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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담: 지금, 비평의 지형과 요구들
권태현, 라시내, 조형빈, 하상현, 하은빈, 한수민
우리에게는 어떤 비평이 필요한가
조형빈 오늘은 에디토리얼 콜렉티브 널(editorial collective null, 이하 『null』)의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에 앞서, 『null』의 구성원들이 어떤 방향성을 가지고 있고 이 매체를 통해 무엇을 보고 싶은지 이야기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여기에 모인 모두는 저마다 지금의 비평이 놓치고 있는 지점들을 해소하고 싶은 갈증과 욕망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안다. 어쩌면 그 갈증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우리가 『null』을 만들게 된 것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오늘 좌담에서는 우리가 동시대 비평의 지형에서 무엇을 더 사유해야 하는지, 그 사유는 어떻게 글로써 실천될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예술의 어떤 부분들을 메꿔줄 수 있는지 이야기해볼 예정이다. 이런 이야기들을 통해 에디토리얼 콜렉티브 널이 나아가고자 하는 지향점을 짚어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먼저, 각자가 보고 싶은 글은 어떤 것인지 이야기를 나눠보자. 『null』은 왜 존재해야 할까? 우리는 무엇을 보고자 하나?
먼저 저부터 말씀을 드려보겠다. 예전부터 다양한 무용 매체들이 생산해내는 글들을 보면서, 거기에 무언가가 빠져있다는 생각을 오랫동안 해왔다. 내가 보고 싶은 것이 있는데, 어디에서도 그런 글을 찾을 수가 없었다. 찾고 있었던 것이 어떤 글인지 단정적으로 잘라 말하기는 어렵지만, 대부분의 무용 비평들이 오직 무용의 ‘겉’만을 다루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많은 글들이 모양새를 설명하는 것에 치중하고, 그것이 비평의 전부인 양 굴고 있었다.
이것은 단순히 ‘비평이라면 무릇 어려워야 한다’, 이런 것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나는 저 공연 안에 있는 몸들이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지 그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그런 이야기를 하는 비평이 보이지 않았다. 같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구조가 되기를 바랐는데, 글들은 ‘저 춤이 어떤 컨벤션 위에서 만들어지고 있는지’에 대해 겉만 핥고 있었다. 내가 알기로 몸은 훨씬 많은 것들을 담을 수 있는 매체인데, ‘무용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것들이 고작 이것 밖에 없나?’ 이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다.
작년에 『춤in』에서 편집위원으로 일하기 전까지는 이런 이야기를 나눌 사람을 찾기조차 어려웠다. 이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주위에 있었다면, 어느 매체에 글을 쓰는지는 크게 상관이 없었을 것이다. 이 채워지지 않는 대화에 대한 갈증이 공허함으로 다가왔다. 그랬다가 작년에 『춤in』에서 일하면서 만났던 동료들, 글을 주신 필자들을 보면서, ‘이런 사람들과는 같이 이야기를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올해는 『춤in』이 갑작스럽게 없어지기도 했지만, 좋은 동료들이 ‘이제 때가 되었다’고 이야기를 해주어서 『null』을 시작하게 되었다.
내가 보고 싶은 것은 ‘춤 안의 몸’이다. 그냥 몸이라기보다 (춤 안에 들어있는)몸이 춤이라는 맥락 안에서 어떻게 전유되는지, 이것을 보고 싶다. 그런데 오래 전부터 봐왔던 숱한 재미없는 글들에는, 오로지 ‘춤만’ 존재했다. 비평 안에 춤이 없이 ‘몸만’ 있어도 재미가 없는 것은 마찬가지다. 춤 안의 몸이 어떤 맥락을 가지고 있는지 살펴보고 이야기나누는 것이 나의 관심사이고, 그것을 풀어내는 비평이 보고 싶다.
