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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담: 사라지는 것들을 아카이빙하기(2)
이민주, 조형빈, 하상현, 한수민
좌담 일시_ 2024년 8월 13일 화요일
좌담 장소_ 서울 후암동 후암서재
모더레이터_ 조형빈
참가자_ 이민주, 조형빈, 하상현, 한수민
아카이브의 욕망
조형빈 앞서 아카이브의 목적, 그리고 퍼포먼스가 아카이브와 어떻게 교차될 수 있는지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아카이브 그 자체, 혹은 아카이브라는 형식을 변용/차용함으로써 또 다른 퍼포먼스 작업이 어떤 발화의 가능성들을 가지고 있는지를 짚어볼 수 있었던 것 같다. 처음 민주 님이 말씀하셨던 것처럼 아카이브라는 것이 소장과 수집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면, 사실 여기서 아카이브가 가지고 있는 목적성은 공연의 테크니컬 라이더가 가지고 있는 욕망만큼이나 강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만약 결과물로서의 작품을 수집 혹은 소장하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은 아카이브를 만든다면 그것은 무엇이 될 수 있을까? 혹은 그것이 존재한다면 어떤 방식으로 그것이 가능할까? 그것은 왜 존재해야 할까? 이런 질문을 드려보고 싶다. 황수현 안무가는 본인 과거의 작업들을 아카이브로 정리하는 과정에서, 자기 작업의 아카이브는 자기 이외의 다른 누군가가 해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이야기했다. 또 한편으로 미술계에서 과거부터 이루어져 온 아카이브는 작품을 뺀 모든 것을 아카이빙하는 것을 아카이브라고 부르더라는 이야기를 전해주기도 했다. 그런 관점에서 보았을 때, 작가들이 작업을 만들어 갈 때 그 과정에서 나오는 것들, 리서치, 실험, 시도, 쇼케이스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부를 수 있는 그것들을 기록하고 남기고자 하는 욕망은 어디에서부터 촉발되는 것일까? 공연이나 퍼포먼스의 맥락에서 그것들을 아카이빙한다면 어떤 방식으로 가능할까? 이런 질문들로 주제를 옮겨보고 싶다.
이민주 나는 그 주제가 앞서 우리가 말한 것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수집과 소장의 욕망은 결국 역사화의 욕망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맥락에서 아카이빙 역시 역사화의 문제와 분리될 수 없다. 결국은 이것이 남기를 바란다는 점에서, 후대에 이것에 관해 이야기하고 기억해 주기를 바라는 욕망에 의한 것이라는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
조형빈 내가 차이라고 느꼈던 것은, 아마도 방법론적인 차이가 있을 것으로 예측했기 때문이다. 조영주 작가의 연구서 같은 경우 작업이 어떤 형상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명시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어떤 키의 어떻게 생긴 무용수가 어떤 색깔의 옷을 입는지를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이것은 결과물을 아카이브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내가 지금 던지고자 하는 질문은 과정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기록하는 아카이브를 말하는 것이다.
이민주 조영주 작가의 작업이 기술적으로 그렇게 정리된 것은 작업의 표면만 말씀드린 것이고, 구체적으로는 퍼포먼스에 등장하는 캐릭터를 묘사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20대 혹은 60대 여성, 장애를 가진 남성 등과 같이 작업 안에서 중요하게 이야기하고 싶은 문제를 캐릭터로 구분해 놓았기 때문이다. 그 캐릭터성을 유지할 수 있다면 사실 어떤 옷을 입든 어떤 제스처를 취하든 그런 부분들은 열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조형빈 내가 궁금한 것은 만약 특정한 장애가 있는 퍼포머를 그 작업에서 필요로 했다고 한다면, 작가는 그렇다면 왜 그 퍼포머를 거기에 넣게 되었는지, 그것을 위해서 어떤 고민의 과정을 거쳤는지의 이야기를 아카이브로서 보고 싶다는 것이다.
