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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문제:몸을 바라보는 몇 가지 관점과 궤적들
조형빈
“우리 말고 세상의 어느 누가 ‘몸’과 같은 것을 알고 있을 것인가? 우리의 오랜 문화 속에서 가장 늦게, 그리고 가장 오랜 시간에 걸쳐 정제, 숙련, 분해와 조립을 거듭한 고안물이 몸이다. […] 몸은 낙하하면서 저울추의 다른 쪽을 들어올리는 최종의 무게, 무게의 끝이라고 할 수 있다. 몸은 무거움이다.”
— 장 뤽 낭시, 『코르푸스』1
‘근대적인, 너무나 근대적인’
몸. 그것은 인류의 가장 오래된 발명품이자 언제나 거기에 존재해 왔던 인류의 숙명이다. 우리는 몸이 없는 우리를 상상할 수 없으며, 몸은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이야기할 때 일부 혹은 전부를 차지한다. 인류가 아무리 뛰어난 기술과 사상을 만들어낸다고 하더라도 몸 없이 존속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몸은 우리 존재의 근거이자, 세계 속에서 표류하는 인간이 깊은 물 속에 내린 가냘프면서도 가장 확실한 닻이다. 우리는 몸을 통해 시공간을 점유하며 세계와 상호작용한다. 기실 우리가 “생각하기” 전에 몸이 있었다 — 우리는 몸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토록 중요한 몸이었음에도, 그것이 ‘고안’되기 전에도 명백하게 존재를 구성하고 있었음에도, 우리가 몸을 들여다본 역사는 결코 길지 않다. 몸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그것을 통해 인간을 설명하고자 하는 지금의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몸이 근대성과 얽힌 역사를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근대가 ‘발명’되면서, 몸은 그것이 차지하고 있는 비중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설명하는 데 있어 전혀 중요하지 않거나 오히려 배제되어야 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근대성의 바탕이 된 데카르트적 세계관 안에서 존재는 곧 사유를 통해서만 증명될 수 있었으므로, 사유와 함께하지 않는 것(혹은 사유를 방해하는 것)은 사유를 통해, 그리고 사유를 위해 제거되어야 했다.
이것을 몸의 ‘추락’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세계가 신의 손을 떠나 인간에게 내려오면서 찾아온 근대는, 갑작스럽게 세상의 주인이 된(것 같은 착각을 한) 인간에게 세계의 비밀을 밝히고자 하는 욕망을 불러일으켰다. 하나로 아우를 수 없는 무수한 근대성의 상징들이 있지만 그 모든 근대성들이 가진 공통점은 거기에 세계의 원리를 알고자 하는 인간의 의지가 깔려있었다는 것이다. 근대 이전까지 세계의 원리는 신 그 자체였으므로 인간은 세계를 탐구하거나 세계에 대해서 궁금해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어두운 시간이 끝나고 신과 계급, 종교와 왕권이 사라진 자리에 벌거벗은 어린아이처럼 서게 된 인간은 세계를 더듬기 위해 사유하기 시작했고, 끝없이 펼쳐진 세계를 정복해 나가는 주체의 황홀경에 빠진 인간은 스스로가 어디에 서 있는지 잊었다. 인간의 몸은 세계를 둘러보는 데에 정신이 팔려 허물어지는 줄 모르고 있었던 자기 발밑의 구덩이 속으로 끝없이 추락했다.
1990년대, 근대성의 종말과 근대-이후에 대한 가능성들이 터져 나오던 시기에 몸에 대해 이야기하는 연구자들이 생겨났다. 물론 그전에라도 몸이 완벽하게 사라진 적은 없었으나, 근대의 역사에서 몸은 몸 그 자체로 간주되기 보다 세계를 구성하는 구성물 중에서도 가장 낮은 위치에 배치되었을 뿐이었다. 20세기를 질주하는 동안 다양한 형태의 예술 작업들이 몸에 대해 질문하고 그것의 ‘수행’을 고민했던 바가 있지만, 무대로서의 몸, 작품으로서의 몸과 세계-내-존재로서의 몸은 아직 잘 맞물리지 않았다. 몸이 미메시스나 재현체로서 작동하는 기능적 한계를 넘어서서 세계-내-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눈치채기 시작한 것은 근대성이 한계에 부딪혔다고 평가되는 20세기 말에 이르러서다. 근대가 그 폐해를 깨닫고 스스로 허물어지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던 그때, 몸에 대한 사유는 우리에게 새로운 가능성들을 열어줄 것처럼 보였다. 이쯤에서 몸은 우리에게 ‘귀환’한다.