라시내 『null』의 시작에는 『춤in』의 폐간이라는 맥락이 크게 작용한 것 같다. 분명히 존재하는 작업들이 있는데, 그것들에 대해서 누가, 어디에 이야기할 것인가? 『춤in』이 폐간되면서 이런 질문이 던져졌다. 그래서 어딘가에는 이야기할 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그 공간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나는 내가 글을 쓰고 싶은 마음보다는 글을 받고 싶은 마음으로 『null』을 시작하게 됐다. 나는 내가 받고 싶은 글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가지고 있는데, 세 가지 정도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첫 번째, 작업에 대한 존중이 있는 글. 두 번째, 읽을 수 있는 정확한 문장으로 이루어진 글, 가능하다면 아름다운 문장으로. 세 번째, 작품이 무엇을 하고자 했고 무엇을 했는지를 성의 있게, 최대한의 관심과 애정으로 읽어주는 글. 나는 이 세 가지 요건을 가지고 있는 글을 받고 싶고, 내가 받지 못하더라도 누군가는 그런 글을 자신의 작업에 대한 응답으로 받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그런 글을 써보고 싶다.
하상현 존중한다는 것은 어떤 뜻인가?
라시내 비평가 스스로가 초월자적인 위치를 점유하고 작품을 평가하고 심판하는 글이 많다. 특히 무용 비평에서 그런 글들이 두드러진다. 작품과 동등한 지위에서 대화하지 않는 그런 글들을 볼 때 작업을 존중하지 않는다고 느꼈고, 가끔은 무례하다고 느꼈다.
한수민 말씀하신 세 가지 중에 특히 세 번째 조건을 충족시킬 수 없는 사람들이 지금 글을 쓰고 있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인 것 같다. 이들은 작품을 읽어줄 마음이 별로 없고, 또 읽을 수도 없는 사람들이다. 글을 쓰는 사람과 작업을 만드는 사람들이 무용이라는 같은 씬에서 함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글을 쓰는 사람들의 관심사는 별개로 있고, 반대로 작품을 만드는 사람들은 또 그것에 일절 관심이 없다. 각자가 너무 다른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에 무언가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표면적인 이유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세대의 문제도 크다고 본다. 너무 많은 차이가 있다.
조형빈 여기 핵심적인 키워드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모욕, 다른 하나는 무시다. 한 쪽에서는 모욕을 주기 바쁘고, 다른 쪽에서는 오직 무시로 그것에 대응한다. 여기에는 대화가 존재할 수 없다. 많은 안무가들이 비평을 받고 싶어 하는데, 실제로 비평을 받아도 글에서는 모욕을 주기 바쁘므로 어떤 안무가들은 “나는 비평을 보지 않는다”고 당당히 이야기한다. 이것이 자연스럽고 오히려 작가적인 태도로 받아들여지는 분위기, 이것이 작금의 무용계의 상황이다. 물론 문제가 세대적으로 드러나고 있기도 하다. 젊은 나이의 필자에 의해 만들어지는 비평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것이 사실이고, 세계관을 공유할 수 없는(공유하지 않으려 하는) 안무가와 비평가들이 서로 섞여있다. 하지만 세대론은 원인이라기보다 일종의 결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자신의 세계관을 확장하려 하지 않는 태도 그 자체에 있다. 결국 작품에 대해 대화하지 않고 모욕과 무시로 맞서는 관계, 이것이 지금 무용계에서 비평가와 안무가가 가지고 있는 스탠스다.
