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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 잠:
황수현의 〈Zzz〉

황수현 〈Zzz〉 ©오석근, 서울문화재단 대학로극장 쿼드 제공

 

 

소파 깊숙이 앉아 책을 펼쳤는데, 어느샌가 졸았다. 졸음이 가시지 않은 채로 단어 몇 개가 눈 안에 든다. 짧은 꿈에서 소설 같은 대사 몇 마디 들은 것도 같다. 꿈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 나는 대낮의 극장에서 잠결에 발견했던 것들을 느낀다. 이를테면 어슴푸레한 반짝임과 낮은 진동, 흘러가는 검은 그림자, 혹은 나직한 추위.

 

*

 

아주 겨울이 오기 전의 대학로. ‘쿼드’라는 블랙박스 시어터에서 Zzz라는 이름의 공연을 봤다. ‘잠’에 관한 공연이라는 것, 오후 2시부터 5시까지 3시간을 머물러야 한다는 것 외에는 특별한 정보가 없었다. 점심을 먹으면 졸릴까 봐 걱정이 되었지만, 배가 고프면 집중하지 못하는 것 또한 두려운 일이기에 극장 건너편에서 국밥을 먹었다. 금세 배가 불렀지만 음식을 남겨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싹싹 긁어먹었다. 밥을 다 먹은 후에는 박카스를 살까 생각했다. 배가 부르니 이제 졸릴까 봐 걱정이 된 것이다. 직장인이던 시절, 퇴근 후 극장에 갈 때 편의점에 들러서 박카스를 마시곤 했다. 피곤으로 인해 공연을 제대로 보지 못하면 안 되니까. 게다가 그건 작품과 작품을 만든 사람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니까. 습관이 들어 공연을 보기 전이면 박카스가 생각난다. 그러나 편의점은 찾지 못했고, 공연 시간이 다가왔고, 나는 극장으로 가서 표를 찾기로 했다. 극장 입구에 붙은 공연 포스터가 눈에 들어온다. 공연의 이름을 확인한다. 그제야, 박카스를 사려던 내가 극장과 잠을 어떻게 여기는지 깨닫는다. 그렇다. 나는 극장에서의 잠을 혐오한다. 

 

*

 

검고 네모나고 너른 바닥. 마찬가지로 검은 네 개의 벽과 2층의 복도. 어둠 속에 배튼이 오련히 보이는 극장 상부. 도착한 곳의 모양새다. 객석이자 무대인 곳. 나는 자리를 잡으려고 두리번거리다가 쿠션과 이불이 쌓인 것을 발견한다. 하나씩 챙겨 들고 귀퉁이도 중앙도 아닌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몇몇 관객들이 바닥이나 벽에 기대어 눕는 것을 봤지만, 바로 따라 눕지는 못했다. 내 옆의 관객은 바로 머리를 대더니 잠들 채비를 마친 듯 눈을 감았다.

극장에서의 잠이라니. 그건 게으르고 한심하고 예술을 존중하지 않는 행동이었다. 객석에 앉은 채로 잠든 관객의 뒷모습, 옆모습 따위가 잇따라 떠올랐다. 그걸 보는 나는 속으로 혀를 차고 있다. 공연 중 졸았던 친구를 놀렸고, 내내 꾸벅꾸벅 졸더니 커튼콜에 일어나 열렬히 손뼉 치던 관객은 비웃었다. 졸음을 쫓으려고 애쓰던 내 모습도 떠오른다. 명동예술극장에서 러시아 작가의 작품을 보던 중이었다. 깜빡 잠이 들어버린 후에 솟아난 수치심도 생생하다. 전설에 가까운 연출가의 최신작이 공연 중인 LG아트센터였다. 

여기는 쿼드. 앉거나 누운 관객은 다음 결정을 해야 한다. 이불과 베개와 어두운 조명과 공연의 이름이 지시하는 바대로 잠들 것인지, 아니면 그것을 만착이라 여길 것인지. 그리하여 남들이 잠들더라도 나는 애써 잠들기를 거부하고 곧 시작될 무용수들의 공연을 놓치지 않고 볼 것인지. 결정을 내리려면 질문을 파악해야 한다. 이 공연은 나에게 잠들기를 ‘정말’ 권하는 것일까? 우리가 공연을 ‘본다’고 말할 때 보는 것은 이 공연 어디에 놓일까? 잠이 들어버린다면 나는 이 공연이 구성한 무엇을 경험하게 하는 걸까? 질문도 답도 잡히지 않는다. 덮고 있던 이불의 굵은 짜임을 만지작거렸다. 거칠게 보였는데 보드랍다. 아직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았다. 

