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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감각’으로 넘어서는 극장의 가능성:
창작그룹 노니 〈빙빙빙〉 리뷰

 

창작그룹 노니는 2022년부터 영유아와 시각장애인을 관객으로 하는 공연 리서치를 이어왔다. 2022년 ‘더 어린 관객을 위한 창작의 과정 공유회 〈보는, 보이지 않는 관객과 함께하는 영유아 서커스 작업 개발 연구〉’를 필두로 한 일련의 리서치들은, 2024년에는 아시테지 국제여름축제의 일환으로 트라이아웃 공연 〈빙빙빙〉을 모두예술극장에 올리는 것으로 이어졌다. 국립극단의 어린이청소년극연구소가 몇 년 전부터 꾸준히 어린이청소년극의 개발에 힘써왔던 것처럼, 최근 들어 다양한 장르의 공연들이 이제까지 관극의 경험에 있어서 취약했던 다양한 주체들(영유아, 장애인, 청소년 등)을 무대와 더욱 긴밀히 연결하고자 하는 노력을 전방위적으로 확산하는 장면들이 포착되곤 했다. 이러한 흐름 안에서 연극의 텍스트적 의미들을 전달하기 어려운 대상인 영유아들을 고민한다는 것은, 기존 공연의 문법들을 해체하거나 우회하는 새로운 방식의 공연을 고민한다는 것과 같다. 영유아극이라는 장르가 보편적으로 충분히 확산되어 있지 않은 한국에서 영유아가 자연스럽게 관극 경험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전략은 무엇이어야 할까? 이 질문은 창작그룹 노니가 영유아와 함께 관객의 대상으로 탐구하고 있는 시각장애인이 가지고 있는 관극 경험의 가능성이 무엇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질문과도 겹친다. 기존 공연의 문법 안에서 어떤 특정한 감각을 필연적으로 우회해야 한다면, 거기에서 고민해야 할 것들은 기존의 연극 텍스트가 가진 힘을 남은 감각에 맞추어 변형(transform)하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 자체를 다른 감각을 통해 재조직(reform)하는 일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3년여에 걸친 창작그룹 노니의 리서치, 워크숍, 다양한 실험들은 단순히 관극 취약계층을 관객으로서 개발하는 공연을 만드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시각과 텍스트가 중심이 되어왔던 공연이라는 매체가 어떻게 다른 차원의 감각들을 발굴하고 새로운 여정으로 나아갈 수 있을지 고민하는 일이 될 수 있었다. 특히 영유아극이라는 장르가 충분히 확산되어 있지 않은 한국에서, 영유아가 자연스럽게 관극 경험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공연의 감각을 조직하는 일은 연극과 공연이 무엇을 통해 전달될 수 있는지, 그리고 관객에게 무엇을 남길 수 있는지를 본질적으로 들여다보는 일과도 같다.

 

창작그룹 노니 〈빙빙빙〉 국립극단 제공, ©최용석, 황호규

 

무대, 관객과 감각 사이

공연 〈빙빙빙〉은 언어랄 것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 연극이다. 2023년 쇼케이스의 형태로 이루어졌던 이전 버전의 〈빙빙빙〉에서는 아예 배우들조차 등장하지 않았고, 2024년의 트라이아웃 공연에는 여러 명의 배우들이 등장해 관객의 참여를 안내하지만 그러나 이들 배우들이 어떤 특정한 상황을 연기하거나 내러티브를 의도적으로 만들어내는 극적 연출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복잡한 은유나 관계성을 이해하기 어려운 영유아 관객을 위한 배려이기도 하면서, 또한 기존의 무대에서 내러티브가 차지했던 영역의 대부분을 감각의 직접적인 전달로 치환한 일종의 효과적인 전략이기도 하다. 따라서 공연은 전반적으로 ‘이야기’를 풀어내기보다 ‘감각’에 집중하며, 극은 끊임없이 ‘어떤 감각’을 관객에게 ‘어떻게’ 전달할지 고민하는 시도들로 채워진다.

