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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에 갇힌 동굴: 〈열병의 방〉과 이미지의 연극성
이민주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열병의 방〉 ©Kick the Machine Films
이야기는 동굴에서부터 시작한다. 땅속 깊이 자리 잡은 공간, 빛이 없는 어둠. 플라톤의 유명한 ‘동굴의 비유’에서 알 수 있다시피, 동굴은 빛과 어둠, 사물과 그림자 사이에서 유희하는 이미지의 역사적인 장소다. 그 어둡고 축축한 공간에서 새어 나오는 빛을 따라가 보면 태국의 영화감독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작품 〈열병의 방〉(2015)이 있다. 이 글은 작품이 뜨겁게 앓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관찰하면서, 일종의 장소로서 이미지를 다루는 방식과 그것의 연극적인 성질에 관해 이야기해 본다.
2023년, 공연예술의 확장과 실천을 조명하는 옵/신 페스티벌이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열병의 방〉을 ‘프로젝션 퍼포먼스/시어터’라는 형식으로 초대했다. ‘퍼포먼스’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다시피 태국의 영화감독으로 알려진 그의 작업은 이번 페스티벌에서 공연의 맥락으로 소개되었다. 2015년, 광주아시아예술극장의 지원을 받아 제작된 이 ‘영화’는 애초에 상영관을 위한 작업이라기보다 극장에 오르기 위한 작업인 셈이다. 그는 예술극장과의 인터뷰에서 “내게 영화와 공연은 같은 개념이다. (…) 다만 새로운 장치들, 새로운 규칙으로 영화를 촬영하고 있는 것이다.”1라고 말하며 영화로서의 작품 위상을 유지하려는 태도를 보인다. 말하자면 그의 작업은 영화와 공연 사이에서 영화의 형식적 확장을 도모하는 실험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옵/신이 소개하는 방식처럼, 영화, 공연예술, 혹은 미술의 경계에 놓인 작업은 그 형식적 모호함으로 인해 ‘퍼포먼스’라는 포괄적인 명칭으로 불리곤 한다.2 형식의 내재적 구분이 모호해진 특정 역사적 시점 이후 퍼포먼스는 춤, 연극뿐만 아니라 회화, 조각 거의 모든 형식과 긴밀하게 관계 맺고 있다.3 하지만 그 용어가 때때로 예술의 다양한 양상을 하나로 뭉뚱그리는 의미처럼 사용된다는 점을 떠올려보면, 우리는 구체적으로 그의 영화에 내재한 ‘퍼포머티비티’, 혹은 그 이미지가 수행적으로 실천하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이 글은 하나의 장(scene)에서 벗어나는(ob) 지점을 포착하는 옵/신의 렌즈를 따라가며 〈열병의 방〉이 영화의 자장을 넘어서는 장면을 포착해 본다.
공연장으로 안내하는 물리적 경로, 실제 동굴의 이미지를 담은 영상 푸티지, 그리고 어두운 공간을 에워싼 포그(fog)와 맺힘 없는 빛의 굴절. 〈열병의 방〉은 ‘동굴’의 이미지를 세 가지 방식으로 겹쳐놓는다. 먼저 공연장을 향한 길을 따라가 보자. 사람들이 느슨하게 모여있는 어설픈 풍경이 있다. 관객은 공연장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으며, 화살표를 따라가 대기해달라는 안내를 받는다. 기다림 끝에 출입구로 진입하면 암전된 통로를 거쳐야 한다. 마치 동굴로 진입하듯 관객은 어둡고 좁은 계단을 더듬어 공연 스태프가 들고 있는 희미한 조명을 따라간다. 도착한 장소에는 또 다른 스태프가 스크린으로 둘러싸인 텅 빈 공간의 바닥에 관객을 나란히 배열하고 있다. 모든 관객이 착석하면 위라세타쿤의 영화가 스크린에 투사되며 태국의 평화로운 일상, 마을 사람들의 모습이 화면에 비춰진다.