권태현 같은 맥락에 있는 말이지만, 나는 비평이 예의를 차려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성의가 필요하다. 비평이나 비판이 기본적으로 부정적인 견해를 내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의미를 발굴하거나 함께 만들거나 혹은 담론에서 작동할 수 있는 토론을 하는 것들이 모두 비평이라고 생각하는데, 여기에는 언어가 아닌 감각적 형식을 언어로 번역하는 일까지 포함된다. 이런 맥락 안에서 비판이나 부정적인 평가를 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성의가 필요하다. 흥미롭게 본 작업이라면, 비평도 자연스럽게 신이 나서 마음 편히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떤 작품이나 전시가 정말 문제적이거나 제대로 비판해야겠다고 생각하면, 마음 편히 쓰기보다는 훨씬 더 많은 연구와 성의를 투입해야만 글을 만들어낼 수 있다.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싸우는 사람은 자기 준비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 측면에서 지금 나오고 있는 이 이야기가 반드시 무용에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예술 비평 전반의 문제이기 때문에 우리 모두 항상 세심한 비평적 태도를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다시 돌아와 내가 보고 싶은 것은 오히려 예의를 차리지 않고 싸울 수 있는 비평과 지면이다.
오늘날 비평적 싸움은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과 같은 곳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인스타그램은 글보다는 이미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페이스북은 이용자들의 연령대가 높아지면서 비교적 젊은 예술계 담론 생성자들이 이탈하고 있는 경향이 포착된다. 또 정제된 글을 내는 지면들에서는 제대로 된 싸움이나 논쟁이 벌어지지 않는데, 『null』은 그런 것들을 할 수 있는 지면이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만 특정 인물이나 매체, 특정 집단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구체적인 ‘사안’을 두고 논쟁을 벌였으면 좋겠다. 만약 어떤 안무가의 작업에 대해 논쟁들이 있다면, 지금처럼 이곳저곳에서 각자 떠드는 길거리 싸움을 하지 말고, 정식 ‘링’을 만들어 놓고 여기서 제대로 싸워보자는 거다. 그것이 『null』의 역할이 되었으면 좋겠다.
반지성주의가 단순히 후진과 선진의 문제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모더니즘을 ‘후졌다’고 이야기하지 않는 것처럼, 컨템포러리라는 시공은 이것들이 모두 다 가능할 때 열린다고 생각한다. 아주 구시대적인 것과 아주 미래의 어떤 것들이 모두 공존해야 한다. ‘저들은 왜 후지지?’라고 생각하는 대신 ‘저 미학’과 우리의 미학을 가지고 비평적으로 투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공공 기금으로 만들어진 작품에 대해 “이렇게 많은 예산을 들여서 객석을 왜 이것밖에 만들지 않았냐”고 하는 것은, 비평의 기준이 미적인 것이 아닌 다른 곳에 있다고 간주하는 것이다. 이런 사례는 철저하게 싸워야 하는, 미학적 투쟁이 필요한 주제다.
이런 상황에서 비평 지면이나 예술가들, 기획자들은 행정적인 방식의 선택들과 싸워야 한다. 어떤 작품에 공적 자금이 투여되었다고 해서 더 많은 관객을 유치해야하는 의무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예술적 실천이 미학적인 장에서 비평될 수 있는 환경을 예술가들과 비평가들이 함께 만들어 나가야 한다. 급진적인 예술 실천이 행정적인 문제에 굴종하지 않을 수 있도록 연대의 전선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맥락에서 관객수 등을 문제삼아 자신과 다른 미학적 입장을 가진 이의 작업을 힐난하는 것은 아주 저열한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하은빈 나는 연극에 관한, 그리고 종종 무용과 퍼포먼스에 관한 비평을 쓴다. 주로 잘 읽히는지에 초점을 두는데, 내 비평의 최초의 독자가 나의 엄마 수미이기 때문이다. 내게는 고려대학교 대학원신문이라는 작은 지면이 있다. 월간으로 발행되는 이 매체에 글을 실은 지 2년 정도 됐다. 인터넷에도 함께 업로드 되기는 하지만 그것은 대체로 한참 후의 일이고, 내 글은 매월 초 신문으로 인쇄되어 본가로 보내진다. 그러니까 내 글을 가장 먼저 읽게 되는 것은 수미다. 지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공연과 거리가 먼 수미는 내 비평을 읽고 이 글이 이해가 되는지 안 되는지 이야기해 준다. 그러니까 내 글이 어디서 어떻게 읽히는지, 읽히기는 하는지 늘 오리무중인 가운데, 수미만은 유일하고 확실한 나의 독자인 것이다. 그래서 내가 비평을 쓰는 기준은 항상 수미가 쉽게 읽을 수 있는지 여부다. 그러다보니 읽기에 많은 자원이 필요한 글과는 자연히 멀어지게 되었다.
