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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한 얼굴 시시한 질문

모두예술극장이 개관한다. 갖가지 방식으로 새로운 극장을 염원해 온 나로서는 기다리던 소식이다. 극장 웹사이트에는 “장애 예술가들의 창작 육성 교류 활동을 위해 조성된 국내 첫 ‘장애 예술 공연장’”이라는 설명에 이어 “장애 예술가와 기술 스태프들이 물리적 제약 없이 활동할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하고 창작의 과정과 공연, 운영 서비스 전반에 걸쳐 편의성과 접근성을 실현”했다고 쓰여있다. 모두를 열고, 담고, 잇는 공간이라니, 감탄하며 존경을 보내게 된다.

나는 빠르게 공연장 위치를 확인하고 예매를 위해 프로그램 정보를 훑고 예매창에 들어선다. 어딘가 기시감이 든다. 관람 연령, 공연 시간, 예매 과정… 사이에서 나는 조금 헤맸다. 매진일까봐 조마조마했는데 아직 자리가 남아 있었다. 내게는 다행스러운 일이었지만, 한편으로 어떤 관객에게는 접근하기 힘든 예매 과정이지 않을까. 기사에 따르면 “기존 공연장들이 장애인 관객 위주로 개선돼 왔다면, ‘모두예술극장’은 장애예술 창작자를 위한 공간이 마련”1되었다고 한다. 장애예술 창작자들이 만들어 낼 아름다운 무대를 기대하는 것과는 별개로 나는 관객들의 모습이 궁금해진다. 언젠가 동료가 들려준 유럽의 한 극장 풍경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다양성에 기반한 작업들이 활발한 만큼 커튼콜 무대 위에는 비장애인과 각기 다른 장애를 가진 이들이, 피부색도, 연령대도 다양한 출연진이 서 있는데, 박수를 치는 객석에는 모두 젊은 백인들뿐이었다는. 

이런 사태는 어떻게 해석될 수 있을까? 무대가 커지고 숨겨진 공간들이 복잡해지고 그곳을 다양한 장비들이 채우는 동안 객석은 수동적으로 정상성에 근거한 관객들의 편의에만 집중해 왔는지를 짚어볼까. 그에 맞춰 형성된 관람 예절 같은 규범이 더해졌음을 이야기하다 보면, 결국 객석에 다양성이 허락되지 않은 작금의 상황이 납득될까. 하지만 물리적인 접근성과 다양성을 이해하는 극장의 가치관에도 불구하고 다른 뭔가가 있다면, 그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브루노 라투르(Bruno Latour)에 따르면 하나의 개념이나 이론, 예술 양식은 특정한 영역을 점유하는 것이 아니라 미학, 종교, 경제, 법, 정치 등의 다른 양식과의 연결과 중첩을 통해 상호작용하는 것, 즉 행위자들의 네트워크로 이뤄진다. 많이 들어본 얘기 같지만 차이는 여기서의 행위자가 단지 인간만이 아니라 비인간 행위자를 포함한다는 점이다.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인간과는 다른 존재처럼 여겨지는 사물이나 자연 같은 비인간 요소들도 스스로 행위를 한다는 것이다. 영문학자 리타 펠스키(Rita Felski)는 이 논의를 문학에 가져오면서, 문학 작품의 지위가 작가와 독자의 관계나 두 인간 행위자 사이의 미학적 반응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를테면 출판 산업에서의 기업 인수, 다국적 기업에 의한 통제처럼 문학과 무관한 외부적 요소가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야 한다고 본다. 이러한 비인간 행위자들이 작동하며 기여하는 바를 쏙 빼고 예술성만으로 문학 작품의 지위를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극장을 행위자들의 네트워크로 살펴보면 어떨까. 예를 들어 예매 시스템이라는 행위자가 공연과 극장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 보는 거다. 예매 시스템은 그것을 이용하는 사람들에 의해 작동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예매 시스템의 작동이 관객과 극장 운영, 작품에 대한 감상의 세부적인 형식들에 영향을 미친다면? 

