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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현재적’ 춤:
전미숙 〈거의 새로운 춤〉

 

김보라 〈춤에 대해 춤 하기; 공연자 관점으로 보기〉, ©Kunst Production

 

〈거의 새로운 춤〉. 이 공연의 제목을 받아들었을 때 관객이 떠올리는 것은, 제목에 대한 몇 가지 질문들이다. ‘새로운’ 춤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춤이 새로워질 ‘필요’는 무엇 때문인가? 춤은 ‘어디에서 어디로’ 새로워져야 할까? 완전히 새롭지 않고 ‘거의’ 새로워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거의’ ‘새로운’ ‘춤’이라는, 다층적인 레이어에서 개념의 가능성들을 흩뜨리고 있는 이 작품은, 2022년 대전예술의전당에서 동명의 제목으로 축제 MODAFE에 초연되었던 작품을 다시 다듬어 올려진 공연이다. 전대미문의 팬데믹이 사회의 전 영역을 휩쓸고 있을 때 공연과 춤 자체에 대한 질문을 중심으로 만들어졌던 〈거의 새로운 춤〉은, 2024년에는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 몇 가지 동시대적 화두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올려졌다. 이 작품은 안무가 전미숙의 단일한 안무작이라기보다 리플렛에서 ‘발제 안무’라고 명명하고 있는 소품들의 집합과도 같다. 리플렛의 텍스트에서는 그것을 ‘심포지엄’이라고 이름 붙이고 있는데, ‘심포지엄’의 원래 의미와도 같이 이 공연은 네 개의 소품이 하나의 유기적인 맥락으로 엮이기보다, 춤(과 무용수)의 현재를 현상적 관점에서 각각 다르게 조명한 개별 작품의 집합체와도 같은 모양을 취하고 있다. 무대에서 안무가 전미숙은 ‘심포지엄’ 중간중간에 나와 춤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음으로써 작품을 연결하거나 안무가의 관점을 직간접적으로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다.

〈거의 새로운 춤〉이라는 작품의 제목이 촉발하고 있는 여러 질문들은 우리로 하여금 춤의 현재적 시간성과 춤의 처지, 춤의 미래와 같은 것들을 생각해 보게 만든다. 만약 이 작품이 춤이 새로워질 것을 요구하거나 춤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것이라면, 기존의 춤이 가지고 있었던 춤의 미학과 역사를 되짚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춤에 대한 동시대적 접근들, 말하자면 근대적 형상으로서의 춤이 폐기되고 난 뒤 벌어진 춤에 대한 방법론적 난장, 그리고 그 후에 오는 ‘모든 종류의 체계’로서의 춤이 난립하는 지금에 있어서 춤이 다시 한번 새로워져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마텐 스팽베르크(Mårten Spångberg)와 같은 안무가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그것이 만약 ‘춤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라면, (스팽베르크 역시도 끊임없이 되묻고 있는) 춤이 지금 처해있는 그것의 처지를 돌아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춤은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있고 그 위기는 어떻게 극복될 수 있는가? 혹은, 그것은 반드시 극복되어야만 하는 것인가? 거기에서 춤의 가능성은 무엇인가?

따라서 결국 새로운 춤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지금의 춤을 이야기하는 것과도 같다. 사회가 단절되고 공공의 공간이 빗장을 걸어 잠갔던 팬데믹의 시기에 공연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끊임없이 제기되어 온 바 있다. 이 ‘새로움’을 요구하는 빗발치는 주장들은 결국 ‘온라인’, ‘영상화’ 같은 코드로 손쉽게 귀결되어 버리곤 했지만, 이런 시도들은 춤에 있어서 춤만이 가질 수 있는 매체적 본질은 이런 방법들을 통해서는 결코 전달될 수 없다는 사실을 더욱 명확하게 드러낼 뿐이었다. 그렇다면 춤의 본질로 돌아가서, 그 본질을 바탕으로 바라볼 수 있는 춤의 대안, 새로운 삶의 양태에 조응할 수 있는 춤의 가능성들은 무엇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여기에는 당연하게도, 이미 변해버린 우리 삶의 모습과 그 모습을 추동하는 정동에 대한 고민 역시도 필요해질 수밖에 없다. 〈거의 새로운 춤〉이 미래의 단단한 형상을 제시하는 대신 현재를 성찰적으로 돌아보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거의 새로운 춤〉에서 보여지고 있는 네 가지 소품은 저마다 완전히 다른 작품이기 때문에, 이 작품을 확고한 틀을 가진 하나의 작품으로 바라보기는 어려울지 모른다. 다만 관객은 이 작품에서 떠오르는 안무가의 존재를 느끼기보다, 춤의 현재적 형상을 묶어내고자 하는 가라앉는 존재로서의 ‘심포지엄’을 체감할 수 있을 뿐이다.

