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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담: 사라지는 것들을 아카이빙하기(1)

 

좌담 일시_ 2024년 8월 13일 화요일
좌담 장소_ 서울 후암동 후암서재
모더레이터_ 조형빈
참가자_ 이민주, 조형빈, 하상현, 한수민

 

 

조형빈 오늘 모여주셔서 감사하다. 사전에 드린 좌담 기획안에서 보셨겠지만, 오늘의 모임은 현장에서 ‘아카이빙’이라는 주제를 둘러싸고 각자가 가지고 있는 고민들을 나누고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지 공유하는 자리로 기획하였다. 고민의 시작은 함께 작업했던 안무가들이 ‘작업에 대한 아카이브를 만들면 좋겠다’고 의견을 이야기했던 것을 여러 번 경험한 바, 그렇다면 ‘(무용에서)아카이브는 왜 필요한가?’라는 질문이 생겨났던 데에서 출발했다. 어떤 특정한 시공간을 점유한 뒤 사라져 버리고 마는 예술 작업에서 아카이빙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무엇을 위해 만들어지는지에 대한 고민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물어보고 싶었다.

개인적으로 2023년 서울무용센터 1기 입주예술가 작업 아카이브를 맡아 만들었는데, 현실적인 문제로 아홉 명 안무가의 작업을 매번 방문하여 기록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작업의 내용을 몇 번의 인터뷰로 갈음하여 정리했던 경험이 있다. 편집자로서 아카이브에 무엇을 어떻게 넣을지에 대한 고민이 많이 있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무용(특히나 리서치 과정이 중요한 레지던시 작업)에서 타당한 아카이빙의 방식은 무엇인지 기존에 존재하는 어떤 명쾌한 답이 없었기 때문에 더 고민이 되었다.

만약 잘 만들어진 아카이브라면 그것을 통해 작업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나타난 것들을 세세하게 들여다볼 수 있고 작업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어야 할 텐데, 그렇다면 그것을 구성하는 것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 오신 분들 모두 여러 가지 방식으로 ‘아카이브’라는 것과 접점이 있으셨던 분들인데, 꼭 아카이브라는 형태가 아니었더라도 퍼포먼스를 텍스트로 옮겼을 때 그것들이 작업과 병치되는 또 하나의 작업물로서 어떤 의미가 있을 수 있는지 고민하셨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 경험을 같이 나눠주시면, 다양한 층위에서 이야기를 진행해 보고자 한다.

 

저자성, 소장, 재연

이민주 나는 이 주제에 대해서 여러 번 글을 쓰기도 했고 전시나 프로젝트를 했던 경험이 있다. 그래서 여기에 어떤 말을 더 할 수 있을지 고민이 되는데, 우선은 내가 해왔던 일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시작해 보겠다. 처음으로 이야기할 만한 것은 2019년에 나와 허호정이 기획했던 《동물성 루프》라는 전시다. 이 전시는 퍼포먼스와 퍼포먼스 도큐멘테이션의 관계에 관심을 두고 작업했던 전시였다. 미술사를 공부할 때도 그렇고 온라인에서 라이브 스트리밍 등 퍼포먼스를 이미지로 경험할 때가 많은데, 이미지로만 퍼포먼스를 보게 되었을 때 그 경험의 위상을 질문하고 싶었다. 보통 사진이나 영상으로 퍼포먼스를 보게 되면 ‘진정’ 퍼포먼스를 봤다고 할 수 없다는 인식이 보편적이었는데, 이에 대한 의문이 들었던 것 같다. 이미지는 하나의 경험이 될 수 없는가? 이미지로서 퍼포먼스를 경험하는 문제에서 출발했던 전시였고, 이미지의 수행성(performativity)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고 싶었다.

이러한 관심사를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퍼폼’(PERFORM)의 PCS(Perform Collection System, 2021) 행사에서도 기획과 연구에 참여하게 되었다. 퍼폼에서 가장 큰 화두였던 것은 ‘미술관이 퍼포먼스를 소장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었다. 퍼포먼스 아트의 형식에서 현존성, 신체성, 실황성이 매우 중요한데, 이 형식의 조건을 어떤 방식으로 소장할 수 있을지 모종의 불가능성을 품고 시작했던 프로젝트였다. 다만 퍼폼 안에서도 구분을 했던 것이, 수집과 소장을 분리하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수집이 흩어진 사물을 모으는 것이라면 소장은 한 곳에 모인 대상을 미술관이라는 장소로 귀속시키는 행위다. 모으는 것과 소유하는 것은 별개의 행위라고 볼 수 있다. 퍼포먼스 형식의 근본적인 성질과 더불어 미술관의 역할과 기능에 관해 연구해 볼 수 있는 기회였다.