공연이 시작되기 20분 전, 관객은 이미 열려 있는 무대에 입장할 수 있다. 극장 직원의 안내에 따라 신발을 벗고 무대로 들어서면, 모두예술극장의 가변형 좌석을 모두 뒤로 밀고 만들어낸 공간에 이미 자유롭게 앉아 있는 여러 관객을 마주하게 된다. 공연 〈빙빙빙〉이 밝히고 있는 공연의 컨셉은 “바람과 빛, 사물과 사운드를 매개로 창작한 ‘관객참여형’ 공연”1이다. 공연의 관객으로 상정된 영유아와 시각장애인들이 보다 더 편안하고 경계 없이 공연에 ‘참여’할 수 있게 하기 위해, 공연은 무대와 객석의 구분을 없애고 관객들을 자연스럽게 무대 ‘안에’ 배치한다. 특히 영유아의 경우 관극에 있어서 낯선 극장의 공간을 편안하게 생각할 수 있도록 그 거부감을 없애는 것이 가장 중요한데, 〈빙빙빙〉은 공연이 시작되기 수십 분 전부터 관객들(영유아를 포함한 그 가족들)을 입장시켜 공간에 충분히 적응할 시간을 줌으로써 이를 해결하고자 했다. 실제로 몇몇 영유아 관객들은 공연이 시작하기 전에 이미 무대 곳곳을 뛰어다니고 있었으며, 어둡고 거대한(실로 성인에게도 거대하게 느껴지는) 극장의 공간에 스스럼없이 적응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공연이 시작되면 무대는 이 공연이 지향하는 바를 조금 더 적확하게 보여준다. 무대 저편에서 쏘아지는 수평적인 조명은 성인의 얼굴 높이 정도에 머물고, 성인 관객은 무대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서서 관찰하기보다는 ‘영유아의 시선 높이’에 맞추어 앉아서 관람하도록 유도된다. 또한 어두운 무대에는 마치 빛의 기둥처럼 조명들이 떨어지곤 하는데, 이것은 극장 전체를 인식하기보다 부모와 함께 있는 작은 공간을 먼저 인식하는 영유아들을 더 효과적으로 집중시키는 역할을 한다. 영유아들이 어둡고 공허한 공간에 낯섦을 느끼기 전에, 다양한 감각들이 호기심을 자극해 영유아 관객들의 집중을 이끌어내고 그것을 유지할 수 있게끔 하는 것이다. 공연이 시작되고 조금 지나 등장하는 비닐은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소재이자 주된 매개체다. 커다랗게 무대 전체를 커버하는 비닐은 바스락거리는 청각과 질감에서 느껴지는 촉각으로 영유아의 관심을 끌고, 더불어 보는 것 이외의 감각을 활용해서 공연을 느껴야 하는 장애인들에게도 유효한 수단으로 작동한다. 시각장애인들은 가족이나 안내자의 안내를 받아 접촉한 비닐을 통해 이것이 어떤 형태의 공연인지 ‘느낄’ 수 있고, 호기심을 가지고 무대(비닐)를 능동적으로 조작하는 영유아들과 함께 공연에 ‘참여’한다. 〈빙빙빙〉이 마련한 다양한 감각의 장치들이 여러 관객들에게 다채로운 감각을 선사하면서, 무대 안에서 관객들은 공연을 직접 만들어가는 퍼포머의 역할도 동시에 수행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빙빙빙〉에서 무대는 관객과 감각 사이 어디엔가 놓여 있다. 객석을 없애고 무대 자체를 공연의 장소이자 관객의 장소로 만들면서 이미 그 구조를 만들어 놓기도 했지만, 공연이 관객들(영유아, 시각장애인, 성인, 비장애인, 그들의 가족들)을 무대 위에 초대하고 다채로운 감각을 선사함으로써 공연이 완성된다. 관객이 감각을 지각하기 때문에(비닐을 만짐으로써) 공연이 발생하고, 여기에서 발생된 공연은 다른 관객들에게 동시에 무대로 인지된다. 모든 관객은 관객과 퍼포머의 상태를 오가면서 공연을 직접 만들어간다. 영유아의 입장에서 눈앞에 펼쳐진 비닐 풍선을 끌어안거나 밀쳐내는 행위는 일종의 놀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 행위는 공연이자 무대로 영유아의 몸에 체험된다. 더불어 기둥처럼 떨어지는 조명, 극의 후반부에 음악과 섞여 들리는 돌봄을 떠올리게 만드는 여성의 육성과 같은 것들은 관객들로 하여금 무대를 더욱 친숙한 감각의 공간으로 인식하도록 만든다. 공연이 벌어지는 ‘장소’를 무대라고 부를 수 있다면, 이 작품의 무대는 어느새 퍼포머가 되어버리는 관객들과 그 관객들이 끊임없이 지각하는 감각의 사이를 흐름으로써 존재한다.