 

목소리, 발화, 존재

‘심포지엄’의 문을 여는 것은 김보라, 박상미, 최수진, 최낙권이 공동 창작한 〈춤에 대해 춤 하기; 공연자 관점으로 보기〉(이하 〈춤 하기〉)다. 무대 뒤편에 커다랗게 ‘준비’라는 단어가 투사된 상태로 공연이 시작되고, 네 명의 무용수가 등장해 의자에 앉는다. 김보라의 리드를 통해 무용수들은 서로 대화를 나누는데, 뒤에 투사된 단어가 이들이 만들어내는 대화의 주제가 된다. 이 주제어들은 무용수로서 공연을 준비하고 완성하는데 이르기까지 거치는 여러 과정들을 묘사한다. ‘준비’, ‘등장’, ‘퍼스트스텝’ 등 무대를 만들고 선보이는 여러 단계들을 분절하고, 이 단계들 안에서 무용수 스스로가 처했던, 혹은 가지고 있었던 생각들을 푸는 방식으로 대화가 이어져 나간다. 말은 단순히 대화에서 그치지 않고 무용수 각자가 가지고 있는 경험들이 직접 몸으로 이어지며(모델 일을 했을 때의 워킹과 무용수로 무대 위에 섰을 때의 워킹이 어떻게 다른지, 그리고 그 몸의 형상을 만들어낼 때 어떤 생각과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는지 등) 움직임들을 만들어내고, 이를 통해 “춤의 의미를 발생, 확장”1한다. ‘춤에 대해 춤 하기’라는 제목은 춤이 만들어지는 과정들을 관객이 아닌 “공연자 관점으로” 봄으로써, 관찰당하는 대상으로서의 춤이 아니라 춤 안에서 그것을 능동적이고 주체적으로 개념화하는 행위자로서의 무용수를 다시 들여다볼 수 있도록 유도하는 일종의 장치다.

