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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률적 몸, 포스트-바디, 도래하는 예술

 

우리는 우리의 몸을 ‘나’를 구성하는 일부로 인식한다. 조금 더 적극적으로 나아가는 것이 허용된다면, 나의 몸은 ‘나’와 동일시된다. 몸은 ‘나’의 증거이자 내가 존재할 수 있게 하는 이유다. 그런데 만약 나의 몸이 어떤 이유에 의해 나의 의지를 거슬러 작동한다면 그 몸은 여전히 ‘나’를 구성하거나 ‘나’일 수 있을까? 이 몸에 대한 존재론적 질문은 ‘나’의 경계를 어디까지로 규정하는지에 대한 문제이기도 하지만, 또한 몸을 ‘나’와 분리된 존재로 인식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인식론적 문제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몸을 주된 방법론으로 삼는 예술인 무용에서 몸의 문제는 주체의 문제이자 곧 대상의 문제다. 무용수의 몸은 퍼포머의 입장에서 주체적이지만 안무가의 입장에서 객체적이기 때문이다. 또한 몸을 수행하는 무용수의 입장에서 나의 몸을 나와 분리가능한 것으로 인식할 수 있는지의 문제 역시도 무용수에게 근본적인 고민들을 불러일으키는 오래된 질문이다. 따라서 무용에서 예술의 존재론에 대한 논의를 촉발시키는 트랜스휴머니즘과 포스트휴머니즘에 대한 담론이 따라오는 것은 필연적인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무용에 있어 몸은 애초부터 주체이자 동시에 대상이었으므로, 그것을 비/인간으로 파악했을 때 무용이 무엇을 전달할 수 있는지에 대한 다차원적인 고민은 무용이 예술로 기능한 이래 지금까지 무용과 분리되지 않고 끊임없이 제기되어 온 질문이었기 때문이다.(춤은 ‘추는 것’인가, 혹은 ‘보는 것’인가?)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하 ACC)에서 2024 공연 레지던시 결과 발표회 쇼케이스로 진행된 Momenta의 〈경우의 도시〉는 바로 이러한 측면에서, 인간의 몸이 대상이 되었을 때 벌어지는 주체와 대상의 문제, 그리고 인공지능으로 대표되는 기계와 트랜스/포스트휴머니즘의 문제들을 경유하는 작업이었다. 2024 ACC 공연 레지던시의 주제는 ‘인공지능, 인간, 다중우주’로, 인공지능과 인간이 어떻게 관계 맺을 수 있는지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 발생하는 비/인간의 문제들은 어떻게 드러나는지 살펴보는 것에 초점을 맞춤 사업이었다. 작품을 발표한 두 팀 중 사운드를 중심으로 디지털 작업들을 해온 류필립과 안무가 김혜연으로 구성된 Momenta는 이번 레지던시 작업을 통해 도시에 확률적으로 출현하는 알고리즘-길을 따르는 인간 군상의 모습을 그리고, 무용수들이 만들어내는 길과 기술-기계가 상호작용하는 과정을 묘사함으로써 몸과 몸-이후(post-body)를 보여주고자 하였다.

 

확률적 몸

ACC 예술극장 1의 절반을 활용하여 준비된 무대는 네 명의 무용수와 무대 뒤쪽에 서 있는 스크린, 그리고 입체적으로 설치된 여러 개의 스피커로 구성되었다. 무용수가 춤을 추는 무대와 스크린에 투사되는 영상들, 스피커에서 나오는 사운드는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일종의 상호작용을 하는 메커니즘 안에 놓여 있었다. 〈경우의 도시〉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이 작업에서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도시 안에서 확률에 의해 ‘조작된 대로’ 움직이는 무용수들의 움직임이다. 마치 내비게이션에 의해 정해진 길을 가는 자동차들처럼 미리 정해진 경로를 따라 움직이는 무용수들은 사전에 확률적으로 조합된 움직임들을 수행하면서 이동한다. 그리고 이 무용수의 위치를 센서를 통해 입력받고 무용수의 위치가 이동함에 따라 재생되고 있는 사운드의 발생 위치가 변경된다. 무용수의 몸은 소리의 위치를 변화시키면서 극장 안에서 공연을 보고 있는 관객들에게 실시간으로 다른 소리의 감각들을 안겨주는 것이다.

