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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나누어 가지는 가장 아름다운 사건은
아마도 작별일 것입니다:
코끼리들이 웃는다 〈마주하는〉
하은빈
*이 글은 2024 코리아나미술관 『*c-lab 8.0: 코러스』 자료집에 수록된 글입니다.
〈마주하는〉 사진 윤재민
타자의 얼굴이 이쪽을 향해 있다. 생각도 의중도 마음도 알 수 없는 얼굴. 우리는 잠시 미지의 서로에게 당혹감을 느끼는 것 같다. 모르는 이의 손을 잡고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고 있어야 할 이유는 없다. 단지 잠시 그러기로 했을 뿐. 공연이 제안하는 이 단순하고도 명료한 약속은 부드럽고도 단호한 강제력을 지녀서, 마주한 얼굴을 앞에 두고 차마 시선을 거두지도 고개를 돌리지도 못한 채 붙들려 있다.
1분 남짓의 시간이 지나 먼 곳에서 스르르 소리가 들려오면 당신은 자리를 떠서 옆자리의 사람에게로 다가간다. 다음 차례의 당신이 손을 마주 잡아 온다. 다시, 모르는 얼굴이 이쪽을 향해 있다. 생각도 의중도 마음도 알 수 없는 얼굴. 그 얼굴의 표면과 내면을 감지하고, 교환하고, 감응하고, 동요한다. 당신은 곧거나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을 가졌다. 당신은 얇고 주름졌거나 두껍고 탄탄한 피부를 가졌다. 당신의 눈동자는 맑거나 탁하다. 당신은 이를 고스란히 드러내며 웃고 있고, 당신은 누그러지지 않은 긴장감 속에서 이쪽을 노려보고 있다. 당신은 수줍고 또 퉁명스럽고, 당신은 내게 도착하기 전부터 이미 나를 반긴다.
여러 얼굴만큼이나 여러 표정이 다녀간다. 그들 중 더러는 우리가 나누게 될 대화의 방향이나 종류, 양식, 태도 따위를 먼저 제시하거나 능동적으로 의도하기도 한다. 가령 개구진 표정을 지으며 손을 꽉 쥐거나 손가락으로 손바닥을 간질이며 장난을 걸어오고 혹은 시선의 마주침 없이 온몸으로 숨결을 보내며 호흡을 통한 교감을 시도하는 식이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에 우리는 서로와 무방비하게 맞닥뜨린다. 번번이 서로에게 처음의 얼굴이고 새로운 양손이다. 우리가 바라볼지, 경계할지, 충돌할지, 동요할지, 스며들지, 맞닿을지, 반응할지, 드러날지, 방어할지, 굴복할지, 뒤섞일지는 당신도 나도 알지 못한다. 두 세계의 경계에서 본 적 없는 무늬의 결정이 피어오르고, 이 낯설고 형체 없는 물질의 증인은 오로지 당신과 나뿐이다.
긴장으로 굳은 얼굴이 풀어진다. 서로의 표면을 체온으로, 감촉으로, 시선으로, 숨결로 어루만진다. 서로의 안쪽을 조금도 들여다볼 수 없는데도 우리는 서로의 내면으로부터 무언가를 교환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나는 문득 당신의 눈알이 서서히 충혈되는 것을, 눈동자와 눈꺼풀 사이의 붉고 여린 피부 위로 빠르게 눈물이 고이는 것을 본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마주한 사람들은 그렇게 여기저기서 조용히 울기 시작한다. 나라고 눈가에 어른거리는 물기를 들키지 않을 도리는 없다. 당신의 눈동자를 맑고도 팽팽하게 부풀리는, 느리게 굴러떨어지면서 뺨의 피부 위로 스미는 눈물을 바라보며 저마다의 울음의 이유를 궁금해한다. 나의 경우는 우리의 닿아있음이 너무 가냘파서다.
모두의 얼굴이 한 차례씩 지나가고 매 순간 이전의 것과도 이후의 것과도 전혀 닮지 않은 대면이 이루어지고 나면 다시 마주하는 것은 최초의 얼굴. 나를 이곳으로 데려다 놓았던 최초의 당신은 이제 나와 마주 잡은 손을 거두고 대신 어깨를 나란히 한 사람들의 손을 잡는다. 그러고는 옆으로 나란히 나란히 이동해 가며 조용히 노래하기 시작한다. 가사 없이 허밍으로만 불리는 느리고 단순한 멜로디는 노래라기보다 진동에 가깝다. 지금까지 유심히 들여다보았던 얼굴들 하나하나가 느슨하게 연결된 긴 선이 되어 시야를 횡단하는 동안 느긋하고 너그러운 합창이 먼바다의 너울처럼 가물거리며 모두의 위에 넌지시 드리운다.
