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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선영 개인전 《Circularium》 리뷰: 눈-멀고, 돌고, 방을 나가기
하상현
오선영 《Circularium》(2024), 사진 제공: ⓒ 이재호
오선영의 퍼포먼스 〈Circularium〉(2024)은 흙이나 광물과 같은 대상이 된 몸 [〈Terrarium〉(2021), 〈Paludarium〉(2022), 〈Linear〉(2023)], 보지 못하고 응시당하는 몸 〈Gazing〉(2019), 가족과 애인과 같이 의존하는 관계에서 비롯된 심리극 〈Dinner with father〉(2018) 등에서 나타나는 작가가 오랫동안 다뤄온 주제를 한 번에 살펴볼 수 있는 작업이다. 작가는 연극적인 재현이나 정서적인 표현을 에둘러 피하지 않으면서 신체의 물리적인 요소와 감정적인 요소를 동시에 사용하는 퍼포먼스-극1을 만든다. 이때 전통적인 연극처럼 서사의 인과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가지 않고, 기승전결을 최소한으로 사용한 장면 중심의 경제적인 극작법을 구사한다.
‘Circularium’은 원형으로 돌 수 있는 야외 공간이나 광장 분수를 의미한다. 이 작업은 분수 주변을 반복해 도는 것처럼 원형으로 순환하는 시간성을 중요하게 다룬다. 작가가 가상으로 창출한 고립된 섬, 광장의 분수와 같은 공간은 신체가 그 주변을 돌 수 있는 경로를 만든다. 섬의 경계를 숨 가쁘게 달리는, 원을 그리며 같은 곳을 무수히 도는 몸을 볼 때 우리는 무엇을 보게 되는가? 하나의 공연, 하나의 달리는 몸을 여러 번 마주칠 때 우리는 같은 사건을 마주치는 것일까?
1. 안경이 없는 ‘눈먼’ 눈과 안경 있는 눈: 하나의 공연을 두 번 볼 때
2024년 6월 21일과 6월 23일, 작가의 퍼포먼스를 두 번 관람했다. 첫날에 안경집에 안경이 없어 몸과 사물의 형태가 거의 뭉개진 상태로 퍼포먼스를 봤고, 다음 회차를 한 번 더 보기로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의 공연을 두 번 볼 때 우리는 같은 것을 보게 될까? 가장 강박적으로 동일성을 추구하는 레퍼토리 형식의 공연에서도 관객은 그날의 날씨와 기분, 몸의 상태에 따라 다른 것을 보게 된다. 안경을 착용하고 난 뒤 나는 첫 공연에는 볼 수 없었던 작가의 발에 난 상처와 감긴 붕대를 본다. 기존에 봤던 장면과 다른 곳에 눈을 돌리며, 서사는 매 순간 다른 방식으로 형성된다. 대상을 흐릿하게 보는 시야와 선명하게 볼 수 있는 눈으로 바라 본 각각의 관극 경험은 매우 다른 두 번의 감상을 하게 했다.
‘눈멈’이라는 모티프는 작가의 작업에서 중요하다. 폐쇄된 방안에서 실리콘으로 눈이 덮힌 채 흐느껴 우는 작가와 핀홀 구멍을 통해 이를 관람하는 구경꾼들의 눈을 다룬 〈Gazing〉에서처럼, 이번 작업 또한 눈과 입이 덮인 작가의 몸이 중요하게 등장한다. 눈이 멀어 있을 때 우리는 보지 못하고 보여지며, 이로 인해 취약해진다. 이때 몸은 타인의 도움과 통제를 동시에 받는다. 본 공연의 중반부, 작가는 눈꺼풀에 덮인 마개를 떼어내고 빛과 관객을 응시한다. 여기서 자칫 가려진 진실(빛)을 마주한다는 계몽의 모티프를 읽어낼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바로 다음 장면에서 관객은 여전히 입이 막힌 채로 숨 가쁘게 섬 주위를 반복적으로 도는, 그리고 이내 (섬에서 탈출하는 것이 아니라) 섬 중앙으로 되돌아가는 몸을 보게 된다. 서사는 기승전결로 완결된 선형적 구조를 띠지 않는다. 처음과 끝이 반 바퀴 돌아 붙어 있는 뫼비우스 띠. 내가 묻힌 곳에 다시 방문하는 일. 이때 관객은 가려진 눈이 밝혀져 진실을 얻게 되는 ‘서사’가 아니라, 눈먼 몸과 눈 뜬 몸, 그리고 입이 터지고 이내 다시 흙에 묻히는 몸을 순환하는 시간 속에서 경험하게 된다.
