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4
생동하는 유령들의 집:
김현진 〈미세행성〉
하은빈
〈미세행성〉(2024), ©김현진
이 공연을 유령적인 무엇으로 기억하는 데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다. 이를테면 짙은 어둠에 휩싸인 텅 빈 주택의 실내 풍경이나, 간헐적으로 맨살을 드러내는 얇은 옷차림으로 몽유병자처럼 배회하는 여자들, 이유도 맥락도 없이 크지도 작지도 않게 달그락 내지는 절그럭 소리를 내곤 하는 사물들… 희끄무레하게 화면 위로 어른거리며 움직이는 형상들은 그 자체로 얼마쯤 기괴하기도 했다. 움직임의 폭 자체는 밀리미터 단위로 미세했으나 움직임은 부드럽고 유기적이라기보다는 기괴하고 분절적이었다. 네발로 기거나 뒤틀리는, 때로 앞뒤가 까뒤집히는 이들의 형상은 히스테리증자로 의학 교과서에 실린 여인들의 기록사진을 연상시켰다. 귀신인 듯도, 귀신 들린 몸들인 듯도 싶었다.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짙은 어둠 속에서 이 모든 것을 가시화하는 것은 관람자들의 손에 쥐어진 야간투시경이다. 렌즈를 통해 아주 작은 빛을 증폭시켜 스크린에 띄우는 이 기계는 일종의 카메라이면서, 화면이 이미 큰 폭으로 줌-인되어 있다는 점에서는 망원경이고, 3분 단위로 끊어지는 영상을 녹화하는 기능을 가졌다는 점에서는 캠코더다. 온통 어둠뿐인 환경 속에서 관람자는 전적으로 투시경에 의지하여 이동해야만 한다. 쉽지만은 않다. 보는 일도 걷는 일도. 앵글이 상당히 확대되어 있는 탓에 몸의 각도를 조금만 틀어도 보고 있던 형체를 금방 잃어버리기 마련이었고, 그러면 화면 속으로 낯선 것들이 평소에 눈여겨볼 일 없는 디테일을 지나치게 드러내며 와락 난입해 오곤 했다. 이 새로운 시각 환경에 맞추어 관람자는 자신의 몸을 동기화하지 않을 수 없다. 이동하기 위해서는 적극적으로 몸짓의 폭을 줄이고 속도를 늦춰야 한다.
엉거주춤 투시경에 의지하여 거닐다 보면 빈 주택 곳곳에 화분처럼 심긴 몸들을 만날 수 있다. 조용히 꾸물거리고 있다는 것 외에 무엇을 하고 있는지 도통 알 수 없는 몸들이다. 그들은 움직인다. 무엇을 위해서도 아니라 몸이 거기 있고 그저 그 몸을 움직일 수 있기 때문에 움직인다. 인간의 몸을 가졌다는 점에서 유령이라고 하기는 어렵겠으나, 인간적인 그 무엇에도 복무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딱히 인간적이지도 않다. 인간이 아닌 동물들이 으레 그렇듯, 아름다운 포즈를 구태여 연출하려 하거나 무언가를 말하고 전달하려 하지 않는다. 한편으로 움직임의 단위는 너무도 작아 움직인다기보다는 가까스로 움직여지는 상태에 가까워 보인다. 굳이 꼽자면 능동이라기보다는 수동이나 부동 쪽인지도 모르겠다. 말하자면 이들은 유령적인 한편으로 인간적이고, 인간적이라 하기엔 동물적이며, 동물적이라 하기엔 식물적이다.