이민주 아카이브로서 우리가 그러한 내용을 살펴볼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 하지만 아카이브가 ‘설명’적으로 기술되는 것은 우려스럽다. 우리가 작업을 볼 때 일반적으로는 전시에 대한 서문이 주어지지만, 늘 그 서문을 따라서 전시를 관람하는 것은 아니다. 작업의 이미지 자체만을 먼저 경험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고, 나는 그것이 작품과의 원초적인 만남이라고 믿는다. 그런 맥락에서 작품을 둘러싼 모든 전사를 다 설명하는 것이 맞는지 의문이 든다. 앞에서 이야기한 캐릭터와 같은 것들이 하나의 덩어리로 모였을 때 만들어내는 텍스트가 있는 것이지, 작가가 의도한 전사들을 앞에 다 설명해 놓는다면 오히려 그것이 작업의 프레임을 그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하상현 명시적인 언어를 사용한 설명이 미술 작품과 함께 제시되었을 때 이것은 미술이 아니라 오히려 문학의 형태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하는 고민이 미술의 역사 안에 있었다. 이는 미술은 지금 눈앞에 있는 것을 감각 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하는 것이 아닌지, 작업에 어떠한 언어를 붙여서 이해하는 것은 작품 자체를 보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문학 텍스트를 읽는 것과 다르지 않은지에 관한 성찰이다.
조형빈 나 역시도 무용 공연을 볼 때 공연 설명 텍스트가 작품에 우선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우선 무용 작업 안에서 작품 설명이 형편없는 경우들이 많기도 하지만, 나는 작품 설명 텍스트가 반드시 작품을 탁월하게 묘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는 좋은 작품은 감각으로 들어와서 이성을 후려치는 작업이라고 항상 이야기한다. 작품에 대한 설명이 구구절절 미리 깔려 있다면 그 작업은 감각으로 들어오는 데 이미 실패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작업이 잘 만들어졌다면 그 작업 자체로부터 오는 것들이 분명히 있다. 나는 바로 그것이 예술이 가진 궁극적인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지금 여기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그렇게 만들어진 좋은 예술이, 어떤 과정을 거쳐 거기까지 오게 됐는지를 어떻게 아카이빙 할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다. 우리가 아카이브를 전시장 도록이나 공연 팜플렛에 모두 싣지는 않는다. 아카이빙이라는 것이 하나의 기록물이나 작업물로서 별도로 존재한다고 할 때, 이것을 찾아보는 사람은 작품 자체를 보러 가는 사람들과는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지금 궁금한 것도 그 작품의 ‘맥락’을 어떻게 흥미롭게 볼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재연이나 재연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것들을 보기 위한 아카이브가 아니고, 과정을 들여다봄으로써 발생하는 의미를 어떻게 추적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것은 어떤 방법을 통해 가능할까, 이런 질문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민주 조영주 작가 사례의 경우, 나는 데이터와 아카이브를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카이브는 그저 자료들이 쌓여있는 덩어리가 아니다. 앞서 거듭 말했던 것처럼 작업으로 갈 수 있도록 하는 친절한 어떤 장소라고 생각했다. 하나의 작업을 만들기 위해 과정 중에 생산되는 모든 것들을 다 아카이빙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어떤 것들은 작가의 사적 기록으로 남겨둘 필요도 있다. 각자가 아카이브를 어떤 방식으로 생각하는지 그 태도에 따라 무엇을 기록으로서 저장할지 다르게 판단할 수 있을 것 같다. 다만, 퍼포먼스에 있어서는 아카이빙의 방식이 고정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퍼포먼스에서 아카이빙은 작품 개별 단위마다 그 형식과 내용을 고려하여 달라져야 한다. PCS 프로젝트에서도 역시 그 작업이 어떤 방식으로 기록되어야 하는지 모든 작업들이 저마다 다른 방식을 취했다. 매뉴얼이라는 형식이 존재했지만, 매뉴얼 안에 들어있는 분류를 위한 탭은 작업마다 연구자가 개별적으로 추가하고 제거하는 방식으로 조정이 숱하게 이루어졌다. 미술관에는 소장, 수집을 위한 제안서의 기본 형식이 마련되어 있다. 이는 굉장히 행정적인 성격의 제안서이기 때문에 퍼포먼스까지 아우르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그래서 이 프로젝트에서 작품맞춤형으로 매뉴얼과 제안서를 제작한 것이다. 그 안에서 작업이 담고 있는 고유한 질문들을 소화해 낼 수 있는 탭들을 계속해서 새롭게 생성해 냈던 게 PCS 프로젝트였다.