1990년대 이후 다양한 사회학자들이 몸의 ‘귀환’에 힘을 보탰다.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나 앤서니 기든스(Anthony Giddens), 크리스 쉴링(Chris Shilling)과 같은 사회학자들은 사회 안에서 몸이 차지하는 위상에 대한 질문을 제기했다. 그전까지 사회구성주의적 관점에서 몸은 일종의 결과물로서, 인간이 만들어낸 인공물로서의 사회구조가 인간의 몸을 빚어낸다는 것이 사회학에서 몸을 바라보는 일반적인 입장이었다. 인간의 몸은 변화할 수 있지만 그 변화의 시작은 몸의 바깥, 세계가 인간을 강제하는 ‘구조’라는 방식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고전 사회학의 입장에서 몸은 그 스스로 개별적인 입장을 지닌 주체가 될 수 없었고, 오직 결과물로만 작동할 수 있었다. 이는 몸이 일종의 재현체로서 소급되었던 20세기 예술의 흐름과도 유사하다. 부르디외나 쉴링과 같은 학자들은 몸이 ‘생성해 내는 것’, 다시 말해 몸에 축적된 사회적 경험이 일종의 자본으로 전유되면서 행사하는 상징체계로서의 문화자본이나, 개별자가 스스로의 몸을 적극적으로 증진시키는 프로젝트로서의 몸을 언급함으로써 몸 그 자체를 들여다보아야 함을 역설하였고, 몸이 세계의 마침표가 아니라 출발점이 될 수 있음을 제시했다.
이와 같은 몸 연구에 대한 흐름은 개별 주체들의 경험과 관계를 중심으로 몸을 해석하는 문화연구의 방법론으로 이어졌고, 20세기를 지나오며 이루어진 다양한 철학적 사유들과 교차되며 후기 근대성의 도래를 알렸다. 몸은 이제 어떤 현상의 결과물로서 존재하는 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세계와 상호작용하는 주체이자 매개로 작동하는 개념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몸에 대한 태도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몸 자체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 혹은 예술 안에서 몸이 매개체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 지금에도 여전히 상존한다. 이는 몸이 개념적으로 처해있는 중요한 모순점 때문에 그러한데, 이 모순은 심지어 몸이 철학과 사유의 대상으로 적확히 간주되지 않았던 중세 이전의 시기에서부터도 그 조짐이 예비되었던 문제이기도 하다.
몸에 대한 다양한 연구들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다. 하나는 생각과 사유의 양식으로서 (근대적)세계의 반대급부로서의 몸을 들여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생활세계의 매개로서 사회와 상호작용하는 몸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이 두 가지의 흐름은 동일한 ‘몸’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그것을 개념적으로 풀어내거나 몸이 가지고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는 입장에 있어서 차이를 보인다. 몸에 대한 문화연구 중에서는 정체성이나 젠더, 섹슈얼리티 연구와 같은 분야에서 이 두 가지 양식을 적절히 연결하고자 하는 시도들이 있어왔다. 그러나 많은 경우 사유로서의 몸과 실천으로서의 몸은 쉽게 이어지지 않았으며, 결국 이 모순 때문에 몸이 세계 안에서 할 수 있는/해야 하는 역할에 대한 끊임없는 논란이 지금까지도 해결되지 않고 있다. 이는 예술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이며, 미메시스로서의 예술에서 한발 더 나아가 세계를 변혁할 수 있는 가능성을 어디서 발견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 때때로 고꾸라지고 마는 결과를 불러일으킨다. 이 모순을 담은 거친 질문을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정치(삶의 세계)는 어떻게 미학이 될 수 있는가?’