최근에 했던 작업으로는 아키비스트이자 연구자의 포지션으로 만든 조영주 작가의 연구서가 있다. 조영주 작가의 작업 자체가 퍼포먼스 형식으로 이루어진 것이 많다. 하드디스크로 자료를 넘겨받으니 3테라가 넘는 방대한 데이터들이 있었다. 아키비스트로서 아카이빙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나름의 정의와 기준을 가지고 시작해야 했다. 이 데이터 덩어리들을 그냥 아카이브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결국 아카이브라는 것은 지금까지 숱하게 논의되어 온 것처럼 어떤 파편들, 언어화되지 않은 물질들이 욱여넣어진 상태로 의미화를 기다리고 있는 하나의 장소 같다는 생각을 했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이 데이터 안에서 내가 무엇을 붙잡고 무엇을 붙잡지 않을지에 대한 선별 기준이 중요해진다고 할 수 있다. 조영주 작가의 연구서 작업은 일종의 매뉴얼을 만드는 것이었다. 퍼폼에서 했던 것과 유사한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내가 퍼폼 프로젝트에서 연구하고 매뉴얼을 만들었던 작가 중 한 명이 조영주 작가였다.

작품을 재현하는 방식으로서의 아카이빙은 작업의 고유한 성질에 집중했을 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맥락에서 작가가 모아둔 데이터를 통해서 실제로 과거에 존재했던 작업을 지금의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경로를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것을 ‘아카이브 항해 지도’라고 부르면서 다수의 작업 매뉴얼을 만들었다. 이 매뉴얼은 단순히 작업을 설명하거나 실물 사진을 얹는 방식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지금에 없는 작업을 아주 구체적으로 다시 쓰는 작업이었다. 이미 행해진 과거의 작업을 새로운 이미지로 상상하게 만드는 것이 중요한 방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데이터 안에는 사진, 영상 등 이미지가 굉장히 많았지만 일부러 싣지 않았다. 이 책을 보게 되면, 개별 작업의 제목과 간략한 소개가 있고 이 작업을 재연하게 될 시에 실제로 퍼포머에는 어떤 캐릭터의 사람들이 새롭게 캐스팅되어야 하는지, 어떤 공간, 어떤 연출, 어떤 오브제가 필요한지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동일한 오브제가 없는 상황이라면 그 시대와 환경에 맞춰 변주될 수 있는 가능성까지 열어두었다. 퍼포먼스 기록 영상이 있으면 영상을 기반으로 동일한 의상을 준비해야 한다는 점도 적혀 있다. 말하자면 다시 올려지는 공연을 상상하면서 정리를 한 것이다.

퍼포먼스의 완벽한 ‘재연’, 혹은 과거와 동일한 경험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모두가 이미 알고 있다. 이미지를 텍스트화하고 이 텍스트를 다시 이미지화하는 과정에서 분명히 유실되는 것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원본이라 불리는 경험과 재연이라 불리는 경험의 다름, 그 사이에서 유실되는 것들이 새로운 가능성을 품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관객들은 재연된 퍼포먼스를 통해 해당 작품을 처음 접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재연을 통해 원본을 상상하게 된다. 이런 지점들이 흥미롭다고 느꼈다. 완벽히 동일하게 반복하고자 하지만 결코 동일한 방식으로 반복되지 않는다는 것, 이것이 퍼포먼스라는 형식 안에서 아카이브, 수집, 소장의 맥락이 만들어낼 수 있는 새로운 논의거리라고 생각했다.

 

『조 0 주 Cho 0 Joo』(2022-2023) 연구서 내 아카이브 페이지

 

조형빈 그렇다면 말씀하신 작업에서 아카이브의 목적은 두 가지 정도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는 재연을 하기 위한 매뉴얼로서의 역할이 그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미지를 의도적으로 배제함으로써 원본과 재연 사이에서 유실을 만들어내는 역할이다. 거기서 나온 유실은 또 새로운 창작의 과정들을 촉발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연결되는 것처럼 들린다.

이민주 맞다. 또 한 가지, 퍼포먼스를 비물질로 단순하게 규정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퍼포먼스를 소장한다는 것이 비물질적인 작업을 물질화했다는 것만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퍼포먼스 형식을 아카이빙하는 과정이 퍼포먼스를 역사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주는 일이라고 본다. 즉, 형식 자체의 시간성을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조건이 된다는 것이다. 찰나적인 시간성을 가진 퍼포먼스가 지금의 시점에 다시 소환될 때, 이 시차에 대해서 생각하게 만들고 나아가 다양한 시간성을 상상하게끔 만든다. 이것이 아카이빙의 방식을 통해서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소장과 수집의 차이에 관해 조금 더 덧붙이자면, 미술관에서 이야기하는 소장은 언제나 반출될 가능성과 재연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는 개념이다. 수집은 한번 이루어지면 그곳에서 다시 나간다는 조건이 전제되어 있지 않은 반면, 소장은 언제나 다시 전시될 수 있는 가능성을 담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재연의 문제를 생각할 수밖에 없다.