 

창작그룹 노니 〈빙빙빙〉 국립극단 제공, ©최용석, 황호규

 

공동체 만들기

이러한 다양한 장치들이 감각으로써 관객에게 다가오고 또 그것이 일종의 ‘무대’로 인식되지만, 실상 이것을 하나의 공연으로 완성하는 것은 관객의 참여다. 아마도 관객이 능동적으로 반응하지 않으면 결코 만들어질 수 없었을 공연이, 〈빙빙빙〉에서는 관객들의 참여를 통해 만들어진다. 극의 중간 부분에서 커다란 비닐이 펼쳐지는 부분에서 배우들은 성인 관객들에게 비닐의 끝부분을 건네며, 함께 흔들어주기를 요청한다. 이미 영유아들이 무대 안에서 다양한 감각들과 함께 놀고 있는 모습을 본 성인 가족들은 여기에 흔쾌히 참여하며, 아이들을 조심스러운 눈으로 지켜보면서 비닐로 하나의 커다란 파도를 만들어낸다. 관객들은 여기서 일종의 퍼포머이면서 동시에 무대-공동체를 구성하는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 영유아들이 언제나 최우선으로 찾고 의지하고자 하는 것은 자신의 가족이지만, 놀이의 형태를 통해 공연이 진행되면서 이제 부모와 아이들은 서로 섞여 ‘놀기’ 시작한다. 마치 무대의 ‘주인공처럼 보이는’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까지도, 감각에 능동적으로 대응하는 행위자들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에리카 피셔-리히테(Erika Fischer-Lichte)는 공연의 매체적 조건을 퍼포머와 관객의 신체적 공동 현존에서 찾는다.2 공연을 만들어내는 퍼포머와 그것을 지켜보는 관객이 함께 있음으로써 공연이 완성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퍼포머의 행위가 관객에게 어떤 반응을 촉발시키고, 또 그렇게 나타난 반응이 다시 퍼포머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그 피드백의 과정이 중요해진다. 피셔-리히테는 이 피드백의 고리를 강화하거나 효과적으로 수행하는 전략의 하나로 ‘공동체 만들기’를 꼽는다. ‘공동체 만들기’는 연극이 수행될 때 무대를 만드는 배우들과 그것을 바라보는 관객 사이에는 일종의 연결이 생겨나고, 이를 통해 극장 안에서 공연의 미학이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것과 결합될 수 있는 공동체가 형성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만들어지는 공동체는 단지 무대가 상연되고 있을 때만 작동하는 허구의 내러티브를 둘러싼 것에 그치지 않고, 공연을 하나의 체험으로 습득하고 그것이 관객(그리고 배우)의 삶 자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공동의 경험이 된다는 것이다.

