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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b x null] 이곳은 극장이다,
지금 여기 ‘우리’가 우리의 ‘함께’를 노래하는:
전형산 《백그라운드 보이스》*
라시내
*이 글은 2024 코리아나미술관 『*c-lab 8.0: 코러스』 자료집에 수록된 글입니다.
《백그라운드 보이스》 사진 홍철기
0.
“비극적 이야기는 추악한 것과 부조화스러운 것이 [···] 예술적 유희의 일부라는 것을 우리에게 확신시켜 준다. 디오니소스적 예술의 이 근원적 현상은 이해가 어렵다. 그것을 즉각 파악하고 이해 가능하게 만드는 직접적인 방법은 하나뿐으로, 바로 음악적 불협화음의 경이로운 중요성을 통해서다. [···] 비극적 이야기가 산출하는 쾌는 음악에서 불협화음이 낳는 쾌와 고향을 같이하는 것이다.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고통에서조차 느껴지는 근원적인 쾌를 수반하는 것으로, 음악과 비극적 이야기의 공통 모태다.”
— 프리드리히 니체, 『비극의 탄생』1
1.
전시장 한가운데 무대가 있다. 나무 재질의 낮은 단상 혹은 좌대라고 불러도 좋다. 무대에는 복잡해 보이는 기계 장치와 잡다한 사물이 어지러이 놓여 있다. 소리 객체라고 불리는 이것 중 몇몇은 소리를 생산하거나 음원을 재생하기 위해서 특별히 고안된 장치들이지만, 몇몇은 선풍기나 화분 같은 일상적인 사물들이다. 소리 객체의 소리들은 — 선풍기에서 나는 기계 소음과 바람 소리는 근처에 놓인 마이크를 거쳐서 전기 신호로 변환되고, 레몬 나무 화분의 생체 신호는 잎에 부착된 센서를 통해서 소리 신호로 전환되어 — 믹서로 보내지며, 믹싱된 소리는 스피커로 보내진다. 스피커는 전면에 열여섯 대가 걸려 있다. 열선풍기로 만든 이 스피커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찬찬히 고갯짓하며 노래한다. 사물들의 합창이 울려 퍼진다.
〈백그라운드 보이스〉(2024)는 *c-lab 8.0의 주제, 코러스를 현대적인 의미의 ‘합창’으로 해석하고 풀어낸 작품이다. 벽에 걸린 열여섯 대의 스피커는 합창단원의 얼굴을 떠올리게 한다. 가운데가 까맣게 막혀 있어서 눈동자 같기도 하고 벌린 입 같기도 한 — 얼굴에 난 구멍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구멍으로서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을 — 심연 같은 구멍들. 어둑한 전시장에서 차가운 백색의 빛을 내는 동그란 형상이 여덟 개씩 두 줄로 벽 하나를 가득 채운 모습은 고귀할 것도 아름다울 것도 없는, 그렇다고 비천할 것도 추할 것도 없는 혼잡한 소리들로 가득한 공간에 기이한 숭고의 감각을 불어넣는다.
작품은 사운드 시스템을 일종의 극장으로 구축한다. 무대에 오르는 것은 흔히 소음이나 잡음으로 치부되는 소리들이며, 언제나 거기 있지만 있는 줄 모르게 배경으로 물러나 있는 존재들이다. 이른바 노이즈로 통칭되는 이 소리들은 우리의 지각과 인식의 틀 바깥에 존재한다. 식물의 소리는(그런 것이 존재한다면) 인간의 청각으로 지각이 불가능하다. 선풍기의 소리는 지각 가능하지만 보통은 인식되지 않으며, 만약 인식된다면 대개는 듣기에 거슬리거나 방해가 되는 것으로 취급되며, 듣기의 대상이 아니라는 점에서 소리가 아닌 소리로 취급된다. 음향학적으로 노이즈는 악음(樂音, musical tone) 외의 소리, 즉 ‘비음악적인 소리’를 가리킨다. 파동에 주기성이 있는 소리, 특정한 음을 가진 소리가 악음이라면, 노이즈는 파동에 주기성이 없는 소리, 불특정한 음을 가진 소리로 요컨대 규정되지 않은 소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
무대 위에 놓인 두 개의 화분은 이 작품의 연극성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다. 다른 소리 객체들의 퍼포먼스는 작가가 미리 입력해 둔 그대로 펼쳐지는 반면에, 화분의 퍼포먼스는 우연에 맡겨져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연극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정해진 장면을 가장 정확하게 반복하려는 시도 가운데서도 그때그때 다르게 펼쳐질 수밖에 없는 것, 시간과 사건의 예술이다. 신작 〈백그라운드 보이스〉와 나란히 전시된 기존작 〈지극히 작은 하나의 점〉(2021)은 시간의 차원에 대한 작가의 작업 관심을 간명하게 보여준다. 60개의 계수기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계수기가 넘어갈 때마다 나는 딸깍 소리만으로 독특한 리듬을 만들어 낸다. 소리 자체보다는 순차적으로 발생하는 — 시간 속에서 펼쳐지는 — 사건으로서 소리들과 사건들 사이의 관계에 초점을 둔 작품인 것이다. 관객은 원한다면 계수기 스위치를 올리거나 내려서 리듬에 변화를 줄 수 있는데, 이는 관객의 개입이라는 통제 불가능하고 예측 불가능한 우연의 차원을 더한다.