이 확률적 몸, 움직임의 조합을 만들기 위해 안무가는 몸의 움직임을 여러 단위로 분리하여 안무를 만들었다고 이야기한다. 움직임을 공간적으로 세분화하여 분석하는 것은 낯선 방법론은 아니다. 무용기보법인 라바노테이션(Labanotation)이 만들어지면서 최초에 추구했던, 부위, 방향, 높낮이, 시간에 따라 움직임을 분석하고 기록하는 방법은 몸을 분절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고 생각했던 모더니즘 이데올로기에서 출발했다. 무용과 안무의 역사가 예술로서의 무용을 성립시키기 위해 그 운동성을 무용의 근대적 정신으로 삼았다고 한다면, 라바노테이션의 환원주의적 분석과 그 기록 방법은 무용의 근대적 실체이자 결과물이었다. (운동성을 숙명으로 삼은)안무와 라바노테이션이 모두 춤의 기록과 저장을 그 토대로 삼고 있다는 점은 근대무용의 방향성이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를 주지시켜 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우리는 여기에서 우리가 무용을 (예술로서의)무용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과 그것을 환원적으로 분절하여 생각한 것이 같은 시기에 이루어졌다는 것을 깨닫는다. 〈경우의 도시〉는 라바노테이션의 방법론과 유사한 방식으로 무용수의 몸을 분절적이고 구조적인 것으로 바라보고 개별적인 부위의 조합으로서의 안무를 완성시킨다. 모더니즘 무용의 그림자가 저물어가고 있는 지금에 이 환원주의적 안무 방법론이 포스트-바디와 포스트-휴머니즘을 고민하는 과정에 틈입하는 현상은, 이 몸들을 바라보고 경로를 ‘설정’하는 인공지능이 몸에게 어떤 가능성을 펼쳐줄 수 있는지 그 단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무용이 가지고 있는 비언어적 특징 덕분에 무용은 마음만 먹으면 구상이나 서사와 같은 것들을 거부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무용은 또한 추상의 모호한 영역에서 다양한 실험을 시도하는 것이 가능했다. 영국의 웨인 맥그레거(Wayne McGregor)와 같은 안무가는, 안무를 구성하는 것이 표현도 재현도 아니라면 움직임 자체를 외재화시켜 기술-기계에게 위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던 선구자 중 하나다. 우연성에 의한 움직임들로써 작품을 구성하는 것은 모던댄스의 초창기 머스 커닝햄(Merce Cunningham)과 같은 안무가들로부터 시작된 유서 깊은 방법론이지만, 인간의 몸에 의해 태어나는 것이 아닌 기계에 의해 창조(혹은 조합)된 움직임이 주는 생경함은 미드저니(Midjourney)의 〈스페이스 오페라 극장〉이 주는 충격과도 유사한 것이었으리라. 그러나 동시에 미드저니의 ‘작품’들이 불러일으키는 것과 동일한 질문을 인공지능이 만들어낸 안무에게도 던져볼 수 있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춤추는가?’ 이 질문은 더 이상 서사나 재현의 대행자가 되지 않기로 선언한 동시대 무용이 예술 그 자체에 던지는 되물음이 될 수 있다. 이를테면 아무리 빅데이터 학습과 딥러닝으로 방대한 학습량을 가지고 있는 인공지능이라도, 랜덤하게 조합한 난수적 움직임이 예술이 되는 것은 거기에 맥락을 부여할 누군가가 있기 때문이다. 무작위로 설정된 움직임은 그 자체로 ‘스페이스’나 ‘오페라’, 혹은 ‘극장’이 될 수 없다. 반대로,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의 〈샘〉이 작품이 된 것은 거기에 뒤샹이 맥락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거기 놓인 것은 변기가 아니라 세면대나 장롱, 카우치 소파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샘’이라고 호명하고, 그것을 호명함으로써 발생하는 전위의 가능성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공지능은 안무를 ‘호명’하지 않는다. 호명하지 못한다. 움직임은 그것을 수행하는 몸과 붙어있을 때에만 완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경우의 도시〉는 따라서 무대 위에 단순히 확률적으로 계산된 안무를 놓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안무를 추적하는 또 하나의 층위를 덧입힌다. 몸을 추적함과 동시에 길을 무대화하는 사운드의 구조가 바로 그것이다. 무용수의 몸이 이동함에 따라 그 좌표값을 받아서 소리가 퍼져 나오는 음원 역시도 이동하는데, 이것은 인간 무용수의 몸 위에 어색하게 덧입혀진 움직임들이 만들어내는 경로를 감시하는 감시자, 구조 그 자체를 은유한다.〈경우의 도시〉가 초기에 가졌던 기획에는 각각의 무용수들이 개인에게 부여된 확률에 의해 나아갈 방향을 정하면 인공지능 역시도 확률에 의해 무용수가 나아갈 길을 제안하는 상호작용이 실시간으로 이루어지는 메커니즘이 포함되어 있었다. 여기에서 도시의 ‘미래’를 상상하고 통제당하는 몸에 대한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무용수의 몸 위에 어색하게 덧입혀진 기계적 움직임이 아니라 그것을 감시하고 추적하는 다른 층위의 감각, 사운드인 것이다. 호명하는 존재로서의 사운드는 움직임에 감시당하는 대상으로서의 몸을 접합시키고, 움직임은 비인간성 아래에 깔린 인간성을 소환함으로써 맥락 안에 편입된다. 지시하는 소리와 지시받는 인간, 기계에 대한 공포가 극적으로 가시화되는 순간이다.