〈빙빙빙〉의 배우들은 성인 관객들을 자연스럽게 유도하여 공연의 맥락 안으로 초대한다. 그전까지 무대 가장자리에서 아이들이 작품에 참여하는 것을 지켜보거나 독려하는 역할을 맡고 있던 성인 관객들은, 자연스럽게 비닐을 손에 쥐고 작품의 퍼포머이자 무대 그 자체가 된다. 피셔-리히테의 피드백 고리는 프로시니엄 무대 위, 배우와 관객 사이에서 순환되는 반응의 강화를 이야기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배우와 배우 사이, 관객과 관객 사이에서 벌어지는 피드백을 의미하기도 한다. 〈빙빙빙〉에서 배우는 성인 관객을 무대로 끌어들이고, 관객들은 어색하지만 동시에 조심스럽게 무대 안으로 들어선다. 초대된 관객들은 비닐을 잡고 아이들이 비닐 안을 뛰어다닐 수 있도록 그것을 흔들면서, 박자를 맞추고 간격을 맞추기 위해 옆 사람과 무언의 조율을 거친다. 관객은 관객 사이에서 서로 반응을 주고받으며 무대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여기서 각자의 관객들이 체감하는 공연은 가족의 범위에서 공동체 전체(극장 전체)로 확대된다. 비닐을 흔드는 장면부터 극의 후반부에 다양한 크기의 풍선들이 던져지는 ‘놀이’에 이르기까지, 성인 관객들은 스스로 세심한 보호자이자 흘러 다니는 무대, 그리고 안전한 공동체의 테두리가 된다. 이 공동체 안에서 ‘모든’ 관객들은 서로 피드백을 주고받으며 무대 위에서 ‘노는’ 퍼포머의 역할을 맡는다.

그렇게 〈빙빙빙〉에서 영유아, 성인, 장애인, 비장애인 관객들은 유도된 장치들을 통해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한다. 여기에는 가족에게 느끼는 친밀감, 자신보다 취약한 사람에게 가지는 세심한 배려, 눈앞의 감각을 타인과 공유하고자 하는 대화의 욕구가 함께 작동한다. 이것은 단지 내 가족에게 느끼는 보호본능이 아니라, 같은 경험을 공유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만들어내는 일종의 ‘공동 감각’일 것이다. 가족들은 기꺼이 다른 아이들을 위해 비닐을 흔들어 무대를 만들고, 위험에 처한 사람들을 달려가 안내해 준다. 이 선의의 공동체는 무대라는 것이 관객의 몸과 분리된 어떤 다른 곳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관객 모두가 함께 하기 때문에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관객 모두를 관통하고 있는 돌봄의 경험이 이들을 하나로 묶고 감각을 무대화할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이를 통해 관객들은 공연이라는 매체 자체가 가지는 미학을 다시 새롭게 체험하고 공연에 대한 인식을 되돌아보게 된다. 관객들은 〈빙빙빙〉을 통해 영유아와 시각장애인에게 공연이 줄 수 있는 감각이 무엇이 되어야 할지 고민해 보는 공통의 질문을 몸으로 체험한다. 결국 피셔-리히테가 말한 것처럼 사회적 경험이 무대를 구성하고, 극장의 경험이 다시 삶의 정치적인 경험으로 이어질 수 있는 공동체가 만들어진 것이다.

 

창작그룹 노니 〈빙빙빙〉 국립극단 제공 ©최용석, 황호규

 