퍼포먼스를 어떻게 아카이빙할 수 있을지에 관한 문제는 이미 답이 주어져 있다. 개별 퍼포먼스 작업마다 다 다르게 접근하면 된다. 퍼포먼스 ‘형식’을 아카이빙하는 고정된 방법론은 없다고 생각한다. 회화에는 캔버스라는 고정된 형식이 존재한다. 이런 사례에서는 그 물질을 어떻게 보존할지의 방식 역시도 규격화되어 있다. 그러나 퍼포먼스의 경우 거기에 참여하는 인간의 신체를 붙들어놓을 수 없다는 한계가 있다. 휘발되어 버리는 모든 것들을 어떻게 붙잡을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은 결국 그 작업 안에서 해결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퍼포먼스 형식과 관련해서 매번 새롭게 부딪히는 질문이기에, 끊임없이 그곳에 천착하도록 만드는 동력이 되기도 한다.
Perform Collection System, 총괄 기획 이솜이, 연구 권태현, 김지율, 맹나현, 용선미, 이민주, 이보름, 이솜이, 최소연
하상현 공연을 영상으로 남긴 구체적인 사례를 떠올려 보자면, 작년(2023)에 황수현 안무가의 〈카베에〉 작업 영상을 다시 본 경험이 떠오른다. 글을 쓰기 위해서 공연 영상을 계속 돌려봤는데, 공연을 직접 보는 것과 전혀 다른 경험이라고 느껴졌다. 그 영상을 보고 글을 쓸 수 없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최근에는 코로나로 촉발된 많은 기록 사업들이 공연에 대한 영상화를 추동하고 있다. 송주원 안무가의 경우는 무용의 영상화 자체가 작업에서 핵심적인 부분이 되기도 한다. 결국 관객으로서 흥미를 가지게 되는 부분은 눈앞에 있는 몸과 영상의 관계를 작가가 어떻게 상정하고 있는지, 혹은 그 사이에서 어떤 균열을 발생시키고 있는지인 것 같다. 이는 무용을 어떻게 영상으로 ‘잘’ 담는지의 차원은 아닌 것 같다.
조형빈 아카이빙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작업의 과정들에서 나온 것들은 작가가 그냥 가지고 있으면 된다는 언급이 있었는데, 이 점을 짚어보고 싶다. 물론 그것도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작가에 따라서, 작업의 부산물을 어떤 방식으로든 드러내고 싶어하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면 그 욕망은 어디서 온 것일지 곰곰이 생각해 봤다. 짧은 시간 동안 떠오른 나의 답은, 안무가들의 욕망 자체가 불분명하기 때문에 작업의 부산물로서의 아카이빙을 계속해서 원한다는 것이었다. 얼마 전 온수공간에서 비고 작가의 퍼포먼스 〈스플린트〉(2024)가 있었는데, 그 작업을 보면 텍스트가 대단히 명확한 지점을 짚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작업 소개글에서는 “작가가 경험한 수면무호흡증으로 인한 입면 환각 경험을 바탕으로” “VR기기를 가상과 현실을 섬세하게 혼합해주는 제2의 몸으로 보며, 작품 체험을 통해 새로운 경계의 경험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 질문한다”고 설명하고 있다.1 작품이 무엇을 보여주는지 다 설명하지 않으면서도,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를 명료하게 알려주는 텍스트다. 아주 깔끔한 형태로, 욕망을 내보이고 있는 작업인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많은 무용 작업들이 이것을 해내지 못한다. 작품의 목표가 무엇인지, 이 작품이 어디로부터 왔는지 제시하지 않는다. 그런 애매모호한, 스스로가 무엇을 알고 있는지조차 잘 모르는 것 같은 공연 소개 텍스트들을 보면 나는 관객으로서 또 속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까 이야기 나온 것처럼 작업 안에서 특정한 장애가 있는 퍼포머를 필요로 하는 경우가 있다고 하면, 무용 작품은 그것이 왜 필요한지 대체로 설명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계속 그 작업의 고민의 과정을 궁금하게 되는 것 같다. ‘당신은 왜 그것을 바로 그 작업 안에서 필요로 하게 되었는가?’ 물론 이것은 내 궁금증이지만, 많은 안무가들의 경우 스스로 가지는 욕망을 들여다보는 기회로서의 아카이빙을 원하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앞서 이야기 나온 것처럼 결과물을 아카이빙하는 문제는 공연에서는 아주 단순해진다. 그냥 영상을 남기면 되는 것이다. 비물질임이 너무나도 명확한 공연예술은 작품을 물질화하려는 시도 자체를 상상하지 않는다. 그저 다른 매체에 위임해 버릴 뿐이다. 이것이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공연 아카이빙일텐데, 결국 지금의 안무가들이 하고 싶은 것은 그런 것은 아닌 것 같다. 결과물의 아카이빙이 아닌 과정의 아카이빙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나도 작년에 무용 레지던시 아카이브 책자를 만들었지만, 책이라는 것이 인터뷰 한두 번 한다고 만들어지지 않는다. 아주 많은 것들을 그 안에 담고자 하는 욕망이 있는 것인데, 그렇다면 과연 그 안에 무엇을 담아야 하는지, 또 작가들은 무엇을 담고 싶어 하는지,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던 것 같다.