위라세타쿤이 관람 이전부터 설계해 놓은 공간에 관한 경로는 영화적 경험을 위한 장치다. 시네마의 역사적 맥락에서 영화는 단순히 이미지를 감상하는 대상이 아니라, 이미지를 마주하는 신체와 공간적 경험이다. 관객의 시청각적 자극과 몰입을 위해 동원되는 폐쇄적인 영화관의 건축 구조를 떠올려보면 알 수 있다. 이미지로써 관객을 매혹시키기 위해 영화는 특정한 공간과 상황을 구축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를 ‘영화적 상황(situation cinematographique)’이라고 부른다. 프란체스코 카세티(Francesco Casetti)에 따르면 이 개념은 스크린, 영화관, 관객이 구성하는 모든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이미지에 관한 인식 및 해석, 서사에 대한 몰입, 그리고 영화 속 캐릭터들과의 동일시, 투사 등과 같이 영화 관람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뜻한다.4 이 영화적 상황은 관객의 충분한 몰입감을 위하여 관객의 부동성을 요구한다. 말하자면, 영화적 관람 경험은 관객의 부동성과 이미지의 운동성이 충돌하는 장소를 마련하는 일인 것이다.
실제로 영화의 발명 이후 20세기 전반에 걸쳐 영화관과 ‘동굴’은 같은 지평에서 논의되곤 했다. 이는 플라톤이 『국가』에서 ‘동굴의 비유’로 제시한 상황을 따른 것이다. 플라톤은 동굴이라는 특정 장소에 신체를 결박당한 채 모여 있는 죄수를 보며, “앞만 보도록 되어 있으며 머리를 돌릴 수 없는” 상태로 묘사한다.5 뒤쪽으로 타오르는 불빛에 의해 죄수들은 알 수 없는 존재들의 소리와 정면에 비춰진 그림자만 확인할 수 있다. 이 장면에서 동굴 속 죄수들의 배치와 시네마토그라프적 영화에서 관객이 극장에 앉아 스크린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집단적 관람의 양상이 겹쳐지는 것이다.
위라세타쿤은 이러한 영화적 상황을 동굴의 이미지와 직접적으로 연결시킨다. 그는 관객을 공연장으로 향하는 통로에서부터 지정된 좌석에 배열하는 방식까지 마치 플라톤의 죄수처럼, 신체적으로 통제하며 공연의 장소를 ‘동굴화’한다. 나아가, 실제 무대 공간에 동굴이라는 이미지를 포개어 놓을 뿐만 아니라 직접적으로 동굴 이미지를 영화의 한 시퀀스로 담아내고 있다. 영상에서 한 남성이 손전등에 기대 동굴의 암흑으로 향한다. 그곳은 지나가는 장소인지, 도착하는 장소인지 알 수 없다. 동굴 시퀀스는 평온하고 일상적인 태국 풍경과 병렬하며 평범한 생활 속에서 가시화되지 않는 정치적 분위기를 감지하도록 유도한다. 보이지만 알 수 없는 가시적인 세계, 지성으로 알 수 있지만 보이지 않는 이데아의 세계를 대비하는 플라톤의 동굴처럼.
〈열병의 방〉에는 빛, 공간, 스케일 등 영화의 철학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이 작품에 존재하지만, 이 작품의 특이성은 영화 형식이 제안하는 몰입적 성질을 거부한다는 점이다. 여기서 우리는 영화의 연극적 성질을 발견할 수 있다. 사전적 의미에서 ‘연극적(theatrical)’이란 단어는 무대에서 배우들이 말과 행위로 관객에게 이야기를 전달하는 장르적 속성을 지칭한다. 이는 무대와 관련해 언급되어 왔으며, 19세기에 이르러서 ‘연극성’이라는 말로 논의를 확장시키기 시작했다. 연극성은 언어의 표면 아래 있는 공연 요소인 동작, 어조, 거리, 물질, 빛 등 감각적인 기법에 관한 인식을 드러내는 단어로서, 미술의 역사에서는 모더니즘에서 말하는 ‘몰입’과 대립적인 용어로 사용되곤 했다. 그린버그식 환원주의적 모더니즘에 따르면 작품은 매체의 내적 성질과 물질적 구성 자체로 완성되는 것이었다. 즉, 작품이 놓인 맥락과 배경, 그리고 관객은 작품의 요소가 되지 않았다. 이러한 특징으로 인해 연극성은 작품을 둘러싼 관객의 움직임, 빛, 공간의 물리적인 특징을 강조하며 시각 중심적으로 구조화된 미술의 감각적 위계에 도전하는 개념으로 부각되기도 했다.6