따라서 이 작품에서 선보이는 대화가 가리키는 곳은 단순히 ‘춤’ 그 자체가 아니라, ‘춤추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춤 추기’가 아닌 ‘춤 하기’라는 제목에는 바로 이러한 의도가 깔려있다. 어떤 것을 ‘한다’는 것에는 그것을 둘러싼 총체적인 행위가 포함된다. 뿐만 아니라 그 행위를 가능하게 한 구조와 그 구조에 영향받는 행위자 자신들까지도 포함하는 것이 ‘-하다’라는 표현에 함께 들어있다. 〈춤 하기〉는 무대를 만들고 구성하는 안무가와 무용수가 스스로의 목소리를 통해 시간과 경험을 무대 위에 놓음으로써, 공연자라는 정체성과 주체성을 탐색하고자 한다. 그러면 이제 자연스럽게 또 하나의 질문이 떠오른다. 이러한 춤추는 ‘사람’의 목소리는 (거의 새로울) 춤에 대해서 무엇을 제시할 수 있는가? 무용에서 대사, 혹은 대화를 방법론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결코 낯설지 않은 일이다. 목소리 역시도 몸의 일부로서 하나의 안무적 구성 안에 들어갈 수 있다는 목소리에 대한 유물론적 접근이 아니더라도, 무용수(혹은 배우)의 목소리를 통해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은 무용 안에서 끊임없이 시도되어 왔다. 목소리는 몸이 가지고 있는 층위와 다른 의미에서, 그렇기 때문에 때로 더욱 강력한 정치적 힘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널리 알려진 제롬 벨(Jérôme Bel)의 〈베로니크 두아노〉와 같은 작품에서는 바로 그 ‘목소리의 힘’이 전폭적으로 드러난다. 〈베로니크 두아노〉에 등장하는 유일한 무용수인 베로니크 두아노(Véronique Doisneau)는 자신의 목소리를 통해 은퇴를 앞둔 군무진 무용수인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는데, 이 작품에서 안무가 제롬 벨이 두아노에게 목소리를 주었던 것은 비체(abject)로서의 몸에 주목함으로써 무대 위의 주체성(subjectivity)을 전복시키기 위해서였다. 여기서 목소리는 가려졌던 군무 무용수의 몸을 가시화시킴과 동시에, 무대 위에 작동하고 있었던 주체성을 공격하고 그 위계질서를 무너뜨림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새로운 주체들을 발견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스스로의 정체성을 조심스럽게 고백하는 두아노의 목소리는 발레라는 강력한 구조가 은폐하고 있던 무대의 정치 역학을 뒤집는 파괴적인 힘 그 자체였던 것이다.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가 『신화론』에서 신화를 “전언을 생산하는 방식에 의해서 규정”2된다고 정의한 것과 같이, 말을 통해 어떤 것을 의미화한다는 것은 그 말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적 체계와 구조를 말 위에 함께 얹는 행위와도 같다. 말이 가지고 있는 정치적 잠재성이 바로 그 말이 세계를 움직이게 하는 힘이라는 것이다. 무용에서 목소리를 활용하는 것은 그래서 강력한 힘을 갖는다. 그 목소리가 스스로의 정체성(주체성)을 이야기하는 것이든, 타자와의 소통 안에서 빚어지는 갈등을 표출하는 것이든, 그것이 의미가 되기 위해서는 몸과 다른 층위에서 현현하는 정치적-몸을 활용할 수밖에 없고, 또 활용해야만 한다. 〈춤 하기〉에서 말을 통해 구현되는 것은 “안무적 수행의 도구가 아닌 창작의 주체”로서의 정체성이다. 그러나 여기서 만들어지고 있는 공연자의 정체성은, 몸 혹은 무대, 그도 아니면 관객과 시선의 정치학의 층위에서 위계질서를 전복하기에는 힘에 부치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이 극복하고자 하는 안무적 구조가 말이 갖는 명확함에 밀려 효과적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커튼 뒤에서 공연을 준비하는 과정이나 모델로서의 워킹을 재현할 때, 말과 몸은 안무와 충돌하거나 뒤틀려서 존재에 균열을 일으키기보다 경험과 기억을 차분히 전달하는 역할에 그치고 만다. 오히려 그것들은 구조를 충실히 묘사함으로써, 몸(무용수)을 ‘신화’로서 끌어올리는 대신 구조 자체가 무대 가운데에 우뚝 서도록 만든다. 말이 몸을 차지했을 때, 혹은 몸이 말을 차지했을 때 벌어지는 전복의 가능성들 대신에 말을 따라가는 몸, 몸을 따라가는 말들이 무대를 채운다. 결국 그래서 중요한 것은 질문이 된다. 〈거의 새로운 춤〉에서 무용수 혹은 안무가의 현재적 위치를 짚는 출발점의 역할을 하는 〈춤 하기〉가 재현하고 있는 것은 무용가가 처한 위치성이다. 이들의 입을 통해 나타나는 질문들은 ‘신화’를 둘러싼 구조를 상상하게끔 만든다. 그리고 그 구조와 길항하는 몸을 만들어내는 것은 말이 가지고 있는 정치성일 것이다. 〈춤 하기〉는 한계에 부딪히는 몇몇 지점들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 상상력을 통해 구조를 넘어서고자 시도한다. 말의 힘을 통해 ‘새로운 춤’은 바로 여기, “창작의 주체”로부터 출발할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안무가의 제안이 〈춤 하기〉의 무대를 가로지르는 목소리다.