〈백그라운드 보이스〉, 전형산 제공
3.
전시장 한켠에 따로 분리된 공간에는 〈4개의 작은 타자들〉(2018)이 있다. 〈4개의 작은 타자들〉은 헤드셋에 연결된 라이트박스 네 대가 나란히 걸려 있는 모습으로 레코드플레이어를 연상시키는 작품이다. 색색깔로 빛나는 라이트 박스에는 눈금자나 각도기 따위가 들어 있다. 눈금자와 각도기들은 축음기 바늘처럼 돌아가면서 라이트 박스 내부의 전자 장치에서 발생하는 전자파를 소리로 전환한다. 이 작품은 아날로그 녹음 장치인 축음기를 ‘소리를 저장하는’ 기제가 아닌 ‘소음을 포착하는’ 기제로서 참조하는데, 이는 축음기가 모든 소리 진동을 무차별적으로 기록하는 장치로서 악음과 소음을 구별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작품은 노이즈를 들려주면서 그것이 소리의 구성적인 외부(constitutive outside)라고, 소리에 타자인 소리이자 타자로서의 소리라고 말한다. 헤드셋을 통해서 우리가 듣는 것은 노이즈에 담긴 어떤 의미나 무의미가 아니라 노이즈가 거기 있다는 사실이며, 어떤 소리들은 존재하지만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규정 가능한 것 너머에 존재하는 무규정적인 영역에 대한 관심은 초기 작업인 〈불완전한 사실성〉(2009-2010) 연작에서 이미 발견되는 것이다. 이 시기의 작품은 변화무쌍하고 다채로운 실재를 인식으로 포획하는 일의 불가능성을 유머러스하게 드러낸다. 시 짓기 게임을 위한 키트를 만들고서는
짐짓 “언어의 불완전한 진실을 위한 안내서”를 자처하며(〈불완전한 사실성 #5〉(2009), 돌에 마이크를 꽂아 놓고는 무생물의 소리를 들어 보라고 한다(〈불완전한 사실성 #10〉(2010). 돌과 마이크의 결합은 들리는 소리와 들리지 않는 소리 사이에 실재하는 모호하고 결정 불가능한 지대를 가리켜 보인다. 돌에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면, 이는 우리가 돌의 소리를 들을 수 없기 때문인가 아니면 돌에는 소리가 없기 때문인가. 존재하지만 들리지 않는 소리들이 분명히 존재하는 한에서 이 물음은 선뜻 답할 수 없는 것으로 남는다.
〈4개의 작은 타자들〉은 노이즈가 사회적 타자, 소수자의 유비일 수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그리고 같은 맥락에서 〈백그라운드 보이스〉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간주되는 존재들의 합창, 목소리를 좀처럼 낼 기회가 없는 사회적 타자들과 소수자들의 합창으로 읽히기를 바라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러한 의미 부여가 가능하다. 그렇게 해석하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하지만 성급하게 정치적인 의미로 비약하기 전에 — 혹은 정치적으로 유의미한 해석으로 엄밀히 나아가기 위해서 — 필요한 작업이 있다. 그것은 〈백그라운드 보이스〉의 ‘보이스’가 누구의 목소리인지를 헤아리는 일이 아니라, 무대 위의 소리들이 — 그것이 누구의 소리든지 간에 사물의 소리든 기계의 소리든 사람의 소리든지 간에 — 합창으로 제시되고 있음을 문제 삼는 것이다. 합창한다는 것, 함께 노래한다는 것의 그 ‘함께’를 작품은 어떻게 형상화하고 있는가.
4.