빛과 응시를 다룬 또 다른 작업 〈Linear〉(2023)는 작가의 작업 중 가장 연극적인 기승전결의 구조를 이탈한 작업이다. 테라리움2과 같은 인공적인 입방체 상자에 들어간 작가는 어둠 속에서 돌과 함께 정면을, 그리고 관객의 눈을 응시한다. 이내 조도는 점점 밝아지고, 한순간 각막에 손상을 일으킬 정도로 강한 빛이 내리쬔다. 작가의 작업에서 빛은 깨달음을 주는 것이 아니라, 눈을 멀게 하는 두려운 것으로 등장한다. 여러 작업에서 이러한 ‘눈멈’이라는 모티브가 등장하는데, 이때 눈은 종종 눈을 덮은 실리콘 마개와 ‘빛’에 의해 이중으로 실명의 위험에 처해 있다. 작가가 정면을 응시하거나, 서로를 바라볼 수 있는 조건은 오히려 이러한 어둠 속에서이다. 이는 〈Gazing〉에서처럼 타인이 자신을 바라보는 구멍을 덮는 그 순간에 가능하다. 우리는 역설적으로 형상의 경계가 흐려지는 암흑 속에서, 상자의 내부를 관통해 그 안을 볼 수 없는 ‘닫힌 상황’의 조건에서 서로를 바라볼 수 있다. 이는 눈먼 보기이자 어둠 속에서 서로를 보는 일이다.
2. 길들여짐
길들여짐은 관계와 상호성의 조건이기도 하다.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에서 여우는 어린왕자에게 이러한 ‘길들여짐(taming)’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준다. 여기서 여우는 길들여짐을 ‘너무 많이 방치되는 것(neglected)’이자 ‘관계(tie)를 수립하는(묶는) 것’이라 말한다. 관계에서의 얽힘과 보살핌, 또는 방치와 폭력은 긴밀하게 붙어 있으며, 이는 오선영의 중요한 관심사 중 하나이다. 〈Terrarium〉은 흙이나 이끼에 뒤덮여 땅과 대지에 가까워진 몸을 보여주는 작업이기도 하지만, 움직임의 측면에서 사랑의 움직임을 다룬다. 특히 여기에서의 움직임은 폭력이 동반된 사랑의 움직임이다. 퍼포먼스 중 작가의 몸은 ‘어머니’와 같은 사랑하는 이에 의해 눅눅하고 축축한 이끼로 덮어진다. 몸은 점점 움직일 수 없게 된다. 보살핌은 이처럼 눅진한 습기를 머금은 것으로, 점차 자유로운 호흡을 제한하고, 움직이지 못하는 누운 몸, 죽음에 가까운 마비된, 정지된 몸을 만든다.