위라세타쿤은 관객이 영화관에 걸린 스크린을 의식하도록 이끄는 것이 언제나 그의 영화에서 중요한 요소였다고 말한다.7 스크린의 이미지와 이미지가 만드는 내러티브보다 이미지를 둘러싼 움직임과 공간성에 집중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는 스크린 위 이미지의 운동성으로부터 관객의 몰입적 경험을 유도하려 시도하지 않는다. 그는 스크린을 마주하는 관객의 신체적 감각, 영화를 지탱하는 조건에 새로운 가능성을 기대하고 있다.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열병의 방〉 ©옵신페스티벌 제공
정면과 양 측면. 바닥에 쪼그려 앉은 관객을 가둬 두었던 세 면의 스크린이 불현듯 암전과 함께 올라간다. 그리고 이내 스크린 너머로 텅 빈 객석이 보인다. 관객은 이내 자신의 위치가 무대 위라는 걸 깨닫는다. 전도된 관객의 위치로 날카로운 빛이 쏟아진다. 안개처럼 공간을 메우고 있던 포그가 빛과 만나 동굴의 형상을 빚어낸다. 스크린 속 비춰진 동굴이 이내 관객의 눈앞으로 마치 실체처럼 현현한다. 위라세타쿤의 포그스크린 연출은 일견 몰입적 경험을 유도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빛, 공간, 스케일과 같은 영화의 구성 요소와 환경을 적나라하게 노출시키는 연출 효과는 관객이 이미지로부터 거리를 확보하게끔 하며, 이미지의 환영성과 그 환영의 조건들을 가시화 하는 장치로서 기능한다. 그는 영화에서 사건을 중심으로 내러티브를 구성하기보다, 영화라는 형식 자체를 사건으로서 무대 위에 올려두고 있는 것이다.
해석이 텍스트에 종속되는 행위이고, 횡단이 종속의 조건들을 재고하는 탈행위8이라고 할 때, 영화는 현실의 무대와 영상 속 동굴의 경계를 흐리는 연출 효과로부터 내러티브를 해석하게 만들기보다, 이미지 자체를 횡단하도록 한다. 다시 말해서, 위라세타쿤은 연극의 문법으로 의식화된 영화의 형식을 벗어나는 탈행위적 실천인 것이다. 언어의 표면 아래 있는 이미지의 운동성과 신체적 감각의 가능성을 추구하면서 말이다. 모든 가시적인 세계의 조건인 빛. 빛이 가둬둔 공간에서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칠흑의 장소에서 이미지의 파편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온다.
1 “[칼럼] 아시아, 예술, 극장”, 한국영상자료원, 2015년 9월 10일 수정, 2023년 12월 15일 접속, https://www.kmdb.or.kr/story/58/1966
2 일반적인 상영 영화의 특징과 다른 인스톨레이션 관람 방식, 연극적인 상연 장소까지 혼합한 그의 복합적인 예술 형식은 ‘퍼포먼스’라는 절충적인 명칭으로 합의된 것처럼 보인다. 이선우,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이 제시하는 영화의 확장 가능성: <열병의 방 Fever room>이 환기하는 것들」, 영화연구 제74호, 2017, 115쪽.
3 특히 ‘연극학’이 연극의 범위를 전통적인 공연예술에서 실험적인 맥락의 ‘퍼포먼스 아트’로 확대하면서 그 장르 간 의미의 쓰임새는 확장되었다.
4 Francesco Casetti, Les Théoires du cinéma depuis 1945, Nathan, 1999, p. 109; 이윤영,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와 영화」, 『미학』 제78집(2014년 6월), 192-193쪽에서 재인용.
5 플라톤 지음, 박종현 옮김, 『플라톤의 국가·정체(政體)』(서광사, 2006/1997)(514b); 이윤영, 위와 동일, 189쪽.
6 연극성은 서로 다른 요소들을 서로 관계시키는 역할을 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를 미술의 영역으로 끌어오는 것은 장르적 혼합을 유발하게 되는 것이었다. 이에 관해 모더니스트였던 마이클 프리드는 예술작품을 하나의 사물의 위상으로 격하될 위험성을 주장한 바 있다. 자세한 논의가 궁금하다면, 마이클 프리드의 『미술과 사물성(Art and Objecthood)』(1967)을 참고할 것.
7 사사키 아츠시, 아피찻퐁 위라세타꾼, 「열병의 방」, 김성희 엮음, 『우리가 공유하는 시간』, (서울: 작업실유령, 2023), 109쪽
8 서현석, 김성희 지음, 『미래 예술』, (서울: 워크룸 프레스, 2016), 4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