〈마주하는〉 사진 윤재민
노래와 함께 한 바퀴를 돌아 또다시 최초의 당신과 조우한다. 이것이 아마도 마지막 재회일 테다. 당신은 나를 의자에 앉히고 내 앞에 무릎을 꿇고는 한 통의 편지를 건넨다. 모든 관객의 손에 그렇게 한 통씩의 편지가 쥐어진다. 그동안 마주 보았던 얼굴들은 줄지어 천천히 떠나가고 남겨진 관객은 제각기 편지를 꺼내어 읽는다. 그들 중 대부분은 한동안 자리에 남아 있다. 동봉되어 있던 빈 편지지와 연필로 답장을 쓰기 위해서다. 많은 이들이 오래 머문다. 대개는 마주하고 섰던 1분보다 훨씬 더 긴 시간을 쓴다.
내게 편지를 건넨 이는 옐레나다. 우크라이나에서 온 그는 “끔찍한 날들, 폭탄 테러와 지하에서의 삶 후에, 가족과 함께 한국에 올 수 있었”고 지금은 “평화롭게 살고 있어서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적었다. 한편, 나의 일행에게 편지를 건넨 이는 박옥분이다. “팔십이 넘은 할머니지만, 마음속에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고 욕심 많은, 식지 않은 열의를 품고 있는” 그는 “아버지의 반대로 진학을 포기하고 가사를 도우며 원망 많은 시절도 지냈”으나 이제 원망은 내려놓고 “안 해 본 일도 해보고 부끄러워 망설인 일도 시행해 보면서 원래 내 모습이 아닌, 덤으로 사는 것 같은 재미와 행복”을 느끼고 있다고 썼다. 둘 다 말미에 동일한 멘트의 짤막한 답신 요청이 달려 있다. 다른 편지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언뜻 보기에도 “우리 사회의 여러 이슈를 대변하는 당사자”일 이들을 모아 두었지만 〈마주하는〉은 공연 내내 그들에 대해 아무것도 일러주지 않는다. 한 명씩 서로 마주하고 손을 잡는 일을 되풀이하게끔 하면서 여기에 (겉모습만으로도) 얼마나 다채로운 이들이 모여 있는지를 확인시킬 뿐이다. 마지막에 가서야 각자의 사연이 적혀 있는 편지가 건네어지지만, 단 한 통에 불과하다. 애초부터 관객은 자신을 드러낼 기댈랑 전혀 없이 이곳을 찾은 참이고 편지를 내민 당신과는 고작 1분 남짓을 마주했을 따름이며, 당신과 내가 다른 곳에서 다시 만나거나 서신 교환을 이어갈 가능성은 거의 없다. 답신의 요청에 선뜻 응해야 하는 이유 또한 없다. 기껏해야 한 통의 편지가 허공으로 사라지는 것이 전부일 것이다.
일견 지나치게 사적인 것처럼 보이는 이 마무리 혹은 관계는, 기획의 키워드인 코러스와는 어울리지 않는 것도 같다. 형식으로서 그리스 비극의 맥락에서든, 동시대적이거나 사회적인 의미로서의 ‘비극’의 맥락에서든 간에 비극에 대응하는 몸짓치고는 너무 미약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애초에 〈마주하는〉의 코러스는 그리스 비극의 코러스와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상이한 위치에 있다. 〈마주하는〉의 코러스를 이루는 이들은 타인의 일을 멀리서 조망하거나 이따금 첨언할 수 있는 권능을 누리는 이들이 아니다. 이들은 난민으로서, 여성으로서, 장애인으로서, 노인으로서, 청년으로서, 갖은 일을 겪었거나 겪는 중인 사람들이다. 자주 외부에 기대거나 의존해야 하고 때로는 구조적인 차원의 도움이나 돌봄을 필요로 하는 하나하나의 고유하고 오롯한 사연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다. 말하자면 〈마주하는〉의 코러스를 구성하는 사람들은 거리를 두고 타인의 비극을 관조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제각기 크고 작은 비극을 품고 또 겪고 있는 사람들이다.
여기 모인 이들이 싸워야 하는 제각기 삶의 비극 또한 서사적 양식으로서 그리스 비극의 그것과는 사뭇 양상이 다르다. 그리스 비극의 영웅이 신의 뜻과 운명적으로 대결하지만, 인간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저지르게 되는 과오들로 파국을 맞이하게 된다고 말해본다면 〈마주하는〉의 편지에 적힌 이야기는 인간의 땅 위에 놓여있다. 작게는 개개인의 관심과 주의를 통해 크게는 사회적이고 구조적인 변화를 거침으로써 중단되거나 크게 개선될 수 있는 종류의 비극에 가깝다. 말하자면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고 다루어야 하는 절망과 비애는 신과 인간 사이가 아니라 인간과 인간 사이에, 무대와 객석 사이가 아니라 객석과 객석 사이에 단차 없이 놓여 있다. 〈마주하는〉의 무대에 있는 것이 주인공도, 코러스도 아닌 관객인 것은 어쩌면 그래서일지도 모른다.