〈미세행성〉(2024), ©LDK
흥미로운 것은 이 몸들을 보는 경험이 일종의 만짐의 사건으로 변해간다는 사실이다. 제한된 시야 속에서 관람자는 보고 있는 것의 정체를 더 잘 파악하기 위해 대상에 가까이 다가가야만 하고, 화면에 보이는 것을 놓치지 않기 위해 도착적으로 화면 속 대상에 밀착해야만 한다. 보는 이의 시선은 천천히 관조에서 접촉으로 번져간다. 시선은 타인의 몸을 쓰다듬고 어루만지는 보이지 않는 손이 된다. 더욱이 이 몸들이 구멍 나고 착 달라붙은 옷, 레이스가 달려 오돌토돌한 질감이 두드러지는 옷을 입고 있다는 점이나, 머리와 맨몸을 풀어헤친 채 제각기의 여성성을 드러내면서도 보는 이에게 시선을 돌려주고 있지 않는다는 점은 이러한 촉각적 바라봄에서 발생하는 섹슈얼한 텐션을 더욱 부추긴다. 관객은 바라봄을 통해 비밀스럽고도 일방적으로, 도착적이고도 관음증적으로 몸들을 애무한다.
이를 인지한 관람자는 어느 순간 선택의 기로를 맞닥뜨리게 된다. 그러한 방식의 보기를 계속해서 유지한다면 관람자는 필연적으로 이러한 시각적 접촉에 가담하게 될 것이며, 녹화 기능이 계속해서 켜져있다면 그 사실이 기록으로도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지 않기를 선택한다면 관람자로서 누릴 수 있는 봄의 특권을 놓치는 것, 지금 이곳에서 발생하고 있는 사건의 목격자가 되는 일을 포기하는 것이 되리라. 투시경이 매개하는 시선은 이러한 긴장 사이에서 헤맨다. 누군가는 시선을 돌려 보기를 포기하는 반면, 누군가는 도착증자가 되기를 감수하며 계속해서 이러한 방식의 바라봄에 뛰어든다. 어떤 이는 한발 더 나아가 이 시공간에서 일어나는 증언자가 되기로 결심한 양 피사체와의 관계를 노련히 조정하고 숙련된 카메라워크를 발휘하기도 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어둠 속 몸, 보이는 자들의 몸은 은밀하게 피어오른다. 관람자들이 각기 내면화한 윤리와 규범을 시험하기라도 하듯이, 보는 자들의 욕망과 결핍을 간질이며.
이런 방식으로 〈미세행성〉은 시각적 스펙터클을 생산하지 않으면서도 관람자를 낯설고도 정밀한, 매혹적이지만 위험한 감각경험으로 슬며시 끌어들인다. 시선을 접촉으로 바꾸어내는 이러한 전환의 중심에 있는 것은 투시경이다. 투시경이 제공하는 확대되고 제한된 스크린은 보고 있는 대상의 총체를 결코 보여주지 않으면서 전체를 보고자 하는 욕망을, 총체를 알고자 하는 욕망을 계속해서 추동하기 때문이다. 언뜻 생각하기에 관람자는 투시경을 통해 관음증적 구도에서 흔히 발생하는 일방적인 시선의 권력을 누리는 것처럼 것 같다. 투시경이 관람자로 하여금 어둠 속에 묻혀있는 주체가 마치 관람자인 것처럼, 빛 속으로 드러나 보이는 것은 화면 속 몸들인 것처럼 느끼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면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면 금방 깨닫게 된다. 보는 자와 보이는 자의 구도가 뒤집혀있다는 사실을. 보이는 자는 여전히 어둠 속에 묻혀있지만, 야간투시경의 화면에서 나오는 불빛이 바깥으로 노출하는 것은 역으로 보는 자의 정체다.
〈미세행성〉(2024), ©김현진
어쩌면 이 작품의 안무가 개입하고 관여하고 변형하는 몸들, 안무적 대상으로서 다루어지는 몸들은 비단 어둠 속 퍼포머들만의 몸만이 아니다. 관람자들, 보는 자들의 몸들 자체가 투시경에 의해 노출되고 드러나며, 자신이 보고 있는 몸들에 의해 붙들리고 종속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보는 것을 계속해서 보기 위해서, 자신이 보는 것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관람자들은 자신의 몸을 대상에 맞추어 변형시켜야만 한다. 그들의 모든 신체적 감각은 어둠 속을 둥둥 떠다니는 투시경으로 쏠리고, 어느 순간부터 그들은 자신의 몸을 잊은 채 시선을 좇아 느리고 정처 없이, 어둠 속 존재들처럼 서성이고 배회하는 방식으로 움직이게 된다. 떠돌고 서성이는 것, 봄과 보이지 않음 사이를 오가는 것, 몸을 잊어버리고 또 잃어버리는 것, 그 모두 유령적 존재에게 일어나는 사건들이라고 말해본다면, 이 공연에서 유령적 존재로 머무르는 이들은 바로 관람자들이다.