언젠가 게임의 작동 방식을 토대로 공연을 만드는 워크숍에 참여한 적이 있다. 관객의 선택과 수행으로 작동하는 공연을 만들기 위함이었다. 게임을 만들 때는 오류가 생기지 않고 설계한 대로 작동되게 하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공연으로 치면 참여한 관객이 혼란을 겪지 않게 해야 한다. 더듬대는 고민은 다음 장면으로 나아가는 걸 어렵게 만들 테고, 그러면 흥미는 떨어질 테니까. 말이 쉽다. 경우의 수를 세며 혼란을 줄이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스코어는 길고 복잡해지기 일쑤다. 그러다가는 관객이 아니라 연출가나 작가만을 위한 서술이 되어버린다. 

해당 워크숍이 끝난 후에 나누는 대화에서 나는 공연이 아무래도 게임과는 다르다는 걸 느꼈다고 말했다. 관객들이 참여하기로 한 기획이라면 개개인의 차이로 인해 발생하는 예측불가능한 사건에 열려 있어야 한다고, 그것은 오류가 아니라고, 오히려 그런 오차를 기다린다고도 말했다. 말뿐이다. 실제로 내가 관객들과 만나는 작업을 할 때마다 지시문은 길어졌다. 오차가 흥미로운 차이가 되지 못하고 그만 오류로 남을까 두려웠다. 

한편 Zzz에 그런 두려움은 없다. 관객에게 지시하는 구체적인 문구가 없는데, 있다면 아마도 ‘Zzz’라는 단명한 공연 제목이다. 혹은 공간과 무용수가 만들어내는 인상들이다. 이 공연의 스코어는 문장이 아니라 환경이다. 관객들은 단 한 문장의 지시어도 없이 완벽에 가깝게 스코어를 이해한다. 잠들기. 다시 말해, 잠을 자는 상태가 되어가기. 이 스코어를 짐작하고 각자의 선택에 따라 수행한다. 극장 안의 환경을 스코어로 읽어내기 위해서 아주 기민한 감각이나 예술적인 훈련은 필요하지 않았다. 스코어를 작동시키는 것은 오히려 관객 개개인이 달리 가지고 있는 태도나 상태들이었기 때문이다. 눈치를 보거나 무심하거나, 피곤하거나 궁금하거나. 관객은 자기 자신의 상태로 그 환경에 놓이기를 요청받고 그렇게 된다. 여기에 오류는 없다.  

 

*

 

여기저기 관객들이 가만히 있다. 등을 대고 눕기도, 모로 눕기도, 이불로 무릎을 덮고 앉아 있기도, 함께 온 사람과 어깨를 한 쪽씩 맞대고 있기도 하다. 거의 움직임이 없다. 자리만 바뀌었을 뿐, 가만히 있다는 사실은 객석 앉아서 하던 보통의 관극과 다르지 않게 보인다. 관객은 대개 가만히 있어야 했다. 얼마나 가만히 있어야 했냐면, 아무렇지 않게 죽음으로 은유될 정도로. 숨죽인 객석, 죽은 듯 앉은, 혹은 시체 관극. 그렇게 숨죽이고 앉아 있되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잠드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잠이 들어버리고 만다. 

좀처럼 잠이 오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배가 불러서 눕지 않는 게 좋겠다고도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어느새 누웠는데, 그제야 2층 복도를 유령처럼 지나가는, 아니 어쩌면 일상적인 속도에 비해 너무나 느려서 ‘지나가는 흉내’를 내는 것 같은 검은 옷의 퍼포머를 발견했다. 해가 기울어가며 자리를 옮기는 그림자 같다고, 바람이 부는 밤 흘러가는 구름 같다고 생각했다. 생각하는 순간 잠에서 깬다. 어느새 검은 옷의 퍼포머는 뒤로 걷고 있었다. 잠이 드는 것은 필시 자신도 모르는 새에 일어나는 일이라서, 정신을 차리면 늘 잠에서 깨고 있었다. 그때마다 검은 그림자가, 검은 그림자 같은 퍼포머가, 검은 그림자 같은 관객들이 불현듯 다른 장면을 만들었다. 1층 바닥으로 내려온, 느리게 느리게 기울어지던 무용수의 검은 몸들을 바라봤다. 깜박 잠이 들었다가 깨길 반복하며, 검은 몸들의 기울기를 살핀다. 잠이 들었던 것도 모른 채 눈을 뜨니 멀리서 기울어졌던 검은 몸이 내 옆에 누워 있었다. 누운 몸을 따라 나도 모로 누웠다. 