〈마주하는〉 사진 윤재민
〈마주하는〉의 코러스는 그리스 비극의 코러스처럼 단 위에서 무대와 객석을 굽어보는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관객과 같은 높이에서 겨우 한 명의 관객만을 마주하고 서 있다. 울거나 웃으면서 혹은 미처 웃지도 선뜻 울지도 못하면서 신탁과 인간의 운명을 알기는커녕 그 한 명이 어떤 사람인지도 알지 못한 채 그렇게 서 있다. 이들은 그리스 비극의 코러스처럼 사건과 상황에 거리를 두고 관조하며 조언이나 지침을 제공하지 않는다. 대신에 자신의 비극을, 자신의 근간을 이루는 삶의 일부를 뭉텅 떼어내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쥐여 준다. 편지에 담긴 삶의 조각들의, 때로 버거울 정도로 막중하게 느껴지는 사연의 부피와 무게에 비하면 상응하는 무엇인가가 돌아오리라는 그 어떤 보장도 없이 적힌 답신의 요청은 터무니없이 짧고 명랑하다. 어처구니없이 가늘고 여리다.
그러나 그러한 가냘픔, 나이브함, 순진함이야말로 이곳에 모인 우리 각자를 이루는 근본적인 조건일지도 모른다. 누군지도 모르는 이에게 나의 일부를 덥석 건네며 감히 답장을 청하는 마음은 이곳에서 열리는 시공간이 내게 어떤 상처를 낼지 모르는데도 선뜻 공연장을 찾아오는 마음과 그다지 멀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 마음의 한가운데에는 타인에 대한 일말의 바람과 기대가 놓여 있다. 그것은 세계가 그들 각자에게 가져다준 비극 속에서도 스러지지 않는 세계를 향해 여전히 열려 있는 아주 작은 믿음이다. 우리가 만나서 어쩌면 함께 잠시 좋은 시간을 보내리라는 믿음. 모르는 당신이 내게 주의를 기울여 주고 나의 삶과 말에 마음을 열어주리라는 믿음.
어쩌면 〈마주하는〉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새로운 코러스의 출현을 고하는 장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수평적 높이에서 각자가 서로의 비극에 접속하고 또 공명하는 코러스가 되어주기를 연습하는 장이라고 말이다. 한편으로 〈마주하는〉은 우리를 우리이게끔 하는 존재론적 조건을 상기시키는 장을 열어젖힌다. 그 조건이란 (역설적으로) 조건 없이 거는 막연한 기대, 토대 없이 돋아나는 낙관, 그것을 가능케 하는 연약하고 천진한 희망이다. 삶이 주는 갖은 풍파와 모욕을 통과하고도 어쩌면 여전히 삶에 좋은 것이 남아있을 것이라는 낙관을 품는 마음, 우리가 서로에게 열려 있음을 견디고 그 안에서 자신의 소중한 것이 드러나거나 들키는 것을 감수하는 마음, 이따금 무방비하게 기대거나 무너진다 해도 그 너머에 있는 당신이 나를 해치거나 저버리거나 공격하지 않을 것임을 아는 마음이다.
계속해서 새로이 타자와 마주하는 것. 누군가에게는 예기치 못한 선물이겠고 누군가에게는 고역이거나 형벌일지 모를, 단순하고도 무한한 사건. 〈마주하는〉이 제시하는 이 일련의 사건은 원해도 원치 않아도 우리가 서로에게 너무 많이 열려 있고 또 노출된 채로 살아간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되새겨준다. 그 사실은 때로 기대를 배반하며 우리를 괴로움에 빠뜨리기도 하겠지만, 동시에 우리가 가질 수 있고 이미 가지고 있는 힘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시선과 체온과 호흡에 감응하는 힘, 서로의 비극을 마주하고 귀 기울이는 힘, 그 무게를 버티고 감당하는 힘, 응하지 않아도 무방할 부탁에 선뜻 나의 일부를 건네고 또 보태는 힘. 〈마주하는〉에서 우리가 느끼고 교환하고 상기하는 것은 그러한 힘, 서로에게 내재한 바로 그 힘이다.