〈Circularium〉 또한 초반부에서 이러한 길들임-길들여짐의 움직임을 다루고 있다. 먼저 작가는 관객이 보지 않는 순간에도 5시간 동안 부동의 누워있는 자세를 유지한다. 이는 몸이 관객을 기다리는 순간이다. 이때 눈과 입은 실리콘에 덮여 감각을 통제당하고, 오직 코로만 호흡한다. 퍼포먼스가 시작되면, 또 다른 인물인 ‘타인’이 등장하는데, 작가의 작업에 자주 등장하는 이 퍼포머는 오선영의 실제 어머니이자, 동시에 ‘타인’을 연기하는 배우이기도 하다. 이 인물은 스스로 움직이지 않는 작가의 손끝을 공중에 들었다 놨다 하며 그의 손을 움직인다(조종한다). ‘엄마처럼’ 토닥이며 안아 주다가도, 짐짝을 내팽개치듯 던진다. 몸을 일으켜 세워주는가 하면, 다시 바닥으로 꼬꾸라지게 머리를 내던진다. 동물을 조련하듯 네발로 기게 하고, 머리를 쓰다듬어 다정하게 정리해 주기도 한다. 아이가 네발로 기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먼 과거의 보살핌처럼, 자연의 풀과 같은 사물을 만지고 이해하게 도와주는 몸짓들. 이는 사랑의 몸짓이자, 폭력의 몸짓이며, 인간의 원초적인 드라마를 구성하는 몸짓이기도 하다.
5시간 동안 부동의 자세, 그리고 폭력이 동반된 돌봄의 움직임 이후, 앞서 설명한 원형 경로를 반복적으로 도는 행위가 시작된다. 반복해 같은 경로를 도는 일은 나선을 그리며, 무한으로 나아가는 시간이다. 그렇지만 이는 동시에 정말 같은 곳을 반복해서 도는 굴레에 갇힌 시간일 수도 있다. 자유를 향해 나아가다가도 다시 땅에 묻히길 반복하는 일, 어떤 죽은 이들을 생각하지 못하고 살아가다 다시금 그것들에 내 몸이 붙잡혀 어딘가에 머무는 일, 애도의 굴레에 빠져버리는 일.
오선영 《Circularium》(2024), 사진 제공: ⓒ 이재호
3. 방을 나가기
마지막을 생각해 보고 싶은 것은 작가가 창출한 가상의 공간과 그곳에서 움직임을 바라본 이후의 시간, 즉 ‘그곳에서 나가는 경험’에 대한 것이다. 이는 작업을 모두 본 후 실제로 관객이 행하는 행위이며, 때론 작업 안에서 작가 자신이 행하는 일이기도 하다. 우리는 결국 퍼포먼스가 끝나고, 퍼포먼스가 일어난 공간을 뒤편에 두고, 밖으로 ‘나간다’.
앞서 말했듯 작가의 작업은 쇼윈도나 디오라마와 같은 가상의 공간을 만들고 그곳에 인공적인 생태환경을 구축하는 방식으로 제작된다. 이때 작가는 바운더리가 있는 상자와 같은 공간을 선호한다. 그의 퍼포먼스는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해 볼 수 있는데, 퍼포먼스가 끝난 후 이러한 인공적인 상자-공간으로부터 밖으로 ‘나가는’ 경우와 그 공간에 영원히 ‘묻히는’ 경우다. 전자의 경우 초기의 형태는 〈Dinner with father〉(2018)에서 볼 수 있다. 여기서 작가는 곧 돌아가실, 부재하는 아버지 자리를 눈앞에 두고 식사를 하며, 독백한다. 10분가량 통곡과 감정의 폭발이 지난 후, 작업 말미에 작가는 자신의 위치에서 벗어나, 아버지의 자리에 앉고, 그곳에서 덤덤히 자신이 있었던 곳을 바라본다. 이처럼 퍼포먼스의 자리에서 이탈한 후, 그러한 이탈이 허락하는 공간은 작가의 작업에서 중요하다. 〈Gazing〉(2019)의 마지막 부분에서 작가는 방안의 자신을 관찰하는 모든 핀홀 구멍을 닫고, 방 자체를 나가 버린다. 〈Uncrated space and its residues〉(2022)에서는 먼지가 쌓인 입방체 공간을 닦아내 그 안에 닦은 것들을 남기고, 투명해진 그 공간을 나가는 행위가 강조되어 있다. 이 작업은 친구의 죽음 이후 남겨진 것에 관한 작업으로, 이러한 ‘나감’은 퍼포먼스 이후, 남겨진 것을 다시 바라볼 수 있는 위치와 시점을 생성한다.