이번에 사용한 예매처는 티켓링크였는데, 이를 위해서는 페이코라는 결제 서비스를 이용해야 했다. 등록 가능한 자신 명의의 신용카드를 갖고 있거나 휴대폰 소액결제가 가능해야 한다. 비회원 로그인으로 결제하기 기능은 없다. 이런 예매 시스템을 가진 극장에서는 이런 조건들을 이해하고 사용할 수 있는 이들이 관객이 된다. 독립예술웹진을 운영하는 동료는 독립예술을 구분하는 기준에 관해 구글 설문지를 통한 예매인지 인터파크를 통한 예매인지로 가린다고 농담처럼 말했는데, 그건 사실 농담이 아니다. 독립예술작품을 구분할 뿐 아니라 관람객의 조건이나 배경을 결정한다. 공연정보를 어디서 구해야 할지 알 길 없는 예술계 비종사자는 인터파크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 구글 설문지를 통해 예매하는 공연의 정보를 알 길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스무 살에 처음으로 본 공연은 인터파크로 예매한 뮤지컬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였다. 대학로에 와서 (표를 파는 이들의 안내를 받아) 처음 본 연극은 〈라이어〉였다. 공연을 보고 싶고 극장에 가고 싶지만, 지방 도시에서 갓 서울에 올라왔던 내게 다른 선택지를 알 길이 없었다. 모른다는 것은 없는 것과 같았다. 

다시 돌아가 보면, 앞선 예매 과정에서 느껴진 “비물리적 제약”은 단순히 극장 운영의 문제이기만 한 게 아니다. 한 개인이 작정해서 만든 것도, 하나의 명백한 규범 때문에 생긴 것도 아니다. 라투르식으로 이해하면, 극장을 구성하는 다양한 행위자들의 네트워크가 스스로 작동하면서 발생한다. 기금이 형성되는 방식부터 극장을 운영하는 재단의 직원 채용 관행, 티켓 구입이 가능한 예매 시스템, 주차장, 화장실의 동선, 공연 시간 및 러닝타임 같은 것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일종의 분위기나 기세를 형성하면서 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극장은 예술적 장소로서 단일한 개념, 확실하게 안과 밖을 구분 지을 수 있는 건축물, 또는 매끄럽게 구획된 영역을 의미하지 않는다. 획일화된 객석과 관람 예절과 연극 규범처럼 극장 안에서만 작동하는 시스템만으로는 설명되지도 않는다. 공연 작품을 구성하는 주변 요소로 여겨졌던 것들이 동시대 극장의 작동 방식 형성에 기여해 왔다. 

‘공연 시간’이라는 행위자도 살펴보자. 극장은 시간을 다루는 장소다. 공연 정보라 함은 그것이 언제, 즉 몇 시에 시작하여 몇 시에 끝나는지를 알리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러닝타임이 작품의 연출이나 기획에 긴밀하게 연결된다면 공연 시작 시간은 어떨까. 극장이 있기에 앞서 마당극의 형태로 거리에서 공연을 만날 때는 그 시간의 경계가 흐릿할 수밖에 없었다. 자연히 무료로 진행되거나 일종의 후불제로 운영되었다. 그러나 정해진 시간에 일정한 장소에 모이는 극장의 기획은 곧 공연 관람료를 형성한다. 시간을 약속하는 극장의 작동 방식이 산업화에 따라 관객 되기의 자격 요건이 된 것이다. 「극장의 탄생」이란 제목의 논문2에서 박노현은 “극장이라는 공간 속에서 공중은 근대적 삶의 방식을 체득해 나갔다. 공중으로서의 관객이 가장 먼저 배우게 된 것은 계량화된 시간에 대한 적응이었다”고 쓴다. 시간에 맞춰 도착하고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적응할 수 있는 자만이 관객으로 남을 수 있었고, 그것은 여태 이어진다. 공연을 만드는 예술가도 이 시간과의 관계에서 예외는 아니다. 저녁에 극장에 갈 수 있었고, 이 시간을 보내본 사람이어야 그것을 만들 수도 있을 테니까.

공연 시간으로 당연시 되고 있는 평일 오후, 혹은 주말은 근대적 시간이다. 산업화 시대에 노동자들의 시간은 일하는 낮과 쉬는 밤으로 구성되어 있다. 극장은 이들에게 여가와 유흥을 제공하며 노동자는 이것에 비용을 지불함으로써 관계가 견고해진다. 이는 공연예술을 노동의 반대항에 놓았다. 예술과 노동은 극장이라는 장소로서만이 아니라 시간으로서도 완전하게 구분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지난해 나는 오후 2시에 공연을 했다. 일주일을 했는데, 어쩐지 쾌감과 함께 죄책감이 들었다. 뭔가 잘못하고 있거나 잘못된 것 같았는데, 돌이켜보면 낮술을 마실 때의 기분과 닮았다. 남들은 다 일하는데 술을 마신다는 점에서 기인한 해방감과 일을 하지 않고 술이나 마시고 있다는 자책이 교차하는. 