이 글은 2000년대 이후 진행된 여러 가지 몸에 대한 담론들 중에서 동시대적으로 유의미한 화두를 던지고 있는 두 가지 입장을 엿보는 데에 그 목표를 두고 있다. 그 첫 번째 입장은 정동에 대한 것으로, 정동이 몸을 통해 어떤 이데올로기를 체화시키고 단순히 감정을 넘어서서 정동이 철학적으로 그리고 실존적으로 어떠한 현상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를 보고자 한다. 두 번째 입장은 포스트휴머니즘에 대한 것으로, 몸을 인간 너머의 것으로 사유함과 동시에 트랜스휴머니즘을 경유한 확장된 것으로서의 몸을 실체적으로 보았을 때 우리가 동시대적으로 당면한 과제들이 무엇인지 살펴보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입장은 근대성과 함께 ‘발명’된 몸이 종국에 처하게 된 모순들을 극복하는 상반된 방식이면서, 사유로부터 출발한 몸이 생활세계의 몸을 어떻게 변화, 변형, 왜곡, 극복하는지를 볼 수 있는 좋은 사례이기도 하다. 경합하고 있는 담론으로서 정동과 포스트휴머니즘은 우리에게 ‘사회적인’ 몸이 동시대적으로 어떤 상황에 놓여있고, 또 몸에게 남아 있는 과제들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만약 몸이 정말로 사회적인/사유적인/실체적인 닻을 내릴 수 있다면, 예술 역시도 몸을 하나의 사회적인 좌표로 삼아 전에 보지 못했던 새로운 몸의 관점들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매개/체로서의 몸, 정동-되는 몸
몸에 대한 연구들이 각각의 몸이 가지고 있는 개별성에 주목하면서, 이전까지 고찰의 대상이 되기 어려웠던 것들이 담론의 장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중에서 가장 두드러졌으나 가장 이야기하기 난해하고, 그래서 어떤 방식의 거대 이론으로 결코 귀결될 수 없었던 것이 바로 ‘감정’이었다. 감정은 어떤 몸 위에서 분명하게 발화하는 사건이지만 몸을 떠나서 결코 작동할 수 없다는 특징을 갖는다. ‘사회적인 것’이 몸 바깥에 명백하게 존재하는 어떤 구성체인 것처럼 보이는 상황과는 대조적으로 말이다. 따라서 감정은 하나의 이론이 될 수 없었지만, 그러나 어떤 관계, 역학, 구조, 힘들이 특정한 감정을 촉발시키고 그것이 일어나는 몸이 어떻게 그들과 상호작용하는지의 문제는 문화이론 안에서 핵심적인 주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외부적 사건에 반응하는 몸은 개별적이었으며, 그 개별성과 조우한 사건이 특정한 감정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이 감정이 발화하고 작동하는 방식 역시 개별성을 그 근거로 삼았다. 감정이 작동하는 방식 안에서 몸은 주체라기보다 감정이 들락날락하는 매개와도 같았다. 그리고 (‘피부’로 일컬어지기도 하는)이 매개는 대단히 강력한 하나의 필터처럼 작용하여 존재와 사회를 관계 맺었다. 감정은 몸-존재가 세계를 인식했다는 인식론적 증거이자, 세계를 통과시킴으로써 그것을 몸 위에 현현하게 하는 메커니즘이었다.
정동은 감정과 동의어가 아니지만, 감정이 발화하는 과정과 역학에 밀접하게 관계 맺음으로써 주요한 화두로 떠올랐다. 2000년대를 전후로 하여 많은 학자들이 정동의 정체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것에 접근했고, 브라이언 마수미(Brian Massumi)나 사라 아메드(Sara Ahmed) 등은 정동을 단순히 몸 안에 갇힌 감정의 동학으로 파악하는 대신, 사회가 움직이는 역동이 개인과 상호작용하는 하나의 관계로 파악했다. 마수미는 육체가 느끼면서 동시에 움직이는 내적인 연관에 주목하면서 강렬함과 특질이라는 두 가지가 정동을 발화하는 몸을 설명한다고 이야기한다.2 정동은 특정한 이미지 혹은 언어로 의미화될 수 없는 것이므로, 그것은 구조를 재생산하기보다 그것에 반하는 발생으로서 작동한다. 동시대 담론에서 정동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라는 것이다. 또한 아메드는 정동에 대한 문화연구들을 모아놓은 책 『정동 이론』에서 ‘행복’에 대해 이야기한다. 행복은 감정의 일종이지만, 아메드가 이야기하는 것은 행복이라는 과정 — 정동을 촉발하고 또 정동이 가서 달라붙게 되는 일련의 진행 상황 그 자체다.3 그에 따르면 정동은 일종의 지향점을 포함하고 있으며, 따라서 지향점이라는 경로 안에 포함되는 감정과 대상은 모두 관계의 일부를 구성한다는 것이다. 정동 안에서 움직이는 감정(여기서는 ‘행복’)은 세계와 몸을 결정하는 방식이 된다.