조형빈 나는 퍼폼에 대해서 들었을 때 조금 신기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공연에는 보통 테크니컬 라이더라는 것이 있다. 어떤 특정한 공연을 다른 무대에서 재연하는 경우에 극장이 참고할 수 있도록 하는 용도의 문서인데, 말하자면 몇 명이 어떤 의상을 입고 어떤 역할을 하고 무대에는 어느 위치에 어떤 조명이 몇 개 필요하고 무대를 실어 오기 위해서는 어떤 것들이 필요한지까지, 하나의 공연을 다른 곳에 건설하기 위한 모든 것들이 아주 자세하게 포함되어 있는 문서다. 작은 공연의 경우도 물론 필요하지만 흔히 라이센스 공연처럼 대규모로 이루어지는 공연까지 하나의 공연이 초연된 곳이 아닌 다른 무대에서 올려질 때 반드시 이 테크니컬 라이더를 극장에 먼저 보낸다. 원래 작업이 올려졌던 극장의 조건과 새로운 극장의 조건이 어떻게 차이 나는지 알아야만 공연을 그에 맞추어 다시 설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퍼폼에서 시도하고 있는 여러 가지 흥미로운 요소들이 있었지만, 하나의 매뉴얼로서 기능하기를 바라는 부분은 공연을 만드는 사람의 입장에서 테크니컬 라이더와 무엇이 다른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말씀하신 바와 같이 소장의 측면에서 작품을 재연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고 그 욕망을 위해 고민하신 차원은 흥미롭게 들렸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공연의 경우 기본적으로 짧게는 하루이틀에서 길게는 몇 달까지 동일한 공연을 반복해서 올리는 예술이라는 점이다. 당연히 동일한 셋업 위에서 공연이 이루어지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 물론 각각의 공연이 완벽하게 동일한 공연이 될 수는 없지만, 변수를 최소화하기 위해 셋업을 매뉴얼화하는 것이 공연예술의 가장 중요한 부분 중에 하나다. 무대 감독이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무대 감독이 이 매뉴얼을 모두 숙지하고 공연이 그 매뉴얼에서 어긋나는 돌발상황을 실시간으로 통제하는 역할을 맡는다. 결국 가장 동일한 것으로서의 재연을 만들기 위해 모든 노력을 경주하는 것이 공연예술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지금 말씀하신 퍼포먼스의 매뉴얼들이 공연예술의 테크니컬 라이더와 겹치거나 차이나는 부분들이 흥미롭게 느껴진다. 

이민주 다른 예술 분야도 마찬가지겠지만, 미술에서 저자성(authorship)의 문제는 여전히 강하게 작동하는 것 같다. 퍼폼 안에서도 각각의 연구자들이 저마다 다른 기준으로 작가들과 컨택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작품을 수집하는 방식에 대해 고민했는데 나의 경우, 작가의 위상 문제가 중요했다. 작가에게 “작가님이 죽고 난 이후, 작가님이 없을 때 이 작업을 재상연해도 되나요?”라는 질문을 던졌고, 나는 이것을 승인받은 후에야 매뉴얼을 쓸 수 있었다. 당시 내가 연구했던 사례 중에 김홍석 작가의 〈좋은 비평, 나쁜 비평, 이상한 비평〉(2013, 2022)이라는 작업이 있었다. 이 작업에서는 저자의 위상, 작가의 위상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작업 자체가 3명의 비평가를 내세우고 작가 본인은 사라진다. 하지만 이 작업이 김홍석의 작업이라는 사실은 그가 스스로 자신의 자리를 비우더라도 그 안에서 매우 강력하게 영향력을 발휘한다. 작가가 없으면 작업으로서 구성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작가와 상의하며 매뉴얼을 쓸 때 집중했던 지점은 작업의 권한을 분산시키는 방식이었다. 이 작업에는 비평가들이 각자 쓴 비평글들이 있고 세 명의 비평가들이 심포지엄의 형태로 일종의 렉쳐 퍼포먼스 같은 것을 진행했는데, 비평글들은 김홍석이 만들었다고 가정한 가상의 작업을 대상으로 했다. 