 

김보라 〈춤에 대해 춤 하기; 공연자 관점으로 보기〉, ©Kunst Production

 

트랜스-되는 신체

관계와 소통에 대한 부드럽고 명쾌한 움직임을 보인 〈없는 변화; 접속할수록 고립된다.〉를 지나, 세 번째 작품 〈춤과 노동 사이; 포스트 휴머니즘에 대한 안무적 고찰〉(이하 〈춤과 노동 사이〉)에서 발제 안무를 맡은 신창호는 이 작품에서 노동과 포스트휴머니즘을 접목시킨다. 기술과 무용 사이에서 꾸준히 실험을 거듭해 오던 신창호는 이미 2020년의 작품 〈비욘드 블랙〉에서 인공지능 프로그램 ‘마디’를 활용한 안무를 선보인 바 있다. 무용수들을 통해 다양한 움직임들을 인공지능에 학습시킨 후 프로그램이 조합한 안무가 무대 위에 현현되었을 때 어떤 균열을 일으킬 수 있는지 살펴보는 것이 〈비욘드 블랙〉이 던진 질문이었다면, 〈춤과 노동 사이〉는 이러한 안무 생성 – 학습 구조에서 인간 무용수의 노동이 어디로 사라지는지(혹은 어디에서 재-출현하는지)를 살펴보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무대가 시작되면 발제 안무를 맡은 신창호와 무용수가 인공지능과 안무에 대한 대화를 나누고, 검은 옷을 맞춰 입은 일군의 무용수들이 나와 지극히 ‘무용적인’, 그러나 기계에 의해 생성된 춤을 선보이는 것으로 이어진다.

포스트휴머니즘은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난 관점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것으로, 동시대 예술과 철학 담론에 있어서 빠질 수 없는 주제가 되었다. 근대 이후의 인식론적 세계관이 (확고한)이성을 바탕으로 건설된바, 세계의 중심에는 언제나 ‘인간’이 있어왔다는 것이 주지의 사실이다. 이러한 이성적 세계관을 의심하고 주체와 객체의 이분법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나타난 다양한 인식론들이 결국 ‘인간’의 개념을 파훼하고 사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주장에 다다른 것은 필연일 수밖에 없었다. 포스트휴머니즘의 다양한 갈래들은 사이버네틱스, 동물성, 사물 그 자체와 같이 저마다 다른 방법론으로 비-인간적 세계관을 정립하고자 시도하지만, 결국 이들이 공통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과 사물의 이분법을 어떻게 해체하고 세계를 사물로부터 출발시킬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지향점으로 모인다. 포스트휴머니즘이 이야기하는 사물성은 단지 사물의 물리적 조건들에 국한돼서 발현되는 것이 아니기는 하지만, 만일 인간중심주의가 출발하는 곳을 인간 몸의 차원으로 간주할 수 있다면 기실 이 포스트휴머니즘의 맥락은 무용 안에서도 오래전부터 논의되어 왔던 주제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이 아닌 것을 어떻게 ‘춤추게’ 할 수 있을 것인지 고민하는 근원적 질문에서부터 인공지능이 생성해 낸 춤을 인간의 몸에 싣는 최근의 현상에 이르기까지, 무용은 춤이 인간의 몸 ‘위에’ 있기 때문에 언제나 인간의 너머를 고민할 수밖에 없었던 예술이었다. 안드레 레페키(Andre Lepecki)는 안무가 사물들을 다스리기 위한 조건으로서 물질과 몸을 통제하는 안정적인 체계라고 한다면, 사물은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규정되지 않은 특이성을 통해 안무를 모호한 것으로 바꾸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3 결국 안무 안에서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인간의 몸이든, 혹은 오브제이든), 그 자체를 비-인간 사물로 보았을 때 안무의 조건들을 전복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그것은 무용이 인간을 중심으로 발생한 예술이기 때문에 태생적으로 반드시 포스트-휴머니즘을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주장이기도 했다.

