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의 의지:춤에게 무엇을 요구해야 하는가?
조형빈
“2004년 7월 7일 더블린의 한 법정에서는 아일랜드 국제 무용 페스티벌을 상대로 민사소송이 진행되었다. 이 페스티벌이 초청한 프랑스 현대 안무가 제롬 벨의 <제롬 벨(Jerome Bel)>(2005)이라는 작품이 알몸을 노출하고 있으며 외설적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이 작업은 사실 2002년의 같은 페스티벌에서 이미 선보인 적이 있다. 여러 절차상의 문제로 이 고소 건은 결국 기각되었지만 고소인 레이먼드 화이트헤드는 이 작업에 대한 불평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외설적 행위에 대한 혐의와 거짓광고 혐의를 엉터리로 버무려 페스티벌 주최 측에 손해배상을 청구했다(Falvey 2004: 5).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그가 제롬 벨의 작업이 댄스 퍼포먼스에 속하지 않는다고 주장한 것이었다. 2004년 7월 8일자 기사에서 화이트헤드는 춤의 존재론에 대해 역설했는데 이는 키셀고프의 주장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이리시 타임>>의 한 기사에 따르면 화이트헤드는 “춤이란 무용수들이 리듬감 있게 주로 음악에 맞춰 위아래로 뜀박질을 하며 관객에게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것인데, 제롬 벨의 공연에는 춤이라고 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는데도 페스티벌 측은 입장권의 환불을 거부했다”고 말했다(Holland 2004: 4).”
춤의 미학
안드레 레페키는 저서 <코레오그래피란 무엇인가>에서 아일랜드 국제 무용 페스티벌에서 있었던 일화를 소개한다. 내용에서 언급된 안무가 제롬 벨의 <제롬 벨>은 네 명의 무용수들이 등장하는 작품으로, 나체로 등장한 이 무용수들은 분필로 무대에 개인의 정체성을 암시하는 여러 가지 정보나 숫자들을 적다가 작품의 후반에 이르러서는 무용수가 무대에 소변을 보는 장면이 연출된다. 지금은 너무나 잘 알려진 작품이 되어 연출적 맥락이 머릿속에 쉽게 그려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벨이 이 작품에서 동원한 여러 장치들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쉽사리 환영받지 못하는 금기의 코드들을 포함하고 있다. 아일랜드 국제 무용 페스티벌을 상대로 소송을 건 고소인은 이와같은 형태의 연출이 전혀 ‘무용적’이지 않음을 주장하며, 거기에 “춤이라고 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고 이야기했다.
레페키는 <제롬 벨> 소송 사건의 일화를 무용이 보여주는 새로운 징후, 근대성을 뛰어넘는 일련의 무용적 전환의 사례로 소개한다. <제롬 벨>뿐만 아니라, 벨의 작품들의 대다수는 근대 이후로 우리에게 강요되어왔던 단일한 주체의 신화를 해체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그것은 하나의 몸 위에 파악하기 힘든 여러 가지 정체성을 덧씌우거나(<셔츠올로지>), 객체로 배제되었던 행위자들의 출현(<베로니끄 두아노>) 등을 통해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벨이 짚었던 동시대적 ‘농당스(non-danse)’의 국면들이 가지는 의미들이 2000년대 이후의 무용 작업들에서 보여주는 미학적 가능성들을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과연 무엇이 ‘무용적’인 것인가?’라는 질문을 선결해야 할 필요가 있다. 아일랜드 국제 무용페스티벌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고소인 화이트헤드는 <제롬 벨>이 전혀 무용적이지 않고, 또 나아가 무용이 보여주어야 하는 어떤 당위적인 미학에 반하고 있다고 간주했다. 그렇다면 ‘무용적인 것’은 무엇이며, 동시대의 무용은 그것을 요구받아야 하는가? 우리는 춤에게 무엇을 요구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