시도와 충돌, 돌봄의 감각들

영유아, 그리고 시각장애인을 포함한 감각의 장치들이 공동체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하고 돌봄의 경험이 관객들에게 각각의 방식으로 기억되지만, 〈빙빙빙〉은 또한 여전히 어떤 시도들을 계속하고 있기도 하다. 비닐로 도드라진 어떤 특정한 감각은 극의 후반부에 이르러 얼굴을 스치는 바람으로 이어지고, 무대 안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함께 느껴지는 바람의 감각과 비닐 풍선의 촉감은 극을 완전한 놀이로 바꾼다. 그리고 모든 이들이 어우러져 ‘노는’ 가운데에, 한 명의 배우가 줄을 타고 무대 위로 오르기 시작한다. 2023년 버전의 〈빙빙빙〉에서 배우가 등장하지 않았던 것과 달리 2024년 〈빙빙빙〉의 공연에서는 여러 배우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관객들에게 비닐을 건네거나 영유아 관객들을 ‘놀이’로 안내하는 안내자의 역할을 맡는다. 그리고 특정한 ‘극적 역할’의 수행이 두드러지는 것은 이 줄을 타는 마지막 배우에 집중되어 있는데, 줄을 타고 오르는 이 장면은 작품에서 클라이맥스를 끌어올리는 역할을 담당한다. 일종의 시각적 장치로써 시각이 작동 가능한(그리고 눈앞의 놀이에서 눈을 떼는 것이 가능한) 관객들에게 극적 스펙터클을 주는 장치로 역할 하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여기서 줄을 타는 배우가 전달하는 감각은 앞서 공연이 보여주었던 다채로운 감각의 영역들과 조금 다른 방식을 취한다. 소리를 내는 장치를 몸에 달고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들 사이로 혼자 솟아오르는 장면은 관객으로 하여금 잊고 있었던(혹은 애초부터 없었던) 감각(시각)을 떠올리게 하고, 더불어 어떤 유사의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시각이 아니고서는 그 위험을 인지할 수 없을 것 같은 불안감 역시도 함께 불러일으킨다. 관객들은 무대가 안전을 위한 만반의 장치를 구현해 두었을 것임을 의심하지 않았지만, 눈앞의 비닐을 가지고 노는데 집중한 영유아나 아예 시각이 차단된 상태로 공연의 다른 감각들을 감상하고 있을 시각장애인들이 아래에 있는 상황에서, 그저 사이에 빈 공간을 놓아둔 채로 줄을 오르는 배우의 모습은 너그럽고 포용적인 감각들로 채워졌던 무대에 긴장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요소가 되었다. 와중에 비닐 역시도 바람과 함께 이 공연의 주요한 소재이자 매체로 작동하는데, 때때로 비닐이라는 소재가 가지는 특성이 영유아와 장애인들에게 위험하게 작동하지 않을까 하는 찰나의 걱정들 역시도 존재한다.

〈빙빙빙〉은 기존의 관극 방식을 전적으로 타파하고 새로운 감각을 통해 공연을 전달하고자 하는 목표를 내보이고, 공연이 진행되는 내내 이것을 위해 다양한 감각을 동원한다. 영유아, 그리고 시각장애인을 관객으로 상정함으로써 기존의 시각 중심적이었던 무대의 문법을 해체하고 무대를 관객의 감각 사이에 위치시킨다. 그런데 여기서 영유아를 위한 감각과 시각장애인을 위한 감각은 서로 교차하는 듯 보이면서도 미묘하게 다른 층위에 놓여있다. 영유아와 시각장애인의 감각을 촉발시키기 위해 비닐이라는 소재를 동원하고 여기서 촉각과 청각이 지속적으로 자극된다. 그런데 누군가의 관심을 끊임없이 자극해야 하는 이 상황에서, 특정한 감각에 더욱 민감할 수 있는 관객들에게는 이것이 오히려 과한 감각의 격랑으로 다가올 가능성 역시도 존재한다. 어떤 관객들에게는 충분한, 혹은 더 필요할 것으로 여겨지는 감각들이 어떤 관객들에게는 지나친 것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무대를 덮고 있는 감각의 시도들은 때로 충돌한다. 비닐로 가득한 무대는 누군가에겐 놀 수 있는 세계이기도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텅 빈 무대이거나 포화 상태의 감각으로 다가올 수 있다. 시각과 청각, 촉각들 사이에서 공연은 어떻게 총체적으로 경험될 수 있을 것인가? 〈빙빙빙〉은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지만, 또 그렇기에 어떤 측면에서는 감각의 과잉이나 충돌이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 역시도 내포하고 있다.