PCS 프로젝트에서 소장과 관련한 연구는 작가, 세 명의 비평가로부터 비평 에세이와 개별 행위를 수집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도록 승인받는 것에서부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작가가 각 원고에 대한 지적재산권과 소유권을 비평가들에게 귀속시켰으나 개별 행위는 작업의 위상을 부여받지 못한다는 점이 협의 및 정리되었다. 개별 행위가 한날한시, 한 장소로 모여야 김홍석의 퍼포먼스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을 재연하게 되었을 때 그 모든 과정에서 김홍석 작가 본인의 검토나 확인은 없어도 된다. 하지만 그 개별 행위의 지적재산권을 인정해 주더라도 개별 행위가 하나의 ‘작품’으로 인정받지는 못한다. 김홍석은 작가의 자리를 비워내면서 저자성을 약화시키려는 시도를 보여주고자 했지만, 결국 이것이 김홍석의 작업으로 승인이 되기 위해서는 매뉴얼에 있는 모든 조건이 갖춰져야 했다. 그리고 그 조건을 모두 갖추기 위해서는 작가라는 울타리가 필수적인 것이었다. 꽤나 복잡한 역학이 이 안에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홍석이 작가가 없어도 퍼포먼스를 할 수 있다고 동의했던 그 의미는, 결국 우리가 작성한 매뉴얼이 원본을 고스란히 재연하는 것에 목표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과도 같다. 공연의 테크니컬 라이더와 퍼포먼스 매뉴얼의 수행자가 다른 점은 여기에 있다. 매뉴얼에 아무리 퍼포먼스에 필요한 것들을 상세히 담고 있어도 나중에 이 작품이 어떤 장소에 전시될지 모르기 때문에, 미래의 작품에 대한 판단 권한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작가에게 확인을 받았다. 만약 작가가 판단 권한을 담당 큐레이터에게 넘기겠다고 한다면 재연할 때 담당 큐레이터가 작품에 대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이다. 재연이 이루어지는 그 시점과 장소에서 더 중요한 지점이 무엇인지, 의미를 어떻게 가져가는지에 따라서 구성이 달라질 수 있는 셈이다.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김홍석의 작업은 하나의 작업 안에서 세 명의 비평가에게 작품에 대한 법적 권한을 나누어줬지만 결국 무형의 상징 자본은 작가에게 귀속됨을 보여준다. 이런 역학이 드러나는 구성을 만들어낸다면 이건 김홍석의 작업을 그대로 다시 재연해도 문제가 없는 것이라는 어떤 조건들이 있었다.

 

김홍석 〈좋은 비평, 나쁜 비평, 이상한 비평〉(2022), 《그레이박스 이후: 수집에서 전시까지》(2022), 부산현대미술관

 

하상현 동시대 공연예술에서 과거의 역사적인 공연이 어떻게 현재에 재상연되고 해석되는지가 중요한 문제인 것처럼, 미술사 안에서도 저자성이 중요하게 다뤄져 왔다. 하나의 그림을 어떤 작가가 그렸느냐에 따라 가치가 달라지는 미술계의 제도적인 관습이 있고, 이 역학을 해체하고자 하는 시도가 있었다. 플럭서스(Fluxus)의 스코어와 같은 형식이 그 예시가 될 것이다. 플럭서스는 지시문이 있다면 누구나 그 안의 퍼포먼스를 시연할 수 있는 형태를 고안했다. 이는 근본적으로는 저자성을 파괴하는 형식의 예술이며, 아마도 지금 말씀하신 김홍석 작가의 퍼포먼스 작업은 이 같은 정신의 연장선에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작업 안에서 저자성을 의문시하고 해체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모순 그 자체를 작업에 포함했다는 점이 중요해 보인다. 이는 재상연을 위해 테크니컬 라이더를 기능적으로 사용하는 방식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같은 것을 반복해서 생산해 내는 테크니컬 라이더가 가지고 있는 숨겨진 구조가 있을 텐데, 이러한 구조를 비틀고 개입할 수 있는 형식으로 다룬 공연예술가의 사례로 제롬 벨(Jérôme Bel)과 같은 안무가의 작업을 들 수도 있겠다.

