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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와 말 사이에서*
하상현
*이 글은 2023 국립현대무용단 아카이브북 『카베에: 언/아카이브』에 수록된 글입니다.
null에서는 하나의 공연을 주제로 만들어진 여러 개의 글을 비교하는 기회를 만들어보고자,
null의 멤버들(조형빈, 하상현, 하은빈)이 비평으로 참여했던 『카베에: 언/아카이브』의 세 개의 글을 싣습니다.
황수현 〈카베에〉 © 박수환, 국립현대무용단 제공
0. 동굴 밖에서
〈카베에〉에서 본 것을 어떻게 글로 쓸 수 있을지 고민했다. 글과 그림으로 본 것을 남기고, 기록 영상을 보면서 모든 걸 시간순으로 적어보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장면은 계속해서 사라진다. 사라지는 것을 어떻게 받아쓸 수 있을까? 공연에서 느낀 감각은 극장을 나온 뒤, 삶의 시간을 지나며 매 순간 다르게 해석된다. 무엇보다 무뎌지고, 거칠게 잘라지고, 망각된다. 완전히 기억하고자 하는 거만함을 포기하면 그제야 기억하는 일을 시작할 수 있다.
〈카베에〉는 무엇보다도 소리가 중심에 있는 작업이다. 특히 몸에서 나는 소리다. 인간은 다른 사물과 접촉하고 부딪혀 소리를 내거나, 몸 안의 성대를 진동시켜 소리를 낸다. 이것으로 할 수 있는 것들—입소리, 울음과 신음, 공기가 폐에서 빠져나가는 소리, 노랫소리, 새소리, 피부와 바닥을 마찰시키는 소리, 비명과 함성, 메아리. 이것들은 아직 말이 되기 이전의 소리다. 또 말의 밑에서, 말의 밖에서 말을 감싸고 있는 소리다.
갓 태어난 아이는 언어를 배우기 이전에 소리를 낸다. 아(a), 에(e), 이(i), 오(o), 우(u). 또 아이는 소리를 조합해 자신과 가장 가까이 있는 몸을 부른다. 맘(mam), 마마(mama), 맘마(mamma), 암마(amma), 엄마(eomma), 아마(ama), 마망(maman), 마모(mamo), 메(me). 기본적으로 우리는 모국어가 아닌 언어를 이해할 수 없다. 그렇지만 몸이 취약한 어린 시기에 가장 긴급하게 부르는 존재인 ‘엄마’를 뜻하는 단어는 서로 비슷하게 발음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언어가 복잡하게 분절되기 이전의 말소리는 인간의 신체 구조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으며, 많은 경우 모음이 음절을 이끈다. 이 소리를 몸과 원초적인 관계를 맺는 소리, 어머니성1을 가진 소리라고 할 수 있다.
얼마 전 우연히 “아기의 언어”라는 영상을 봤다. 프리실라 던스턴(Priscilla Dunstan)은 아기들의 울음소리가 의미를 담고 있는 언어라고 설명한다.2 그는 총 다섯 가지의 울음소리를 소개했는데, 각각 네헤(neh, 배고픔), 아우(owh, 졸림), 헤에(heh, 불편함), 이에(eairh, 복부 팽만), 에(eh, 트림 필요)이다. 방송에서 여러 아기의 울음소리를 미세하게 비교하면서 차이를 잡아내는 모습은 우스꽝스럽게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 분석을 자세히 살펴보면 소리가 실제 아기의 신체 상태와 매우 밀접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트림 필요인 “에(eh)”의 경우 갇힌 공기를 빼내기 위해 가슴을 조이며 생겨나는 소리이며, 아기는 그 반동으로 숨을 순환시킬 수 있게 된다. 또 몸은 잠이 올 때 하품을 하여 입 공간을 크게 벌리고, 그 사이로 호흡이 지나가면서 “아우(owh)” 소리가 난다. 인간은 지루한 이야기를 들으면 하품(owh)이 나고 잠이 온다. 잠은 사회적 연결을 끊고 자신만의 공간으로 침잠하는 행위다. 이렇게 상황에 반응한 몸은 소리를 만들어 내고, 그 소리는 다시 상황을 알리는 신호가 된다.