 

창작그룹 노니 〈빙빙빙〉 국립극단 제공, ©최용석, 황호규

 

또 한편으로는 공연의 감각을 관객이 능동적으로 소화하게 만들기 위해, 어디까지의 장치가 필요한지에 대한 질문 역시도 여전히 남아있다. 단지 공연의 맥락에서뿐만 아니라 극장 밖에서도, 영유아의 경우 어떤 대상을 체험하는 데 있어 부모나 가족의 떠밀림에 이끌리는 경우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영유아가 극장 전체의 거대한 공간을 공간으로 인지하지 않고 다만 자기 자신 앞에 놓여있는 사물을 무대이자 극장으로 인식한다면, 그것에 능동적으로 뛰어드는 것 자체가 공연의 성사 여부를 결정할 것이고 이는 영유아 본인의 호기심에 의해서 촉발된 상황이었을 때 가장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것이다. 관객이 참여하는 형태의 공연이어도 그것이 ‘돌봄’이 아닌 ‘공연’이 되기 위해서는, 영유아들이 스스로 호기심을 느끼고 무대(비닐, 조명, 바닥, 공연을 구성하는 어떤 것이든지)에 뛰어들기 위해서 관객의 어떤 감각과 태도가 필요한지에 대한 고민이 동반되어야 한다. 〈빙빙빙〉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감각뿐만 아니라, 영유아들이 관객이자 무대가 되기 위해 극장 밖에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함께 고민해 봐야 하는 것이다.

여러 다양한 시도와 충돌들 가운데에서도, 〈빙빙빙〉은 지금 공연이 무엇이 되어야 할지에 대한 중요하고도 단단한 화두를 던졌다. 한국의 공연 지형에서 영유아와 시각장애인은 공연의 대상자로 쉽사리 간주되지 않는다. 다양한 관객들을 포용하기 위한 여러 시도들이 최근 몇 년 동안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기는 하나, 극장은 여전히 누군가에게는 불친절한 공간으로 머물러 있다. 영유아극 역시도 영유아라는 관객들의 특징을 세심하게 살피는 연구가 이제 막 시작된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극장이라는 시각 지배적인 공간이 누군가에게 더 넓은 포용력을 가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어쩌면 기존의 극장에 무언가를 더하는 일이 아니라 우리가 답습해 왔던 문법들을 해체하고 다시 생각하는 일이 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빙빙빙〉에서 시도하고 있는 다양한 방법론과 실험들은 균질하지 않은 관객들에게 극장이 어떤 감각이 될 수 있는지/되어야 하는지를 상기시켜 주었다. 관극 취약계층을 무대 위로 초청하면서 해야 하는 일은 이미 있는 텍스트들을 끙끙거리며 다른 언어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무대를 본질적으로 어떻게 감각할 수 있는지 그 감각의 가능성들을 놓고 처음부터 새로운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 되어야 한다. 〈빙빙빙〉에서 관객들이 보여준 돌봄의 경험들이 열어젖히는 것은 그저 취약한 사람에 대한 배려가 아니라, 공연이라는 매체가 나아갈 수 있는 전에 없던 새로운 가능성들이었다.

 


1 2024 아시테지 국제여름축제 특별기획 초청 트라이아웃 공연 〈빙빙빙Being Being Being〉 공연 소개 리플렛에서 인용.
2 에리카 피셔-리히테, 『수행성의 미학』, 김정숙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7, p.110.

 

창작그룹 노니 〈빙빙빙〉

2024 아시테지 국제여름축제 특별기획 초청작
국립극단 [더 어린 관객을 위한 극장]

2024.7.27(토) 14시, 17시
2024.7.28(일) 11시, 14시, 17시
모두예술극장

창작팀
연출 김경희
드라마터그 이미경
프로덕션 매니저 김민경
음악감독 박혜리
드론콘트롤 박용호
협력(서커스) 마린보이
협력(JKA운동발달) 김윤진

워킹그룹
송이안 송이담 | 양육자 송다민 정수연
신지원 신보람 | 양육자 신재욱 박유진
김도아 | 양육자 김태웅 양윤미
정샛별 | 양육자 이혜은
이채원 | 양육자 이준희 이주이

기획/제작
(재)국립극단 어린이청소년극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