〈춤과 노동 사이〉는 무용과 포스트휴머니즘이 교차되는 이러한 고민의 흐름 안에서 저자성의 영역을 사물에 위임했을 때, 거기에 남는 것이 무엇일지를 질문한다. 저자성은 본질적으로 그 안에 주체-대상의 이분법을 내포하고 있는 개념이므로, 저자성을 질문한다는 것은 곧 무엇이 대상(사물)이 될 수 있는지, 그리고 사물이 된 몸들이 어떻게 안무의 주체를 역전시킬 수 있는지를 질문하는 것과도 같다. 〈춤과 노동 사이〉의 무대에서 무용수들이 AI가 구성해 낸 안무를 춤으로써 대상화(사물화)되는 것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AI가 차지한 저자의 위상이 그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을 ‘몸에 쓰는’ 무용수들의 몸 그 자체다. 저자와 몸이 사물의 탈을 쓰고 사물의 욕망을 드러냈을 때 거기에서 출현하는 것은 무엇인가? 레페키는 무용수가 자신의 몸을 통해 ‘개성’을 강화하는 ‘인간성’의 욕망을 넘어서서 사물이 될 수 있다면, 안무의 저자성을 재규정할 수 있다고도 이야기한다.4 〈춤과 노동 사이〉는 이 사물화의 과정을 ‘빈 노동’의 장면으로 재현한다. 저자가 스스로 주체의 위상을 내던져버렸을 때, 다시 말해 사물로서의 AI가 마찬가지로 사물인 무용수의 몸을 통해 출현했을 때 인간의 노동이, 그리고 예술의 맥락이 어떻게 공허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거의 새로운 춤〉의 공연들이 무용, 그리고 무용수의 시대적 상황을 고민하고 재현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가운데, 〈춤과 노동 사이〉는 무용수의 몸이 “감정, 상징체계, 의지의 표현”5과 같은 것들을 삭제한 사물이 되었을 때 나타나는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작품은 인간의 개념을 사물로 대체하는 포스트휴머니즘의 관점에서 저자성과 예술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지만, 〈춤과 노동 사이〉가 만들어내는 무용 미학적 균열의 문제들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이미 AI가 생성한 이미지들만으로 이루어지는 경매가 출현한 바와 같이, 시각예술을 중심으로 동시대 창작의 영역에서 AI가 만들어내는 ‘작품’들은 다양한 문제를 촉발시키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특히 무용에 있어 AI를 둘러싼 문제들은 조금 더 독특한 위상을 가진다. AI가 만들어낸 ‘안무’, 스켈레톤을 통해 조합한 움직임을 창작에 응용하는 AI 안무의 방식은, 기계에 의해 기능된 개념이 인간의 몸에 다시 접합(안무 학습)된다는 점에서 포스트휴머니즘적이라기보다 오히려 트랜스휴머니즘적인 특성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어떤 AI 회화 ‘작품’도 AI가 생성해 낸 이미지를 인간 화가가 그대로 페인팅한 후에 그것이 완성된 AI 작품이라고 선언하지 않는 상황에서, AI 무용 작품의 경우는 AI가 만들어낸 움직임들을 반드시 인간의 몸 위에 구현(부착)해 낸 후 AI에 대한 인간의 ‘패배를 선언’해 버리고 마는 특징을 가진다. 또 한편으로 어떤 비-인간적인 모습들, 이를테면 음악과 움직임의 완벽한 결합, 군무의 구성적 변환과 이를 통한 배리에이션, 스펙터클의 생성과 남성적 몸의 구현과 같은 근대적 무용의 형상들은 역설적으로 이미 그 자체 포스트휴먼의 알레고리를 내포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무용이 ‘안티-휴머니즘’적인 근대적 몸을 넘어서서 포스트휴머니즘을 이야기하는 것은 동시대 예술에 있어 어떤 의미를 가질 것인가? AI가 만들어낸 안무를 통해 구성된 〈춤과 노동 사이〉는 그렇게 인간이 아니게 되어버린 몸을 통해 구현된 인간-아닌-것들과, 그것이 보여주는 비-인간-객체로서의 무용수의 몸을 중첩시키며 동시대 ‘휴머니즘’의 문제들을 끊임없이 흔들어놓는다.