이민주 무용에서는 훈련된 몸이 중요한 맥락을 가진다. 따라서 신체적 움직임을 고정된 텍스트로 설명하는 것에 대한 반감 혹은 어려움이 늘 있는 것 같다. 무용이나 퍼포먼스는 신체가 가진 고유한 아름다움, 비언어적인 움직임이 만들어내는 언어들을 읽어주기를 바라는 예술 형식인데, 한편으로 동시대적인 흐름 안에서 작업의 개념적인 부분들을 언어화하는 과정이 강조되다 보니 어떤 격차가 발생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조형빈 나는 그런 불일치들이 사실 안무가 본인이 열심히 고민하지 않아서 생기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텍스트의 역할은 작업의 모든 부분을 명징하게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좋은 작품 소개 텍스트는 실제로 거기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다만 이 컨셉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갈 것인지를 이야기할 뿐이다. 관객은 그것을 읽고, 단편적인 지식으로부터 ‘만약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이라면 재밌을 수 있겠네’라는 상상을 품고 작품을 보러 가는 것이다. 그런데 많은 무용 작품들이 그런 단편적인 지식, 심지어는 최소한 작업의 욕망이 어디에서부터 근거했는지조차 설명하지 않는다. 결국 관객은 공연에 대해서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게 된다.
한수민 나는 계속 아카이브로서의 퍼포먼스를 생각하게 된다. 퍼포먼스를 글이나 이미지로 남기는 방식도 계속해서 고민해 봐야겠지만, 퍼포머의 움직임이 과거로부터 우리에게 무엇을 전달하고 있는지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움직임과 같은 것들은 출처가 불분명하고 무의식적인 측면이 강하기 때문에, 우리가 욕망이나 어떤 것을 읽어내기 어려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이것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으면서 어딘가에 끈질기게 붙어 있을 텐데, 다만 과거와의 고리가 잘 보이지 않아서 연결됐다고 느끼지 못할 뿐이다. 나는 그것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계속해서 축적되고 있다고 느낀다. 그래서 최근에는 그동안 무용이 경계해 왔던 것들, 연극성이나 드라마, 표현과 같이 직접적인 재현의 방식들을 가지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들이 있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내 몸에서 재현되는 것들을 통해 과거의 시간을 가지고 온다든지, 몸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을 조금 더 연구해 볼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조형빈 지금 작업하고 있는 원고 중에 서태리 안무가의 작업에 대한 글이 있다. 서태리 안무가는 작품을 만들면서 동시에 작업과 병치될 수 있는 책을 만들었는데, 그 책은 안무 작품의 무보가 담겨있는 무보집이다. 상당히 많은 노력이 들어간 책인데, 나는 이 무보집을 보면서 이것을 무엇으로 보아야 하는지 고민이 되었다. 이것을 아카이브로 볼 수 있을지, 혹은 작품과 병렬적으로 작동하는 또 하나의 작품일지, 그도 아니면 말 그대로 재연을 위한 기록인 것일지, 이 책의 효용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이민주 아카이브에 있는 모든 자료들이 제각각의 기능을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 안에 있는 것들이 뭉쳐져서 어느 시점에는 의미를 만들어 내기도 하고, 또 다른 시점에 다른 조합으로 의미를 만들어 낼 수도 있을 것이다. 결국 자료들 사이의 다양한 만남과 충돌이 있을 뿐이지 개별 자료가 모두 의미를 가질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아카이브에는 분명한 기준과 축이 필요하고, 아키비스트의 태도와 상상력을 믿어주는 것이 필요하다.
조형빈 작가의 입장에서 과정을 기록하거나 남기고 싶은 욕망은 없었나?
