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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의 시간

예술의 존재론. 예술이 아름다운 것과 정치적인 것을 실체적으로 담보해 온 오랜 역사가 있다. 세계 안에 존재함으로써 세계를 추동하는, 하나의 힘으로 작동해 온 예술은 그렇기에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어져 왔다. 이것은 모더니즘의 기치가 세계의 비밀을 캐내기 위해 어떤 ‘궁극적인 아름다움’으로서 예술을 파고들기 훨씬 이전에도, 인간이 무언가를 손으로 만들어 낸 이래(세상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이래) 아주 오랜 시간 지속되어 온 믿음의 체계다. 아름답거나, 정치적이거나, 혹은 정치적이기 때문에 아름다울 수 있었던 예술은 언제나 세상의 대변자였다. 무엇이 예술인지(아름다운지)는 세상의 모양에 의해 결정되었다. 그 시기, 그 공간에 일어나고 있는 세상의 사건들이 미학적이고 정치적인 것들을 규정했다. 그것이 휘두르는 힘은 너무나 막강해서, 세상에 위치한 인간의 손으로 빚어졌음에도 어느 순간 아름다움은 신의 것이라는 믿음마저 생겼다. 작고 소중한 인간 따위는 우연히라도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을 것이므로.

예술이 정치적인 것 혹은 아름다운 것이 되기 위해서는 세상에 존재해야 한다. 그것은 공간을 차지함과 동시에 시간을 점유한다. 예술의 존재론은 언제나 시간성을 바탕으로 작동한다.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물리적 조건이 예술을 규정해 왔다. 2023년 한국에 조선시대 중기의 궁중음악이 연주된다면 그것은 무엇을 움직일 수 있을까? 그것이 전승되고 재현되는 방식으로써의 재-출현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물리적 불가능성을 잠시 눈감아 두고 과거의 바로 그것이 지금 여기에 벌어진다고 생각해 보자. 여기서 예술은 전혀 다른 양상으로 들어앉을/튕겨 나갈 것이다. 아주 기껏해야 2023년 사회의 맥락의 맥락 안에 간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이, 시공을 초월한 자리 잃은 예술이 할 수 있는 고작일 것이다. 점유하지 못하는 예술은 존재로서 온전히 기능하지 못한다. 설사 그것이 동시대적인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위치하는 데에는 반드시 시간적 근거가 있다.(회고전의 기능과 역할들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결국 생각해 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지금 어떤 시간 안에 들어와 있는지.

시대적 균열. ‘동시대적’이라는 말은 ‘어떤 시간’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지금은 항상 ‘동시대’이고, (근대적 시간성에 따라) 1분, 1초가 흐를 때마다 ‘동시대’는 갱신된다. 어떤 것이 동시대적이라는 표현은 그것이 미래적이라는 말보다도 말해주는 것이 적다. 따라서 동시대를 탐구한다는 말은 말뚝에 묶인 조랑말의 모양새를 들여다보는 것 대신, 질주하고 있는 말의 앞뒤에 어떤 장애물들이 이 질주를 위험하게 만들고 있는지를 살피는 일과 더욱 가깝다. 여기에서 분명한 것은 오직 한 가지뿐이다. 말은 달린다. 그것은 결코 멈추지 않으며, 역사의 상대성 안에서 끊임없이 변화한다. 물론 그 말이 직선으로 쭉 뻗은 탄탄한 트랙을 달리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뒤로 달리고, 때로는 어떤 것을 뛰어넘으며, 제자리에서 뱅뱅 돌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달린다는 것이다. 예술이 시대와 관계 맺는 방식도 이와 같다. 그것은 끊임없이 변화하며, 놀랍게도 세상이라는 트랙 위에서 달린다. 세계가 굽이칠 때 말은 그것을 뛰어넘거나 돌아가거나 그것에 부딪힘으로써 함께 굽이친다. ‘동시대성’은 멈춰 있는 시간이 아니라, 세계와 싸우면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투쟁의 시간을 지칭한다.

중요한 것은 그래서 어떤 세계를 질주하고 있느냐의 여부다. 세계는 자율적으로 흐르는 시간들의 총체다. 말들이 따라 달리는 시간의 트랙은 무릇 파편적이다. 그것은 끊임없이 균열하다가, 때로 합류하고, 혹은 말보다 먼저 뛰어나간다. 서로 다른 시간들이 만났을 때 거기서 파열음이 생겨난다. 이 찢어짐의 순간, 달리는 말들은 바로 이것을 통해 서로를 인식한다. 우리는 그것을 ‘동시대성’이라고 부른다. 이 파열음이 세상에 남긴 자국을 읽어내는 것이 비평의 역할이다. ‘동시대성’은 그 자체로 균열의 총체이며, 이 균열들이 산산이 부서져 흩어지는 대신 어떤 의미로 남을 때, 다시 말해 그것이 하나의 ‘정치적인 것’으로 존재되었을 때 그 맥락을 짚어내는 것이 바로 비평의 ‘말(言)’이다.