조형빈 조금 첨언하자면, 테크니컬 라이더의 욕망은 원래 있었던 공연의 원본을 완벽하게 재현해 내는 것이다. 예를 들어 피나 바우쉬(Pina Bausch)의 작업들을 보자. 피나 바우쉬는 이제 죽고 없기 때문에, 그의 공연을 어딘가에 올린다고 했을 때 어떤 것이 맞는지 확인해 줄 피나 바우쉬가 존재하지 않는 상황이다. 따라서 피나 바우쉬의 모든 작업은 피나 바우쉬 재단(Pina Bausch Foundation)의 관리를 받는다. 피나 바우쉬의 작업을 어딘가에서 재연할 때 피나 바우쉬가 평생을 몸담았던 탄츠테아터 부퍼탈(Tanztheater Wuppertal)의 무용수들이 그 작품을 확인해 주기도 한다. 테크니컬 라이더라는 것이 완벽한 재현을 목표로 제공되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공연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피나 바우쉬 재단이 하는 것처럼 공연이 원전과 똑같은지 확인해 줄 공연의 안무가나 연출가가 극장에 반드시 있어야 한다. 결국 테크니컬 라이더는 참고용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주제가 흥미롭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 매뉴얼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작품을 남겨두고 작가가 죽으면 누구에게 저자성이나 권한을 넘길 것인가 하는 문제가 언급되었는데, 사실 테크니컬 라이더의 욕망은 누구에게도 그것을 주지 않겠다는 전제를 기반으로 한다. 저자성은 오로지 그 작품을 만든 저자 본인에게만 있고, 그것은 저자가 죽어도 여전히 저자 본인에게 있는 것이다. 클래식한 작업일수록 더더욱 그것을 훼손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사람들이 누군가 그것을 훼손하도록 두고 보지도 않을 것이다. 만약 누군가가 그사이에 개입하면 더 이상 그것을 그 작업이라고 간주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민주 김홍석의 작업이 보여주는 것처럼, 저자성을 넘겨준다는 것이 결국 작가 본인의 저자성을 계속 공고하게 만드는 방식이라는 생각도 든다. 퍼포먼스라는 형식에서 재연의 문제는 미술 안에서 이례적인 것으로, 다시는 재현될 수 없는 것으로 논의가 되었다. 하지만 당대 미술에서 퍼포먼스는 반복의 형식으로 부상했다. 그 과정의 중심에는 이 작가의 이름이 있을 수밖에 없다. 결국 작가의 이름은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다. 다만 미술 안에서 저자성은 무용에서와는 다르게 작동하는 것 같다. 춤은 춤을 추는 사람과 구분될 수 없지 않나. 무용에서는 아주 디테일한 제스처나 표현 방식까지 다르지 않게 재현되어야 같은 작업으로 인정되지만, 미술에서의 재현 방식은 그렇게 작동하지 않는 것 같다.

하상현 회화와 조각과 같은 물질로 남는 매체는 판매가 가능한 반면, 퍼포먼스는 그 자체로서는 판매가 불가능하다는 특성이 있다. 퍼포먼스에서의 저자성은 퍼포먼스가 비물질적임에도 불구하고 소유할 수 있는 무언가로 인식되면서, 이러한 예술이 가지고 있는 권력이나 가치, 작품을 둘러싼 여러 가지 제도적인 요소를 총체적으로 아우르면서 발생하는 것 같다. 이때 저자성의 개념과 그것의 물리적인 형식이 매체마다 같은 형태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비물질적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형태로든 존재하는 퍼포먼스의 양식에 반응하는 작업들이 있다. 계약서만으로 퍼포먼스가 판매되거나 혹은 물질적인 계약서마저도 의도적으로 없애는 방식을 택했던 티노 세갈(Tino Sehgal)의 작업을 예시로 들 수 있겠다.

 

아카이빙으로서의 퍼포먼스

조형빈 민주 님의 경험을 통해 아카이브의 목적, 형태, 나아가 저자성의 문제까지 이야기해 보았다. 지금까지 나온 이야기들 안에서 아카이브는 말하자면 (최종 결과물로서의) 작품을 어떻게 ‘저장’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였다고 생각한다. 특히나 비물질적인 것으로서의 퍼포먼스를 저장한다면 그것이 어떤 형태로 가능할 것인지 질문을 던지는 것이었는데, 사실 아카이브라는 개념에는 결과로서의 작품을 저장, 소장하는 문제도 들어있지만, 작품의 외부를 어떻게 수집하고 분류하느냐의 문제도 들어있다고 생각한다. 작품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리서치나 작업의 흔적들을 어떻게 가시화할 것인지 역시도 중요한 문제일 것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작가가 주고받은 편지, 생성했던 쪽글, 아이디어 노트, 과정에서 협업했던 기록들은 아카이브로서 무엇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아마도 이는 지금 논의했던 이야기들과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가 될 것이다. 뒤에서 차근차근 더 이야기해 보도록 하고, 다른 분들의 경험을 조금 더 들어보고 싶다.

한수민 지금 나왔던 이야기들이 매우 흥미롭다. 처음 민주 님이 조영주 작가의 연구서 작업 이야기를 시작했을 때 매뉴얼을 만들고 지도를 만든다는 점에서 내가 가지고 있는 관심사와 맞닿아 있다고 느꼈는데, 막상 결과물에 대해서 들으니 내가 상상했던 것과 상당한 차이를 보여서 신기했다. 나 역시도 비슷한 작업을 했었는데, 그 계기는 전혀 다른 곳에서 시작되었다. 나와 주변의 안무가들은 작품이 어딘가에서 재연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전혀 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공연이 하루나 이틀만 하고 사라져 버리는 것은 너무 아쉬운 일이다. 작품을 접하는 관객은 작은 극장의 객석 수만큼밖에 되지 않는데, 그렇게 소수의 관객에게만 전달되고 사라지는 수많은 작업들이 아까웠다. 결국 공연을 계속해서 유통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게 되었고 재공연처럼 자원과 자본이 많이 필요 없는 유통 방식을 찾고 있다. 말하자면 이것은 작업을 어떤 방식으로 아카이브를 할 수 있을까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어떻게 이 작업이 계속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수 있게 만들까의 문제이기도 했다.