공연에 관한 비평은 다른 비평보다 조금 더 특수한 지점이 있는 것 같다. 공연에 대한 글을 읽는 대부분의 독자는 그 공연을 보지 않았을 것이고, 글을 읽은 뒤 공연에 관심이 생긴다고 해도 찾아보거나 접근할 수 없다. 이미 공연은 내려간 다음이니까. 그러니까 공연 비평은 공연이라고 하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린 무엇에 대한 증언 혹은 추도사다. 공연에 대한 비평은 다른 비평보다 더 큰 책임을 지게 된다. 남는 것은 글뿐이고 의존할 대상이 없다. 글이 그 글 자체로 공연을 대신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더욱 글 자체로 온전히 재미있고 읽을 만해야 한다. 그런 글을 쓰려고 노력하고 있다.
세상엔 다양한 유형의 글을 쓰는 비평가들이 있을 것이다. 나는 그중에서 보따리장수가 되고 싶다. 학문적으로 견고하고 이론의 공을 잊지 않는 비평을 쓸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하지만 내 보따리는 턱없이 작다. 지금 올라가고 있는 많은 공연들을 두루 보지도 못하고 있고 내게 허락된 지면도 고료도 작은 데다 공연을 소개하고 설명하는 데만도 주어진 분량이 이미 모자라다. 더 첨예하고 섬세한 논의를 하고 싶지만, 잘 하지도 못할 뿐더러 자칫 나는 나의 중요한 한 명의 독자를 소외하게 될 위험에 처해 있다. 나는 언제나 많은 것들 사이에서 타협하고 협상해야 하는 처지다. 기왕 그렇다면 타협을 잘 하는 사람, 교량을 놓는 사람이 되자고 생각했다. 내가 본 것을 누군가에게 잘 번역하거나 풀어쓰는 역할을 하자고.
그렇다면 어디와 어디를 잇나? 나는 수미 외에 누구를 생각하나? 내 글에 있는 사람들을 다섯으로 갈라 상상하는 것 같다. 첫 번째는 나라는 관객이다. 내가 작품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그것이 진실된지. 두 번째는 같은 공연을 본 다른 관객들이다. 그들은 무엇을 보았을지 상상하고, 우리가 함께 보았되 언어로 떠오르지 않았을 법한 무엇이 있다면 그걸 쓴다. ‘이 공연은 이러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는 하나의 관점을 제공하려 한다. 세 번째는 공연을 보지 않은 사람들이다. 공연을 놓친 이들이 이 공연의 윤곽을 가능한 한 잘 상상하고 가늠할 수 있도록 약도를 그려놓는다. 마지막으로는 공연예술 자체와 가깝지 않은 이들이다. 그들을 생각할 때 가장 영업을 하는 마음이 된다. 외롭고 고단히 작업을 이어오는 이들이 있는데, 당신이 그들의 작업을 봐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싶다.
그러니까 내가 의식하는 다섯 번째 이들은 바로 공연을 지은 이들이다. 이 자리에 오면서 얼마 전 백상예술대상에서 젊은연극상을 수상한 ‘지금 아카이브’ 팀의 수상소감을 생각했다. 작업 중 쓴 어느 날의 일기랬다. “벌판 위에 집을 짓는다. 아무도 오지 않을 것이다.” 창작을 겸하는 입장에서 너무나 공감이 되었다. 세상에는 전선에서 싸우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백업이 되어줄 수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인데, 나는 날카롭게 벼리는 말들뿐만 아니라 필요한 사람에게는 충분한 칭찬을 아낌없이 제공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들이 계속해서 작업할 수 있도록. 『null』의 지면에서 여러 종류의 글에 참여할 일과 날카로운 급진적인 비평들이 펼쳐질 것을 기대하면서도 그 안에서 또 다른 결의 글들을 써내고 싶다.