 

신창호 〈춤과 노동 사이; 포스트 휴머니즘에 대한 안무적 고찰〉, ©Kunst Production

 

시간의 춤

마지막 네 번째 차진엽이 ‘발제 안무’한 〈새롭게 포맷되는, 오래된 춤과 새로운 설정의 공존〉(이하 〈공존〉)에 이르러 안무가 전미숙은 작품에 흘러들어온다. 무용가로서 시간을 어떻게 감각하고 고민해야 하는지 풀어놓는 이 소품은 아마도 전미숙의 목소리와 가장 근접해 있는 작품일 것이다. 40대 중반을 지나는 무용수로서 고민하고 있는 차진엽, 그리고 같은 고민을 이미 오래전에 지난 경험자로서 전미숙은 나이 듦의 문제가 얼마나 ‘현재적’인 것인지 무대 안에 세운다. 두 사람은 직접 무대 위에 서서 나이와 몸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각자가 시간을 어떻게 파악하고 흘려보내고 있는지에 대한 고민을 꺼내놓는다. 무용수가 스스로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방식으로서의 몸은 결국 그 물질성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에 따라 역할을 달리한다. 여기에는 몸을 수단, 통로, 장애물, 혹은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하나의 (대체된 존재로서의) 사물로 파악하는 것과 같은 것들이 모두 포함된다. (안무가가 아닌) 무용수의 몸은 계속 변화하고, 무용수는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극복하거나 거부하는 선택을 해야만 한다. 이 절대적인 ‘재료’의 변화는 무용이 받아들여야만 하는 숙명이자, 무용을 새로운 길로 나아가게 할 수도 있는 가능성이기도 하다.

〈공존〉에서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몸의 상태, 그리고 변화하는 대상으로서의 몸을 받아들이는 무용수의 주체성을 차진엽은 물의 이미지로 표현한다. 차진엽의 이전 작업 〈원형하는 몸〉연작에서 몸의 원형으로서 물이 만들어내는 파동과 유동적인 속성을 이야기했다면, 〈공존〉은 물의 또 다른 속성, 끊임없이 어디론가 흘러감으로써 만들어내는 변화(노화)의 이미지들을 활용한다. 무대 전체에 넓게 투사되는 이미지들은 한순간도 멈춰있지 않은 흘러가는 이미지들을 만들어내며, 이는 차진엽 개인이 경험했던 프리다이빙의 이야기들과 교차되며 변화를 겪고 있는 몸 그 자체를 드러낸다. 물의 유동적인 이미지는 몸으로 하여금 흘러가는 시간이 투과하는 중간적 매체로 간주하게 하는 감각을 제공하고, 시간과 노화의 개념은 몸 안에 수용해서 품는 것이 아니라 다만 흘러가게끔 두는 관조적 차원의 감각으로 남는다.

무용수에게 있어 노화를 비롯한 몸의 변화는 협상의 대상인가? 몸이 곧 작품의 재료이자 무대가 되는 무용에 있어서, 몸(의 상태)의 변화는 작품의 방향성 자체를 바꾸어버릴 수 있는 주요한 모멘텀이 된다. 몸은 단지 주제가 펼쳐지는 매개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주제이자 메세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것은 몸의 의미를 전면적으로 주제화하는 현대무용에서 더더욱 그러하다. 나나코 나카지마(Nanako Nakajima)는 무용에서의 나이 듦이 젠더의 사회적 구성과 연관되어 있음을 밝히며 젊음, 신체적 힘, 스태미나와 같은 가치들이 무용 예술 안에서 조명받는 상황이 어디까지나 문화적 맥락에서 구성된 범주임을 밝힌다.6 나카지마의 분석처럼 부토를 대표로 한 일본 무용에서의 나이 듦이 서구적 문화에서의 나이 듦과 다를 수 있다면, 이것은 무용을 더욱 넓게 해석했을 때 현대무용이 몸의 변화에 대해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을 예고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몸이 드러낼 수 있는 다양성, 동시대 안무 작업들이 끊임없이 몸의 가능성을 발굴해내고 있는 시대에 이 다양성을 주목하고 표면화시키는 것은 (현대)무용이 가진 숙제이자 운명일 수 있다. 매체적 몸의 국면에 그치지 않고 몸을 전면적으로 의식화 시키는 지금의 무용이 나이 듦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것은, 무용수의 현재적 처지를 고민하는 것을 넘어서서 안무의 영역과 그 질문을 확장하는 데에도 핵심을 차지하는 자연스러운 수순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빠르고 강하고 탄력적인 몸이 활공하는 무대는 역설적으로 빠르게 소진된다. 차진엽의 〈공존〉은 힘차고 도전적인 ‘건강한 몸’을 넘어서는 시간적 몸, 스러지는 안무를 고민하게 하는 ‘유동적인 무대’다.