반면 〈Circularium〉(2024)을 비롯한 〈Linear〉(2023), 〈Paludarium〉(2022), 〈Terrarium〉(2021)과 같은 작업에서 작가의 몸은 퍼포먼스 공간에 영원히 ‘묻힌다.’ 퍼포먼스가 끝난 이후에도 작가는 오랜 시간 동안 그곳에 누워 있고, 퍼포먼스 이전에도 관객을 기다리는 긴 시간을 버텨낸다. 이러한 형식은 관객이 결국 보기를 끝내고 공간에서 나가는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데, 이는 표면상 ‘방을 나가는’ 작가의 작업과 구별되어 보이지만, 형식적으로 한 지점을 향하고 있으며, 동일한 효과를 만들어 낸다. 그것은 가상의 공간을 벗어나는 ‘나가기’의 경험, 그리고 그를 통한 이격된 시점을 확보하는 것이다. 부재한 아버지의 자리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일, 보는 주체와 대상으로 양분된 공간 자체를 이탈해 보이지 않는 상자 밖을 상상하고 창출하는 일, 죽음 이후 남겨진 애도의 흔적을 (상자의 형태로) 영원히 간직하는 일, 이 모든 것은 공간을 ‘나가는’ 쉽게 드러나지 않는 중요한 행위를 통해 가능해진다.
1 작가의 작업은 퍼포먼스와 연극의 경계에 놓여 있다. 인터뷰 과정에서 사물의 상징적/물질적 사용, 배우의 위상, 관객과 무대의 경계, 시간성 등 작업 내 구성 요소에서 이러한 이중적인 조건을 발견했으며, 그의 작업이 그러한 조건들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때문에 본 글에서 〈Circularium〉(2024)의 장르적 표기는 ‘퍼포먼스’와 ‘공연’을 의도적으로 혼용해 사용할 것이다.
2 인공 생태 환경을 구성하는 테라리움(Terrarium), 비바리움(Vivarium), 팔루다리움(Paludarium), 아쿠아리움(Aquarium)과 같은 공간은 작가의 작품의 제목으로 사용된다. 그렇지만 이는 단순히 제목을 넘어, 작가가 구현하는 시공간에 접근하기 위한 중요한 개념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rium’적 공간은 연극 무대처럼 1)‘가상적’으로 구획된 공간으로, 2)‘객석과 무대 공간의 분명한 분리’를 전제하고 있으며, 3)유리 케이스를 통해 보는 ‘반 2차원적 공간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연극 무대와는 다르게 4)실제 동식물(살을 가진 존재들)의 생태적인 조건을 축소된 규모로 시뮬레이션하며, 5)극적인 시간성을 초과해 지속하는 시간성을 포함한다. 이를 일종의 ‘살아 있는 디오라마(Living Diorama)’로 볼 수도 있겠다. 작가는 퍼포먼스의 시공간과 현실의 시공간 경험을 구분하며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전자인 퍼포먼스의 시공간을 더 실제적인(the real) 것으로, 후자의 현실의 시공간이 더 가상적인(imaginary-actual)것으로 느낀다고 말했다.
오선영 개인전 《𝘾𝙞𝙧𝙘𝙪𝙡𝙖𝙧𝙞𝙪𝙢》
2024.6.15.(토) – 6.23.(일)
Hall 1
작가 오선영
기획 윤태균
코디네이터 이윤서
그래픽 디자인 박도환 (스튜디오 자율도)
설치 큐브하우스, 에포크가든
움직임 코치 박준형
사진 이재호
영상 에드워드 조지 고메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