하상현 시내님이 하신 ‘내가 받고 싶은 글을 쓰고 싶다.’는 말이 와닿는다. 창작자들은 작업을 성실히 봐 줄 수 있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다면 작업을 지속하는 데 큰 힘을 얻는다. 특히 퍼포먼스 창작자 동료들을 볼 때 성실히 봐주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그 한 사람이 부재한 경우를 자주 본다.
내가 글을 쓰고 기획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계기가 있었다. 윤자영 작가의 〈불가사리의 자살〉이라는 공연이었다. 오랫동안 작업을 지켜봐 왔고 그가 하고 싶었던 것들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 공연이 너무 좋았고 작가가 하고 싶었던 어떤 성과를 이뤘다고 생각하기에,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알아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많은 경우, “공연 잘 봤어요.”로 끝나더라. 동료로서 마음이 아팠다. 하나의 공연을 만들기 위해서는 정말 많은 노력과 예산과 마음이 들어간다. 그에 비해 발표를 마치고 어떤 이야기도 없이 사라지는 작업이 대부분이다. 1년 단위의 기금에 따라 작업이 생겨나고 때로는 좋은 작업이 등장하지만, 그것을 다루는 지면이 턱없이 부족하다.
작업을 추동하는 대신 공회전하게 만드는 환경 때문에, 한국에서 작업을 할 수 없겠다고 느낄 정도다. 그래서 퍼포먼스와 공연예술에서 비평이 몹시 갈급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소멸하는 형태의 작업들을 글로써 누가, 어디서 다루어야 할 것인가가 중요한 문제가 되고 있다.
몇 년 전, ‘안티카페 손과 얼굴’이라는 곳에서 ‘퍼포먼스 퍼포밍 아트’라는 라운드테이블에 참여했다. 시각예술 안에서 등장하는 몸을 사용한 작업과 공연예술의 현시대의 다양한 실천들이 혼재되어 다원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묶여 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런데 사실 몸이 등장하는 작업들이 겉으로 보기에 흡사해보여도, 굉장히 다른 기반들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창작자이자 한 명의 관객으로서 이 부분을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 앞선 윤자영 작가의 예시를 다시 들어보자면, 처음 그는 안무와 연극, 시각예술을 포함한 총체극을 만든다고 생각했는데, 작업이 진행되면서 점점 연극 연출에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반면 난 미술의 전시장 안에서 몸과 사물이 함께 등장하는 작업을 하게 되었다. 작가들이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다는 자각과 매체적인 선택은 이유가 있고, 또 어떤 특정한 욕망과 지향이 있을 것이라고 보는데, 이런 지점이 충분히 다루어지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관심이 있는 것은 경계가 혼용되는 상황 안에서 어떤 작가들이 하고 있는 특정한 고민들, 그리고 역사적인 맥락 안에서 작업들이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지 가까이 들여다보는 일이다. 최근 사루비아 다방에서 발표한 노혜리 작가의 퍼포먼스에 대해 글을 썼다. 그는 기억 속 이야기가 사물과 움직임과 만나 증언되고 다시 삶을 살도록 하는 작업을 해왔다. 이번 작업에서 사물들이 부딪히며 순간 나타나고 사라지는 소리의 비중이 늘어나면서 작업이 완전히 다른 국면으로 바뀌었다. 이 작업은 사물의 측면에서만 바라보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사운드나 음악 전문가가 다루기도 어렵다고 생각한다. 결국 누군가 이에 관해 글을 쓰고자 한다면, 어떤 종류의 다시점을 교차하는 시각이 필요하다. 이 다양한 각도는 보통 전시장과 공연장 사이에서 일어나거나 작가 안에서 이들이 섞이면서 일어나는데, 우리가 지금 하고자 하는 비평 콜렉티브가 이런 작업들을 다룰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