이 소리들은 반복적인 훈련을 통해 학습한 것이라기보다 신체의 일차적 반응에서 나온다. 〈카베에〉를 비롯한 황수현의 안무 작업은 이러한 ‘아직 말이 되지 않은 신체적 소리’의 가능성을 탐구한다. 이는 사회 속에서 이미 통용되거나, 매끄럽게 소통 가능한 언어는 아니다. 작업이 주목하는 것은 말의 외부로 밀려나 있는 것들로, 말이 아니게 된 말, 그리고 말에서 탈락하여 말이 될 수 없는 목소리들이다. 이들은 때로, 서로 다른 층에 있는 우는 몸들이 예민하게 소리를 감지해 큐를 맞추는 방식에서(〈우는 감각〉, 2018), 한 사람의 감각이 타인의 감각으로 전이될 수 있는지를 살피는 과정에서(〈나는 그 사람이 느끼는 것을 생각한다〉, 2019), 눈을 감고 시각 없이 취약해진 서로의 신체를 감각하는 안무에서(〈검정감각〉, 2019) 드러난다. 이 작업들은 목소리와 말 사이의 점이 지대를 바라보게 한다. 비명도 말도 아닌 소리, 자신의 내부에 함몰된 것도 타인을 향한 내뱉는 언어도 아닌 소리들. 여기엔 몸과 또 다른 몸 사이를 이어 내는 정의되지 않는 파동이 흐르고 있다. 이들은 어떤 관객에게는 한순간 의미를 담은 언어가 된다. 그러다 이내 의미로부터 달아나 그 자체로 흩어진다.
말이 되지 못하는 목소리와 존재들, 깨진 언어와 모음(어머니 소리)을 다룬 또 하나의 작업이 떠오른다. 차학경(Theresa Hak Kyung Cha)의 〈입에서 입으로〉(1976)이다. 어린 시절 미국으로 이주한 차학경은 자신의 모국어가 흩어지고 있음을 자각했다. 이 작품은 무의미한 소리가 되어가는 자신의 어머니-언어에 대한 기록이자, 이를 기억하고자 하는 실천이다. 흐린 화면에서 느리게 한국어 모음을 발음하는 입술이 등장한다. 소리가 들리지 않고, 초점이 맞지 않는다. 물소리와 백색소음이 교차하며 들려오고 또 사그라든다. 이내 화면 속 흑백 노이즈가 입술의 움직임을 보이지 않게 덮는다. 밀물이 모래사장의 글씨를 지우는 것처럼. 검고 균질하게 변한 화면은 진동하는 바다, 깊이를 알 수 없는 표면이 된다. 여기서 모국어를 발음하는 입술과 그 이미지는 사라진다. 동시에 사라짐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나타난다.
하나의 공연을 기억하는 일은 이와 비슷하다. 사라진 것을 보는 일은 검은 표면을 보는 일이자, 그것이 내게 돌려주는 남은 자국을 보는 일이다. 이어질 2장 “어떤 장면: 다시 사라졌다 나타나기(Re Dis Appearing)”는 〈카베에〉의 한 장면을 글로 적은 것이다. 긴 암전이 있고 난 후 첫 장면이었다. 이 장면은 차학경의 작업과 그의 저서 『딕테(Ditee)』(1982)를 보게 했다. 『딕테』는 멀리서 온 한 몸, 어떤 여성의 몸에 대한 글이자, 어떤 불가능한 언어를 욕망하는 글이다. 이 글의 가장 마지막 부분은 『딕테』의 한 부분을 직접 번역했다. 번역을 하면서 글에 등장하는 표현인 ‘정확성을 측정하기 위해 주저하는’ 것과 ‘말을 흉내 내는’ 행위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그건 어쩌면 번역이라는 행위 자체를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모든 말하기는 사실상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번역이자, 받아쓰기다. 매 순간 사라지는 공연을 받아쓰는 일은 원래 불가능하다. 『딕테』가 이미 있는 언어로, 그 언어에서 드러날 수 없는 존재를 받아 쓴 것처럼, 또 〈카베에〉가 몸이 모이는 와중에 사라지는 몸을 한 켠에 둔 것처럼.
1. 미디엄으로서 몸에 관한 노트
황수현이 무용수에서 안무가로 전환하며 처음 관심을 가진 주제는 몸의 실재성, 몸 그 자체였다. 그는 무대 위에서 실제적인 몸을 찾고 싶었다. 그러나 〈페이스 투 페이스〉(2013)와 같은 초기 작업에서부터 실제적인 몸의 불가능성을 만난다. 이후 그는 “리허설 때는 [몸이] 굉장히 살아있는 순간으로 느껴지다가 무대에 올라가는 순간” 보이고, 재현되고, 반복되며 이미 어떤 종류의 실재성이 사라지게 되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3 실재 자체로부터, 그것이 제시되는 조건인 미디엄(medium)4으로 관심의 초점을 옮긴 것이다.