이 동시대적 질주에서, 간혹 두 가지의 문제가 발생한다. 하나는 어떤 시간들이 비대해지는 경우다. 땅을 박차고 서로 함께 달리는 예술의 말(馬)들이 서로 경합하며 달리지 못하고 어떤 하나의 덩치에게 짓눌릴 때, 우리는 그것(그 짓눌림)을 설명할 말(言)을 잃어버린다. 이 덩치는 시대에 따라 다양한 이름표를 걸고 있었다. 모더니티의 질주가 다른 모든 말(馬)들을 압도했을 때, 세계의 시간은 그것을 향해 정렬되었다. 시간을 발명한 것처럼 보이는 모더니즘에 감탄하며 말(言)들은 풍성해졌지만, 함께 달려야 할 말(馬)들은 자취를 감춰버렸다. 시대를 달려갈 다른 시간들, 곁에 있어야 할 말(馬)들, 상상과 몽상을 가능하게 했을 누군가의 목소리들은 점유할 공간(시간)을 상실해 버렸다.

또 하나의 경우는 시대가 말(馬)보다 앞서 달려 나갈 때 발생한다. 시간의 균열은 예상치 못한 세계의 국면들을 만들어 내고, 여기서부터 나온 힘은 달리고 있는 ‘동시대’의 시간들보다 더 먼저 뛰쳐나가기도 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미지의 영역, 아직 말(言)이 닿지 못한 빈 시간의 영역을 마주할 때 우리는 새로운 말(言)을 만들어 내야 한다. 이 시대적 미지, 미답의 시간선은 달리는 말(馬)들에게는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시대적 균열은 달리는 말(馬)들에게 언제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지만, 말(馬)들은 자신의 시간을 잃어버리고 추락하거나, 표지판을 오인하고 낭떠러지를 향해 달려갈 위험 역시도 가진다.

예술의 유령적 국면. 미지의 시간을 뛰어넘는 것은, 시간 안에 배태되어 있던 몸을 찢어내는 것과 같다. 경험해 보지 못한 것, 인식할 수 없는 것들이 미지의 시간으로부터 온다. 예술은 시간과 공간 안에 존재론적으로 작동하지만, 때때로 역사는 예술을 시간 너머로 집어 던지기도 한다. 시대적 균열이 만들어 내는 미지의 블랙홀, 말(馬)과 말(言)이 미처 도달하지 못한 영역, 거기에서 예술은 스멀거리며 흘러나온다. 마치 유령처럼. 그것은 시공간을 점유하지 않으나 반존재로서 존재하고, 비존재로서 존재를 부정한다. 존재 없는 유령으로 출몰하지만, 그러나 그 유령은 세계와 시간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다. 동시대 너머의 시간, 도래할 미학과 정치적인 것의 안내자로서 유령은 우리 몸에 엄습한다. 예술은 언제나 그래왔다. 역사 안에서 먼저 내던져져 마침내 출몰하는 것으로서, 세계를 변화시켜 왔다. 그것을 몸으로 맞부딪히는 것은 시간을 달리는 말(馬)들이요, 그것의 위치와 의미를 짚어내는 것은 시간을 지켜보는 말(言)들이었다.

그렇다면 지금의 유령은 어디에 있나? 우리에게 주어진 예술의 시간들은 몹시 혼재적이다. 동시대성이 담보하고 있는 시간의 가능성들을 훨씬 뛰어넘어, 다양한 갈래의 과거가 현재와 미래에 틈입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과거, 과거다. 우리에게 주어진 근대성은 탈근대적이거나 오히려 전근대적이며, 우리는 모더니티를 해체하기 위해 탈근대성과 전근대성을 동시에 해체해야 했다. 아니, 그 전에 모더니티를 구축하기는 했는지 반문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이 모든 시간성들, 찜찜한 균열과 해체의 역사가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동시대’다. 그렇다면 유령은? 시간에 앞서 내던져진 예술은 무엇을 보여주는가? 유령이 드리우는 반투명한 그림자는 과연 우리의 몸에 다가서고 있는가? 우리에게는 고개를 들어 유령을 감각할 여력이 남아 있을 것인가?