 

몸 이후, 그 너머

결국 〈경우의 도시〉에서 극적 구조는 감시당하는 몸, 대상으로서의 몸을 부각함으로써 완성된다. 여기에서 인간의 몸을 비인간성을 띤 하나의 대상으로 파악할 수 있다면, 그 반대급부로서의 주체는 감시하고 통제하는 자로 존재하는 소리-기계-인공지능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 이후를 바라보는 포스트휴머니즘은 사물을 인간이 차지하고 있던 자리에 위치시킴으로써 인간성을 다시 돌아보고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을 바꾸고자 하는 담론이다. 인간에 의해 인식되는 대상으로서의 사물들을 주체와 대상의 종속적 관계에서 벗어난 존재로서 인식하고자 하는 정동 이론들 역시 주체-인간의 허상을 허물고자 했지만, 포스트휴머니즘은 사물 자체를 (인식의) 주체로 간주하거나 아예 인간을 사물의 일부로 보고 사물 자체의 역동성을 들여다봄으로써 인간중심주의를 극복하고자 한다. 여기서 타파되고 극복되어야 하는 것으로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대상’인데, 어떤 것을 대상으로 지칭하거나 인식하는 것에는 반드시 ‘주체’라는 전제가 깔려있기 마련이다. 〈경우의 도시〉가 보여주는 ‘대상으로서의 인간’은 따라서 인간을 비인간 사물로 간주했을 때 벌어지는 여러 가지 역학들에 대해 고민하게 만든다. 만약 인간을 미지의 감시자에 의해 통제되고 감시되는 ‘대상’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면, 그 감시자에게는 ‘주체’의 권력과 위상이 주어졌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주체’의 자리에 기계가 올라앉아 있어도, 우리는 그것을 주체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인가?

〈경우의 도시〉에서 사운드, 혹은 조명으로 대변되는 기술-기계는 극 전반에 걸쳐 감시자이자 주체로서 드러난다. 그것은 (비)인간 무용수들의 움직임을 추적하거나 특정한 색깔의 조명을 통해 무용수들의 방향성을 인도한다. 포스트휴머니즘이 인간과 사물(혹은 세계)의 대응을 뒤집음으로써(혹은 하나를 다른 하나에 넣음으로써) 인간중심성을 극복하기 위한 이론임을 고려하면, 포스트휴머니즘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포스트휴머니즘 이전 인간중심주의에서 바라보는 것으로서의 대상을 설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선결 과제를 해결할 필요가 있다. 과연 인공지능, 기술-기계, 혹은 개별 프로그램들은 하나의 존재로서 대상으로 파악하는 것이 가능한가? 우리는 대상의 존재적 경계를 어떻게 정의하고 그것을 세계로서 간주하는가? 인공지능은, 과연 세계를 구성하는 구성물이 될 수 있는가? 이 질문들은 결국 가시화된 공포의 주체로서의 기술-기계가 인간을 옭아매기 위해서는, 그것이 먼저 대상(혹은 존재)으로서의 요건을 갖추어야 함을 의미한다. 결국 〈경우의 도시〉가 무대 전체를 통해 구현하고자 하는 구조로서의 주체, 인공지능의 위상은 그래서 형상 없는 주체로 남고 만다. 그것은 세계와 세계의 구조를 모사하지만 결코 세계의 위상으로 올라설 수 없기 때문이다.

