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생하는 극장(들): 〈착생 안티 식물 고네〉
하은빈
〈착생 안티 식물 고네〉, 연극실험실 혜화동1번지 제공, ⓒ 박태양
극장은 온통 공중에 매달리고 치렁치렁 늘어진 식물들로 가득 차 있다. 모두 착생식물이다. 물리적인 지지를 위해 다른 식물이나 사물에 붙어 자라지만, 생존에 요구되는 수분과 영양분은 공중에서 따로 흡수할 뿐 의존한 대상의 양분을 빼앗지는 않는다고 한다. 닿아있되 착취하지 않고, 의존하되 기생하지 않는다는 그 식물들이 비스듬히 들어오는 보랏빛의 조명을 받아 환히 빛나고 있다. 옆 사람과 대화를 나눌 수 있을 만큼 낮은 볼륨의 음악이 멀리서 흐른다. 언뜻 보아도 이곳은 지하소극장이라기보다 세련된 화원을, 혹은 플랜팅 이벤트를 진행하는 한시적 팝업스토어를 닮았다.
실제로 이곳에서 관객이 보내는 시간도 팝업스토어를 거니는 손님의 시간과 그리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관객들은 대기 중인 퍼포머 김시락에게 팔꿈치를 내밀어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그를 데려갈 수 있다고 안내받는다. 시락은 정말로 화원이나 팝업스토어에서 일하는 점원처럼 튼튼한 앞치마를 갖추어 입었다. 그리고는 관객이 데려간 곳에서 마주한 식물을(혹은 관객이 그의 앞으로 직접 가져온 식물을) 이리저리 만져보면서 종류를 파악하고 특징을 일러준다. 화분마다 꼬리표처럼 달려 아래로 길게 드리운, 점자로 새겨진 두어 줄의 문장들을 읽을 수 있는 사람도 이 극장에서 오로지 그뿐이다.
그의 손끝에서 해석되고 발화되는 점자 텍스트들은 모두 소포클레스의 비극 『안티고네』에서 발췌되었다. 공교롭게도 시락이 시각장애를 가졌다는 사실은 그의 모습 위에 『안티고네』 속 눈먼 예언자 ‘테이레시아스’를 덧씌워보게 한다. 그러나 시락은 인물들의 비극적인 결말을 예견하지도 극의 파국을 내다보지도 않고, 장애라는 접점만으로 곧장 작동하고야 마는 관객의 낡고 빈곤한 연상을 꾸짖거나 해소하지도 않고, 그저 내 손에 들린 식물의 이름이 ‘호야’이며 둥근 하트모양 이파리에 뾰족한 모서리를 가졌다는 사실만을 차분히 일러준다. 시락의 목소리가 무척 나직하여 나는 그의 말을 더 잘 들으려고 곁에 바짝 다가서지만, 착생식물과 『안티고네』 텍스트 사이의 친연성에 관해서는 이렇다 할 연결고리를 얻어내지 못한다.
〈착생 안티 식물 고네〉, 연극실험실 혜화동1번지 제공, ⓒ 박태양
중간에 등장해 씩씩하게 독백을 시작하는 또 다른 퍼포머 김신자는 관객 한 명 한 명과 눈을 맞추어가며 ‘내가 만일 안티고네라면’이라는 질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개진한다. “배신자 아니고 김신자”라는 너스레 섞인 소개로 시작되는 그의 독백은, 소중히 여기는 친구들과의 크루즈 여행을 회고하는 곁다리 수다를 지나, 에테오클레스와 폴리네이케스의 대립을 ‘야당-여당 갈등’으로 해석하는 독특한 관점도 지나, 느닷없이 한 관객과의 영문 모를 박치기를 시도함으로써 다른 관객들의 어리둥절한 웃음을 자아낸다. 김신자의 이러한 ‘안티고네-되기’는 분명 활달하고 사랑스러운 것이지만, 신자 역시 이 공연과 안티고네 사이의 연관성을 관객에게 제공하는 것에는 크게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이 공연에서 ‘안티고네’로 분한 배우 강혜련 또한 안티고네로서의 연기랄 만한 것을 거의 보여주지 않는다. 그는 극장에 머무는 세 퍼포머 중에서 유일하게 배역의 이름을 부여받은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배우에게 기대되는 일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관객의 일을 적극적으로 수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극이 진행되는 내내 관객들 사이를 은밀히 걸어 다니며 사람들을 관찰하고는 손에 든 안티고네 단행본 낱장에 그 결과를 스케치하거나 휘갈기는 데에 몰두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자신이 남긴 기록을 관객들이 주워서 볼 수 있도록 이따금씩 책장을 찢어 슬쩍슬쩍 쪽지들을 흘리고 다닌다. ‘거스르는 자’라는 의미의 이름을 받은 ‘혜련-안티고네’는 그런 식으로 자신에게 쏟아지는 관객들의 시선을 거스르고 사람들에게 응시를 되돌려준다.