마지막 ‘발제’, 그리고 다른 ‘발제’의 중간중간 나타나 관객에게 고민의 지점들을 이야기하는 전미숙의 목소리는 이 작품에서 가장 강력한 힘이다. 수십 년의 세월을 거치며 무용수, 그리고 안무가로서 해온 몸과 춤에 대한 이야기들은 전미숙의 대사 하나하나에 묵직한 무게를 싣는다. 그러면서 동시에 수없이 해왔을 질문을 다시 던진다. ‘지금의 무용(수)은 어떻게 새로울 것인가?’ 〈거의 새로운 춤〉은 ‘심포지엄’의 형태를 띠고 다양한 무용수와 안무가의 입장에서 무용을 어떻게 고민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여러 개의 ‘발제 안무’를 꿰는 것은 안무가 전미숙이 감각해 온 시간이다. 전미숙의 목소리는 지금의 무용이 당면하고 있는 과제들을 오랜 시간의 궤적을 통해 다시 들여다보게끔 한다. 결국 이 작업은 시간과 몸의 대한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다. 이 뀀의 과정을 하나의 안무로 간주할 수 있다면, 안무가가 바라보고자 하는 것은 춤의 새로움, 다시 보는 몸의 의미일 것이다. 우리는 현재를 통해 어떻게 ‘새로움(미래)’을 설계할 수 있을 것인가? 춤의 현재성은 어떻게 새로움과 교차될 수 있을 것인가? 새로운 것이 ‘춤’이 아니라 ‘춤꾼’이라면, 혹은 ‘춤꾼’이 아니라 ‘춤’이어야 한다면, 그것을 새롭게 만드는 것은 어떤 방법으로 가능해질 것인가? 〈거의 새로운 춤〉은 (안무가의) 긴 시간이 무용가들의 현재에 틈입하면서 발생하는 수많은 문제들을 수면위로 떠올린다. 어떻게, 현재를, 그리고 춤을, 새롭게 만들 것인가.

 

차진엽 〈새롭게 포맷되는, 오래된 춤과 새로운 설정의 공존〉, ©Kunst Production

 


1 〈거의 새로운 춤〉 공연 리플렛에서 발췌.
2 롤랑 바르트, 『신화론』, 정현 옮김, 현대미학사, 1995, p.16.
3 Andre Lepecki, Singularities: Dance in the Age of Performance, Routledge, 2016, p.36.
4 위의 책, p.37.
5 〈거의 새로운 춤〉 공연 리플렛에서 발췌.
6 Nanako Nakajima and Gabriele Brandstetter, The Aging Body in Dance: A cross-cultural perspective, Routledge, 2017, p.18.

 

전미숙 〈거의 새로운 춤 Desalto Quasi Novus〉

2024.6.7(금) 20:00
2024.6.8(토) 15:00, 19:00
2024.6.9(일) 15:00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안무 전미숙
발제 안무 김보라, 김동규, 신창호, 차진엽
출연 정태민, 박상미, 최수진, 임샛별, 최낙권, 이정민, 장지호, 정건, 정하늘, 박지희

드라마터그 제환정
무대디자인 이태양
의상디자인 퍼틀랜드 최인숙
콘셉트디자인 전수환
VR아티스트 탱자필름 이정민
홍보영상·공연기록 Kunst Production 전혁진, 탱자필름 이정민
프로젝션 맵핑 장주희
영상촬영·제작 KIMWOLF
시각디자인 금종각
음악 강태원, 장지호
조명감독 김정화
무대감독 스텝걸작 이도엽
마케팅 홍현정
기획 국지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