마수미와 아메드를 비롯한 다양한 학자들이 나름대로 정동의 부분들을 해석해 내지만, 여기에는 두 가지 정도의 공통점이 존재한다. 하나는 정동이 발생되는 몸이 빠지지 않는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어떤 경우에서든 정동을 하나의 관계로 파악한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는 연구자, 그리고 사례를 가리지 않고 정동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동원되는 지점들이다. 여기서 좀 더 나아가 명확히 정의 내리기 어려운 정동이라는 개념의 실체를 들여다보기 위해서 우리는 ‘정동(affect)’이라는 단어의 번역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영단어 affect는 정동으로 번역되기도 하지만, 몸을 기반으로 한 관계적 사유로서의 정동이라는 개념을 지칭하기 전에 affect는 사회심리학 등에서 ‘정서’로 번역되기도 하였다. 심리학에서의 정서(affect)는 기분이나 기질,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일종의 정신과 신체를 연결하는 개념으로 쓰여왔다. affect의 또 다른 번역으로 ‘감응’을 들 수 있는데, 감응은 정서보다 더 관계적인 의미로 여기에는 정동’하고’(affect) 정동’되는’(be affected) 과정이 내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정동 이론』의 서문을 쓴 그레고리 시그워스(Gregory J. Seigworth)와 멜리사 그레그(Melissa Gregg)에 의하면 정동은 사이(in-between-ness)의 한가운데서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4 감응은 감응되기 위한 개체와 감응하는 개체 모두를 필요로 한다. 그 신체’들’ 사이에서 관계 맺기 위해 잠재된 힘을 우리는 ‘정동/감응’으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정동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강렬함의 정도이자 잠재된 감정이 신체를 통해 발화되는 방식이자 인식의 장이다. 따라서 정동은 과정 위에 흐르고, 정동하고 정동되는 존재들과 그 관계의 역학을 모두 포함한다. 이 역학에는 (당연하게도) 변화가 전제되어 있고, 흐르는 시간성 역시도 함께 들어있다. 정동은 감정의 발화이자 그것을 통해 나타나는 사건이고, 또한 사건에 얽힌 몸의 문제이기도 하다.
정동은 그것이 관계를 들여다보는 개념이기 때문에 2000년대 이후의 문화이론에서 주목받는 개념이 되었다. 근대성이 강제했던 주체와 대상의 이분법을 극복하고 세계와 사물을 새롭게 설명할 수 있는 대안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정동의 구조 안에서 세계를 인식하는 유일자 주체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고, 모든 개체들은 오직 존재로서, 자기 자신의 고유한 감정과 방향성을 가지고 다른 존재와 연결된다. 더 이상 주체가 오롯한 주체가 아닌 것처럼, 세계 역시도 막대하고도 단일한 ‘외부’로서의 세계가 아니게 된 것이다. 정동은 이처럼 포스트모더니즘적 인식론이라는 점에서 사유의 방법론이기도 하지만, 또한 그것이 명확한 감정, 변화, 시간을 통해 세계에 작동한다는 점에서 실체적인 몸의 방법론이기도 하다.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타인과 관계 맺는가? 거기에는 어떤 감정이, 어떤 강도로, 어떻게 정향 되어 작동하는가? 우리 감정의 방향성을 결정짓는 것은 세계 안에 배태되어 있는 구성된/태어난/생성된 나의 몸이다. 내가 처한 정치적 구조와 내가 만들어내는 나의 정치성(세계를 뒤흔들 수 있는 나의 잠재)이 곧 관계를 결정한다. 정동은 이 관계의 색깔을 설명하는 하나의 방법론이므로, 정동의 뒤흔드는 몸을 들여다보는 것은 곧 수많은 존재들로 이루어진 세계 그 자체를 들여다보는 일이 된다.