그런 조건들을 고려해 보면, 평일 오후와 주말이라는 극장의 시간은 연극 예술의 규범이 아니라 근대적 규범이다. 공연의 시간은 각각의 공연에 알맞은 요건으로서 검토되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혹은 ‘당연하게’ 저녁 7시 또는 8시로 결정된다. 그 시간이 가장 많은 사람들이 올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믿음이 향하고 있는 것은 일하는 인간에 대한 기준이다. 동시대 노동에 대한 사유나 검토가 바탕이 되었다고 볼 수 없다. 저녁 8시라는 공연 시간이 선택된 게 아니라 창작자가 저녁 8시의 감각에 맞춰 작품을 만들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짐작은, 너무 터무니없는 비약일까? 

이처럼 예술 자체와 무관해 보이던 다양한 비인간 행위자들이 극장의 존재에 영향을 미친다. 존재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극장이 극장이도록 하는 중요한 차이를 만든다는 의미이고, 그렇게 구성된 극장의 차이와 특질은 곧 극장에서 실연되는 연극과 그것을 관람하는 관객 등에 영향을 주고 또 되돌아온다. 비인간 행위자들은 일종의 분위기, 흐름을 형성하고, 예술 작품으로서 공연은 결코 단독자가 아니며 세계와 무관한 자율성을 가질 수 없다. 어떻게 이것이 그저 극장 경영의 영역이기만 할까? 

내게 이러한 행위자들의 모습은 극장이라는 시스템이 스스로 굴러가게 하는, 그러나 너무 크거나 아주 작아서 관련 분야 전문가들에게만 겨우 보이던 톱니바퀴들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하나라도 빠져나가면 크고 작은 문제가 생길 테지만 그런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 오래된 자동 장치. 물론 시대가 바뀌고 공연 양식이 변하면서 이 톱니바퀴들은 가끔씩 문제시되었다. 삐걱거리거나 멈추거나 느슨해지는 식으로, 자주는 아니지만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며. 허나 그럴 때마다 어떻게든 해결이 되었다. Show Must Go On. 공연은 계속되어야 하니까. 이를테면 객석에 앉을 수 없는 휠체어 이용 관객의 문제 제기는 극장 건축 시 휠체어석을 계획하고 설비하는 필수 법령 제정으로 이어지며 해결된 것처럼 보인다. 관람 예절을 지킬 수 없는 관객이 극장에 오면 일정한 제지를 받으면서, 또 어떤 경우에는 그 관객이 가진 장애라는 불가피성을 들어 옹호받으며 일단 합의되었다고 여겼을 것이다. 공연 시간에 대한 문제의식은 마티네 공연이라는 형식을 들어 대안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관람 방식의 경직성과 그에 따른 배제에 대한 논의는 릴렉스드 퍼포먼스(relaxed performance)라는 접근방식을 통해 대답을 한 것처럼도 보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개별적인 ‘해소’는 삐걱대는 톱니바퀴에 임시의 윤활유를 붓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 톱니가 왜 거기에 있는지 궁금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질문이 필요하다. 극장의 존재론적 가치나 예술적인 의미, 그에 따른 불가피한 규범들로 이어지는 오래되고 큰 질문만이 아니라 아주 작은 요소에 관한 질문들 말이다. 라투르의 논의가 내게 흥미로웠던 지점은 인간들이 중요하게 여기며 통제하고 있다고 여긴 요소들이 실은 인식도 하지 못했던 비인간 행위자들이 만든 흐름을 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발견이었다. 그래서 사소한 말과 질문과 하소연, 혹은 궁금해하는 표정 따위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공연 라인업만이 아니라 예매 방식이나 공연정보가 제공되는 방식처럼 너무 당연하게 여겨졌던 것들에 관한 질문, 또는 티켓 결제는 나만 힘드냐는 하소연부터 다른 관객들의 얼굴을 궁금해하는 물음처럼 말이다. 그런 작은 말과 질문들은 서로 어떻게든 연결되어 영향을 미치고 또 변화시킬 것이다. 그러면 결국엔 물으면서 동시에 답하게 되지 않겠지. 그 톱니바퀴는 왜 거기에 있었고 또 언제 만들어졌는지, 왜 지금은 삐걱대는가. 삐걱대는데도 불구하고 계속해도 되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1. 강진아, [문화, 장벽을 넘다ⓛ]공연장 자동문으로 바꾸고 '모두예술극장'도 개관[뉴시스 창사 22년], 뉴시스, 2023. 9. 30, 1쪽, 링크 ↩︎
  2. 박노현. "극장(劇場)의 탄생 - 1900~1910년대를 중심으로." 한국극예술학회 (2004): 7-3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