러리 공간 전체에 영사한다. 이 모든 작품들에서 영사기의 등가물이라 할 만한 조명 장치의 이동성은 영화장치의 물질적 구성요소에 대한 관심을 반영하지만, 영화장치의 표준적인 사용 규범에는 속하지 않는다. 고정되지 않고 상영 공간 내에서 다양한 위치를 점유하며 다수의 영사기에서 방출되는 사각의 빛 자체를 보기의 대상이자 퍼포먼스로서의 상영 대상으로 삼은 권희수의 시도는 이벤트로서의 영사를 1970년대 영국 구조/유물론 영화의 맥락에서 실험했던 말콤 르그라이스(Malcolm Le Grice)가 말하듯 “현재의 ‘구체적’ 현실과 관련하여 관객에게 가용 가능한 행동과 경험의 본성”, “‘구체적’ 차원으로서의 시간 또는 지속”, 그리고 “그 이벤트의 시/공간(TIME/SPACE) 구조화라는 관념”6에 관심을 갖는다.
이벤트로서의 영사에 대한 권희수의 관심을 연장한 〈스크린만이 스크린을 본다〉에서의 장치는 디지털 카메라가 전면에 부착된 프로젝터다. 회전이 가능한 이 장치는 한 번에 두 가지의 시각적 정보를 영사한다. 하나는 프로젝터에서 방출되는 광선이 이루는 사각형의 틀이고, 다른 하나는 카메라가 회전하면서 실시간으로 기록하는 갤러리 공간의 여러 세부들이다. 표준적 영화장치의 구성요소인 카메라와 영사기의 조합을 개조한 결과인 이 장치는 영사 장치인 동시에 기록과 보기의 장치다. 즉 카메라가 기록하는 피사체는 단순히 갤러리 공간이 아니라 프로젝터의 광선을 포함한, 일정한 시간을 점유하고 전개되는 사건으로서의 영사가 발생하는 갤러리 공간이다. 더 나아가자면 카메라가 ‘보는’ 사건은 갤러리 공간의 벽과 모퉁이가 프로젝터의 광선을 수용하면서 잠정적인 스크린 공간으로 변모하는 순간이다. 관객이 움직이는 가운데 프로젝터의 광선을 간섭할 수 있음을 감안하면, 이와 같은 잠정적인 스크린-되기는 관객의 신체에도 적용된다. 관객은 갤러리 공간 내에서 움직이면서 어디에든 위치할 수 있기 때문에 권희수가 개조한 장치 자체도 관람의 대상이 되며, 그 장치에 부착된 카메라 또한 예외가 아니다. 따라서 관객은 카메라가 실시간으로 기록하는 갤러리 공간의 시각적 인상을 카메라의 뷰파인더와 프로젝터의 광선이 구성하는 사각의 프레임 내에서 모두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동시성을 통해 관객은 영화에서 카메라의 보기가 시각적 인상의 기록을 위한 지각의 작용이라는 점을 넘어, 그 인상의 경계와 범위를 가변적으로 구성하는 스크린과 내재적으로 결부되는 방식을 볼 수 있다.
최고은 〈토르소〉, 《Masochistic Screen》(2024), Ⓒ 이현석
스크린을 계약의 대상으로 설정하고 스크린이 맺는 계약들을 상연하는 《Masochistic Screens》은 갤러리 공간을 퍼포먼스의 공간으로 잠정적으로 치환함으로써 탐구의 대상이 되는 계약의 범주를 확장한다. 인공적인 조명을 쓰지 않고 시간의 경과에 따른 자연광의 변화를 공간 내부로 반영하면서도 퍼포먼스 각각의 시간-기반 공연 포맷과 무대적인 속성을 유지하는 전시 기획은 갤러리를 클레어 비숍이 말하는 회색지대(grey zone)에 가깝게 전용한다. 비숍에 따르면 동시대 미술 갤러리에서 전개되는 퍼포먼스는 실험적 극장의 블랙박스와 전시의 화이트 큐브를 통합하는 동시에 이들 각각이 함축하는 공간, 장치, 관객성, 이데올로기가 긴장을 이루며 공존하고 경합하도록 촉진한다. 이와 같은 효과를 낳는 회색지대로서의 갤러리는 “안무 무용(특정 순서대로 무대에서 펼쳐지는 것에 대한 우리의 주의를 유도하는 시간적인 것)에서 전시 무용(보다 공간적이며 관람객이 역으로 가거나 건너뛸 수도 있는 자기 주도적인 관람이 가능한 것)으로 전환”7에 호응한다. 전시 무용으로의 패러다임 전환에서 예술작품, 관객, 관람성에 대한 화이트큐브의 프로토콜은 부정되거나 도전될지언정 완전히 소거되는 것은 아니다. 에어컨, 장롱과 같이 육중하고 변형이 어려운 가전과 가구로 작업해 온 조각가 최고은의 〈토르소〉가 《Masochistic Screens》의 퍼포먼스들과 병존한다는 점은 그런 점에서 자연스럽다. 톱으로 썰려 자신의 내부를 드러낸 냉장고는 전시 제목이 드러내는 피학증적인 절차와 호응하면서, 질문의 대상이 되는 계약이 일상적 사물과 조각 작품 간의 통상적 구분, 그리고 이들 각각을 보는 방식에 대한 계약임을 단언한다. 그러나 전시 전체의 진행 속에서 이 냉장고는 한편으로는 권희수와 곽소진의 퍼포먼스 속에 무심한 배경 사물로 통합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조각과 화이트큐브의 존재를 확인하는 동시에 심문하는 개조된 오브제로서의 위상을 유지한다. 이렇게 고려할 때, 냉장고의 표면과 틈은 퍼포먼스와 갤러리 기반 미술 각각이 설정한 전제와 프로토콜(즉 계약)을 투영하는 스크린으로 기능한다. 〈토르소〉가 이 전시 기획에 포함되어야 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1 Kathy O’Dell, Contact with the Skin: Masochism, Performance Art, and the 1970s (Minneapolis, MN: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98), 2.
2 Gilles Deleuze, Masochism: Coldness and Cruelty, trans. Jean McNeil (New York: Zone Books, 1989), 102.
3 O’Dell, Contract with the Skin, 11.
4 Francesco Casetti, Screening Fears: On Protective Media (New York: Zone Books, 2023), 14.
5 Sven Lütticken, “Performance Art after TV”, New Left Review 80 (2013): 127
6 Malcolm Le Grice, “Real Time/Space”(1972), in Experimental Cinema in the Digital Age (London: British Film Institute, 2001), 160 (강조는 원저자).
7 Claire Bishop, Disordered Attention: How We See Art and Performance Today (New York: Verso, 2024), 90.
김지훈(Jihoon Kim, Ph.D in Cinema and Media Studies)
영화미디어학자. 중앙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며, 학제간 인문 예술학인 영화미디어학의 제도화에 주력해 왔다.
《Masochistic Screen》
2024.11.20.(수) – 11.24.(일) 14:00 – 20:00
The WilloW
참여작가 곽소진, 권희수, 김온, 최고은
기획 QF(하상현)
그래픽 디자인 동동
영상 촬영 정순영
사진 촬영 이현석, 홍철기
필진 김지훈, 허호정
후원 서울특별시, 서울문화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