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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하는 마음〉을 쓰신 하은빈 님에게.

안녕하세요? 배우 배선희입니다. 지난해 9월, 은빈 님의 〈비평하는 마음〉을 읽고 든 생각을 편지로 회신하는 상상을 계속했습니다만 아직도 무슨 말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꺼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여러 갈래로 뻗치는 생각을 따라가다 보면 자욱한 안개를 삼킨 것처럼 마음이 자꾸 답답해지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그동안 은빈 님께 받았던 “좋은 대답”1을 돌려드리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유령 할머니를 향해 뻗은 저의 빈손을 은빈 님께서 덥석 잡아 주셨던 그날처럼2 글을 쓰다가 “번번이 허공을 휘젓는” 은빈 님의 손을 맞잡을 수 있길 바랐어요. 하지만 저는 제게 그럴 자격이 있는지부터 거듭 묻게 됩니다.

왜냐하면 저는 그간 은빈 님의 성실한 독자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은빈 님께서 쓰신 서른 편 남짓한 비평글 중 읽지 못한 글이 더 많았기 때문입니다. 부끄럽게도, 이제까지 참여하지 않은 연극의 비평글에 충분한 관심을 두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공연 비평글의 독자에 대해 생각하다가, 저부터 공연예술계 종사자로서 지금까지 공연 예술 비평 부문에 마땅히 기울여야 했을 관심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어요. 그동안 은빈 님의 글쓰기와 작업을 무조건적으로 응원하는 동료 예술가 되기를 자청했을 뿐, 은빈 님께서 진정으로 바라고 원하는 독자가 아니었음을 깨달았습니다.

 

공연 비평글을 읽었던 때를 돌아보았습니다. 배우나 기획, 제작 등의 역할로 참여했던 연극, 동료 예술가가 참여해 때마침 관극했던 연극, 친구가 좋다고 추천해서 봤는데 나도 좋았던 연극, 좋다고 소문났는데 일정이 겹쳐서 못 봤던 연극, 상 받은 연극 그런데 내키지 않아 안 봤던 연극, 그리고 친애하는 동료분들이 쓴 비평글들을 눈길이 닿는 대로 읽고 또 읽어 왔더라고요. 그런데 펼쳐놓고 살펴보니 관극을 포함한 저의 비평글 읽기 알고리즘(?)이 다소 기묘하게 느껴졌습니다. 평가와 입소문을 따라, 좋아할 수 있는 것과 아닌 것을 본능적으로 구분해 가며, 인정욕구에서 비롯된 뭉근한 질투와 부러움을 숨긴 채 내 편을 향한 강박적인 의무감과 책임감에 좇긴 기괴한 읽기 같다는 생각이 점차 들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제대로 된 읽기를 실천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공연 비평글만이 갖고 있는 특수한 성격과 역할을 진지하게 사유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도요. 심지어 이제까지 공연자로서 비평글을 의뢰하고 받는데만 익숙했다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보지 못한 연극의 비평글을 읽을 때도 사라진 공연의 ‘기록물’ 이상으로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제한된 지면에 필자가 마지막까지 남기고 싶어한 문장의 중요함을, 수많은 공연 중에 이 공연이어야만 했던 필자의 선택과 마음을, 고민하는 지점과 고집하는 지점 사이를 오가는 필자의 복합적인 관점과 정치적 입장을, 어떤 점을 아쉬워하거나 좋아하고 있는 문장에 묻은 필자의 응원과 용기를 온전히 읽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동안 은빈 님께서 지극히 외로우셨을 것 같습니다. 한 명의 창작자이자 독자인 저는 비평글을 읽을 때 연극뿐만 아니라 필자를 먼저 만나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러질 못했어요. 부끄럽고 미안합니다.

 