이민주 퍼폼을 만들 때 다양한 분들을 만났었는데, 무용 분야에서 활동하는 분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흥미로웠던 것은, “무용 분야에는 소장이라는 개념이 없(었)다”고 말한다는 점이었다. 미술에서 늘 수집과 소장, 물질화하고자 하는 컬렉터의 욕망이 있었던 것과 대비된다. 무용 작업을 하던 분들이 미술계에서 활동하면서 작품을 판매하려는 시도들이 이어졌는데, 나는 그것이 미술 안에서 작동하고 있는 물질화에 대한 욕망, 작품을 한 손에 쥐어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을 그들이 느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맥락에서 출발점이 매우 다르다고 볼 수 있다. 미술에서 퍼포먼스를 소비하는 방식은 미술의 기존 문법, 소장하고자 하는 욕망을 통해서 구성되었고, 무용은 애초에 휘발하는 대상으로서, 소장에 대한 욕구나 개념이 작동하지 않았던 곳이다. 그러다 보니 다른 방식으로 아카이빙이 진행되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한수민 무용의 아카이브는 스승이 제자에게 전수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왔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유지영 안무가와 함께 ‘기다란’이라는 출판사이자 프로젝트팀으로 안무 유통에 관한 기획들을 시도하고 있는데, 확실한 건 우리의 접근법이 미술 아카이브의 수집과 소장보다는 무용의 전승과 전수에 더 가깝다는 것이다. 《납작한 안무를 열어 읽기》(2022)는 종이책이 공연을 발생시킬 수 있는지를 실험해 본 프로젝트인데, 읽는 행위를 통해서 관객들이 몸을 감각하며 공연이 발생된다고 느꼈으면 했다. 책을 통해 이것이 가능하다면 커다란 극장 없이도 어디에서든 공연을 발생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매체로 선택했던 이유는 내가 영상이나 디지털 매체를 잘 다루지 못하고, 가장 저렴하게 제작할 수 있는 매체가 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돈이 제일 덜 드는 방식이 중요했다. 참여했던 안무가들은 확실히 책을 보는 관객들의 상태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다. 공연처럼 읽는 시간의 구성이 중요했다. 독자가 몸의 부분들을 하나하나 인지하면서 다른 위치로 가져다 놓을 수 있게 하는 텍스트나 공연에 충실하게 공연에 실제 사용되었던 목소리 같은 것들을 조합해서 쓴 편지, 하루에 한 장씩 읽도록 하는 수행을 지시하는 글들이 만들어졌다. 공연을 배송해 보기도 했는데, 6개월 간 매달 안무를 보내는 《월간 안무》(2023)는 새로운 공연이 아니라 이전에 이미 공연된 안무를 보내는 것이 핵심이었다. 지난 공연의 핵심 요소, 공연을 하고 남은 잔여물들을 다시 유통해 보자는 아이디어였다. 공연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이어질 수 있도록, 공연의 움직임이 관객들에게 계속 유통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납작한 안무를 열어 읽기》(2022)

 

조형빈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보면 단순히 아카이빙의 개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공연과는 별도로 분리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작업처럼 들린다.

한수민 나는 작가들이 재탕하는 느낌으로 편안하게 참여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그건 불가능했던 것 같다. 완전히 다른 매체를 통해서 움직임을 만들어내야 하는 작업인데, 익숙하지 않은 매체를 다룬다는 것이 어려운 과제였다. 