포스트휴머니즘, 인간-몸 너머
정동이 세계를 해석하는 가장 주요한 행위자로서 몸의 위상을 끌어올렸다면, 포스트휴머니즘은 인간중심주의를 해체하는 방법론으로써 몸을 접근한다. 정동 이론이 주체 중심성을 와해하고 존재들이 각자의 개별성으로 접촉하는 몸의 관계성에서 출발한 것이라면, 포스트휴머니즘은 몸을 둘러싼 다양한(때로는 실체적인) 이슈들을 통해 인간 존재를 다시 해석하고 그 너머를 바라보고자 하는 이론이다. 포스트휴머니즘이 대중적으로 가지고 있는 이미지는 상당 부분 사이버네틱스에 치우쳐져 있으나, 실상 포스트휴머니즘이 관심 가지고 있는 것은 보철을 통한 신체의 변형이나 확장 같은 것들보다는 신체의 개념 자체를 무엇으로 치환할 수 있을지, 또 그것을 통해 인간 혹은 몸을 어떻게 다르게 바라볼 수 있을지의 여부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결국 인간중심주의를 타파하는 것으로서 포스트휴머니즘의 출발점은 역시나 몸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정동 이론과 접근 방향은 다르지만 포스트휴머니즘 역시도 인간 주체를 해체하기 위한 시도라는 점에서 일종의 인식론적 이론의 측면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포스트휴머니즘이 인간-너머를 보고자 한 것은 근대가 옹위했던 주체, 세계를 인식하는 유일자로서의 인간 주체를 해체했을 때에만 세계의 본질을 포착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인간이 쌓아 올린 근대적 세계관 안에서 세계는 오직 인간에 의해서만 구분되고 분류되고 인식될 수 있었으나, 기실 세상의 그 어떤 사물도 인간이 아닌 이상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은 불가능하다. 포스트휴머니즘은 바로 이 점을 간파하고 인간중심성이 왜곡해 온 세계의 본질을 들여다보기 위해 인간 바깥의 것들을 사유해야 한다는 움직임이며, 나아가 인간을 사물과 동치하거나 혹은 사물(세계)이 인간보다 더 중요한 사유의 출발점이 될 수 있음을 지적하는 관점이다.
그렇다면 인간-아닌-것을 인간보다 더 중요한 자리에 위치시켰을 때, 그것을 하나의 거대한 이론으로 간주하거나 명명할 수 있을까? 근대가 호명한 인간 주체 역시 결코 단일할 수 없다는 것이 밝혀진 지금, 인간 바깥의 세계를 어떤 단일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 역시 자명하다. 세계는 불연속적이며 셀 수 없는 많은 몸들로 구성되어 있다. 말하자면 세계는 인간의 반대급부로서의 어떤 단일한 대상이라기보다 (정동적 관점이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수많은 관계에 의해서만 구성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포스트휴머니즘 역시 인간을 벗어남으로써 다양한 관점으로 인간 주체를 해체하고자 한다. 캐서린 헤일스(Katherine Hayles)는 테크놀로지의 발전이 인간의 몸을 변화시키면서 나타난 일련의 흐름을 통해 테크놀로지가 몸을 지워버리는 대신 오히려 몸을 더 절실하게 느끼도록 하는 역설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포스트휴머니즘의 정체로 파악한다. 기계가 몸을 파고들어 다른 것으로 만들면 만들수록, 우리는 몸이 무엇인지 다시 질문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포스트휴머니즘 관점에서 동물 이론을 펼쳐온 캐리 울프(Cary Wolfe)는 인간이 동물이라는 타자-생명체를 통제하는 방식을 지적함으로써 인간중심주의를 비판한다. 