하상현 (작가로서 경험을 다시 끄집어내 보자면) 나는 눈앞에 있는 것을 좋아해서 조각과 퍼포먼스에 이끌렸던 것 같다. 영상으로 남기는 것 자체를 싫어했고 거기에 작품이 담긴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결과적으로는 퍼포먼스 아카이빙을 너무 대충 했다는 생각도 든다. 그런데 《동물성 루프》에 참여한 것이 계기가 되어 영상을 보는 경험 자체가 작업의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있음을 알게 됐고, 기록에 관해 다시 고민을 시작했다. 물론 여전히 퍼포먼스가 가지고 있는 것들이 영상에 담긴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영상을 관람하는 순간 또 다른 방식의 시간성이 생겨난다고 생각한다. 영상에 저장되어 있는 바로 그 시간이 아니라, 그것이 재생될 때 누군가가 그것을 그 앞에서 보고 있는 시간 말이다. 〈디램〉(2022)과 같은 작업에서는 이러한 상영의 시간과 입체적인 공간 안에서 몸이 움직이는 시간을 같이 병치할 때, 어떤 균열이나 기울어짐 같은 것이 발생하는 현상에 집중했다.
이러한 작업을 진행하면서, 앞서 말씀드린 ‘지나간 기록을 다시 보기 어려워지는 시대적인 조건’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유튜브와 같은 접근하기 쉬운 플랫폼을 비롯하여 다양한 매체에서 계속해서 새로운 콘텐츠를 욕망하고, 빠른 속도감은 과거의 기록물을 볼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한수민 민주 님이 강조하신 부분을 곱씹으면서 지금 잠깐 생각을 해봤는데, 무용에는 아카이빙 작업이 없는 것 같다. 정확히는, 그런 일을 하는 아키비스트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쌓여있는 자료들은 있는데 그것들을 가지고 아카이빙을 하는 사람이 없는 것 같다.
이민주 퍼폼에서 같이 작업했던 작가 중 박보나 작가가 있다. 퍼포먼스 작업을 많이 하신 작가인데, 2009년 《Flexible Aura》라는 전시에서 〈박보나〉라는 작업을 선보인 적이 있다. 작가를 연기하는 배우를 고용해 전시 오프닝에 대신 참여하게 하는 퍼포먼스였다. 나는 PCS 프로젝트에서 이 작업을 소장하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작가는 처음에, “이걸 왜 소장해야 하죠?”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티노 세갈도 그렇고, 작업이 기록되기보다는 오히려 풍문으로 회자되면서 기억 속에서 존재하는 작업이기를 바라는 작가도 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우리가 정리했던 방식은 캐릭터 박보나에 대한 소설 같은 텍스트를 쓰는 것이었다. 퍼포먼스에서 작가가 퍼포머에게 전달했던 설명들이 있었을 것이다. 박보나라는 캐릭터는 어떤 성격의 어떤 사람인지를 그렸던 묘사와 박보나를 연기한 퍼포머의 성격이 만나 어디에도 없는 새로운 인물이 만들어졌다. 그래서 그 인물에 대한 새로운 서사를 만들어보자고 했다. 기존 작업의 성격, 내용, 가치를 충분히 이해해야지만 쓸 수 있는 또 다른 방식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작업마다 매우 다른 방식의 접근법이 필요하다.
한수민 나는 그것을 작가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내가 됐든 누가 됐든, 그것을 작가 이외의 다른 사람이 할 수 없다고 생각했었다.
이민주 물론 작가도 함께 해야 한다. 미술에는 아키비스트라는 직업이 있지만, 그렇다고 작가가 없어도 되는 것은 아니다. 나도 아카이빙 작업을 하면서 작가와 모두 긴밀하게 소통했었다. 아카이빙은 오롯이 남겨진 자료와의 싸움이 아니다. 특히 퍼포먼스 형식에 있어서는 데이터가 많은 것을 누락하고 있기 때문에 다양한 방식으로 작업에 접근해야 한다. 작가의 구술 기록이 중요할 수도 있고, 사진, 영상, 작가의 말, 작가가 생각하지 못했던 의도까지 많은 것들을 함께 고민해야 한다. 이것은 퍼포먼스 형식이기 때문에 요구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뒤에 일이 있어서 먼저 일어나보겠다. 더 풍성한 논의가 이어졌으면 좋겠다.