팬데믹이라는 시대적 상황은 사람들의 삶과 공동체를 재조직하도록 만들었다. 몇 년의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이 다시 무화되었다고 느낄 수도 있지만, 우리 안의 어떤 것들은 영원히 변해버리기도 했다. 우리의 몸에는 접촉이 주는 공포가 각인되었고, 삶의 조건들이 언제든 망실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담게 되었다. 이 와중에 예술은 방법론적으로도, 내용적으로도 시대적 상황을 보여주는 지표가 되고자 했다. 예술은 예술로서 살아남기 위해 대안들을 고민해야 하는 처지에 이르렀고, 이 시도들은 상당 부분 실패했다. VR과 웹 공간성, 몸을 제거한 매체적 프로토콜은 새로운 대안이자 미래처럼 보였지만, 그것이 현실을 대체할 수는 없었다. 이것은 예술의 존재론이다. 삶의 공간 안에서 미학으로서 기능하기 위해 분투하는 것, 세계를 변화시키기 위해 물질화(이 경우에는 가상-물질화)를 시도하는 것, 우리에게 익숙한 예술의 역능이다.

그러나 이 예술의 존재론이 실패해 버림으로써, 우리는 몸을 설명할 말(言)을 잃어버렸다. 아니, 기실 그 전부터 어떤 종류의 말(言)들은 꾸준히 상실되어 왔다. 예술이 스스로 존재함으로써 밀어붙였던 존재론적 영역(그것이 모던이든, 컨템포러리든) 너머에서 스멀거리는 것들에 대한 언어는 존재한 적이 없었다. 이것은 단순히 어떤 무용들이 모던 댄스의 망령에 사로잡혀 지금-시대적(동시대적이 아닌)으로 호흡하지 못한다거나, 퍼포먼스 아트가 표상하는 지금-몸에 대한 언어가 부족했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예술이 스스로의 역능으로서 존재하는 영역들은 언제나 말(言)-되었으나(그것이 실제로 세계를 움직였는지와는 상관이 없다), 그 역능을 넘어서는 영역에 대해서는 언제고 말(言)-되지 않았음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저 너머에 존재하면서 출몰하지만 그림자로만 남았던 유령들, 시간을 앞서 질러가 균열과 파열음을 먼저 생산하고 있었던 비존재의 존재들에 대해서 말이다.

비평의 시간. 우리에게는 그래서 말(言)의 시간이 필요하다. 질주하는 말(馬)들의 경합은 그 자체로 비대해진다. 말(言)하지 않으면 비대해진 속력에 갇혀 시간 너머를 보지 못한다. 세계를 바꾸고 있는 유령이 바로 우리 곁에 와 있음에도, 편협한 존재론의 예술은 균열이 열어준 다음의 시간을 포착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궁극적인 아름다움이 무엇이냐고 질문했던 모더니즘은 백 년이 넘게 답을 획득하지 못했다. 예술은 진리를 통해 세계를 바꾸려고 했으나, 기교와 조형성에 기반한 미학과 지치지 않는 운동성과 같은 것들은 결코 세계를 움직여 낼 수 없었다. 그것은 저 ‘너머’가 아니라, 그저 ‘여기’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비평은 시간들 사이에 자리해야 한다. 균열이 일으키는 파열음을 고막에 박아 넣고, 여러 시간들 사이에서 찢겨나가는 피부를 감내하며, 질주하는 시간 너머의 유령에 시선을 두어야 한다. 그리고 몸의 언어를 잃어버린 시대, 예술의 언어를 잃어버린 지금의 순간이 바로 이 비평을 요구하고 있다. 도래하지 않은 유령을 두려워하며 입을 닫는 것은 이제 그만 두어야 한다. 말(馬)에 올라타 그것이 달리는 시간에 몸을 맡긴 채 말의 역능을 채찍질하는 데 안주하기에는, 지금의 시대는 비평에게 너무나 큰 과제를 요구한다. 이미 비대해진 말(馬)들은 모르는 것, 낯선 것을 적으로 간주하고 쫓아내거나, 그것에 대해 입을 닫아버린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비평’이라는 살아있는 단어가 무시와 모욕으로 점철된 지 너무 오랜 시간이 흘렀다. 무시와 모욕, 말(馬)의 가치를 폄훼하는 유사-비평의 동학 안에서, 말(馬)들은 이미 너무나 비대해졌다. 살이 썩어가고 진물이 흘러도 말(馬)은 말(言)할 생각을 하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시간을 달리는 말(馬)들 가운데, 우리에겐 비평의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의 몸에 어떤 시간이 흐르고 있는지, 우리의 몸에 출몰하는 유령의 정체는 무엇인지, 도래할 예술은 우리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지 생각하는 시간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비평을 통해서만 오지 않은 미래, 예술의 잠재태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실체가 없는 유령은 그림자를 남기지 않는다. 비평은 바로 이 유령의 그림자를 좇는다. 존재하지 않는, 오로지 투과될 뿐인 형체의 뒤편에서 비평은 그것의 존재를 세계 속에 은밀하게 위치 짓는다. 예술의 반향, 유령의 흔적 형상이 세계에 각인되는 방식, 비평은 유령의 그림자로서 작동한다. 그러니 이제 말(言)을 시작하자. 썩은 우리에게 이제 남은 것은 거의 없다. 잃을 것이 없는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오직 비평의 시간뿐이다.