울프의 이론은 인간이 동물에게 가하는 구조적 폭력에 대한 윤리적 비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어떤 방식으로 동물을 소외시키고 배제해 왔는지(그리고 그럼으로써 어떻게 ‘인간성’을 확보하고자 했는지)를 비판하는 데에 주안점을 둔다. 이처럼 포스트휴머니즘의 다양성은 역으로 그동안 인간중심주의가 어떻게 인간 이외의 것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대상화해 왔는지를 상기시켜 준다. 인간을 다시 생각하는 것은, 그동안 세계를 보느라 돌보지 않았던 인간 자신의 몸이 세계에 저지르고 있던 실수를 복기하는 데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포스트휴머니즘의 접근 방식에는 이 외에도 여러 가지 것들이 있지만, 때로 포스트휴머니즘이 사이버네틱스와 연결되면서 흔히 일어나는 착각이 있다. 가장 대중적인 이미지로서 테크놀로지가 사이버네틱스의 모습으로 몸을 대체하는 경우에 있어서, 어떤 경우에는 트랜스휴머니즘과 포스트휴머니즘을 혼용하여 사용하는 오류가 종종 발생한다는 것이다. 물론 신체를 대체한다는 측면에서 사이버네틱스의 기작들이 포스트휴머니즘으로 나아가는 단초가 되는 것은 분명하나, 트랜스휴머니즘이 지향하고 있는 명확함, 인간의 몸을 기술적인 확장을 통해 고양시킨다는 목표점은 포스트휴머니즘이 바라보고 있는 방향과는 조금 다르다. 포스트휴머니즘이 인간의 몸을 버리는 것으로써(혹은 사물을 불러옴으로써) 인간을 다시 생각하는 지향점을 가지고 있다면, 트랜스휴머니즘은 몸의 개념 안에서 인간의 몸을 기술로 대체함으로써 더 ‘나은 몸’을 만드는 데에 그 목표가 있다. 따라서 트랜스휴머니즘에서의 사이버네틱스 기술들은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몸의 대체라기보다 확장을 의미한다. 트랜스휴머니즘과 포스트휴머니즘은 몸을 바라보는 관점에 있어서 명백한 차이를 보이는데, 트랜스휴머니즘이 (기존의)몸을 (기술을 통해)개선과 보완이 필요한 미완성의 존재로 보는 것에 비해, 포스트휴머니즘은 몸을 폐기하고 복원함으로써 존재를 다시 생각하도록 하는 인식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이 포스트휴머니즘과 트랜스휴머니즘 사이의 간극은 몸이 실체적으로 활동하는 다양한 영역에서 그 차이를 보인다. 쉴링이 이야기한 것처럼 동시대에 있어 몸은 사회적인 것을 생성해 내는 주체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프로젝트로서의 몸, 기술에 의해 신체를 변형하고 확장하는 사이버네틱스의 방법론을 통해서 가능한 것들이다. 포스트휴머니즘으로 나아가기 이전에도 확장하는 신체로서의 트랜스휴머니즘은 이미 생활세계의 많은 부분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 만약 우리의 인식과 지각, 감각의 수용까지를 몸의 확장으로 본다면, AI를 비롯한 디지털 기술들은 이미 우리의 삶을 구성하고 몸을 바꿔나가고 있는 형편이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몸에 개입하는 테크놀로지가 우리의 몸을 변형시킬 때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이다. 트랜스휴머니즘이 강조하는 것처럼 테크놀로지가 인간 신체의 고양과 인간성의 증진을 그 목표로 삼는 것과, 포스트휴머니즘이 내다보는 것처럼 이들 테크놀로지가 건드리는 몸의 감각적 촉수들이 인간을 넘어선 ‘사물로서의 세계’를 열어젖히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이 지향점의 차이들은 동시대의 시간성 안에서 우리가 몸을 어떻게 바라보고, 그 너머를 어떻게 상상해야 하는지의 차이를 불러일으킨다.