저는 비평글을 쓰시는 모든 분께서 자신을 공연에 투과시키는 동안 끝없이 해체되었다 조립되길 반복하는 고통스러운 몸의 쓰기를 하고 계시다고 생각됩니다. 수없이 번복한 판단과 선택의 고민 끝에 “미미한 자해로 기어이 스스로와 주변을 조금 망”쳐가면서 아프고 고단한 시간과 맞바꿔 태어나는 것이 비평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글에 피드백이 없다는 것은 공연 예술계 전반적으로 비평글을 읽어야 할 필요성이 충분히 공유되고 있지 않고, 적절치 못한 방식으로 읽고 있기 때문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읽기의 부재’가 지금 한국 공연 예술계에서 내-외부적으로 세대를 가로지르며 다양한 논의나 담론이 충분히 생산-순환되지 않는 현실로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비평글이 갖고 있는 특수성을 주시했을 때 저는 이 일(피드백 없음)이 꽤 심각하게 느껴집니다. 이러한 문제의식이 모이지 않는 것 또한 문제라고 느낍니다. 저는 〈비평하는 마음〉에서 은빈 님이 밝히신 외로움과 “황량한 마음”이 더 이상 한 창작자의 몫으로만 남겨져선 안 된다는 생각이 자꾸 듭니다. 이러한 무응답의 환경이 조성된 것에 공연 예술계의 책임이 일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공연 예술계가 근심 어린 미소로 공연 예술 종사자들로부터 물러나 있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진심으로 걱정하고 걱정스러운 마음에 관한 이야기를 더 자주 나눌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지원 사업에 선정됨과 탈락됨을 다 같이 슬퍼하면 좋겠습니다. 모든 창작자들이 자신의 생살을 깎아 먹는 심정으로 작업할 필요 없는 환경이 조성되면 좋겠습니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는 조바심으로, 정말 잘해야 한다는 비장함으로 작업하지 않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서로에게 기대어 살고 있음을, 어쩔 수 없이 이미 난잡하고 복잡하게 얽혀있음을, 괴롭지만 받아들이고 같이 살 수 있는 방법을 함께 모색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진득한 관심을 폭넓게 가질 수 있는 여유가 저를 포함한 창작자 모두에게 생겨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오랫동안 공연 예술계의 한쪽 끄트머리를 붙잡고 있는 기분으로 살았습니다. 움켜쥔 손에 힘이 풀어지는 순간 공연 예술계가 전적으로 무관한 곳이 될까봐 늘 무서웠습니다. 이런 기분과 마음을 혼자 감당하지 않아도 되는 방법을 함께 찾고 싶어요. 지금 이대로는 자꾸 비장해지고 온몸에 힘이 들어가기 쉬운 환경 같아서요. 그러면 빨리 지치고 나중엔 모두 그만두고 싶어지잖아요. 그러지 않기 위해 우리는 지금까지 서로의 동료이자 친구, 관객, 독자, 팬이 되어 왔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공연예술 생태계가 여전히 예술가를 고립시키는 구조로 이뤄져 있지 않은가? 싶은 생각이 거듭 올라옵니다. 저는 그래서 은빈 님이 〈비평하는 마음〉을 쓰셨을까? 싶은 생각도 들었어요. 무척 솔직한 글이라고 느꼈습니다. 깊고 오랜 외로움이요. “그 모든 것이 별 의미 없는 농담이나 신소리라 하더라도 그렇게 해서 누군가 너무 오래 혼자 있지 않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저것 바라는 마음으로 두 손 모아” 마음을 나눠주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마음에 기대어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글을 쓰는 동안 은빈 님께서 『연극in』과 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연극비평에 연재하신 글을 모두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이전에 읽었던 글도 있었고 처음 본 글도 있었는데 연달아 여러 편을 읽고 난 아침에 갑자기 울음이 복받쳐 바닥에 엎드려 엉엉 울고 말았습니다. 저는 이전에도 은빈 님께 울었다는 감상을 몇 번 전한 적이 있는데, 이번에는 왜 울음이 났는지를 충분히 설명해 보고 싶습니다.

 

느닷없이 터진 울음에 깜짝 놀랐는데도 울음이 멈춰지지 않았습니다. 몸속에서도 가장 오래되고 늙은 장기에서 올라온 울음 같았어요. 그리고 저는 은빈 님께서 쓰신 글이 연극이 모두 사라진 자리에 덩그러니 남은 비석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비석이 존나 두껍고 아름다웠어요. 모두 생생히, 큰 목소리로 증언하고 있었어요. 자신이 본 연극을, 무용을, 무대를, 배우를, 이야기를, 빛을, 청소년을, 광장을, 장애인을, 세월호를, 아기와 엄마를, 개를, 할머니 귀신을, 삐뚤빼뚤한 종이테이프를, 크게 웃을 용기를, 구멍 난 몸들을, ‘조금 전 사라진 세계의 안쪽을 믿지도 잊지도 못하면서’3 계속 관객을 부르고 당신이 만난 가장 아름다운 것을 본 장소로 데리고 간다고 느꼈어요. 정확하여 고통스러울 때도 있었어요. ‘어쩌면 때로 우리가 의지적으로 향해 가야 할 곳은 정확히 우리 자신의 과거다. 상처를 봉합하고 과거를 내려놓기 위해서가 아니라 상처를 주고받고 타인에게 침범하고 또 침투당하며 과거로부터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두기 위해서.’4 실망했다가도 금세 다시 믿기로 한 사람이 쓴 글이었고 그 모든 글들이 제게 몹시 뜨겁게 느껴졌어요.