〈마주하는〉 사진 윤재민
이렇게 적기는 했으나 내게는 그것이 적잖이 어렵고 괴로웠음을 고백해야겠다. 새로운 타인들에게 나의 취약성을 매번 들키고야 마는 일이 어려웠고, 마찬가지로 마주함 앞에서 예상보다 더 연약해지는, 쉬이 보드랍고 무른 얼굴이 되는 사람을 감당하는 일이 괴로웠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매번의 얼굴을 맞이할 때마다 활짝 웃지 않기가 어려웠는데, 그것은 반가워서라기보다는 차라리 두려워서였다. 나의 내면으로 무단히 또 난폭히 틈입해 오는 상처받은 표정을 감당하는 일보다 차라리 환대하는 몸짓과 표정으로 서로의 경계를 확보하고 안전지대를 설정하는 일이 더 쉽고 견딜 만해서였다.
공연을 함께 관람한 일행은 어쩌면 동요 없이 낯선 이와 눈을 맞출 수 있는 사람보다 울거나 웃는 사람이 어쩌면 더 강한 사람이었을지 모른다고 말했다. 겁 없이 약한 모습을 내어 보일 수 있는 사람, 아무런 반응도 돌아오지 않아 머쓱해질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웃음을 건넬 수 있는 사람이 실은 더 강인한 이들이었을지 모른다고. 그러나 내 기억에서 벗겨지지 않고 오래 남은 얼굴들은 다소간 무뚝뚝하고 퉁명스러워 보였던 몇몇 이들의 얼굴, 만남을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거나 드물게는 적의마저 품는 듯했던 몇몇 이들의 얼굴이다. 시간이 지나자 홀가분한 얼굴로 자리를 떴던 그들은 마치 단호히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마저도 당신은 나의 가장 중요한 안쪽을 들여다볼 수 없을 테지요.
나 역시 당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함부로 목격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 시간이 되었군요.
이제 깨끗이 헤어집시다. 우리가 나누어 가지는 가장 아름다운 사건은 아마도 작별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자리를 떠난 이들마저도 미지의 타인을 향해 기꺼이 자기 삶의 일부를 남겨두고 갔음을 생각한다. 그토록 짧은 시간에도 우리가 맺을 수 있는 관계란 얼마나 복잡하고 미묘하고 위험하고 다채로운 것이었는지.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우리 사이에 놓여 있었던 온전한 진실일 것이다. 우리가 만나고 함께 하고 헤어질 때 우리는 환대하는 만큼이나 실은 적대한다는 것. 서로를 너그럽고 반가운 마음으로 맞이하는 만큼이나 실은 경계하고 의심하고 적개심을 품는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 안에서 당신은 당신이고 나는 나인 채로 무사할 수 있다는 것. 우리는 결코 같지 않으며 나아가서는 그 같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각자의 세계를 지탱하고 또 지킨다는 것.
당신의 몸이, 당신의 삶이, 당신의 세계가 제때 나를 떠나간다. 내가 또 다른 몸을, 삶을, 세계를 제때 맞이할 수 있도록. 우리는 무언가를 잠시 나누었지만, 우리 각자의 가장 소중한 것은 여전히 유실되지 않고 제각기 몸 안에 잘 보존되어 있을 것이다. 그 사실이 나로 하여금 안심하고 당신을 떠나보낼 수 있게 한다. 이것은 흡사 가장 작은 단위의 몸짓으로 추는 포크댄스다. 우리는 서로에게 매번 새로이 태어나고 사라지는 낯선 안무다. 이전에도 이후에도 추어질 일 없을 이 짧은 춤의 끝에서 우리가 나누어 가지는 가장 아름다운 사건은 아마도 작별이리라.
*c-lab 8.0 프로젝트 X 코끼리들이 웃는다 〈마주하는〉
코리아나미술관 c-cube(B2)
1회차 | 5월 18일 (토) 16:00
2회차 | 5월 18일 (토) 19:00
3회차 | 5월 19일 (일) 13:00
4회차 | 5월 19일 (일) 15:00
연출 이진엽
프로듀서 이호연
조연출 최원석
참여 배우 김경림, 김민서, 김서영, 김시락, 김신자, 김연수, 김준봉, 김진숙, 김타냐, 다니엘, 마광현, 메삭 루이마 미첼, 바톨 모하메드 마흐무드 압달라, 박규민, 박빅토리야, 박스페타, 박옥분, 서현성, 스티븐, 썬더스 모하메드 마흐무드 압달라, 안나(아만굴 무라토브나), 안옐레나, 안종숙, 유스티나 다니엘 이브라힘, 이상연, 이애리, 이재호, 조만식, 최선애, 하난 사예드 알마스리, 한라리사, 홍응표, 황옐레나
기획·운영 최선주 *c-lab 큐레이터, 김재아 *c-lab 어시스턴트
주최 코리아나미술관, 문화체육관광부, 국제박물관협의회 한국위원회
주관 국립박물관문화재단
후원 ㈜코리아나화장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