[이민주 퇴장]
능동적 시선, 그리고 매체를 건너가는 아카이빙
조형빈 사진과 영상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이어가 보고 싶다. 나는 공연을 영상으로 기록하는 기록물의 경우 풀샷을 선호하는데, 전에 다른 분들이 영상 감독의 관점과 편집이 들어간 영상이 아카이브로서 의미가 있다고 이야기했던 적이 있다. 나는 공연예술이 가지는 가장 큰 특성이자 미덕은 관객이 무엇을 볼 수 있을지를 결정할 수 있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극장에서 일어나는 공연은 대체로 프로시니엄의 구조 안에서 객석과 무대가 구분이 되어 있지만, 무대는 생각보다 넓기 때문에 관객은 주역이 아닌 인물이나 오브제, 무대 장치 같은 것들을 선택적으로 볼 수 있다. 이런 관점의 선택으로부터 주체성의 문제를 끌어낸 작업이 제롬 벨의 〈베로니끄 두아노〉(Véronique Doisneau, 2004)와 같은 작품이기도 하다.
베로니끄 두아노는 파리 오페라 발레에서 오랜 시간 군무진 무용수로 활동을 하다 은퇴를 앞둔 무용수다. 세계 최고의 발레단의 무용수이므로 당연히 그에 맞는 엄청난 기량을 가지고 있을 테지만, 주역 무용수가 되지 못했으므로 관객의 눈길을 받을 수 없었다. 제롬 벨은 바로 군무진 무용수를 무대 정중앙에 세움으로써 관점의 문제, 무대에서 주체성의 문제를 제기했다. 다시 생각해 보면, 관객은 언제든 군무진 무용수를 볼 수도 있다. 내가 주역 무용수 대신 코르 드 발레를 보겠다고 선택하면, 무대 뒤편에서 15초간 동일한 포즈로 다른 이십 명과 함께 대형을 유지하고 있는 누군가의 얼굴을 세심하게 관찰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런 것들을 연출가나 안무가의 의도에 따라서(혹은 그에 반해서) 무엇을 볼 지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이 공연이 가지는 큰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측면에서 나는 공연을 기록으로 남기는 영상이라고 하면 풀샷을 선호하는 편이다. 클로즈업 샷이 많이 들어가고 적극적으로 편집된 기록 영상들을 보면, 삭제된 맥락들이 너무 많아서 공연을 제대로 감각할 수 없다고 느낀다. 나는 지금 영상이 보여주고 있는 무용수의 뒤편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궁금한데 그걸 다 잘라버리고 무용수 한 명의 얼굴만 확대해서 찍어놓은 영상을 보고 있으면 그렇게 답답할 수가 없다. 무용은 단순히 무용수의 얼굴 표정이 중요한 게 아니라 전체적인 몸의 형상과 무대의 맥락이 중요한데, 팔다리를 다 잘라버리고 얼굴만 클로즈업해 놓으면 대체 이 영상은 뭘 위해서 만들어진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제롬 벨 〈베로니끄 두아노〉, 2004
하상현 형빈 님의 말씀에 동의하는 한편, 풀샷이 객관적이라는 것은 환상이라고 생각한다. 풀샷 역시도 여러 관점 중 하나를 선택한 것이다. 기록에서 객관적인 시점이라는 것이 얼마나 불가능한지에 대해서 성찰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퍼포먼스 작업 안에서 어떤 형식으로 기록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과정은, 개별 퍼포먼스를 자세히 들여다보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영상 안에서 대상이 시선을 끌어당기는 정도와 공연장에서 대상이 시선을 끌어당기는 정도가 다르기 때문에 이를 1대 1로 비교할 수 없다고도 생각한다. 관객과 퍼포머들이 가까운 경우에는 몸을 훨씬 촉각적으로 많이 느낄 수 있고 먼 몸들은 덜 느껴지는데, 이런 구성이 영상에 담길 때 훨씬 플랫하게 감각되는 것 같다.
조형빈 조금 첨언하자면, 나 역시도 풀샷이 객관적이기 때문에 좋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극장에서 공연을 관람할 때에도 같은 공연을 1층 1열에서 관람하는 것과 3층 14열에서 관람하는 것은 대단히 다른 경험을 만들어낸다. 어떤 객석에 앉는지의 여부도 그 공연을 통해 어떤 경험을 할지를 고민하는 관객의 선택 안에 들어있는 것이므로, 관객이 무엇을 볼지 결정하는 시선의 문제와 함께 엮여 있다고 할 수 있다. 내가 풀샷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하는 이유는 클로즈업이나 편집 같은 것들이 관객의 이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침해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선택의 가능성이 최대한 주어진 상황에서 선택을 하는 것과 남이 다 잘라놓은 것 안에서 보는 것은 매우 다른 경험이 될 수밖에 없다. 개인적으로는 이 잘려 나가는 맥락들이 공연 전체를 온전히 파악하지 못하게 만든다는 생각이 든다.