포스트-바디를 향해
몸에 관한 담론이 대두되면서 우리는 이전까지 근대성에 가려져 있던 잊힌 우리의 몸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몸을 바라보는 두 가지 길, 사유와 실천은 때로 그 간극을 줄이고 서로 교차됨으로써 세계의 일부인 몸을 포착하고자 노력해 왔다. 이것은 몸이 단순히 하나의 (사회적)구성물이거나, 혹은 인식가능한 세계의 반대항 주체로서 더 이상 기능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이제 우리가 세계를 품을 수 없다는 것을 안다. 보잘것없는 몸뚱이는 세계의 지극히 일부일 뿐, 우리의 몸을 세계와 등치시킬 수 없음을 깨달은 것이다. 그러면서 다양한 이론들은 몸을 좀 더 급진적으로 해석하기 시작했다. 정동 이론은 몸을 명확히 언술로 표현해낼 수 없는 것, 고정되지 않은 흔들리는 상태로 규정하면서 세계를 인식하는 관계의 부분으로 파악했다. 정동 이론 안에서 몸은 세계를 규정하는 대신 받아들이고 흘려보냄으로써 관계 속에 자리 잡는다. 여기서 몸은 (세계)인식의 통로이자 매개다. 그리고 포스트휴머니즘은 몸을 적극적으로 버리기를 요구한다. 세계를 인식하는 주체의 몸을 버리지 않으면 세계의 본질을 바라볼 수 없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더 이상 거기에는 주체란 없으며, 오직 사물들만이 가득할 뿐이다. 인간중심주의를 넘어서서 몸을 몸-아닌-것으로 바라볼 수 있을 때, 우리는 인간과 세계를 다시 생각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장애, 젠더, 사이버네틱스, 동물과 같은 소재는 몸을 둘러싼 관점과 담론들을 실체화한다. 아니, 그것은 기실 세계 안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우리는 다만 그것을 알아채지 못했을 뿐이다. 지금에 와서 몸을 다시 들여다봄으로써, 주체를 해체하고 관계를 맞이함으로써 우리는 몸이 태초부터 갖고 있었던 몸-너머를 볼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몸이 언제나 인간의 곁에 있었음을 알려준다. 같은 맥락에서 몸은 예술에서 역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반드시 몸이 존재해야 하는(혹은 존재하지 않는 몸을 이야기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존재하는) 무용이나 연극에서도, 몸은 작품이 현현하는 가장 중요한 소재다. 그러나 지금의 예술은 몸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몸 담론들이 가리키고 있는 사유와 실천의 영역에서 문화적으로 기능하고 있는 몸의 자국이, 과연 작품에 담기고 있는가? 현실을 그대로 담아내거나 그것을 재현하는 미메시스 매체로서의 몸의 시간은 이미 지나갔다. 동시대 예술이 바라보는 몸은 몸 그 자체가 무대 위로 올라왔을 때 해낼 수 있는 역능을 지닌 몸이다. 거기에 존재해야 하는 것은 사회적인-사유적인-실체적인 몸이다. 몸이 할 수 있는, 몸이 해야 하는 역할을 동시대 예술은 요구한다. 몸이 세계와 괴리되었을 때 그것은 더 이상 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몸-이후를 상상할 필요가 있다. 인식 체계로서의 몸, 사회구성물로서의 몸, 사유의 물꼬로서의 몸이 혼재되어 있는 지금, 몸은 어떤 단일한 주체로 수렴되지 않는다. 몸을 출발점으로 삼는 예술에서 우리가 돌아보아야할 것은 오직 우리 자신의 몸이다. 우리가 몸을 통해 어떻게 관계 맺고, 몸과 다른 것들을 몸 안에 들임으로써(혹은 몸을 바꾸어냄으로써) 몸을 어떻게 재정의하는지, 우리의 몸으로 그것을 다시 해석해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성상을 파괴해야 하는 이유다.5 만약 몸이 성상이 아닌 우리의 몸으로 돌아온다면, 그래서 우리가 지금의 몸 너머를 상상할 수 있다면, 도래할 포스트-바디는 예술에 새로운 이야기를 제시할 수 있을 터다. 또한 그것이 바로 지금 동시대의 예술이 짊어진 숙명이다.
1 장-뤽 낭시, 『코르푸스—몸, 가장 멀리서 오는 지금 여기』, 김예령 옮김, 서울: 문학과지성사, 2012, p.10.
2 브라이언 마수미, 『가상계』, 조성훈 옮김, 서울: 갈무리, 2011, p.49.
3 멜리사 그레그・그레고리 시그워스, 『정동 이론』, 최성희・김지영・박혜정 옮김, 서울: 갈무리, 2015, p.59.
4 위의 책, p.14
5 조형빈, “신비로운 몸을 쓰레기통에: 무용을 바라보는 어떤 오해들”, 웹진 『춤in』, 2022.12.16.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