그리고 저는 은빈 님께서 〈비평하는 마음〉에 밝히신 대로 필자가 엄청나게 이동하고 있다고 감각했어요. 하지만 저는 은빈 님이 이것에서 저것으로, 저것에서 다시 이것으로 몸을 바꾼다고 생각 들진 않았어요. 오히려 전혀 다른 위치들을 모두 껴안고 부들부들 서 있는 은빈 님을 보았어요. 그 사람은 조금 전에 자신이 말한 문장을 곧바로 의심하기도 했어요. 그 흔들림이 일으키는 진동이 실로 엄청났습니다. 아무래도 그 진동에 울음이 시작된 것 같아요. 그리고 그 순간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린” 연극들이 계속 여기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렸어요. 배우가 등 뒤에서 ‘전력을 다해 뛰어가는 소리, 옷깃이 스치는 소리, 헐떡이는 숨소리’5를 들었어요. 비평글은 ‘기록’이 아니라 ‘기억’임을, 과거가 될 수 없거나 과거였던 적 한 번도 없는 것들이 계속 다시 시작되는 ‘극장’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은빈 님께서 〈다시 사랑하고 사랑받기 위해서〉에 쓰셨던 마지막 문장을 다시 생각했어요. 그리고 저는 친구와 대화를 나누다가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던 어떤 순간, 친구가 제 손을 부드럽게 잡아줬던 순간이 생각났어요. 저조차도 모르겠던 어떤 마음들이 손등에 닿은 그녀의 엄지손가락과 손바닥을 감싸던 그녀의 따뜻한 손바닥 사이로 비로소 포개진 기분을 찰나 느꼈었는데요. “빈손을 덥석 잡는”다는 건 너를 위로하거나 보듬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 그 어떤 말도 충분하지 않기 때문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였어요.

그리고 저는 그 어떤 말로도 충분하지 않게 느껴지는 어떤 순간들을, 언어로 만지고 깎고 다듬어 가장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자리를 기어코 만들어 내는 모든 비평가분들을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앞으로 수미 님에 이어 은빈 님의 두 번째 독자로 입주하고 싶어요. 즉각적인 피드백을 돌려드리거나 발표하신 글을 한달음에 읽지 못하는 날도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꾸준한 성실함으로 당신의 글을 똑바로 마주하며 읽는 독자가 되겠습니다. 나누고 싶은 생각이나 마음이 있다면 싱거운 한 마디가 될지언정 꼭 전할게요. 잘 부탁드려요. 저도 그럴게요. 고맙습니다. 곧 극장에서 또 반가이 만나요.

 

배선희 드림.

 

 


1 “제게 비평이란 누군가에게 좋은 대답을 주는 일인 것 같습니다. 그 일은 작품이 받아야 할 마땅한 비판뿐만 아니라 풍요롭고 충분한 감탄 또한 포함합니다. 그들이 무엇을 해냈는지 좋은 눈썰미로 알아보고, 모자람 없이 칭찬하고, 창작자들이 다음 작업을 할 수 있도록 필요한 말을 보태는 일. 저는 그 일을 잊지 않고 싶습니다.” 하은빈, “비평하는 마음”, 에디토리얼 콜렉티브 널. https://collectivenull.com/002-2/ (본문의 따옴표 문장은 모두 하은빈 님의 “비평하는 마음”에서 인용하였다.)
2 “나는 길게 울고 나서 막 세수한 사람처럼 말개진 얼굴의 선희를 바라보다가, 그가 유령 할머니는 향해 뻗은 빈손을 대신 덥석 잡는 상상을 했다.” 하은빈, “다시 사랑하고 사랑받기 위해서”, 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2022. 9. 4. https://kugnews.tistory.com/m/402
3 하은빈, “믿지도 잊지도 못하는 어떤 안쪽”, 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2022. 12. 12. https://kugnews.tistory.com/m/452
4 하은빈, “딱지 벗기기 : 심지후, 〈비밀의 화원〉”, 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2023. 12. 6. https://kugnews.tistory.com/m/617
5 하은빈, “스틸 미싱, 혹은 상실의 트레이닝 : 여기는 당연히 극장, 〈그로토프스키 트레이닝〉”, 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 2023. 9. 4.  https://kugnews.tistory.com/m/5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