한수민 나는 무용, 퍼포먼스 작업을 하면서 어느 순간 허무하다고 생각했던 지점이 있었다. 1년 단위의 프로젝트를 착수하고 끝내는 것이 반복되는데, 그것들에 대해서 어떤 언급들도 없이 바로 끝나버리는 것이 굉장히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대해 “퍼포먼스는 원래 그런거야.”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불편했다. “퍼포먼스는 그 찰나에 있었던 일이고,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렇게까지 의미가 있지는 않아”라는 말이, 마치 변명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지금 여기가 아닌’ 퍼포먼스를 계속 찾아다녔던 것 같다. ‘퍼포먼스가 지속된다는 건 뭘까? 퍼포먼스가 끝나고 남는 것들은 뭘까?’ 이것을 찾고 싶었다. 새로운 작업은 계속해서 만들어지지만 이 작업들이 다른 시간들과 어떤 연결고리를 만들어내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부족하다고 느낀다. 지금 비평이 잘 작동하지 않는 지점 또한 이것과 무관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 작가들이 행하는 움직임이 어디에서부터 왔으며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 읽어주는 것이 필요한데 아무도 그걸 해주지 않는다. 그래서 계속 현재에만 머물게 되며 모두가 단절을 느끼게 되는 것 같다. 우리가 하고 있는 질문들이 과거와 어떤 고리로 연결되어 있으며 앞으로 이 고리를 어떤 미래에 걸지에 대한 이야기를 더 하고 싶다. 사실 이 얘기를 더 본격적으로 하려면 이전 세대의 안무가들의 작업에도 더 주목하고 교차하는 작업도 필요하다고 느끼는데, 지금은 누군가 이 작업을 해줬으면 좋겠다고만 생각이 든다.
당장은 은빈님이 이야기했던 것처럼 어떤 작업을 보고 “작업 너무 좋아요”라고 계속 말하는 것도 필요한 것 같다. 나 스스로 내가 비평가라는 태도를 갖고 있지는 않지만, 좋은 작품들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하상현 퍼포먼스와 다른 매체의 창작자들은 확실히 다른 면이 있다. 회화 작가에게 당장 그림이 안 팔릴 수 있지만 창작에 드는 돈과 시간을 자기에게 하는 투자라고 생각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 말이 너무 새로웠다. 영상의 경우도 작업물이 남는다. 퍼포먼스가 가진 ‘사라진다’는 특성은 이것과 굉장히 다른 것 같다. 조각도 비슷한 운명인데, 도시의 공간들이 임대료가 점점 비싸지면서 부피를 차지하는 조각은 남아있을 수 없게 되었다.
결국 작업들이 그냥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얼마 전 구리를 가지고 조각을 하는 작가를 만났다. 그의 작업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의 사물 자체가 아니다. 구리로 만든 그릇으로 차를 마시고, 조각을 두드리면서 발생하는 열이나 소리가 벽에 튕겨나가면서 이어지는, 이 관계들의 총체가 하나의 예술 형태다. 이 미약함, 사라지는 것들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들이 중요하다.