한편 시간이 갈수록 생동하며 발작적이고도 에로틱한 에너지를 뿜어내는 것은 어둠 속 몸들, 관람자들에 의해 보이는 자들의 몸들이다. 어둠이 제약이 되지 않는, 어둠을 그들 집으로 삼고 있는 몸들. 시각이라는 옵션이 주어지지 않았으므로 그들은 이 바라봄의 사태로부터 자유롭다. 소리 사물들이 그저 소리를 내기 위해 소리를 내듯이 그들은 자신들이 그저 움직이기 때문에 움직이고 있음을 잘 안다. 봄의 욕망으로부터 자유롭기에 그 욕망을 충족하거나 부응하지 않으면서, 외려 그 봄의 욕망을 배반하거나 미끄러뜨리며 움직일 수 있다. 자유한 자도, 평안한 자도 보여지는 자다. 연출도 제약도 없이 그들 자신의 몸으로 존재하는 데에 집중하는 자도 모두 보는 자가 아닌 보여지는 자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어둠 속 몸들은 관람자에게 보여지는 만큼이나 관람자를 본다. 눈도 없이, 바라봄 없이 본다.
그런 시선의 관계 속에서 첫눈에는 비틀리고 발작적으로 보였던 그들의 움직임, 그러니까 히스테리적이고 고통스러워 보이기도 했던 움직임은 고요한 유희의 몸짓들로 변해간다. 천천히 뻗쳐가는 오르가즘에 휩싸인 듯 몸들은 인간의 육안으로는 포착되지 않는 희락으로 꿈틀거리고 있다. 침입자들을 사로잡고 그들을 유령적 존재로 만들면서 조용하고 은밀하게 만개하고 있다. 이곳은 실로 유령들의 집이다. “뿌옇고 막막한 시간” 속에 “끈질기게 달라붙어”1 유령이 되어가는 자들의 집이자, 그런 식으로 침입자들을 사로잡고, 붙들고, 자신을 잊게 함으로써 그들의 일부로 끌어들이며 생동하는 유령들의 집이다.
공연이 후반부에 이를 즈음 내가 쥔 투시경의 초점 링은 점점 뻑뻑해지더니 고장 나기 시작했다. 톱니바퀴를 아무리 밀어도 초점을 맞출 수도, 형상의 윤곽을 잡을 수도 없었다. 어둠 속 뿌연 포그만을 비추는 스크린이 밝게 빛났다. 투시경에서 새는 빛이 화면 속으로 들어와 만화경 속 끝없이 열리고 접히는 무궁한 별세계처럼 펼쳐졌다가 또다시 흐리고 흰 공백이 되었다가 했다. 더 많은 몸을 움켜쥐려 할수록 돌아오는 것은 없으리라고, 붙들려 할수록 외려 붙들리게 될 뿐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러는 동안 무엇인가 느리게 움직여 천천히 내 곁을 지나갔다. 화면 안에는 너무 빛이 많아서, 화면 밖에는 어둠이 짙어서 내게는 보이지 않는 몸이었다. 어디선가 달그락하는 소리가 났다.
〈미세행성〉(2024), ©최요한
1 이 문장의 인용은 2024년 12월 재연 시 사용된 〈미세행성〉 공연 소개글에서 발췌했다.
김현진 〈미세행성micro-planet〉 쇼케이스
2024.10.25(금) – 26(토) 20:00, 22:00
LDK(구대사관저)
컨셉·안무 김현진
퍼포머 간주연, 강호정, 곽유하, 임은정
사운드 장수진
PM 김정윤
영상 이예울, 이지운
사진 최요한
글 하은빈
주최·주관 김현진
후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2024년 창작의 과정 선정 프로젝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