요즘에는 나의 관심이 퍼포먼스를 어떻게 아카이빙할지의 문제가 아니라 퍼포먼스 자체가 어떻게 아카이빙이 될 수 있을지의 문제였던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아카이빙이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글을 써서 도서관에 둔다든지 하는 저장의 방식을 상상하게 되는데, 나는 대안적인 개념으로서의 아카이빙, 말하자면 몸에서 몸으로 전달되는 것들을 어떻게 포착해서 유통시킬 수 있을지를 고민했던 것 같다. 아카이빙이 불가능한 것들, 목소리와 같은 불안정한 것들은 직접적으로 아카이빙하기가 어려운데 그것을 아카이빙할 수 있는 매체가 퍼포먼스가 아닐까 생각했다. 제의가 감정을 다시 불러일으키는 일종의 매체라고 본다면, 그것 자체가 아카이빙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최근에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하상현 ‘목소리와 같은 불안정한 것들의 아카이빙’이라는 말을 들으니, 구전으로 전해지는 아카이빙에 관한 생각이 떠오른다. 구전의 방식은 시간이 지날수록 입에서 입으로 계속 변형되어서 옮겨지지만, 이를 특정한 형태의 아카이브로 바라볼 수 있다. 과거의 퍼포먼스들을 다시 돌아보면 작업 자체가 아카이빙에 대한 어떤 관점을 다루고 있는 경우가 있다. 민주 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모든 미술 작업에는 미술이 가지고 있는 수집하고자 하는 욕망, 사라지는 대상을 남기고자 하는 욕망이 보이지 않게 깔려 있다고 본다. 이런 근원적인 미술의 욕망에 대해 코멘트하는 작업이 떠오른다. 피에로 만초니(Piero Manzoni)의 〈예술가의 숨〉(Artist’s Breath, 1960)은 작가가 풍선을 불어서 고정 장치에 꽂아놓은 후, 그것이 천천히 줄어들어 결국엔 쪼그라든 풍선만 남아 있게 되는 작품이다. 고정적인 물질을 전시하는 미술관의 전통에서 숨을 재료로 삼는 것은 일종의 비판적 코멘트를 담고 있다. 그 숨은 결국에는 하나도 남지 않고 쓰레기 같은 껍질의 형상으로 남는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이 또 비싼 가격에 유통이 된다. 이런 모든 상황을 포함하는 것이 예술가가 제시한 작업이라고 보면, 〈예술가의 숨〉을 일종의 아카이빙, (아카이빙에 관한) 특정한 사건을 발생시키는 매개체로서의 아카이빙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민주 님이 기획하고 참여하셨던 《동물성 루프》와 퍼폼의 PCS에 작가로 참여했었다. 두 기획은 퍼포먼스 아카이브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해볼 수 있는 기회였다. 《동물성 루프》의 워크숍에서 리서치한 사례들을 보면 흥미로운 경우가 많다. 이브 클랭(Yves Klein)은 자신이 추락하는 순간을 사진으로 남긴 〈허공으로 뛰어들기〉(Leap into the Void, 1960)라는 작업을 발표했다. 여기서 추락하는 행위는 퍼포먼스이고 사진은 그에 대한 아카이브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실제로 그 높이에서 추락한 것이 아니었고, 사진은 아래에 쿠션을 놓고 떨어진 것을 교묘하게 합성한 것이었다. 이는 일종의 거짓이 포함된 아카이브다. 비토 아콘치(Vito Acconci)의 〈포토-피스〉(Photo-Piece, 1969)는 길가를 걸어가다가 눈을 감을 때만 사진으로 순간을 기록하는 작업이었다. 길을 걸어가는 행위의 모든 듀레이션이 퍼포먼스에 포함되어 있고, 이를 아카이브하는 방식인 ‘사진’은 오히려 눈이 감긴 순간만을 기록으로 남긴다. 이러한 작업은 아카이빙의 균열을 만들어내고 사건을 온전히 남길 수 없음을 받아들인다. 이러한 인정과 포기를 토대로 과거의 사건을 새롭게 현재와 연결시킨다. PCS에서는 작가가 아닌 다른 사람이 퍼포먼스를 다시 수행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작품의 디테일한 소장과 재상연 방식을 정하는 과정이 작업의 원래 내용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이때는 작업의 사후적인 형태가 기존 작품 자체의 역량을 증폭시키는 방식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Piero Manzoni 〈예술가의 숨 Artist’s Breath〉, 1960

 

이민주 조금 조심스럽지만, 나는 아카이빙 자체가 작업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아카이빙은 말 그대로 작업에 가닿을 수 있게 하는 어떤 장소나 공간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 형식을 차용한 다양한 방식의 작업들은 있을 수 있다. 

‘퍼포먼스로서 아카이빙을 한다’는 아이디어는 어렵고 재미있는 접근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이 퍼포먼스는 또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하는 질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질 것 같다. 퍼포먼스 형식으로서의 아카이브는 재미있는 접근이라고 생각하지만, 결국에는 또 다른 퍼포먼스 작업이 되어버릴 것이다. 아카이빙은 이 작품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발화의 순간을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비록 변형될 여지가 있더라도 여기에는 당연히 발화자가 있어야 하는데, 만약 그것이 상황이나 퍼포먼스의 형식으로 구성된다면 이것을 위한 또 다른 계기는 어떻게 만들어질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 이어질 것 같다. 