우리가 쓰고 싶은 것들
조형빈 그러면 본격적으로 각자가 쓰고 싶은 글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저는 유럽에 가서 보고 들은 것들에 대해서 써보고 싶다. 또 하나는 우리가 많이 언급했던, 댄시-댄스에 대한 또 다른 관점에 대한 것이다. 댄시-댄스가 가지고 있는 폐해는 우리 안에서도 숱하게 이야기되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춤이 무엇을 보여줄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 역시도 가지고 있다. 왜 춤을 추지 않고 머리로만 공연을 만드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서 나도 일부 동의하는 부분이 있다. ‘머리로 만드는’ 공연들에 대한 비판들, 무용이 마치 시각예술의 개념적인 작업들처럼 되어가는 현상들을 보면서 든 고민이다. 요즘 들은 이야기인데, 굉장히 많은 작업들이 ‘소매틱’을 방법론으로 삼아서 시작된다고 한다. 소매틱이라는 방법론 자체는 하나의 작업, 공연적 결과물로 이어지기 어려운 부분이 분명히 존재하는데, 소매틱 그 자체를 그냥 작업으로 갖다 놓았을 때 거기서 미싱되는 것들이 무엇인지 고민해보고 싶다. 이 흐름 안에서 우리가 찾아야 하는 것은 무엇일지, 제안하는 글을 한번 써보고 싶다.
권태현 나도 비슷한 맥락에서 소매틱 유행은 명확한 지점이 있다고 본다. 유물론의 귀환이 무용에서 펼쳐지는 국면이 아닐까.
라시내 의미가 중요한 무용에서, 물질이 중요한 무용으로.
권태현 내가 무용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소매틱 유행이 흥미롭다고 생각하는 건, 트랜스 등 주관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무언가를 형식화하려는 노력이 흥미롭기 때문이다. 요즘 정신과 물질의 이분법에 대해 관심이 많은데, 두 가지를 가로지르는 문제에 있어서 무용계의 소매틱이 이것을 하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소매틱을 공연화하는 것에 문제는 있다고 생각한다. 공연이 아닌 애초에 다른 형식을 실험해야 하지 않을까.
라시내 나는 소매틱이 공연 창작의 유용한 방법론이 될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소매틱의 특성상 몸이라는 물질의 작동을 감지할 수 있는 것은 움직이는 몸 자신뿐이므로, 그 주관적인 감각 자체를 작품이라고 내놓으면 관객으로서는 그것을 보고 있을 이유를 찾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물질 자체가 의미의 자리를 차지한 것으로 본다. 물질에 어떤 의미를 덧붙이는 것은 이미 구식이고, 그래도 어떤 작업에 어떤 의미가 있다고 이야기를 하기는 해야 하는데, 그때 물질 자체가 의미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에 또 한 가지 배경이 있다고 생각한다. 대개 무용하는 사람들은 워낙 어렸을 때부터 춤을 추기 때문에, 그리고 춤이라는 것이 몸으로 하는 일이다 보니, 춤추는 일과 자신의 정체성이 불가분하게 묶여 있는 것 같다. ‘나’는 무용수고, 예술가고, ‘내가 하는 것’이 곧 무용이고 예술인 것이다. 작품이 타자에게 어떻게 건네지고 작동할지로 나아가기 전에, 내가 느끼고 나에게 작동하는 것 자체가 작품이 되는 셈이다.
하상현 어떤 시대의, 백인 남성 추상표현주의 작가들의 정체성과도 유사한 방향이라는 생각이 든다.
조형빈 이 주제에 대해서 어떤 분이 쓰면 좋을지. 맥락을 짚고 왜 이런 트렌드가 있는지를 보는 글이 하나 있으면 좋을 것 같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될 것 같다.
권태현 나는 계속해서 고민하고 있는 ‘대중성’이라는 주제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다. 어떤 부분에서는 반지성주의와도 연결이 되는 문제이다. 요즘에는 무언가를 어려운 상태로 두는 것이 문제적으로 여겨지곤 한다. 물론 나도 글쓰기에서 ‘우리 엄마도 편히 읽을 수 있는 글’이라는 기준을 적용할 때가 있다. 그러나 쉬운 것이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될 수는 없다. 철학 텍스트가 쉽게 이해되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논하고 있는 문제가 정말로 어렵기 때문이다. 어려운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쉽게 읽을 수 없다는 이유로 나쁜 글쓰기로 여겨지는 것은 큰 문제이다. 이러한 반지성주의와 투쟁이 필요하다.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글을 써야 한다는 입장에 점점 더 회의가 생기고 있다. 글쓰기 만큼 읽기 역시 밀도가 있어야 한다.