무대 위에서의 몸은 특정한 지시를 부여받은 수행적 역할과 동시에 스스로 기억이나 인식,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주체적 역할로 존재한다. 두 개의 역할이 혼돈된 몸은 공연이 진행하는 과정 속에서 또 다른 가상의 몸으로 관객과 마주하게 된다.5
몸의 실재성과 관련된 ‘일회적 현존(라이브성)’, ‘무대 밖의 현실’, ‘진정성 있는 감정’과 같은 것은 무대라는 장치를 만나는 순간 변용된다. 그렇기에 안무가는 “오히려 가상적이고 허구적인 게 무대 공간에서는 더 실제적인 게 아닐까”라는 생각에 닿는다.6 여기서 무대 위의 몸은 안무가에 의해 구성된 가상적인 몸이지만, 특이성(singularity)을 가진 몸으로서 관객과 만나며 정동을 불러일으킨다.7 황수현의 작업에서 몸은 두 역할 중 어느 한쪽에 속하지 않고 이를 오간다.
스스로 진동하는 매개자, 미디엄으로서의 몸에 대한 이러한 관심은 그가 ‘울음’을 다루는 방식에서 잘 드러난다. 우는 것은 슬픔에 대한 즉각적이고 개인적인 반응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렇지만 울음소리는 주변인들에게 무시할 수 없는 감정적 반응을 끌어내고, 근원지인 몸에 주목하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 가짜로 울음소리를 내는 경우에도 말이다. 이처럼 울음은 개인적인 행위임과 동시에 강력한 사회적 효과를 만들어 내는 행위이다. 울음을 본격적으로 다룬 작업 〈I want to cry, but I am not sad〉(2016)에서 안무가는 감정에 대한 결과물로서 울음이 아닌, 호흡이나 떨림 같은 신체 조절을 통해 만들어진 울음을 안무의 요소로 사용한다. 관객 모두가 퍼포머의 울음이 인위적임을 알고 있지만, 울음소리는 물리적으로 관객을 동요시키고, 그들의 정서와 기억, 신체적 반응을 불러낸다. 감정을 유발하는 효과에 집중하여 만들어진 우는 행위는 여전히 관객에게 실체로서 작동한다. 이는 이를 수행하는 퍼포머 자신에게도 마찬가지다. 내부적인 감정과 분리시킨 울음은 다시 한 바퀴 돌아, 퍼포머의 정서와 기억, 그리고 신체적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이때 퍼포머는 자기 신체를 스스로 추상화하고 도구화하면서, 동시에 그것의 감각적인 파장 안에 놓인다. 이같이 자기 몸과 내면성을 분리하는 형식은 감각을 공간에 펼쳐 공유할 수 있는 형태로 제시할 수 있게 해 준다.
대상의 깊이를 전제하지 않고, 현상 표면에 집중하는 경향은 오브제의 내부가 아닌 표면 이미지와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효과에 집중한 1960년대 미니멀리즘 조각의 방식과 맥을 같이한다. 황수현은 움직임의 표면 효과와 배치에 집중함으로써 모던 댄스의 내면적 표현과 거리를 둔다. 그는 신체와 시공간의 물리적 조건을 관찰하고 그것에 움직임을 발생시키는 특정한 규칙을 설계하는 것이다. 이는 일정 부분 자신에게 떠오른 이미지를 제한하기 위함이다. 물론 이때 발생한 움직임 또한 특정한 ‘표현된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 그렇지만 그러한 이미지는 거울을 통해 동일한 메소드를 무용수에게 전달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진 움직임과는 표현성의 차이가 있다.
2. 어떤 장면:
다시 사라졌다 나타나기 Re Dis Appearing8
이내 몸들은 하나둘 흩어져 시야에서 사라진다. 등을 바닥에 붙이고 있다.
누워있지만, 동시에 이동한다. 거의 시체처럼 바닥 가까이 붙고
또 마찰이 없는 것처럼, 지속적으로 움직인다. 천천히
눈에서 벗어난다.
긴 암전 끝에 몸을 조금은 단단히 세우고, 뒤로.
등에 눈이 있는 것처럼 등장한다(걷는다)
이때 뱉는 단말마의 아-(A) 소리, 이것은 노래가 아니었다. 신음도, 비명도 아니다.
화성(和聲)이 아니다.
말과 말소리 사이에서
언어를 알았던 자가 언어를 고의로 잊으며 뱉은,
언어가 되지 못한, 언어가 되기 이전의 소리(아마 그것만이 새로운 언어의 가능성이다)
홀로 서서. 아니, 홀로 선 누군가와
간격을 두고
DISEUSE9
그녀는 말하는 것을 흉내 낸다. 말하기를 닮은 것을. (어떤 것과 비슷하다면.) 벌거벗은 소음, 신음, 단어로부터 뜯겨져 나온 파편들. 정확성을 측정하기 위해 주저하기 때문에, 그녀는 입으로 흉내 내는 몸짓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아랫입술 전체가 위로 올라갔다가 다시 원래 자리로 내려앉는다. 그리곤 두 입술을 모으고 뾰죽이 돌출시킨다. 어떤 소리를 낼 듯 숨을 들이쉬면서. (한 마디. 단 한마디.) 그러나 숨이 떨어진다. 뒤쪽으로 머리를 약간 젖히며, 어깨에 힘을 모으고 이 자세로 남아 있는다.