〈경우의 도시〉가 표상하고 있는 도식, 종속된 (비)인간들은 인간이라기보다는 맥락을 잃은 사물과도 같이 묘사된다. 분절적 움직임들을 조합해서 만들어진 안무이므로 움직임은 몸의 흐름을 따라 연결되지 않고 맥락 없이 끊어진다. 이 불안정한 움직임을 동세적 안무로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애초에 여기에는 몸의 호흡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움직임이 몸과 붙어있어야 안무로서 완성될 수 있다는 사실을 떠올려볼 때, 〈경우의 도시〉의 안무에는 몸이나 움직임, 그리고 맥락 중 어느 것 하나는 반드시 탈락되어 있는 불완전한 움직임들이 이어진다. 무용수들의 성긴 몸짓을 수행하는 것이 무용수나 안무가라기보다 그것을 조합한 일종의 ‘확률’이라고 할 때, 〈경우의 도시〉의 안무가 보여주는 것은 안무를 통한 비인간성이라기보다 안무가 몸으로부터 탈각될 때 나타나는 균열, 몸과 움직임의 괴리가 보여주는 으스스함(the eerie)이다. 무용수의 움직임 위에 몸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감시자 인공지능이 억압하는 것은 인간이 아닌 비인간 사물이 되어버리고, 통제당하는 대상으로서의 인간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통제하는 주체 역시 무력화된다. 여기에는 억압하는 자와 억압당하는 자의 길항 대신, 기계와 기계의 상호작용만이 존재할 뿐이다.

인간과 사물, 세계와 인식의 문제에 있어서 인간중심주의를 극복하고자 하는 포스트휴머니즘의 시도가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는 지금, 몸은 포스트휴머니즘의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 중요한 열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때로 인공지능이 만들어낸 안무가 포스트휴머니즘 자체를 의미한다는 오류를 범하는 작업들도 있지만(그것은 포스트휴머니즘이라기보다 오히려 트랜스휴머니즘적이다), 〈경우의 도시〉는 어설프게 트랜스휴머니즘을 곡해하는 작업으로 위치하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오히려 인간과 비인간의 사이에서 진동하는 무용수의 몸을 통해 인공지능의 주체성을 질문하고 고민하는 리서치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가 보아야 하는 것은 기계-기술의 기술적 수월성이나 종속된 몸의 하찮음 같은 것이 아니라, 도래할 포스트휴머니즘의 세계에서 몸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시도들이다. 인간중심주의를 넘어서고자 하는 이 몸부림 안에서 몸은 이제까지의 몸이 아닌 몸-너머, 포스트-바디로서의 몸이 기술과 주체, 구조 안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들여다보아야 한다. 특히나 무용 안에서 몸이 가지는 정동적 강력함, 어떤 분장을 하고 어떤 역할을 해도 무용수 본인으로부터 결코 떨어질 수 없는 무용수의 개인성이 몸과, 그리고 맥락과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를 고민했을 때 그것이 비로소 포스트휴머니즘을 고민하는 열쇠로 기능할 수 있을 것이다. 길지 않은 공연 시간의 쇼케이스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번 ACC공연 레지던시에서 선보인 Momenta의 〈경우의 도시〉는, 이러한 포스트-바디에 대한 고민들의 긍정적인 시작점이 될 수 있을 공연이었다.

 

Momenta(류필립, 김혜연) 〈경우의 도시〉

2024 ACC 공연레지던시 결과 발표회
2024.11.23.(토) 16:00
ACC 예술극장 1

작가 류필립, 김혜연
사운드 류필립, 이민주
영상 류필립, 강설
안무 김혜연
퍼포먼스 임성은, 박소진, 김민주, 김혜연
어레인지 임진호
퍼포먼스크루 이수연
무대감독 김평강(ACC)
조명감독 이승호
음향감독 김왕민(ACC)
영상감독 이강석
영상프로그래머 김수현
영상크루 유영모
무대크루 김승민, 김준희
조명크루 김경호, 문다희, 정선주, 이지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