한수민 계기를 남기는 것을 아카이브로 생각하고 작업했었다. 물론 그러다 보니 또 다른 작업이 되기는 했지만. 그 계기를 만들다 보니 너무 품이 많이 들었고, 한편으로는 매체가 달라진다고 느끼기도 했다. 공연장에 있던 것들을 다른 것을 통해 계기를 만들어야 했으므로 책이 되기도 하고 돌조각이 되기도 하고 매체가 달라지면서 또 다른 작업이 되었던 것 같다.

하상현 결국 아카이빙과 아카이빙의 형태를 차용한 작업, 그 두 지점 사이에 여러 가지 형태들을 상상할 수 있는 것 같다. 나의 경우 전시 《동물성 루프》에서 멈춰있는 퍼포먼스를 기록한 영상 자체를 작업화하고자 했다. 대안공간 루프에서 발표한 〈구걸하는 포즈〉(2015)는 미술 공간 안에서 6시간 동안 조각상처럼 있었던 퍼포먼스였고, 그 시간을 기록한 영상이 있었다. 작업에서 ‘구걸하는 포즈’를 소재로 작업하게 된 계기는, 실제 길가에서 그 몸을 하나의 조각이나 사진처럼 보았던 것에서 출발했다. 이 멈춰 있는 몸과 그것을 바라보는 영상적 프레임은 연관관계를 가지고 순환하는 구조 안에 있다. 《동물성 루프》 전시에서는 오히려 영상 기록물을 더 신체성이 느껴지지 않는, 살아있지 않은 상태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고, 흐르고 있는 영상의 수많은 프레임 중 한 프레임을 늘려 정지된 사진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영상은 실제로 멈춰 있는 한 장의 사진이 재생되다가 이내 다시 미세하게 움직인다. 이때 관객은 화면에 등장하는 신체가 실제 신체가 아님을 더욱 인지할 수밖에 없었고, 어떤 종류의 감각할 수 없음을 느끼길 바랐다.

이민주 《동물성 루프》 전시에서 기획자들이 작가들에게 요구했던 것은, ‘각자가 가지고 있는 퍼포먼스 기록물을 가지고 새로운 작업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기록물을 기록물의 위상으로 남기지 않고 어떻게 새로운 작업으로 변형할 수 있을지를 같이 고민해달라는 뜻이었다. 결국 상현 님의 작업에서도 기록물은 작업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아카이브의 형식을 차용한 작업인 것이다.

 

하상현 〈구걸하는 포즈(2015)에 대한 기록 A Document of Begging pose(2015)〉, 기획전 《동물성루프》, 2019 Ⓒ강신대

 

한수민 무용 공연을 하면 다들 돈을 들여서 영상을 남긴다. 나는 그게 너무 아깝다. 돈을 써서 촬영 작가를 섭외하고 영상을 멋지게 편집하는 노고를 들이는데, 결국 결과물은 개인 하드 디스크에만 저장되어 있고 두번 다시 활용되지 않는다. 이 영상물들이 작업이라는 말로 불리지 않아도 좋으니 사용될 수 있는 방식도 고민해 보게 된다. 

하상현 그래서 윈드밀 같은 공간에서 퍼포먼스를 다시 스크리닝하는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 같다. 과거의 것을 다시 상연하는 것에 관해서 생각해 보자면,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영상이 새롭게 제작되면서 점점 먼 과거에 저장한 영상이 다시 상영될 여유와 시공간이 마련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든다. 제도는 너무 빨리 새로운 것들을 욕망하며 나아간다. 이때 새로운 것이 아닌, 다양한 교차되는 시간의 감각들이 우리에게 머물 여지가 점점 없어지는 것 같다.

이민주 그래서 아카이브가 중요하다고 본다. 결국 아카이빙은 우리가 과거를 어떤 방식으로 기억할 것인지를 고민하는 하나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한수민 나에게는 그것이 일종의 위기감으로 다가왔던 것 같다. 동료 작가들의 작업이 미래에 남지 않을 것 같다는 불안함이 그것이었다. 안무가들은 매년 작업을 만들어 올리고 있는데, 어디에도 남지 않고 사라진다면 너무 슬플 것 같다.

조형빈 말씀을 듣고 보니 아마도 아카이빙은 작업을 기억하는 방식으로 살아 있게 만드는 일종의 방법론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다만 아카이빙이 작업 그 자체를 그대로 저장, 소장, 기록하는 것에서 그친다면 지금 우리가 고민하는 문제들을 충분히 풀어낼 수 없을 것이다. 특정한 시공간을 점유하는 것으로서의 작품을 보는 관점에서는 퍼포먼스 작업들 역시도 일종의 ‘단단함’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단단함’을 둘러싸고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그리고 어떤 일들을 만들어 낼 수 있는지 쫓아가 보고 싶다. 공연이라는 예술의 형태까지 확장해서 조금 더 논의를 이어가 보자.

 

[ 2부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