이런 방식으로 세 사람은 『안티고네』와 이 공연 사이의 연관성을, 혹은 서로 간의 연관성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도대체 무슨 영문으로 이들이 한데 있게 되었는지 아리송하게 만든다. 다시 말하자면 ‘안티고네’라는 이름 아래 모인 세 사람은 서로 닿아있지만 붙어있지는 않고, 서로에게 기대고는 있지만 서로와 합일되지는 않는다. 대신 각자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안티고네의 자리에 자신의 생각을 넣어보거나, 안티고네의 이름에 부여된 의미를 수행해 보거나, 자신만이 읽을 수 있는 『안티고네』의 텍스트를 관객에게 선사하고 있다. 그렇게 하는 데에 다른 퍼포머를 끌어들이지도 않고, 서로를 자신의 방식 안에 들이려 하거나 구태여 설득력 있는 연결을 만들어내지도 않는다. 서로로부터 일정한 간격을 두고 각자가 소화하거나 수행하는 안티고네를 듬성듬성 놓아두기만 한다. 말하자면, 이들은 서로에게 ‘착생’하는 방식으로 공존한다.
〈착생 안티 식물 고네〉, 연극실험실 혜화동1번지 제공, ⓒ 박태양
공연의 말미에, 혜련-안티고네는 해당 관객에 대해 기록한 쪽지와 함께 모든 관객에게 극장의 착생식물들을 하나씩 나누어준다. 나는 문득 가톨릭 미사의 영성체 의식을 떠올린다. 밀빵으로 이루어진 예수의 몸. 사람들이 받아먹는 만큼 정직하게 없어지는 그 몸. 이어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의 작품도 떠올린다. 78kg의 사탕으로 이루어진 연인의 몸. 집어 가는 관객의 수만큼 줄어들고 사라지게 되어있는 그 몸. 그리고 다시 안티고네의 몸으로 되돌아온다. 사람에 대한 온당한 애도를 하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스스로 매달리기로 한 몸. 목전의 죽음 앞에서도 자신은 “서로 미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 태어났다고”1 말하는 몸. 이곳에 모인 모든 관객의 손에 하나씩 쥐어지고 있는, 꼭 관객의 머릿수만큼 허물어져 없어지고 있는 이 몸.
〈착생 안티 식물 고네〉가 꿈꾸고 그리는 『안티고네』의 극장이란 바로 이렇게 조각나고 덜어지고 나누어지는 안티고네의 몸 자체인 모양이다. 혹은, 집으로 돌아가는 관객들의 삶 위로 접붙고 착생하는 극장(들)의 조각들인 모양이다. 구태여 극장(들)이라고 적는 까닭은, 이곳에서 경험한 당신의 극장과 나의 극장이 같은 것이라고 도무지 말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나의 〈착생 안티 식물 고네〉와 당신의 〈착생 안티 식물 고네〉는 내가 이 극장에서 호야를 가져가고 당신이 이 극장에서 틸란드시아를 가져가는 것만큼이나 다를 것이므로. 그 차이는 애초에 이 극장이 관객에게 동일하게 경험될 수 없었던 무엇을 주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여기 모인 우리의 다름 그 자체에서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기이하게도 이것은 이곳에 잠시 함께 있었던 이들을 〈착생 안티 식물 고네〉의 관객 공동체로 묶어주는 유일한 조건이다. 시락과 신자와 혜련에게 아무런 공통점이 발견되지 않는 만큼이나, 관객인 우리에게도 이렇다 할 동일성이 없다는 것. 우리가 이곳에서 제각기 다른 복수의 극장을 경험했으며, 〈착생 안티 식물 고네〉를 보러 왔다는 것 외에는 아무런 접점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 애초에 안티고네와 별 공통점이 없어 뵈는 착생식물이 안티고네의 신체이자 이 극장을 이루는 사물로 채택된 이유부터가, 공중에 매달린 존재라는 단 하나의 접점 외엔 전연 없는 것처럼.
서로 다른 우리의 몸들 위로 서로 다른 모양의 〈착생 안티 식물 고네〉가 치렁치렁 늘어지고 기대어온다. 이렇게나 다른 우리에게, 언제까지고 결코 같을 수 없는 우리에게 ‘우리’라는 이름을 선물하면서. 서로 결코 같을 수 없는 채로도 얼마간 이곳에서 함께 시간을 보냈다는 사실, 그 사실만이 우리가 갖는 유일하고도 불변하는 접점이라고 말하는 것만이 극장이 할 수 있는 전부일지 모른다고 암시하면서. 닿아있되 착취하지 않고, 의존하되 기생하지 않는 몸으로 〈착생 안티 식물 고네〉는 그렇게 한다. 사람들의 수만큼 정직하게 떨어져 나가고 줄어들고 없어지는 몸으로 그렇게 한다. “서로 미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기생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착생하는 것이라고 알려주려는 듯이. ![]()
〈착생 안티 식물 고네〉, 연극실험실 혜화동1번지 제공, ⓒ 박태양
1 소포클레스·아이스퀼로스, 『오이디푸스 왕·안티고네 외』, 천병희 옮김, 문예출판사, 2025, p. 351.
〈착생 안티 식물 고네〉
2025.9.28.(일) – 10.5.(일)
전일 19:30
연극실험실 혜화동1번지
안티고네 강혜련
구성/연출 이성직
드라마터그 신재욱
프로듀서 이호연
퍼포머 김시락 김신자
공간 무밍
사운드 오로민경
조명 이동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