속에서 웅얼거린다. 웅얼웅얼한다. 속에는 말하기의 고통 말하려는 고통이 있다. 그보다 더 큰 것이 있다. 더 거대한 것은 말하지 않으려는 고통이다. 말하지 않으려는 것. 말하려는 고통에 대항해서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안쪽에서 곪는다. 상처, 액체, 먼지. 터뜨려야 한다. 비워내야 한다.
그녀는 목뒤에서부터 어깨를 내려놓는다. 그녀는 숨을 한 번 더 삼킨다. (한 번 더. 단 한 번이면 될 것이다.) 준비 중에. 그것은 수축해 올라간다. 바로 그 음을 향해. 끝없는 웅성거림이, 그 스스로 연료를 공급하며. 자율 신경적인. 자생하는. 말하기를 바라는 고통에 대항하는 마지막 의지를 마지막 노력을 다해 삼켜 버린다.
그녀는 타인들을 허용한다. 그녀의 장소 대신에. 타자들이 가득 차도록 허락한다. 떼를 짓도록. 모든 불모의 공동(空洞)이 부어오르도록. 타인들은 각기 그녀를 메운다. 종양의 겹들, 모든 빈 구멍이 그녀의 살이 될 때까지, 초과한 모든 것들을 배출한다.
[…]
그녀의 빈 공간 속. 더 이상 들어있지 않다. 텅 빈 아래로부터 떠오른, 가스의 자갈 혹 덩이들. 습기. 그녀를 침수시키기 시작한다. 그녀를 용해시키며. 서서히, 신중함을 향하여 느려진다. 서서히 그리고 두껍게.
1 ‘어머니성(maternity)’은 몇 가지 차원에서 이야기할 수 있다. 먼저, 본문에서처럼 실제로 아기가 가까운 몸을 부른다는 의미에서 ‘신체의 근접성’과 관련된다. 두 번째로, 유아의 원초적인 욕구인 구강기, 항문기, 남근기 욕구의 반응이라는 의미에서 ‘신체적 필요’와 관련된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소리가 타인인 어머니와 나 사이에 구분이 흐릿한 전-사회적이고 무의식적인 성격을 가졌다는 뜻에서 ‘탈-자아적인 상태’와 관련된다.
2 Oprah Winfrey Network. “One Woman Unlocks the Secret Language of Babies.” YouTube video, 08:54. Nov. 29, 2018. https://www.youtube.com/watch?v=afMNp6Q4u7s
3 황수현, “Pre-performance Interview – 가상의 몸, 실재하는 몸”, 인터뷰어 김정현, 「황수현, 〈I want to cry, but I’m not sad〉」, 『MMCA×KNCDC Performance: 예기치 않은 : 2016 다원예술프로젝트』, 국립현대미술관, 2016, p. 11.
4 미디엄은 실재를 매개하는 ‘매체’를 의미하는 말이자 ‘영매’를 뜻하기도 한다. 채널링(channeling)으로 번역되기도 하는 영매는 두 차원을 이어주는 존재(매체)로서의 몸이다. 황수현의 작업은 실재의 제시 조건으로서 미디엄에 대한 것이기도 하지만, 종종 이런 영매적인 감각을 코앞에 던지기도 한다. 긴 머리로 얼굴을 가리고 서로 뒤엉킨, 뒤집어진 여성들이 웃는 얼굴을 순차적으로 관객에게 들이밀거나(〈나는 그 사람이 느끼는 것을 생각한다〉), 곡소리를 통해 감정이 표백된 화이트큐브 공간을 귀신적으로 ‘울리고’ (〈우는 감각〉), 수평으로 누워 반쯤 죽은 것 같은 몸들이 눈앞에서 서서히 치워진다(〈카베에〉). 이처럼 무언가 튀어나올 것 같은 으스스한 감각은 억압된 대상을 촉각적으로 불러온다.
5 앞의 글. 김정현 인터뷰어가 황수현 안무가의 〈소설화하는 몸〉(2013)에 관한 설명을 언급하며.
6 앞의 글.
7 정동(affection)은 개인적인 감정과 정서들이 사실상 축적된 사회적인 사건-대상과 촘촘하게 연계되어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특정한 정동은 온전한 개인의 영역도, 온전한 사회적인 영역도 아닌 그 둘의 사이의 접촉면에서 발생한다.
8 이 장의 제목은 차학경의 비디오 작업 〈다시 사라짐 Re Dis Appearing〉(1977)에서 가져왔다.
9 Theresa Hak Kyung Cha. Dicte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09. pp. 3-5. 필자의 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