한수민 그 선택이라는 측면에서, 나는 오히려 풀샷이 관객의 선택권을 박탈한다고 생각한다. 영상 안에서 선택의 문제를 이야기할 수 있다면, 나는 이 정해진 화면 안에서 무엇을 볼지를 선택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화면 밖에 무엇이 있는지를 상상할 수 있는 것이 선택이라고 느낀다. 영상에서 보여주는 화면들이 계속해서 바뀌어야 내가 그 밖에 있는 것들을 계속해서 상상할 수 있다. 풀샷처럼 화면에 모든 것을 다 담는 경우 오히려 선택의 여지를 하나도 남겨놓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하상현 흥미로운 얘기인 것 같다. 영화에서 이야기하는 외화면과 관련된 논의도 떠오른다. 그런 ‘바깥의 것들’을 섬세하게 다룰 수 있는 기록자라면 좋은 아카이빙을 남길 수 있지 않을까?
조형빈 그래서 이해가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좋은 기록을 남기기 위해서는 그것이 무용이 됐든 연극이 됐든 퍼포먼스가 됐든 그 작업에 대한 이해가 반드시 필요하다. 몇 년 전 LG아트센터에서 ‘아비뇽 페스티벌 시네마’라고 해서 프랑스의 아비뇽 페스티벌(Festival d’Avignon)에 올려졌던 몇 편의 공연 영상을 무대에서 상영하는 기획이 있었다. 영상 중에는 로사스(Rosas) 무용단의 〈체세나〉(Cesena, 2011)가 있었는데, 이 영상은 말한 것과 같이 상당 부분 편집이 가미된 영상이다. 그런데 영상을 보는 내내 불편했다. 무용의 문법에 익숙하지 않은 영상 감독들이 거의 무조건 하는 실수가 얼굴을 클로즈업하는 방식을 상당히 자주 사용하는 것이다. 연극이나 뮤지컬 같은 장르는 배우의 호흡과 발성, 그것으로부터 표현되는 감정이 극의 흐름에 끼치는 영향이 막대하기 때문에 표정을 포착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무용은 얼굴과 더불어 몸이 처한 상황을 함께 인식할 수 있는 것이 매우 중요한 장르다. 〈체세나〉의 영상에서 얼굴과 상체를 클로즈업하는 장면에서 심지어 두 무용수는 빙글빙글 돌면서 이동한다. 팔다리가 어떻게 회전을 만들어내고 있는지, 돌면서 어느 방향으로 이동하는지를 전혀 파악할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회전하는 두 명의 무용수 뒤로는 여러 명의 군무진이 떼로 지나가기까지 한다. 관객은 무대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대신, 그저 그다지 의미 없어 보이는 무용수의 얼굴만 보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결국 영상을 촬영하고 편집하는 사람은 무용과 그 작품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하고, 그것을 입체적으로 감각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Rosas & graindelavoix 〈Cesena〉, 2011
하상현 기록물로서의 영상에 있어서 풀샷이냐 클로즈업샷이냐의 문제는 이분법적으로 나눠서 선택해야 하는 문제가 아닌 것 같다. 어떤 상황에서 무엇을 위한 풀샷인지, 무엇을 위한 클로즈업샷인지가 중요할 것이다. 형빈 님 이야기를 들으면서 인사미술공간에서 열렸던 《도끼와 모조머리들》(2022) 전시에 참여한 김무영 작가의 작업이 떠올랐다. 흰 공간에서 카메라로 퍼포머를 촬영을 하는 인물이 배치되어 있고 퍼포머들은 달리기를 위한 자세를 취하기도 하면서 촬영 자체를 드러내는 작업이었다. 작가 제공으로 전시가 열리기 전에 영상을 미리 볼 수 있었고, 데스크탑 화면으로 본 영상은 다소 플랫하게 느껴졌다. 흥미로운 것은 실제로 전시장에서 ‘영상 설치’로서 이 작업을 마주했을 때, 작가가 설계한 촬영의 시스템 자체가 드러나면서 퍼포머들이 왜 카메라를 쳐다봤는지, 이런 것들이 실제로 작동했고 이를 감각할 수 있었다. 김무영 작가의 작업에서 퍼포머가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클로즈업 형식은 중요한데, 이와 같은 구체적인 작업 안에서 클로즈업을 하더라도 외화면이 드러나는 경우가 있다는 점을 들고 싶다. 여기서는 영상을 상영하는 디바이스 장치에 따라서도 변화하고, 상당히 디테일한 요소들이 동시에 작용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아카이빙을 할 때 구체적인 작업을 잘 들여다보는 것이 더욱 중요한 것 같다.