동시대 예술은 아주 첨예한 전문 분야이다. 다른 분야를 생각해보면, 물리학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이 물리학 연구나 논문을 접했을 때,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여겨지지 않는가. 동시대 예술가들은 지금 정세에서 가장 치열하고 가장 감각적이고 가장 아름답고 가장 정치적인 방식의 문제를 가장 복잡한 형식으로 다루고 있는 것인데, 그것을 모두가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언어화 해야할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나는 이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어보고 싶다.
조형빈 나는 이 딜레마가 집약된 단체가 국립현대무용단이라고 생각한다. 대중적인 것, 티켓 판매, 그러면서 따라오는 ‘국민의 예술 향유’와 같은 것들이 국립현대무용단에 걸쳐져 있다. 그렇다면 예술은 어디로 갈 것인가?
권태현 아무도 보지 않는 예술이라고 하더라도 국가가 지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중성에서 벗어난 실험이 가능한 환경을 만드는 것은 공공성의 차원이다. 당장은 쓸모가 없는 순수 과학 연구를 지원하는 것과 같은 문제다. 더 많은 사람들이 보는 것이 그토록 중요하다면 예술이 아니라, 유튜브 콘텐츠나 넷플릭스 시리즈만 제작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라시내 극장도 연구기관이어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극장은 사실 옛날에는 일종의 넷플릭스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영상 매체의 압력으로 자신의 역할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극장은 어디서나 도시에 위치한다. 관객이 와서 머릿수를 채울 수 있어야만 극장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극장의 본질은 원래 엔터테이닝이었다고 할 수 있다.
권태현 반대로 뮤지엄은 애초에 누군가가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아니었다. 보물창고이거나, 연구기관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대중적으로 개방된 것은 복잡한 맥락이지만, 대중 혁명과 같은 과정들을 통해 대중들에게 개방되면서 긍정적인 변화가 생겨났다.
한수민 나는 항상 움직임이 전달되고 상속되고 훈련하는 방식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움직임이 우리도 모르게 지속되는 것, 그러면서 권위적인 동상을 세워버리는 그 자장들이 생겨나는 방식이 궁금하다. 퍼포먼스의 움직임들이 어떻게 시간을 지속하게 되는지에 대한 내용들을 한번 다뤄보고 싶다.
조형빈 오늘 많은 이야기가 나왔다. 우리가 지금 비평의 관점에서 보고 싶어하는 주제들이 예술의 전 영역에 걸쳐져 있다는 생각이 든다. 몸을 다루는 방법, 예술의 형식과 구성의 방법론, 제도와 협상하거나 싸우는 방식들, 움직임과 몸의 흔적과 정치성 등 아주 다양한 주제들이 있었다. 특별히 이들을 시대적이라고 규정짓는 것보다, 지금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뜨거운 화두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우리에게 있어 아주 급한, 그리고 아무도 해결해주지 않기 때문에 반드시 꺼내야 하는, 간절한 이야기들일 것이다.비평이라면 이런 것을 다루어야 한다, 라는 형태나 방법론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둘러싼 주제적인 접근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주제들을 중심으로 앞으로 매 주 하나씩, 올해를 꽉 채워서 글이 올라갈 것 같은데,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많이 나올 것 같다. 지금 우리가 활동하고 있는 필드가 어떤 모양인지, 어떤 비평과 작품이 필요한지에 대한 고민들은 지금도 계속해서 쏟아지는 것 같다. 고민들이 있으면 가감 없이 나눠주시고, 또 치열하게 나눌 수 있는 장으로 『null』을 함께 꾸려갔으면 좋겠다. 그러면, 이제 ‘링’ 위로 올라서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