퍼포머는 극장 바깥이나 유튜브 쇼츠에서라면 단 몇 분 몇 초 안에 끝낼 법한 움직임을 먼 곳의 구름이나 바람 없는 날의 물길처럼 해낸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은 순간들이 모여 3시간이 지난다. 3시간은 지나야만 어렵사리 흐름을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잘 훈련된 퍼포머는 짧은 순간을 그렇게 늘일 수 있다. 하지만 관객은 매 순간이 실제다. 극장에 들어와 앉았다고 해서 곧장 몸의 속도가 느리거나 빠르게 바뀔 리 없다. 극장의 건축 양식이나 규범이 의도한 대로라면, 공연의 장소는 생활의 흔적들과는 동떨어진 진공 상태가 되어야 할 테다. 하지만 관객의 몸은 극장 속 세계에서도 생활의 체취와 먼지를 털어내지 못한다. 그러기에 몸은 너무 취약하다. 잠들고 추위에 떨고 끊임없이 부스럭거리며 수선을 피운다. 3시간은 그 취약함을 감각하게 만드는 시간이었다. 그 취약함이 공연을 이룬다.

잠들기는 그렇게 관객에게 편집의 권한을 넘겼다. 잠이 관객 개개인의 상태에 따라 부지불식간에 찾아들어 공연을 진행시키는 것이다. 꾸벅꾸벅 조는 사이 장면이 바뀌었다. 잠이라는 암전, 잠들기라는 전개. 어떤 시간은 사라지고, 어떤 시간은 멈춘 것 같다. 퍼포머와 각각의 관객들 사이 다른 시간들이 교차하는 극장은 고요하게 혼란스럽다. 혼란 가운데 명확해지는 사실이 하나 있다면, 그 누구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는 것. 잠자코 누운 관객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는 것.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몸이, 잠들고 깨어나는 몸이 나라는 사태의 원래 상태임을 깨닫는다. 

그간의 극장에서는 매번 나만 빼고 모두가 가만히, 잘 있는 것 같아 외로웠다. 잠든 관객을 향한 비아냥은 잘 못 있는 나를 향한 미움이었다. 이 극장에서는 모두가 가만히 있질 못했다. 여기서 덜 외로워진다. ‘잠들기’라는 수행은 ‘숨죽이고’, ‘죽은 듯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극장의 규범과 일견 같아 보였지만, 정반대다. 이 공연은 관객들의 몸이 각자의 시간을 가지고 흘러감을, 그리하여 제각기 다르게 살아있음을 밝혀낸다. 자다 깨다를 수차례 반복했으니 잘 못 잤다고 해야 할까. 아니다. 좋은 잠이었다. 빼곡한 객석에 바르게 앉아 있던 관객을 두고 시체 같다 부른다면, 그 시체들을 살리는 잠이었다. 오직 살아 있는 자만이 잠들 수 있으니까.

 

황수현, 〈Zzz〉

2023.10.31.(화) – 11.12.(일) 14:00~17:00
서울문화재단 대학로극장 쿼드

컨셉·안무 황수현
공동 리서치·퍼포먼스 강호정, 김주영, 김현우, 문형수, 정한별, 황다솜, 황수현
크리에이티브 프로듀서 박지선
사운드 카입
무대 디자인 김종석
조명 디자인 공연화
의상 디자인 임선열
음향 감독 안창용
무대 감독 정찬홍

무대 조감독 전재윤
조명 프로그래머 김해빈
조명 오퍼레이터 김현
음향 엔지니어 김여운
음향 오퍼레이터 김우람
조명팀 강주연, 김대현, 김아연, 이한융, 정채림
무대팀 김학준, 정지훈
리허설 보조 정나원

사진 오석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