조형빈 오늘 많은 이야기들을 나눴다. 무용과 퍼포먼스를 오가면서 대화하다 보니, 이 안에서 또 새롭게 발생하는 이야깃거리들도 보이는 것 같다. 오늘 좌담을 마무리하는 분위기에서 마지막으로 하나 정도 질문을 드려보고자 한다. 오늘 우리는 아카이브, 말 그대로 ‘사라지고 난 후에 남은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아카이브가 공연이나 퍼포먼스가 지나간 후에 남은 일종의 제도적 ‘자국’ 같은 것이라면, 작가들이 실제로 남기기를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한국의 동시대 무용 작업들은 이 작품이 재공연이 될 것이라는 상상을 그다지 하지 않으면서 작업을 만드는 것 같다. 공연의 경우 작품이 물질적으로 남을 수 없다는 전제가 있지만, 그렇다고 엄연히 세상에 내보였던 작품이 공연이 끝났다고 해서 이 세상에 존재했던 적이 없는 것처럼 지워지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과연 안무가는 이 작업이 무엇으로 남기를 바랄까? 혹은 어떤 방식으로 남기를 바랄까? 이런 질문이 들었다.
한수민 아까 민주 님 말씀을 듣고, 이 질문을 저에게 해야 되는 질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나는 과연 이 작가들을 보고 무엇을 남기고 싶어 하나? 동시대라는 자장 안에서 함께 고민하고 감각하면서 만들어내는 작업들을 모아서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까? 이런 고민을 더 깊게 하게 되었다.
하상현 이는 작가와 작가가 다루는 매체마다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면, 무언가를 남기고 싶다는 마음이 컸다. 어쩌면 불안하게 사라지는 것을 붙잡고자 하는 마음을 동력 삼아 작업을 해왔던 것 같다. 퍼포먼스나 기체와 같은 가장 불가능한 형식과 소재를 가지고 무언가를 남기고자 하는 시도를 해왔던 것이다. 지금은 작가가 아닌 기획자로서 일하고 있는데, 수민 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흘러가며 사라지는 형식의 작업으로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된다. 큐레이터의 일이 작품을 돌보는 일이라면, 퍼포먼스 작업을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고 돌보고 싶다. 매년 생산되는 많은 작업들이 공회전하거나 그저 소진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조형빈 이 질문은 공연이나 퍼포먼스 작업을 하는 작가들뿐만 아니라 모든 작가에게 던질 수 있는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물질로 결과물이 남는 회화나 조각 같은 작업들은 작품 그 자체가 남을 수 있겠지만, 작업이 무엇으로 남았으면 좋겠는가 하는 질문은 곧 사람들에게 이것이 어떤 방식으로 남기를 바라는지 물어보는 질문과도 같다. 작업이 끝난 후에도 이것이 살아있는 것으로서 계속 돌아다니게 하기 위해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그리고 이 작업은 나에게 무엇이 되어야 할지 고민하는 일들이 거기에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한수민 어쩌면 핵심은 ‘질문을 던지는 일 그 자체’일 수도 있을 것 같다. 나는 작가를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작가들은 계속 질문을 던지고 누군가가 대답해 주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누군가가 계속 거기에 대답해 준다면, 무언가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고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조형빈 그렇다면 아마도 아카이브는, 그 질문과 대답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기록하는 작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작업을 만들어내기 위한 숱한 고민과 질문의 시간들이 단순히 작품 후에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대답’으로 남을 수 있다면, 작가들 역시 계속해서 그 의미를 추적해 나갈 수 있는 힘을 얻지 않을까. 오늘 긴 시간 동안 많은 이야기들을 나눠주셔서 감사하다. 오늘 나온 이야기들을 가지고 더 깊은 곳으로, 더 흥미로운 곳으로 계속 대화를 이어 나갔으면 좋겠다. 그러면 오늘은 여기서 좌담을 마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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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스플린트》 전시 소개글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