〈지극히 작은 하나의 점〉 앞에서 관객들은 계수기 스위치를 임의로 껐다 켰다 해 본다. 이런 행동 자체에는 대개 별다른 의도도 의미도 없다. 스위치를 끄거나 켜는 행동이 작품의 의미에 대단한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딸깍하는 소리에도, 딸깍딸깍하는 리듬에도 애초에 의미 같은 것은 없으니까. 그냥 할 수 있으니까 해 보는 것이다. 〈백그라운드 보이스〉의 무대와 스피커 사이에 설치된 마이크 두 대는 이 계수기 스위치와 정확하게 같은 역할을 한다. 관객은 마이크 앞에 서서 페달을 밟고 자신의 목소리를 녹음한다. 대개는 무의미한 말들, “안녕하세요” 같은 것이다. 녹음된 목소리는 다른 소리 객체들의 소리와 마찬가지로 섞이고 가공되어, 음절을 분간하기가 어려운 소리가 되어, 노이즈가 되어, 다른 소리들과 함께 극장에 울려 퍼진다.
“관객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작가는 말한다.2 동의한다. 애초에 작품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언어적으로 규정 가능한 의미 너머의 무규정적인 소리들이므로. 그러나 의문은 남는다. 무슨 말을 하는지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무슨 말이든지 해도 되고 할 수 있다는 자유롭고 방종한 무의미의 공간으로 열릴 때, 할 수 있다는 것, 할 수 있으니까 마음대로 해 본다는 것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다시 말해 행위주체성(agency)을 행사함으로써 행위주체성의 있음을 확인하는 것에 어떤 행위주체성이 있는가. 그런 것을 행위주체성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발화의 의미나 무의미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 지점에서 발화한다는 것, 말을 하고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결국 나의 입으로부터 나온 소리를 다시 나의 귀로 확인함으로써 나에게 입이 있음을, 목구멍이 있음을, 몸이 있음을 — 결국 ‘나’의 있음을 — 확인하는 일에 그치는 것은 아닌가.
《백그라운드 보이스》 사진 홍철기
5.
작품을 보면서 열여섯 대의 스피커에서 동일한 소리가 나오는지 아니면 각각의 스피커에서 다른 소리가 나오는지 여부가 못내 궁금했다. 열선풍기가 제각각 다른 방향으로 돌아가며 고갯짓하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다른 소리가 나오고 있으리라 짐작했으나, 실제로 가까이 가서 들었을 때 서로 다른 소리가 들린다는 느낌을 받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열선풍기마다 이펙터가 설치되어 있어서 스피커마다 조금씩 다른 소리가 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나중에 인터뷰 영상을 찾아 보고서다.3 이펙터가 만들어 내는 차이를 실제로 듣지 못했기 때문에 그 차이가, 적어도 나에게는 작동하지 않았다는 것 외에 다른 말을 덧붙이기는 조심스럽다. 그러나 애매한 것을 애매하게 남겨둔 채, 이렇게 말할 수는 있을 것 같다. 함께라는 것은 언제나 ‘여럿’이 함께이므로 — 당연한 이야기지만 ‘혼자서 함께’ 같은 것은 없으므로 — 서로 다른 소리들이 ‘하나’ 되어노래하는 것을 ‘함께’ 노래한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함께 노래하는 우리를 ‘우리’로 만드는 것이 타자들의 존재이며 다시 말해 ‘너’의 존재일 것이다.
6.
‘너’와 닿는 상상을 한다. 너를 만지고, 너와 손을 잡고, 너를 안고 뒹구는 상상. 그러나 손에 쥐고 입에 넣을 수 있는 촉각의 확실성 가운데서, 눈앞에서 말하는 너의 목소리의 직접성과 가운데서, 너를 만지는 일은 쉬이 너를 만지는 ‘나’를 느끼고, ‘나’의 존재를 확인하는 일이 되어 버릴 위험에 처하고 만다. 혹은 ‘나’는 ‘너’를 너무나도 사랑한 나머지, 네 안에서 나를 잃어버릴지도 모른다. 우리가 함께 노래할 수 있을까. 우리를 ‘우리’로 만드는 그 노래를 부를 수 있을까. 너를 나로 전유하지도 나를 네 안에서 잃어버리지도 않는, 너와 나의 ‘사이’를 노래할 수 있을까. 어쩌면 그럴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노래의 타자로서 우리가 노래라고 내놓는 노래 너머에서 울려 퍼지는 노래일 것이므로. 우리는 귀 기울일 수 있을 따름이다. 그리고 — 아니, 그러므로 — 계속해서, 다시 새로이 노래할 수 있을 따름이다.
1 프리드리히 니체, 『비극의 탄생』, 박찬국 옮김, 파주: 아카넷, 2007, 285-287. 번역 수정
2 《백그라운드 보이스》 아티스트 토크 중에서. 2024, 코리아나미술관.
3 《백그라운드 보이스》 전형산 작가 인터뷰 영상, 2024, 링크., 22.8.20. 접속.
*c-lab 8.0 프로젝트 X 전형산 《백그라운드 보이스》
2024.5.9.(목) – 6.22.(토)
코리아나미술관 c-cube(B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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